정선에서의 하루
기차는 새벽 3시경에 도착했다.
인적 드문 산골의 선평역 새벽 시간엔 역무원도 없다. 개찰구에 표를 던지고 나오자 낮은 지붕의
집들이 검게 엎드려 있다.
청량리역에서 늦은 밤 강릉행 기차를 타고 증산역에서 다시
3량으로 갈아타는 구절리역이 종점인 기차는
밤별을 머리에 이고 산 골골을 돌아 줄곧
달려왔다.
산골의 11월은 이미 겨울이 들어서고 온 누리가
적막하다.
졸다 깬 눈이 퀭한 사람 몇몇이 내려 갈 곳으로 다 간
다음, 눈 붙일 여인숙이래도 찾을 양으로 역사를 나와
골목을 헤매었지만, 나그네가 쉴 곳은
없다.
불 켜진 집 대문을 두드려도 인적은 없고 개 짓는 소리만
마을에 퍼진다.
제자 왕근이와 스케치도 할 겸 사진도 찍어야 하는 하루가
바쁘게 열리는 새벽이다.
다리를 건너와 밭 가에 불을 피우고 다섯 시간만 버티면 될
성 싶어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허름한 집에서 불이 켜지더니 아저씨 한 분이 나와 마당 가에서 추루루룩 소변을 본다. 잘 됐다 싶어
"저~아저씨, 좀 전에 기차에서 내렸는데 잘
곳이 없어서 그런데요. 어디 묵을 곳이 없을까요?"
"아, 여는 잘 데가 없으요오~"
우리의 처지가 딱했는지 아저씨는 벽을 더듬어가며
따라오란다.
자세히 보니 아저씬 시각장애인이다. 고맙고 반가워서 지폐
몇 장을 쥐어 주었다.
그건 책임을 져 달라는 간절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인도한 곳은 슬라브 지붕의 노인정이다.
문을 두드리자 허연 머리를 한 노인 한 분이 귀찮다는 듯이
현관문을 열자 퀘퀘한 냄새가 확 끼쳐
온다.
"여~ 사람들이 잘 데가 없어서 그러는
모얀데 하룻밤 여서 재~ 주오"
"허~ 회장님 알면 크일
아이요."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는 노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방으로
들어 가더니 이불을 안고 나와 던지다시피 건네주고
들어간다.
차가운 거실 바닥에 옷도 벗지 않은 채 추위에 떨리는 몸을
뉘이자 이불에서 노인냄새가 머리아플 지경으로 난다.
깊은 새벽 내 웅크리고 자서인지 깨어나니 어깨가 아팠다.
노인에게 고맙다는표시로 담배라도 사 태우세요!
하고 지폐 몇 장을 드렸더니 처음과는 반대로 눈가에
웃음이 번지며 친절해진다
"하~간밤에
춥지않아쏘오?"
"네,괜찮았습니다. 여기 식당은
있는가요?"
"업으요오~ 저어 가겟집 가면 라멘이라도
끼레 줄란지모르겄쏘!"
가게에 가서 오래된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해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바라본 아침 풍경이
냇가에서 피어나는 물안개로 자욱하고 절벽을 이룬 산이 참
아름답다.
산위로 오른 햇볕에 십일 월 풍경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냇가를 따라 올라가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파란 줄을 두른
하얀 경찰차가 서더니
경찰 두 명이 가까이 와서 어디서 왔으며, 뭐하느냐 물으며
신분증을 보잔다.
신분증을 제시하자 요모조모 살피더니 차에
타란다.
직감으로 누군가가 우릴 수상한 사람(간첩)으로 신고했다는 생각이
든다.
경찰서에 끌려 가는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났지만 간첩이
아닌 이상 별일 없겠지 생각했다.
경관은 우릴 태우고 남면 쪽으로 가며 예의 그 사무적인
투로 여러 가지를 묻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하자
"여어 처음
인기래요?"
"네. 이곳 풍경이 참
예쁘네요"
"뭐~ 볼거나 있는 기래요. 저어 가면
좋은디가 있쟎오." 우릴 태우고 산길을 20여 분 남짓 오르더니
"여~ 겡치가 좋소 ,사진 마이 찍어가오~"
하곤 뒤돌아 가버린다.
딴에 우릴 좋은 풍경 있는 곳으로 안내한다고 친절을 베푼
곳은 진즉 폐광이 된 탄좌와 사택 몇 가호가
빈집으로 남아 있는 골짜기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연필 스케치를 하고 터덜터덜 산을
내려와 처음 자리까진 두 어 시간이 족히 걸렸다.
한 20여년 전이니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생생한
것은 그때의 모습 그 대로 늘 머릿속에 아름답게
각인된 까닭이다.
지금도 해가 일찍 떨어지는 11월의 산골은 여전히
부지런하지 않음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림을 계속 그렸음 좋았을 왕근이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보고 싶고 궁굼하기 짝이없다.
소순희
<선평역앞 낙동리>
<별어곡역 부근>
첫댓글 20여 년 전의 정선 기억은 쥔장에게도 많은 추억을 남겨놓았답니다.
지금도 정선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는...그 즈음, 그림자님의 하루가 연상되어 비슷한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단편소설 하나 읽은 느낌입니다. 모든 상황이 상상이 된다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