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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회의 2
행 15:6-11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행 15:6-11 / 사도들과 교회 장로들은 이 문제를 결정하고자 회의를 열었다. 7) 토의가 끝없이 거듭되자 베드로가 일어서서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방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음을 갖게하려고 오래 전에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가려 뽑으신 줄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8) 인간의 마음을 환하게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받아들이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우리들에게 주셨던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습니다. 9)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우리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시지 않았고 우리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그들도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10)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어째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그들에게 지워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마음대로 뜯어고치려 듭니까? 11) 여러분은 주 예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모든 사람을 똑같이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회의는 쉽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회의 안에는 혼란과 대립,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민족과 인종을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로 세워지는 일에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의 연설을 요약하는 것으로 예루살렘 회의의 핵심 내용을 정리합니다. 본문은 베드로의 연설 내용입니다.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6-7a) 단순히 보자면 예루살렘 회의의 주제는 ‘이방인의 할례 문제’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는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구약의 율법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율법에 관한 성도의 자세를 다루는 예루살렘 회의는 치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베드로가 11장에서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이 열린 것을 증거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주의자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7b-9) 베드로의 연설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누가가 예루살렘 회의를 요약한 두 개의 연설 중 하나입니다. 베드로의 연설은 그가 10년 전에 했던 생생한 자기 경험(행 11:1-18)을 근거로 진행됩니다. 이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다룬 내용이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신학 이론이 아니었음에 관한 증거입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복음 전파와 선교 현장에서 일어난 실제를 다룬 공적인 모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머리 놀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 전파와 선교의 현장에서 일하시는 성령님께 올바로 반응하기 위한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에 이끌려서 했던 자기 경험을 근거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벽이 있을 수 없다”(롬 1:16; 3:29)고 선언합니다. 영적 우월주의와 선민의식의 철폐를 외친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10-11) 베드로는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라고 말하며 복음의 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바리새파 출신 기독교인들의 그릇된 주장을 논박합니다(10).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 구원을 선포합니다(엡 2:8-9). 여기서 드러나는 베드로의 만민 평등사상은 바울 신학(롬 1:16-17; 2:10-11; 3:29-30; 5:15; 갈 3:27-28)과 일치하는데, 이는 기독교의 근본 신학입니다.
적용 : 혹시 당신에게 영적 우월감과 그릇된 선민의식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삶에서 십자가를 붙들지 못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까지 신앙의 기준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해야 되는데 하지 못해서 그렇다’이런 생각이 좋은 생각일수 있지만 삶의 주인이 ‘나’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의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내 힘으로 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호크마 주석
=====15:6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 그 의안(議案)은 앞서 언급된 대로 바리새파 출신들이 제기한 이방인에 대한 할례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이 회의는 기독교가 발생된 후 최초로 시작된 교회 총회라는데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즉 기독교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자 유대인들이 그동안 매우 자랑스럽게 지켜왔던 선민 의식에 큰 상처를 받게 되면서 나타난 민족적 감정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대응했다는 점과 종교적으로 중요한 구원에 관한 교리를 취급했다는 점에서 종교 회의의 모태가 된 것이다.
=====15: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회의 진행을 압축적으로 전해주는 본 구절을 통해 회의가 상당히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장시간 계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변론(* , 제테시스)은 논쟁이나 토론을 뜻하는 말인데 일방적인 변론이 아니라 상호간의 주장을 내놓고 토의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회의에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바울과 바나바를 지지하는 주장들이 맞서 열렬한 토론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변론'이라는 단어 앞에 형용사 '폴뤼스'(* )를 두어 강조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에서는 '많은'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공동번역에서는 '오랜'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폴뤼스'의 의미로 어느 것이 정확한지 분간할 수 없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개역성경과 같이 번역하고 있지만(KJV, RSV, NIV, MB) 공동번역의 해석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폴뤼스'란 용어 자체가 수나 양, 공간 및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토론의 열기 또한 뜨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베드로가 일어나 - 매우 긴 시간의 토론 속에서 언급된 발언자는 베드로와 야고보(13절) 두 사람 뿐이다. 이를 미루어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역할을(갈2:9)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베드로의 발언 결정적(決定的)인 것으로 언급된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향력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너희도 알거니와 - 이 말은 10:1-48에서 언급된 내용, 즉 가이사랴의 고넬료가 베드로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된 사실과 하나님이 보여준 환상(10:10-16)을 뜻한다. 베드로는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자신의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밝힘으로써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못박아 두고자 한다.
=====15:8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 베드로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하게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재함을 진술하고 있다. 이 사실은 고넬료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10:44-47의 내용과 관계가 있다. 이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방문한 사건을 두고 할례자들이 공격해 왔을 때에도(11:2)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친지들이 성령받은 사건을 언급함으로 그들을 잠잠케 한 바가 있다(11:18). 여기서도 역시 아무도 베드로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12절).
=====15:9
믿음으로...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 이유가 믿음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전통이나 민족에 의한 차별을 통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배타적인 선민 의식이나 우월감(優越感)은 지양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것이다. 지금까지 베드로의 변론은 공의회가 소집하게 된 내용인 할례 문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단지 이방선교의 정당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회의 진행 도중 이방 선교 자체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케 한다.
=====15:10
어찌하여 - 이 말의 헬라어 '티'(* )는 의문 대명사(who)로 쓰이기도 하고 이유를 묻는 부사(why)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맥상 단순히 이유를 묻는다기보다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말하면서 책망하는 형식의 어투로 보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시험하여 -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행위를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한 시험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시험'이라는 단어 '페이라조'(* )는 '시도하다', '시험하다'(make trial of;RSV)외에 '유혹하다'(tempt)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문에서의 의미는 문맥상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도록 장애물을 설치하거나(Alford)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간섭하는(공동번역) 불경건한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본 구절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행위의 의로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네일(W.Neil)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 베드로의 논점은 유대인 자신들조차 메지 못하는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징적으로 언급된 '멍에'라는 단어 '쥐코스'(* )는 무거운 짐을 끌거나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끌도록 소의 목에 걸었던 도구로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에 대한 강제적인 압제(사9:4) 또는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상징하며(신28:48) 신약성경에서는 율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종교적 의무나 율례를 뜻한다. 여기서도 역시 5절에서 언급된 바 있듯이 유대교의 종교적 의무나 계율을 뜻하며 '조상'과 우리가 모두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유대교의 전통적 율례를 뜻한다. 특히 초기 기독교 당시(1세기 중엽) 베드로가 활동하던 때에는 샴마이(Shammai)학파의 극단적인 해석으로 율법이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F.F.Bruce). 바울도 역시 율법을 종의 멍에로 묘사하며(갈5:1) 그것을 비인간적인 억압 구조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율법을 조상때부터 지금까지 완전하게 지켜내지 못했음을 베드로는 전제하고 율법의 멍에는 사람이 질 수 없는 것이므로 강요해서는 안 됨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울 서신에서와 같이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 관계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하는 설교의 핵심이 언급되고 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 앞에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은 바울의 사상과도 일맥 상통한다(롬1:16;3:30;5:15;갈2:14-16;엡2:14). 바울이 베드로를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듯이(갈2:11-14), 베드로는 바울만큼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본 구절처럼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正當性)에 있어서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아마 베드로 자신이 고넬료 사건을 직접 체험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 설 교 >
주 예수의 은혜로 받은 구원
서금석 목사 / 행 15:6-11
사도행전 15장은 예루살렘 제1회 공의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회의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왔습니다. 오늘 저희가 다루게 될 사도행전 15장은 교회에 문제가 되었던 것을 해결하려고 모인 공식적인 첫 회의인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예루살렘 공의회는 상당히 힘든 회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7절 전반부를 보면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변론(辯論)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제테시스입니다. 변론은 자기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론의 정확한 의미는 상호간에 의견을 공평하게 내놓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많은 변론'이라고 했습니다. 변론 앞에 '많은'이란 폴뤼스라고 합니다.
