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면승부 1: 울산 현대 감독 차범근'
1990년 11월 23일 현대 구단과 정식 계약을 체결한 차범근은 한국이 나은 불세출의 스타 '차붐'이 아닌 현대 프로 축구단의 감독 차범근으로 한국 축구계에 돌아왔다.
2년 연속 최하위권에 처진 팀을 3년 안에 정상에 올려 놓는다는 청사진과 함께 차범근의 야심찬 독일 축구의 한국 이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4년 후 차범근은 '성적 부진'이라는 불명예를 얻고 현대 감독 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우승을 지상 과제로 여기고 있던 당시 현대 구단과 프로스포츠의 속성으로 볼 때, 그리고 3년 안에 팀을 우승시키겠다던 차범근의 취임 목표를 고려했을 때 그의 퇴진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승을 못했다고 해서 차범근이 한국 축구에 기여한 그 수많은 공헌들을 깎아 내리고 그를 평가절하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논리는, 수 십년이 지나도록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와 퇴보를 지속하고 있는 한국 축구의 저열한 인식과 맥을 같이하는 청산해야 할 유산이며, 지금도 겪고 있는 시행착오의 자기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차범근이 당시 현대를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어도,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유럽 축구의 한국 이식은 당시 한국 축구를 발전 시키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모범 답안이요,
지금도 한국 축구에 소중한 유산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한국 축구의 선각자 차범근
선수로서도 한국인 최초로 선진 축구를 경험하며 위대한 성공을 거두었던 차범근은 감독으로서도 한국에서는 볼 수도 없었던 선진 축구의 마인드를 가지고 많은 새로운 시도들을 하게 된다. 차범근의 새로운 시도들은 언론의 찬사를 동반하며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을 침묵하게 했으며, 1차 년도 준우승이라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3년 안에 우승이라는 차범근의 취임 목표는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차범근이 현대의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들은 선수들을 '프로 축구 선수가 되게 하는 것'이었고, 구단은 '프로 구단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학원 축구에서 고질병으로 남아 한국 축구의 장래를 망치고 있는 요소들을 없애고, 의식을 뜯어 고치고자 했으며, 스스로 몸 관리 하나도 제대로 못하는 프로 선수들을 바꾸고자 했고,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제대로 된 과학적인 훈련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그가 감독으로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당시(지금도 변하지 않는 곳이 수 없이 많이 존재하지만) 선수들이 몸 풀 때는 대충 천천히 하고, 음식은 전혀 생리학적이고 과학적인 근거 없이 먹고 싶은 것 아무거나 먹고,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엄청난 습관인 정례적으로 낮잠자는 것 등의 나쁜 습관 등을 금지시킨 일이었다. 워밍업은 적응력을 기르게 하기 위해 실전 수준으로 진행했으며, 식단을 직접 관리하며 현대 선수들을 프로 경기에서 뛸 수 있는 프로 선수로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운동 선수들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술, 담배를 금지 시킨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잘못인지도 모르고 익숙해져 있는 선수들에게는 쉽지 않은 변화였겠지만, 축구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에서는 당연히 하고 있는 것들을 시행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범근의 조치들에 반기를 드는 선수들이 있었다고 하니, 만일 지금 그런 선수가 나온다면 온 국민이 쫓아 내려고 할 것이 분명함을 고려하면, 당시 한국 선수들의 얼마나 미개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차범근은 이런 기술 외적인 요소를 뜯어 고침과 동시에 시스템에서도 선진적인 방식들을 도입해 선수와 구단을 프로화 시키고자 했다. 코칭 스탭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GK 전담코치, 스카우트 담당, 전술분석코치를 두려고 했다. 그러나 유럽 축구의 이식이 어쩌고 저쩌고는 했지만 한국의 후진적인 구단인 현대가 스카우트 담당이니, 전술 담당이니 하는 듣도 보도 못한 돈 들어 가는 것들을 수용할 리 만무했으니,
10년 지난 지금에서야 대표팀에서 시행하는 시스템을 일개 프로구단에서 시행하려고 했던 차범근이 얼마나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것은 역으로 한국이 엄청난 후진국이었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다.