개혁성경에는 '많은'이라고 번역했으나, 공동번역은 '오랜'으로 번역했습니다.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아마도 상당히 깊고도 많은 진통을 겪은 회의였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공의회의 내용은 심각한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회의 문화에 익숙치 않습니다. 회의하는 방법에는 요령부득입니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습니다. 이렇듯 회의에서 막무가내로 달려들다 보니 잘해 보자고 하는 회의가 어떤 때는 악재(惡材)로 작용하여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회의를 잘못해서 조직이 와해되고, 교회가 갈라지고, 분열이 생기고 갈등이 생깁니다.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회의에 임하는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갖출 미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여 경청하는 것이 그 첫째 미덕이요 상대의 좋은 의견은 충분히 검토하여 수용하는 아량이 두 번째 미덕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미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이방인이 예수를 믿을 때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으냐,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제1회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로 그 문제가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문제가 불거져 나오자 사도들과 장로들 사이에 많은 진통이 있었고 드디어 베드로가 그 매듭을 짓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문제해결에 대한 접근은 매우 신중했으며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섣불리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옳고 그름을 구별하려고 시도했다면 더 큰 반발이 불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단지 자기의 입장에서 복음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복음을 솔직하고 단백하게 그러나 힘있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단순하면서도 확신에 찬 선포가 많은 변론을 잠잠케 했습니다. 이전의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를 생각할 때 참 많이 겸손해 진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1. 이방인에게도 같은 성령을 주셔서 믿게 하셨습니다.
"7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베드로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이방인에게도 우리와 같이 성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문제의 본질을 짚어 나갑니다. 이방인의 구원에 관한 문제는 교리적인 기준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즉각 알았습니다. 단지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던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 유일한 해법임을 베드로는 경험적으로 알았습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베드로는 이미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방인의 성령강림에 대하여 매우 강하게 거부감을 드러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허락하셨고 바로 그 기념비적인 일을 베드로에게 시키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사건이 바로 그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사도행전10:9-16절의 사건은 베드로가 욥바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습관적으로 기도했던 베드로가 그 날도 제 육시 쯤에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본 것이 바로 그때였습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이르렀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베드로는 처음에 부정한 것을 가까이 하지 않는 유대인의 전통에 호소하며 강하게 거부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 없는 대화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하나님의 명령에 토를 달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근거는 유대인의 전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율법의 범위를 넓혀놨습니다. 집을 에워싸고 있는 울타리처럼 율법을 범하지 않기 위해 율법 주위에 울타리를 쳐 놨는데 바로 그 울타리가 유대인의 전통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율법만큼이나 이 전통을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베드로는 처음엔 율법과 유대인의 전통에 충실했습니다. 율법과 전통이 도리어 생명을 억압하는 것으로 오용되고 있었음에도 베드로는 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서 봤던 환상은 바로 이 편견으로 가득찬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 환상을 기점으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유대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세계만국에 걸쳐 완성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한 지역에 국한되었던 복음이 이제는 세계로 전파되어져야 함을 베드로는 배우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증거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는 다양한 의견이 서로 충돌하며 진통을 겪고 있었지만 베드로가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대한 비전을 접한 순간 잠잠했습니다.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베드로의 선포는 가장 강력하고도 명확한 결론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 처럼 동일한 성령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지혜로운 선포도 대단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겸손히 받아들였던 공의회 회원들의 모습도 돋보입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 회의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의견보다 나은 의견에 겸손히 동조하는 겸손과 아량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도 구원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총안에서 성령받고 구원얻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 분간치 않으시는 하나님(9-10)
베드로의 증거를 통해서도 확실해 졌듯이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치 않으셨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이 있다면 이방인들에게는 순결한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깨끗케 하셔서 율법을 필요치 않게 하셨습니다. 율법 역시 사람을 께끗케 하는 수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을 믿음으로 깨끗케 하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듯이 율법과 믿음 역시 구원에 있어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믿음으로 구원얻는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믿음으로 깨끗케 하는 것을 직접 봤는데.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참 무서운 경고입니다. 누가 있어 감히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심이 지나치다 보면 어느 순간 순수한 동기는 사라지고 업적과 형식만 남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속에 생명은 사라지고 외형만 남게 됩니다. 지금 유대인이 그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겸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한국 초기 기독교에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하루는 선교사가 차를 타고 가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저 앞에 한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겹게 걷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선교사는 안된 마음에 차를 세우고 할머니를 태웠습니다. 이런 저런 얘길하면서 가다보니 이 할머니가 아직까지 머리에 이고 있는 짐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할머니 왜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고 여태까지 이고 있습니까?" 선교사의 물음에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렇게 차를 얻어 타게 된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무거운 짐까지 내려놓겠습니까? 무거운 건 내가 지고 있어야죠!"』
참 황당한 이야기입니다만 할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만 합니다. 자동차가 익숙치 않던 때라 할머니는 짐을 내려놓기가 미안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할머니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해는 되도 지혜로운 처사는 못됩니다. 율법은 할머니가 이고 있던 짐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예에서 보았던 것처럼 죄인된 인간이 질 수 없습니다. 멍에로 작용합니다. 율법의 무게에 눌려 신앙생활의 기쁨도 만족도 느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조상대대로 율법의 무게에 눌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번 해 보지 못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다시 율법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지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10절)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베드로는 계속하여 자신의 경험을 증거합니다. 베드로의 계속되는 논지는 '우리 조상도 메지 못하는 멍에를 왜 이방인에게 지우려고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실은 유대인도 율법을 잘 지키고 있지 못하는데 왜 이방인에게 지키라 하느냐? 나도 잘 못하면서 남에게 하라고 하는 것이 문제다, 라는 지적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 100개가 있는데 하나를 못 지킨거나 100개를 못지킨거나 못지킨 것은 일반입니다. 다른 율법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할례만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우리 조상들도 율법을 못지켜서 고통스러워했는데 이방인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는 못하면서 남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반감이 생기는 경우는 지도자는 못하면서 남만 하라고 강요하는 때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칠 때,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를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전국민적으로 개혁(改革)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것도 실은 국민이 안해서가 아니라 지도자들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개혁의 지연을 국민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집니다. 자기는 못하면서 이방인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싶으십니까? 먼저 자신이 변화되십시오! 아내가 변화되기 원하면 먼저 남편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남편이 변화되기 원하면 먼저 아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자녀가 변화되기 원하면 먼저 부모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진리입니다.
3. 누구에게나 동일한 복음
(11절)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3: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구원이라는 것은 율법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은 행위나 율법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행위나 율법이 구원의 근거였다면 우리는 구원의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죄많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도는 은혜로 삽니다.
은혜만이 구원얻는 길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감격을 알았던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기쁨이고 복음입니다.
유대인들은 마치 물건의 독점권을 가진 것처럼 복음에 대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성결하고 거룩하고 이방인들은 짐승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무슨 대단한 훈장을 받은 것처럼 여겼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자랑하고 뽐내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교만에 싸여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달갑게 용납할 리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외칩니다. '우리도 저희와 동일하게 은혜로 구원받는다' 유대인들은 은혜를 몰랐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노력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자유를 주기 보다 멍에로 작용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굳이 율법을 고집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베드로의 선포는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방인의 구원도 놀라운 일인데 한걸음 더나아가 이방인의 구원이나 유대인의 구원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언제나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꿈이 한순간에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입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은 은혜를 몰랐다는데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모든 성도는 은혜로 살고, 은혜로 호흡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편63:3) 은혜가 생명보다 낫다는 것을 다윗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은혜없이 하루도 살수 없다는 고백이 위대한 다윗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은혜 앞에서 구원은 누구에게나 가능합니다. 은혜 아래서 모든 사람은 동일합니다. 은혜 아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은혜 아래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결 론
베드로의 전하는 메시지에서 뭘 배울 수 있는가?
베드로는 옳고 그름의 얘기를 하지 않고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는 사도로서 어떤 권위로서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경험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도로서 귀한 자세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겠다고 한 유대인의 주장에 대하여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 또 구원에 대해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차별없이 동일한 주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깨닫고 있습니까?
그러면 은혜 아래서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은혜 아래서 모든 성도들을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실수와 허물이 있어도 용납하세요.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함 받았습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은혜 아래서 모든 사람과 동일한 교제와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 회의, 베드로의 변론
김영규 목사 / 행 15:1-11
예루살렘 회의
교회 역사상 최초의 종교 회의가 열렸습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공개 질의를 했고,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회의 형식은 온 교회가 모이는 공개 형식이었습니다. 발언은 사도와 장로들이 주로 했습니다. 평신도들이 참여하여 방청을 했습니다.(12,22절) 평신도들이 함께 한 이유는 문제의 핵심을 모든 교인들이 알아야 하고, 또한 그 논의 과정의 정당성도 보여주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형태의 회의는 오늘날 교단 총회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논의하고 합의한 사안을 존중해 주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8-19)
회의의 진행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의제를 확인하기 위한 질의응답 식 토론이 있었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7)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변론”(zhvthsi")이란 말은 “zhtevw”(seek)란 의미의 말입니다. 영문 성경에는 “questioning, debate, discussion” 등으로 번역합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왜 이런 문제가 일어났는지? 묻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제기된 의제는 “예수를 믿는 것 한 가지를 통해서 완전한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예수 믿어도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의제가 확정된 후에는 몇 명의 대표자 발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온 교회가 결의하고 승인했습니다. 결의된 내용은 즉시 모든 교회에 알리고 따르도록 했습니다.
대표 발언자는 셋입니다. 첫째는 베드로 사도입니다.(7-11절) 둘째는 바울과 바나바입니다.(12절) 셋째는 야고보입니다.(13-21절) 베드로는 사도의 대표자요 최초 교회의 대표자이기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 전도의 최전선에 섰던 사람으로 문제를 제기한 장본인들입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동생으로 예루살렘 교회회의가 개최될 당시 상당히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고 이 회의의 의장 격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제 발언을 했고, 바울과 바나바는 실증을 했고, 야고보는 의장 격으로 결의문을 도출해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주제 발언
오늘은 첫 번째 발언자인 베드로의 발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베드로가 첫 번째 대표 발언자로 나선 것은 여러 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사도들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따르는 일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이고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베드로를 대표자로 만든 것은 주님의 위임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8-19)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내 어린 양을 먹이라...내 양을 치라...내 양을 먹이라.”(요21:15-17) 연령적으로나, 열심으로나, 주님이 인정하신 측면에서나, 베드로는 확실한 수장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항상 앞장서서 발언하였습니다.(행1:15, 2:14, 3:12, 4:8,19, 5:29) 그리고 그의 발언은 곧 중요한 방향타요 지침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베드로 사도는 본문에 논의되는 바로 이 주제에 관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바 있습니다.(행10장, 11장) 바로 고넬료 집에 복음을 전한 사건입니다. 이 점은 베드로가 확신 있게 발언하게 된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 베드로가 발언한 내용이 무엇인지 함께 보겠습니다.
베드로 발언의 요지
1. 자신이 사도로 택함을 받은 목적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들려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즉, 복음의 목표는 유대인(할례자들)이 아니라 이방인(무할례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7) 하나님의 목표는 유대인 구원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의 구원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가히 폭탄선언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유대인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만이 선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이방인이 유대 사회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원관 자체도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즉, 메시아가 오시면 유대 국가를 회복하고 유대인 중심의 세계 국가를 만드는 것이 중요 골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에게 예수는 유대 국가를 회복하는 예수였습니다. 이방인이 예수를 믿는다면 유대 국가에 편입되는 것이니까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전혀 다른 소리를 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목표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고, 그래서 베드로 자신을 사도로 택하셨다고 합니다.
유대인 사도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놀랍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대인의 사도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사도직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갈2:8) 사도행전을 크게 둘로 나누면 1장에서 12장까지의 전반부와 13장 이후의 후반부입니다. 전반부는 베드로 사도의 사역이 중심이 되고 있고, 후반부는 바울 사도의 사역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역의 주요 무대는 유대 땅입니다. 주요 대상자들도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는 자신을 이방인을 위해 불렀다고 말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을 열도록 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의미합니다. 즉, 고넬료 전도 사건입니다. 당시만 해도 베드로는 이방인의 집에서 식사하는 것조차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을 먹으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거부할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정하다고 한 것을 네가 감히 부정하다고 할 수 있느냐? 이 환상은 하나의 상징이었습니다. 부정한 짐승은 곧 부정한 이방인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환상과 함께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초대되었고, 고넬료 가족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는 깨달았습니다. 아하! 하나님이 이방인을 구원하실 목적이 있으시구나!
본래부터 복음은 유대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이방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모든 믿는 자! 즉, 세계 만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신 선민은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영적인 선민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8-29) 천하 만민이 구원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국 민족이 복음을 듣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유대인의 것이 아니라 천하 만민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할례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을 주셨다고 합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8) 물론 이 말씀은 고넬료 가족에게 성령을 내리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임하십니다. 잠깐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거주하십니다. 조금 힘든 말로 內住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신 것은 그들이 영원불변의 하나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고넬료 집안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44-46)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행10:44-48) 고넬료 가족이 성령을 받았다면 그들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여기서 성령을 받은 시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이 언제 임하셨습니까? 고넬료 집안 사람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례 받은 후가 아닙니다. 세례 받기 전입니다. 교인으로 등록하기도 전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기도 전입니다. 그런데도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고넬료와 가족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면서 마음에 깨달았습니다. 아하 내가 죄인이구나! 이대로 있으면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구나!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 예수님 이제 내가 주님을 영접합니다. 내 마음에 오셔서 영원히 내 구주가 되소서! 마음으로 주님을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넬료와 가족들의 마음을 사람들은 몰랐지만 주님은 아셨습니다.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성령을 주어 증언하셨다”(8절) 그래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세례를 받거나 공식적인 고백을 하기 전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은 외형적인 의전에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명부에 올리고 예배 출석하는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이전에,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 한 가지 때문에 성령이 먼저 임하십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님의 인정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자녀가 되기 위해 굳이 외형적 의전인 할례를 받거나 탈무드 식으로 정한 음식을 가려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려 먹지 않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습니다. 절기에 매이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에 성령이 내 안에 와 계십니다. 가장 확실한 인정입니다. 오늘 여러분! 성령이 내 안에 와 계십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 자체가 바로 성령이 임하여 계신 증거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고전12:3) 성령이 임하여 계시다면 외형적 의전이 구원의 조건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3. 예수를 믿음으로써 마음이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9) 깨끗하다는 것은 단순히 청결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만큼 완전무결하게 무죄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머리터럭 만큼도 죄를 용납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100% 거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깨끗하다는 것은 어떤 죄목으로든지 우리를 정죄할 수 없고, 지옥에 보낼 수 없는 순도 100%의 의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천국 갈 자격이 100% 있습니다. 9절 말씀은 두 가지 교리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칭의적 의미요, 둘째는 성화적 의미입니다.