남들은 몇 십년 전에 프로 구단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걸 이제서야 대표팀에서 시행 하다니… )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1년 훈련계획을 수립하여 1월 4일부터 시즌이 끝나는 11월 3일까지의 모든 훈련 일정과 경기일정, 선수들의 이동방법과 시간, 숙식장소와 시간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최초의 외국인 감독이었던 대우의 엥겔도 3개월 단위의 훈련 계획표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차범근이 얼마나 철저한 과학화를 추구했고, 선진적인 시스템을 수립하려고 했었는지 알 수있다. 그러나 '당시 유럽에서는 감독이 경기 일정에 맞춰 1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보편화된 일'이라고…
차범근은 또 하나의 시스템을 시행하려고 했다. 십여 년 동안 탁상공론만 계속되던 '클럽 시스템'이 그것이다. 아마추어팀을 2군 밑에 두는 구상이었는데, 지금도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은 시스템이 당시 진행될 수 있었을리가 만무하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 앞서갔다'고, 그러나 그건 앞서간 게 아니고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 '너무 앞서 가는 것 아니냐'고 떠들던 사람들로 인해 일본에 10년은 앞서 있다던 한국 축구가 10년도 안되어서 일본에 몇 년은 뒤진 꼴이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차범근은 제대로 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명백히 반대 하던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일례로, 92년 말 축구 협회와 일화를 제외한 프로구단들이 담합해, 90년 1년 동안 진행되고 유명무실해 있던 2군을 93년부터 폐지하기로 결정을 하게 되는데, '어떤 식으로든 2군을 유지하겠다'고 축구협회의 결정에 반박을 하고 나선 차범근의 행동은 축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정확하게 알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는 선각자의 그것이었다.
주둥아리로만 '축구 발전' 외치는 세태와는 동떨어져 행동하는 모습, 그것이 이 척박한 땅을 비옥한 토지로 만들기 위해 광야의 폭풍우 속에서 씨앗을 뿌리는 선각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랴? 결국 이런 옹골차고 정도를 가는 행동들이 일련의 무리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10년 전 한국 축구의 풍토에서 진정으로 한국 축구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알고 행동으로 옮기는 유일한 인물이 한국의 프로 축구 감독 차범근이었던 것이다.
감독으로서 4년, 첫해 절반의 성공 그리고 그 후
감독으로서 첫해인 91년 차범근은 90년 월드컵 때, 이탈리아, 브라질 등 세계 최고의 국가들이 채택했던 '3-5-2' 포메이션과 '유럽식 압박 축구'의 개념을 도입한 전술을 가지고 감독으로서 데뷔한다. 최전방 공격수와 최후방의 수비수 사이의 간격을 20m 정도로 좁게 유지하며 빠른 템포로 움직이는 차범근의 전술은 리그에 새로운 반향을 일으켰고, 전년도 최하위였던 팀은 정규 시즌이 끝났을 때 2위라는 성적을 거머쥐었다. 3년 내 우승을 목표를 천명했던 차범근과 현대 구단으로서는 만족할만한 성과였고, '구단 최초의 정규리그 우승'이라는 목표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92년, 93년 리그 초반에 선두를 다투던 팀이 시즌 끝 무렵에는 2년 연속 3위로 처지고 마는 '뒷심 부족'을 겪으며 차범근의 3년 계약은 끝나게 되었다. 당시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으나 현대가 우승하지 못한 원인으로는, 시즌 후반의 체력 저하, 대표팀 차출로 인한 전력 누수 등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대표팀 차출 문제는 모든 프로팀들이 겪는 문제로 '현대'만이 가장 크게 피해를 입었다라고 강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92년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던 현대는 중국 다아너스티컵에 가장 많은 6명의 선수(최인영, 최강희, 정종선, 신홍기, 김현석, 송주석)가 차출되어 후반기 10게임을 남기고는 3위로 밀려나는 결과를 맞았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대표팀 차출이 겹쳐 우승 전력에 상당한 차질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는 것이 당시의 중평이다. 반면에 동 시즌 우승팀인 포철과 2위 팀 일화는 주전 중 2명만이 대표팀에 차출되어 현대에 전력적 우위를 점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대표팀 차출이 성적 차이의 모든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차범근의 전술은 선수들에게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니, 시즌 후반의 체력저하라는 내부적 요인과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이 겹쳐 당시 차범근과 현대의 목표인 팀 우승이라는 당면과제는 이루어 질 수 없었다. 차범근은 구단의 신임을 받아 94년 3년의 재계약을 맺었으나 94년 초반 6연승의 기세를 살리지 못하고 시즌 4위라는 성적표를 받고 난 후 4년 동안의 '한국 프로 축구 감독'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감독에 대한 평가는 성적으로 내려질 수 밖에 없는 것이 프로의 냉정한 논리지만, 리그 우승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약팀을 감독 생활 내내 우승을 노리는 강한 팀으로 바꾸어 놓은 차범근의 프로팀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평가 절하될 수는 없다.