칭의란 법적인 자격입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먼저 법적 절차를 밟습니다. 일단 호적에 등재 되면 모든 법적인 자녀의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이 자격은 불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한 가지 때문에 영적으로 새로운 출생자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하나님 자녀로 법적으로 입양되었습니다. 모든 자녀로서의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천국 상속 권, 영생, 하나님과의 교제, 축복된 삶 등등. 이런 특권 중에 가장 큰 특권은 바로 정죄를 당하지 않는 특권입니다. 과거든지, 현재든지, 미래든지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심판 당하고 지옥에 가거나 하나님 자녀의 자격이 상실되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칭의란 죄를 죄로 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무 죄나 지어도 괜찮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정죄를 면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가 지은 어떤 죄든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사면에 포함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죄를 짓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의인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사면해 주시기 때문에 의인 취급을 받는 겁니다. 행위로 의롭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으로 사면을 받았기 때문에 의로운 겁니다. 우리는 다만 예수를 믿고 의지할 뿐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법적인 사면을 받았습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이 법적인 칭의 아래 진행되는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하나님은 이미 나를 법적인 자녀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면 실제적 상황은 어떻습니까? 실제 상황은 법적인 것과는 달리 더디게 진행됩니다. 어느 집에 입양되었다고 당장 그 부모를 닮을 수 있습니까? 서서히 닮아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생각, 가치관, 성격, 인품, 언행, 행동이 다 하나님 자녀답게 변화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인간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노력한다 해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거룩에는 절대로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완전한 의인으로 천국 생활을 할 수 있나요? 그것은 바로 성령님이 보증을 서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신원보증인입니다. 성령님이 책임지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거룩하게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1:22)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성령님은 적어도 내가 이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나를 하나님 자녀답게 변하도록 책임을 지시고 단련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필경은 완전무결한 하나님 자녀로 만들어 주십니다.
이제 베드로 발언을 요약해 봅시다. 첫째로, 자신이 사도로 택함을 받은 목적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들려주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할례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셋째로, 예수를 믿음으로써 마음이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즉, 하나님 자녀로서의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1.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
즉,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11절) 구원은 행함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결과로 받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결과,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결과로 거저 주신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3-5, 8-9)
하나님께서 어떤 대가를 받지 않으시고 거저 은혜로 구원하신 이유가 뭘까요? 은혜가 아니면 인간에게 절대로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존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들을 보세요. 가장 중요한 치명적인 것들은 거저 주십니다. 대가를 받지 않으십니다. 인간 생명을 거저 주십니다. 생명 값을 받는다면 도대체 얼마를 받아야 됩니까? 숨쉬는 공기, 햇빛을 거저 주십니다. 하늘의 비를 거저 주십니다. 인간의 거주지인 지구를 거저 주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거저가 아니면 도저히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 값을 받지 않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내가 갚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가장 비싼 생명의 대가를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한 가지로 충분히 구원받습니다. 더할 것도 없고 덜 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로 완전히 구원받습니다.
2. 그러므로 다른 멍에를 메거나 메울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10) 율법은 멍에입니다. 너무나 힘든 멍에입니다. 멍에가 뭡니까? 무거운 짐을 올려놓기 위해 소나 말의 목에 얹어놓는 물건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짓누르는 멍에입니다. 그 누구라도 도저히 질 수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유대인들의 조상을 거론합니다. 성경 역사를 보세요. 언제 유대인들이 단 한 번이라도 율법을 제대로 지킨 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지켰습니까? 광야 시절에 지켰나요? 지키기는커녕 밤낮 하나님을 원망 불평만 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오기도 전에 우상숭배로 계명을 어겼습니다. 광야 40년 간 할례를 제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정착 직후 사사 시대 300년 간 어땠습니까? 한 번도 하나님 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라는 지리멸렬되고 밤낮 외적에게 시달렸습니다. 사울 시대에 제대로 했나요? 다윗 왕국 시대가 열렸지만 결국은 하나님 법을 지키지 않아 나라가 망하지 않았습니까?
랍비들도 이런 과거를 알고 있었습니다. 주후 70 년경 이후로 보수적 바리새파였던 샴마이파가 쇠퇴하고 보다 온건한 힐렐파가 등장했습니다. 주후 100년 경 랍비 아키바 이후로 율법을 지키는 문제에 보다 관대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율법의 51%만 지켜도 천국으로 가는 길을 여는 데 충분하다”든지, “의무의 4분의 3만 이행하면 나쁜 사람으로 볼 수 없다”는 식의 교훈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단 한 가지만 위반해도 죄인으로 드러난다!(약2:10) 그것이 정통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질 수 없는 멍에입니다.
그런 멍에를 왜 예수 믿고 하나님 자녀가 이미 된 사람에게 씌우려고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그 외에는 어떤 율법의 짐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할례도 필요 없습니다. 식사법이 필요 없습니다. 절기가 필요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의지하면 됩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3-6)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자
행 15장 6~11절 / 신성종목사
1.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시험한 내용은?
히브리서 3장 9절에 보면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40년 광야 생활입니다. 민수기 14장 22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 가지 시험을 당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는 경제적 시험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는 것을 보이면 대중들의 인기가 높아질 것이라는 정치적 시험이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경배하고 타협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다 주겠다는 종교적 시험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시험이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서로 다릅니다.
여기서 두 번째 시험을 받았을 때 주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답변하셨는데 그 구절은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은 출애굽기 17장 1절 이하에 나오는 므리바 물 사건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 므리바란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였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7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장막을 쳤을 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우리들에게 마실 물을 주시오. 이때 모세는 어찌하여 나와 다투며 여호와 하나님과 다투느냐?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우리와 가축들로 목말라 죽게 하였다고 하면서 원망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어떻게 하리이까”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 앞에서 반석을 쳤을 때 물이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르비딤을 므리바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험한 내용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한번 시험해 보라고 허락한 적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2. 우리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내용은?
성경에는 시험이란 말을 두 가지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나쁜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사탄이 우리들을 시험할 때, 즉 유혹이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시험할 때, 즉 시련과 테스트란 뜻으로 성경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뜻입니다. 즉 의심하면서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3장 10절에는 반대로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의심으로 시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확인해 보라]는 뜻입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생활이 하나님의 영적, 물질적 축복을 받는 비결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또 에베소서 5장 10절에도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시험하라고 하신 것 외에는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합니까?
(1) 십일조를 가지고 시험합니다.
십일조를 내면 생활비가 모자라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월급쟁이들은 수입이 뻔하니까 그래도 좀 나은데, 장사하는 사람들은 정확한 수입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주 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을 한번 시험해 보라고 한 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돈에 관하여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2) 주일성수를 가지고 시험합니다.
제가 대전에 와서 놀라는 것은 친척이 주일날 결혼식을 행하든가, 먼 친척이라도 누가 소천 당했을 때 예배드리는 것을 그만두고라도 간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답합니까?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먼저 가서 자기의 부친을 장사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 9:60)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례식에도 참석치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은 부모가 연로하면 자녀가 멀리 떠나지 못하고 몇 년이고,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떤 사람이 요청한 것이고 그것에 대해 주님은 죽은 자들로(영적으로 죽은 자인 불신자) 죽은 자(육적으로 죽게 될 사람)를 장사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일날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우선순위를 지키는 것이 더 복을 받습니다.
(3) 감사헌금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어떤 경우 감사헌금을 낼까? 생일 감사헌금은 꼭 내야 하나? 절기헌금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사 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절기 헌금은 액수에 관계없이 꼭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밖의 감사헌금은 자기의 신앙의 척도에 따라 내면 됩니다.
(4) 봉사를 가지고 시험합니다.
현대의 많은 교인들은 가정 중심이기 때문에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봉사를 하지 않으면 운동하지 않는 사람처럼 몸이 건강하지 못합니다. 결국은 신앙이 약해져서 개인과 가정에 시험이 더 많아집니다.
(5) 선행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지금 한국의 많은 성도들은 자기 교회에서는 봉사를 하면서도 사회의 봉사에는 너무 무관심합니다. 그러나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사회를 떠난 우리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많이 사회활동도 하시기를 바랍니다.
(6) 기도하는 것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많은 분들이 나는 새벽에 잠이 많아서 새벽기도를 못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세상에 새벽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잠이 많아서 낮에도 차만 타면 좁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며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바빠도 호흡을 하듯 의례히 하는 것이라고 하고 해야 할 수 있습니다. 좀 죄송합니다만, 저는 아직까지 저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런 근면성이 어디서 났을까요? 새벽기도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행이나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한 기도하는 일에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3. 어떻게 우리들이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살아야 합니까?
(1) 약 1장 2절의 말씀처럼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러므로 우리는 시험의 의미를 깨닫고 연단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고전 10장 13절의 말씀처럼 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또 히 2장 18절에 보면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에 두려워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기도로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3) 기도할 때마다 주기도문의 말씀처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하듯이 형통할 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다 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영적 보약인 말씀을 통해서 영성을 길러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가 믿는 구원관
행 15장 1~30절 / 변영익목사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타코마에 산다는 40대 초반의 여자 분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처음 듣는 음성이라 실례지만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자기 이름은 아무게 인데 4년 전 캘리포니아 북가주 몬트레이에 살다가 타코마로 이사를 와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4년 전 몬트레이에 살 때 변 목사님께서 자기가 나가는 모 교회에 오셔서 부흥회를 하셨는데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 그래서 어째서 이렇게 전화를 하셨느냐고 하니까 자기는 지금 타코마에 있는 침례교회를 나가고 있는데 교회에 지금 큰 시험이 생겨서 목사님께 조언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무엇이냐고 하니까 문제가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목사님께서 이혼한 사람을 재혼하는 주례를 서준 것이 문제가 되었고, 둘째는 교회안에서 장사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고, 세 번째는 타 교파에서 오는 자마다 다시 침례를 받으라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 이런 문제들 때문에 목사님과 다툼이 생기고 패가 갈리며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러 문제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은 이럴 때 참 조심해서 조언을 해야 합니다. 즉 이럴 때는 사람 편에 서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서 문제를 보고 풀어야합니다.
=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이혼한 자의 재혼 주례문제는 성경대로 어떤 이혼이냐에 따라 설수도 있고 안 설수도 있다, 라는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는 교회 안에서 장사하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우리 교회도 해당되는 문제인데 이 문제는 이렇습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마 12:12)에 나오는 예루살렘 교회들 들어 문제를 제기합니다.
= 저는 대답하기를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것이 더 좋다, 라는 대답을 하면서 그러나 교회 안에서 여전도회가 선교사역이나 교회를 위하여 행하는 도네이숀과 봉사 형식의 장사를 (마 12:12)의 장사꾼들과 똑 같이 정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실 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보고 안식을 범한 자들이라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 12:12)에 나오는 예루살렘교회안의 장사꾼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가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남기기 위하여 들어온 자들입니다. 교회의 유익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장사꾼들입니다. 그러나 여전도회나 교회가 하는 일은 100%의 봉사와 100%의 도네이숀 으로 그와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 마지막 세 번째 세례 받은 자를 다시 침례를 받으라고 강요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토론의 여지가 없이 비 성경적인 잘못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을 했습니다. 세례나 침례는 같은 것으로 어느 편에서든지 서로가 인정을 해야하는 문제입니다. 세례나 침례는 절대적으로 1회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 문제는 분명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기 바랍니다.
= 여려분 ! 제가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드림은 오늘 본문에 이와 똑 같은 문제가 발생해서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 선교보고를 할 때 이와 비슷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즉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에 대하여 유대에서 내려온 어떤 자들이 주장하기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 여러분 !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표를 뽑아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의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보냈습니다. 역사적으로 처음 공회의가 열렸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도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때(5절)에 보면 어떤 바리새파에서 개종한 사람이 일어나서 강하게 주장하기를 그들에게도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 여러분 !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구원과 믿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므로 바울의 편을 들게 됩니다. 여러분 ! 첫째로 베드로는 자신이 받은 구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 본문(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나를 택하시고, > 라고 했습니다. 즉 베드로의 주장은 바울의 입장과 같이 우리가 받은 구원은 할례에 의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 여러분 ! 율법과 복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지킴으로와 믿음으로의 차이입니다. 율법은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나 복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 하셔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시켜 주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 (롬 8:5)에 보면 바울은 말하기를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그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 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여 하심이니라 > 고 했습니다.
= 여러분 !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으로 더 쉽게 말하면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다 들을 수 없이 연약하므로 하나님께서 예 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우리가 할 수 없는 율법이 요구를 들어 주셨다"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율법을 이루는 것이요, 내가 모세의 율법을 직접 지키지 않아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요 베드로의 구원관입니다.
= 여러분 !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세례문답을 합니다. 그 문답에 중요성은 성경- 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예수를 구주로 믿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 확신만 있다면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세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경을 통달하고 십일조를 드리며 봉사에 열심히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만일 그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그는 세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 여러분 ! 할례나 세례는 구원의 증표는 될 수 있어도 구원의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즉 세례나 할례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에게, 이제 이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증표인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 수년전 이야기입니다. 어떤 젊은 부부가 세례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부부에게 각각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과 그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받은 것을 확실하게 믿습니까 ? 라고 물으니까 여자 분은 확실하게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데 남자는 말하기를 ( 목사님 ! 솔직히 잘 모르겠고 아직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 라고 했습니다. 그 때 나는 그 젊은이에게 잘 설득을 시켜서 다음에 믿어질 때 세례를 받으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 여러분 ! 베드로가 믿는 구원관이 무엇입니까 ?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로마서 전체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로마서를 보면 로마서에는 온통 ( 율법으로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왜 복음이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 너무너무 복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 ! 이 복음이 왜 복된 소식입니까 ?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지킬 수 없는 무거움 짐이 율법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 11:28)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 이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짐을 벗어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믿는 구원관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2. 성령으로 믿게 된다.
= 본문(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 하시고 >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셨던 성령을 저희에게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자는 최소한 두 가지 원인이 있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본문(7절 하)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야하며 둘째는 성령을 받아야 예수가 구주되심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 전도가 무엇입니까 ? 전도란 안 믿는 자를 예수와 만나게 하므로 믿게 하는 신령한 중매입니다. 저도 옛날 어느 날 제 친구가 나를 예수에게 소개하므로 예수를 알게 되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 여러분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를 만남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를 만나서 성령을 받아야 비로소 믿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도 처음 에는 예수를 만났지만 100%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루 저녁에 세 번씩이나 자기는 예수를 전혀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가의 다락에서 불같은 성령을 받음으로 비로소 100%를 믿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즉 성령이 그를 믿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 여러분 ! 또 본문에 나오는 바울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도 예수를 알았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를 핍박하던 자였고, 믿는 자를 잡아 감옥에 가두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에서 성령을 만나고 체험하므로 전혀 믿어지니 않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100% 믿어지게 되었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 여러분 ! 그러므로 (고전 12:3) 말씀에서 말씀하시기를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 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즉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인데 이 믿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어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바울도, 빌립도, 나도 여러분도 모두 성령을 받으므로 예수가 우리의 구주되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 여러분 ! (행 8:15)이하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한 사람도 성령 받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내려가서 그들에게 안수하므로 성령을 받게 되고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라고 했습니다.
= 여러분 ! 오늘날 교회 안에도 믿기는 믿는데 100%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지금 여러 분 계십니다. 세례도 벌써 받았고 잡사도 수년전에 되었는데 왜 안 믿어지는지 아십니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도 100%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 마지막 세 번째로 베드로가 믿는 구원관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믿음으로 깨끗게 된다.
= 여러분 !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구약 적 증표가 할례라면 신약 적 증표는 세례입니다. 세례라는 말의 뜻은 물로 씻는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구약의 할례나 신약의 세례를 받으므로 깨끗함을 받는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의미는 할례의 의미와 조금 다릅니다. 즉 세례는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다, 라는 증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 다시 말씀을 드리면 할례는 깨끗함을 받는 원인이 되고 있지만 세례는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증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세례는 믿음을 전제로 한 깨끗함이요, 구약의 할례는 행위지체를 깨끗함의 원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와 세례는 절대로 같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바리새인의 말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우리를 믿음으로 께끗게 하신 것과 같이 저희도 믿음으로 이미 깨끗함을 받은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 저의 집 사람이 종종 사우나에 가서 사용하는 소금이 있는데 때를 벗기는 소금이라고 합니다. 저도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는데 그 소금으로 문지르면 10년 전 때까지 모두 벗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 그 소금으로 10년 된 때는 벗길 수 있어도 그 소금으로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죄의 때는 벗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더러운 죄의 때는 오직 믿음으로만 깨끗함을 받을 수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 여러분 ! 베드로가 믿는 구원관이 무엇입니까? 그 구원관이 바로 여러분의 구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즉 우리가 받은 구원은 애가 무엇을 하므로, 지키므로, 의로움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그 택한 자에게 성령을 주시므로 믿게 하셨고, 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므로 우리를 죽음에서 영생으로 구원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강성찬목사 / 행 15:11
존 번연(John Bunyan)은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에 꿈속에서 더러운 옷을 입고 무거운 짐을 등에 진 남자가 책을 펴들고 있는데 그 이름은 기독도이고, 책은 성경입니다. 그는 길을 떠납니다. 수없는 고난과 머나먼 순례의 길에 기독도와 동행한 동반자는 ‘소망’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의혹’이라는 성에서 ‘절망’이라는 거인 성주에게 잡힙니다. 성주의 아내는 ‘의심’이었는데 그녀의 충동으로 옥에 갇힌 채 굶주리고 매질을 당합니다. ‘절망’은 자살을 권합니다. 그때 기독도는 품속에 있던 ‘구원의 약속’이라는 열쇠를 찾아내어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소망과 함께 동행 하면서 구원의 열쇠만 있으면 절망과 의심의 감옥을 헤쳐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이방 전도는 미처 예상치 못한 규모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사실만도 대단한 일이었으나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윤리적 수준을 지키는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하듯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였을 것이라 하기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가지고 그들과 심한 변론을 했지만, 결국 이 문제는 교회의 최고 책임자들 수준에서 해결할 문제로 판단해서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던 중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흩어진 교인들이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 곳 교인들은 이방인 선교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바리새인 중 어떤 믿는 자들이 일어나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예루살렘 공회'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방인 신자들도 교회의 같은 지체로 인정해야 할지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소집한 모임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공회의 구성원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증인으로 초청되어 참석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바리새파 출신 교인들은 이방인 개종자들이 그들과 똑같이 할례를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자기들의 견해를 밝힌 후, 마침내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참석자들에게 이방인들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고넬료의 집에서 최초로 복음을 받았던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아무런 구별도 하지 않으셨고, 유대인들에게 내리신 성령을 똑같이 내리셨으므로 하나님이 지우시지 않은 짐을 이방인에게 지우려고 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을 마친 후, 바울과 바나바는 최근의 전도 여행을 말하며 베드로의 의견을 지지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의 결론은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나 다른 유대인의 관습을 부과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금하며 아울러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질지도 모르는 불안과 불만도 고려해야 하니 유대인 신자들이 양심상 거리낌 없이 새로 가입한 이방인 신자들을 맞이할 조치가 필요하므로 이방인 신자들에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짐승의 고기나, 피를 완전히 빼지 않은 고기 등 유대인들이 꺼리는 특정 음식을 삼갈 것을 요구하고 결혼에 관한 율법의 규정에 순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판단을 구약 성경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1-12)는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뒷받침했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동의를 얻은 야고보의 결론은 그가 제안한 몇 가지 대안들과 함께 편지로 작성되었고 이 편지는 이방인 교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교회가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려 할 때 중요하게 여겨야 할 점을 자세하게 교훈한 것으로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뿐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보면 그들은 할례를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이 할례는 아브라함 때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나기 전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시면서 당신의 백성 된 표로 이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 즉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창 17:14).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목숨처럼 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이방인은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적인 것에 매달리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관심을 보이는 칸 영화제에서 몇 해 전 <밀양> 이라는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기독교를 조롱하거나 모독하는 흐름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반기독교 영화라고 평가했다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영화 <밀양>을 볼 필요가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로 작가는 그 소설에서 유괴 살인범에게 아이를 잃고 나서 신앙의 힘으로 견디려고 했던 한 여인을 그리고 있는데 그 여인은 신앙심으로 범인을 용서하려고 많은 고민 끝에 교도소를 찾아갔으나, 범인은 벌써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서 오히려 여인을 위로하자 여인은 다시 충격을 받는데 그렇다면 나는 용서할 권리도 없는 벌레 같은 존재인가 하고 하나님께 저항한다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이 여인은 원작보다 더 하나님께 강력하게 대들며 예배를 방해하는 인물로 표현된다합니다. 그런데 영화를 만든 이창동 감독의 말은 자신은 종교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관한 영화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용서와 화해를 말하고 있으며,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합니다.
유대주의자들의 또 다른 오류는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신뢰함에 있었습니다(눅 18:11, 12).
유대인들은 할례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그러한 그들의 출신 성분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보다 더 우월함이 아니라 절대적인 우월함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는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출신 성분으로는 구원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출신 성분으로 구원이 가능하면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공로를 무효화시키는 것입니다.
'엠마오 도상'이란 유명한 그림을 그린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모든 사람이 원하는 그림을 잘 그려서 큰 부자가 되어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으나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 버려 그 행복도 산산이 깨지고 말았고 그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붓을 내던지고 고민하게 되었으나 곧 그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깨닫고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 후에 그린 것이 바로 '야경(夜警, night watch)이라는 그림이라 합니다. 본래 제목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민방위대(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 Cocq)〉였다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 제목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요? 1640년 무렵 렘브란트는 국민병 대장인 프란스 반닝 코크로부터 자신의 부대를 묘사한 그림을 의뢰받고, 낮에 성벽에서 훈련하기 위해 무기고를 떠나는 병사들의 모습을 그렸다합니다. 낮에 말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이미 문을 나선 병사들은 햇빛을 받아 환히 비치고 있는 반면 뒤쪽 문간에 서 있는 병사들의 모습은 어둡게 묘사되어 있다합니다. 이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렘브란트가 의도한 그림의 아름다움이었다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두 가지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합니다. 첫째 비밀은 그림의 본래 모습인데, 4.5미터×5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그림을 본 군인들은 국민병 본부 벽을 장식하기에 너무 크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군인다운 결단으로 문제를 해결했는데, 왼쪽 부분을 잘라 버리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비밀은 바로 제목과 관련된 것이라 합니다. 그림이 걸린 장소가 부대였다는 것은 그림이 제대로 대우받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환경임을 동시에 알려 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에는 엄청난 그을음을 내는 이탄 난로가 있었고, 결국 이 그림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 세기가 지나자 사람들은 이 그림이 야밤을 틈타 이루어지는 기습 장면이라고 여기게 되었다합니다. 그리고 제목은 자연스럽게 〈야경〉이 되었다합니다.
인간들의 인간적인 면이 삶을 더 어둡게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능히 자기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했으며, 그 공로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자는 없습니다(롬 3:19, 20).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신 동물 제사조차도 그들의 죄를 없이하지 못합니다(히 10:1, 4). 만일 행위의 공로로 인간이 구원 얻을 수 있다면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를 강력히 변론합니다.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베드로는 '우리가'즉 유대인이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함으로써 유대인의 구원의 출발이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음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에 있고 그것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써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합니다.
그러면 유대주의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고(롬 3:2)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었음에도 이와 같은 오류에 빠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뇌리 속에서 철저히 굳어 버린 선민의식,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득권 의식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에게 다가오기 전에 구원을 자기들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쥔 것이 너무 강하여 정작 구원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가왔을 때는 그것을 쥐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자신만이 쥐지 못한 게 하니라 남(이방인)까지도 쥐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비단 구원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성도는 무언가 손에 넣고 있다거나 어떤 기득권 의식을 가지면, 정말로 손에 넣을 것이 다가오면 쥘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의 손은 늘 빈손이어야 합니다.
탤런트 최불암씨를 만나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같이 식사를 하던 분이 '선생님은 최고의 연기자인데 연기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늘 연기를 하면서 가장 처음 받은 연극수업을 기억하는데 얼마나 빨리 그 대사에 나오는 인물과 같아지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서 극중 인물의 인격으로 채우느냐 하는 것이 연기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잘못 비워서 멋대로 성품대로 하려고 하면 연기를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하더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은총을 우리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비우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교회력으로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로 지킵니다. 특별한 사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삼위일체 교리를 새기는 일을 강조해 왔습니다.
우리가 가장 신비하고 거룩하게 여기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는 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세 분이 하나이시라는 놀랍고 어려운 교리 앞에 처음 직면할 때면 누구나 의문을 토로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우리가 드려왔던 기도들이 곧 아버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님에 의해서 행하여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고스란히 인정해 왔던 것입니다.
오늘 예배당에 나온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매주의 첫날인 주일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셨고, 이날에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셨고, 또 이날 성령님께서 새롭게 태어난 교회에 충만히 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주일은 거룩한 삼위일체의 날입니다.
죄 속에 있던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가 성부, 성자, 성령으로 하나가 되어 구별 없이 임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자이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3-5)다고 합니다.
장로교회 창시자인 존 칼빈은 젊어서부터 죄와 상관없이 살아보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합니다.
은혜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행 15:6-11 /
[사도들과 장로들이 이 문제를 다루려고 모였다. 많은 논쟁을 한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택하셔서, 이방 사람들도 내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 속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안디옥 교회의 상황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초대교회의 역사 가운데 매우 중요한 한 사건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 선교에 나섰던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는 매우 인상적인 결과를 가지고 파송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지중해의 섬지역과 소아시아 지역 선교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욕망에 뿌리를 둔 옛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따라 사는 새로운 삶으로의 개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대략적인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 미처 담지 못한 수많은 에피소드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생생한 경험들을 본 교회 신자들과 나눌 생각에 그들의 가슴은 떨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는 좀 복잡한 문제에 휩쓸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신학적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자문을 구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포함한 신도들 몇 사람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떠났습니다. 무려 500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들은 페니키아와 사마리아를 거쳐가면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만나 이방인들이 회개한 일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신도들은 매우 기쁘게 그 이야기를 청취했습니다. 이 대목을 묵상하다가 문득 바울과 바나바의 행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복음의 실로 엮어내는 바느질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숨을 죽인 채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는 법입니다.
사절단은 예루살렘에서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사도들 말고도 장로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장로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대개 나이도 많고, 덕스러워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들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나중에 자신을 장로 가운데 하나로 소개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장로로 있는 이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벧전5:1) 사도들과 장로들은 일종의 협의체를 이루고 있었고,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그 중심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협의체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하신 일들을 모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새파에 속하였다가 신도가 된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방 사람들에게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여야 합니다"라고 문제 제기를 하였습니다.
• 공의회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공식적인 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로 구성된 일종의 공의회인 셈입니다. 주후 49년 경에 일어난 이 회의를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도회의라고 지칭하기도 합니다. 이 회의는 나중에 열릴 모든 공의회의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이 이루어졌습니다. 갑론을박하는 과정이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참여자들은 거리낌없이 자기들의 생각을 드러냈습니다. 누구도 말을 독점할 수 없었습니다. 토론과 논쟁에서 드러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각자의 성격이라는 말도 있지만, 진리를 찾아가기 위한 건설적인 논쟁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논쟁을 참 좋아했습니다. 안티로기아(antilogia)는 법정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로고스와 로고스가 맞부딪치는 곳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는 신들조차 진리를 고지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다투는 자로 법정에 섭니다. 유대교의 랍비 전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아마 이런 전통 때문이었을 겁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철야 기도를 하기보다는 논쟁을 택했습니다. 이게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여쭙기 위해 기도하는 일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활용하는 일 또한 중요합니다. 존 웨슬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환상이나 꿈 그리고 종류가 어떠하든, 갑작스러운 느낌이나 강한 충동 같은 것을 믿지 말라"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경험과 이성 그리고 성령의 평범한 도우심을 힘입고 명백한 성경적 법칙을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웨슬리 설교 전집3>, 기독교서회, 2006년 5월 30일, p.34)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경험과 이성 그리고 성경입니다. 여기에 한가지를 더하면 전통이 되겠지요.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강조합니다. '내가 기도해봤더니~'라며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지르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런 이들이 참 위험합니다. 토론이 무르익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말합니다. 그는 이탈리아대 백부장이었던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들을 인정해주신다는 것,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그러니 이방인 신자들에게 자기들조차 온전히 지키기 어려운 율법의 멍에를 메우려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아니겠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 말을 이렇게 맺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11)
베드로의 논증은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고, 논리적으로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회중들은 반박할 말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때 바나바와 바울이 베드로의 증언을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이방 사람들 가운데 행하신 온갖 표징과 놀라운 일을 보고하였습니다. 이야기는 힘이 센 법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일하심에 대한 결정적 증거입니다. '신학'(theology)은 '신(theos)에 관한 이야기(logos)'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구체적인 언어에 마음을 열곤 합니다.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는 신약보다 구약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그 속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창세기나 출애굽기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 진리를 향한 개방성
이제 사람들의 마음은 거의 하나로 모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야고보가 일어나 베드로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펼칩니다. 이방인의 회심에 대한 이야기는 일찍이 예언자들이 전했던 말씀과 꼭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무너진 다윗의 집을 다시 고치고, 그 집을 바로 세우실 때, 남은 자들이 주를 찾을 것이고, 주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받은 모든 이방 사람이 주를 찾게 될 것이라는 아모스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증언이 경험과 이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면 야고보의 증언은 전통과 성경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로써 감리교 신학의 4대 원리라고 하는 '경험 이성 전통 성경'이 다 등장했습니다.
공의회는 마침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을 할례나 율법 준수 요구 등의 일로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입니다. 우리는 비교적 사소한 입장 차이 때문에 교파가 갈라지고 교회가 갈라지는 것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이방인 신자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 때문에 갈라질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지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설교 '관용의 정신'에서 "비록 교리나 예배 방법의 차이가 우리들이 외적으로 일치를 이루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음에서 하나가 되는 것까지 막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비록 우리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앞의 책, p.61)라고 물었습니다. 모두의 마음이 같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웨슬리는 이 말 끝에 단언하듯이 말합니다.
"서로간의 차이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행과 사랑에 있어서 서로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작은 차이 때문에 다른 이들을 백안시하거나 적대시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웨슬리는 그런 차이를 차이로 받아들이되,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과 선의로 대할 수는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여유와 지혜가 아닐까요?
• 공의회 이후
이제 결론은 내려졌습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교의 한 종파에 머물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규례를 따르는 일은 구원과 무관한 일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여전히 찜찜한 마음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유대인 신자들을 고려하여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이방인 신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혐오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일은 하지 말라고 권고하자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쳤던 더러운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 음행을 피하라는 것,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는 아주 명백하게 결론을 내려주되, 유대인들의 마음도 고려하여 내린 조치입니다. 이것은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친절한 배려입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교인들에게 다른 이들을 각별히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여러분은 유대 사람에게도, 그리스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 나도 모든 일을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이로움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추구하여, 그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고전10:31-33)
믿음의 삶은 늘 남을 배려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나 좋을 대로가 아니라 남에게 유익이 되도록 자기 삶을 제한할 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의 길 위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마지막으로 안디옥 교회의 질문에 답하는 편지를 작성하여 유다와 실라로 하여금 안디옥에 전달하게 합니다. 이로써 안디옥 교회의 혼란은 진정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도 탄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교회 일치와 공교회성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안팎으로 질타를 받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이런 공교회성을 잃어버리고 개교회 중심주의에 사로잡혔기 때문일 겁니다. 공교회성이 사라졌기에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적 태도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자정 능력은 거의 상실되었습니다. 대형 교회 목회자들의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는 데도 불구하고 교회의 상급 기관들은 그들을 치리하지 못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사람들은 교회를 더욱 차갑게 외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신실한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아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때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성전임을 깨달아,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림의 사람답게,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미래는 바로 우리들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향기와 평화의 기운이 감돌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행 15:6-11 / 우인택 목사
여러분, 자석에 쇠붙이를 붙여두면 그 쇠붙이에도 자력이 생기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측량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은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어떤 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은혜의 복음을 붙들고 감사와 순종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 먼저 6절 함께 읽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성도가 구원받는 것이 은혜로냐, 아니면 행위로냐?”라는 초대교회의 운명을 가를 신앙의 분기점에서, 역사적인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교회가 한 사람의 독단이 아니라, 사도와 장로와 온 성도들이 함께 의논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성도는 “교회의 모든 것을 목회자의 뜻을 따라 결정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의견에 순종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모든 성도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힘을 모아 세워가는 곳이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상고한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세울 때, 베드로가 독단적으로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11명의 사도와 120명의 성도가 함께 모여 기도하며 새로운 사도를 세웠습니다. 또, 사도행전 6장에서 과부들의 구제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도, 사도들이 강압적으로 불만을 잠재우지 않고, 온 성도들과 함께 모여 일곱 집사를 세움으로써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습니다.
이처럼 교회는 특정한 지도자가 일방적으로 이끌어가는 곳이 아니라, 어떤 문제든지 목회자와 온 성도가 함께 모여 의논하며, 힘을 모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은 이러한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라 ‘제직회’ 또는 ‘공동의회’라는 모임을 통해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모든 성도들이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에서는 반대 의견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색다른 의견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말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의 주장과 할례주의자들의 생각이 정반대였습니다. 할례주의자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회의에서 그들에 대해 비난하는 분위기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강제로 제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격적으로 모욕을 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그들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충분히 말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이 공식적으로 드러났고, 복음은 제자리를 찾았으며, 교회가 둘로 깨어지는 위기를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로 갈라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을 향한 선교 사역은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들이 충분히 자기의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면 이러한 아름다운 결말이 도출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그들은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하다가, 뒤에서는 ‘우리가 진짜 복음’이라며 교회를 분열시키고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초대교회를 본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를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리고 더 나아가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서로의 의견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교회로 세워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우리 교회로 세워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2. 이어지는 7절 함께 읽습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베드로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최고지도자였지만 성급하게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자기 의견에 따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공의회 안에서 ‘많은 변론’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이때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의견을 말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할례주의자들의 주장이란 들을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으로 역사를 거꾸로 돌리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주장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열심과 주장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묵묵히 들으며 그들이 의견을 충분히 다 말할 때까지 참았습니다.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베드로의 진정한 지도력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먼저, 분쟁이 되는 사안에 대하여 충분히 토론하게 함으로써, 할례주의자들이 스스로 자기 논리의 모순을 발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나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구원을 통한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며 논쟁을 정리했습니다.
이처럼, 반대되는 의견을 인내심을 갖고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할 때 들어주는 사람의 말에 무게가 실리게 됩니다. 설득력이 있게 됩니다. 교회에서의 대화는 이러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어야 합니다. 비록 자기와 다른 견해라 할지라도 인내심을 갖고 들어줄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진리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합니다. 복음에 반하는 말이나 주장은 바르게 시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과정’입니다. 아무리 옳은 일도 우격다짐으로 하려 하면 문제가 일어납니다. 옳은 말도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하게 되면 반발을 사게 됩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주장이라도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인내력과 포용력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말이 옳기에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 만해서 들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들어주는 인내의 과정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설득하기보다,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일 때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지도력은 말보다 경청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러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3. 긴 변론 끝에 베드로가 선포한 내용의 핵심은 9절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깨끗하게 하셨으며, 구원에는 차별이 없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여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거나, 스스로 구원받을 자와 버림받을 자를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도전이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0절에서 베드로는 할례주의자들을 단호하게 책망합니다. 함께 읽습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여기에서의 ‘멍에’는 율법을 뜻합니다.
사실, 율법은 유대인들도 지키기 어려운 멍에였습니다. 율법은 타락한 인간이 지키기에는 너무도 벅찬 멍에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갈라디아서 3:24에서 율법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의지하게 하는 초등교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할례주의자들은 자기들도 지키지 못한 율법을 이방인 성도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억지스러운 행동입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종교일수록 사람이 더 많이 몰려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언가 특별한 멍에를 멜 때 종교적 효험이 나타나리라는 기대 심리를 갖게 됩니다. 부처 앞에 삼천 배를 올리고 나면 어떤 효험이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몸에 할례를 받고 나면 무언가 거기에 ‘부적 효과’가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심리를 기막히게 이용하는 것이 타락한 거짓 종교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주의적인 유대교가 그러했으며, 중세의 타락한 로마 가톨릭이 면죄부를 팔며 그러했습니다. 오늘날 이단들도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자극하여, 할 수만 있으면 신실한 성도라도 굴레를 씌우려 합니다.
더욱이 이 멍에는 이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 ‘율법주의의 멍에’가 교묘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과 헌금을 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율법주의의 멍에를 메고 있는 성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주일을 목숨처럼 지켜야 구원받습니다.”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습니다.” “새벽기도를 빠지면 하나님이 벌주실 거야.” 이 모든 것은 은혜의 복음에 나의 행위라는 ‘조건’을 다는 율법의 멍에입니다.
여러분, 멍에만 지우려는 거짓 종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 신앙은 예수님 안에서의 자유를 줍니다.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을 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11절에, 오늘 설교의 제목이자 예루살렘 공의회의 최종 결론으로 그의 발언을 마무리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한 길, 우리의 행위나 자격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고, 겸손하게 성도로서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가 선포한 것처럼 저희도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 믿습니다.” 이를 가슴 깊이 새기고 저희 안의 교만과 자랑을 모두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율법의 멍에를 벗고 복음의 자유를 누리며, 은혜받은 성도답게 감사와 순종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은혜의 복음 위에 굳게 서서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