차범근의 유산 - 진정한 프로 축구인으로서의 모습
차범근은 4년 동안의 '현대' 감독 생활을 통해, 그가 지니고 있던 이상, 선진 전술과 시스템 등을 한국 축구계에 쏟아 내었다. 그는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하던 한국 축구계에 유럽식 선진 축구가 무엇이며 한국의 축구 발전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명확하게 모든 이들에게 열어 보였다. 그리고 그 올바른 길을 위해서 고집을 피우고 때로는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차범근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그가 선택한 전술도,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진정한 프로가 무엇인지, 이제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실례를 한국의 축구계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 아직도 한국의 프로 선수들 중에는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여럿 존재한다. 외국의 훌륭한 감독이 선수들을 강하게 통제하면 '역시'하는 탄성을 질러대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한국의 축구인들이요 냄비 은 한국의 언론이건만, 축구 선진국 그 어느 나라에서도 감독은 보조적으로 선수를 관리할 뿐이요 자신의 컨디션과 몸 상태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은 선수 본인이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한다.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눈으로 보면서 체득한 것이요, 본능적으로 그것이 프로로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축구계에는 이러한 것을 보고 따라 할 수 있는 모델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유일하게 최고의 프로 선수로서 세계 최고
의 프로 리그에서 자신이 몸소 체득한 것을 실천하는 유일한 프로페셔널의 예를 차범근을 통해서야 비로소 눈으로 곁에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차범근은 감독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프로 근성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스스로 프로는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며 생활하였다. 그는 평상시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 모습 이외에도 '현대' 감독이 되지 마자 울산으로 내려와 '조기 축구회'에 가입하며 지역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이나, 홈에서는 전술과 베스트 멤버까지 달리하며 이기고자 했던 것들, 컴퓨터로 일일이 데이터를 관리하는 모습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위해 타협하거나 야합하지 않고 자신의 축구로서만 보여주려 했던 모습들을 통해 프로페셔널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인간 차범근을 상상하면 철저한 프로로서 행동하는 그를 모습을 제일 먼저 연상시킨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처음부터 일관되게 추구해오던 차범근의 철학들은 '종교인 차범근', '축구인 차범근', '인간 차범근' 위에 존재하는 '프로페셔널 차범근'의 모습이다. 그가 보여주었고 시도하고자 했던 프로페셔널한 축구의 자산들을 우리는 지금 엄청난 돈을 들여 사서 쓰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당시 일개 프로구단에서 일개 감독이 이루려고 했던 것들이 대표팀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 10년 전 차범근을 외면한 한국 축구 풍토와 여론… 그들이 버린 것은 차범근이 아닌 한국 축구 미래의 10년이었다는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별책부록
프로축구 현대 감독 차범근 전적
(정규리그 130전 53승 35무 42패, 아디다스컵 21전 9승 3무 9패)
’91 정규리그 (승점 : 승 2 무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무 패 득점 실점 차
1 대우 40 51 17 18 5 49 32 17
2 현대 40 42 13 16 11 36 34 2
3 포철 40 39 12 15 13 46 47 -1
4 유공 40 37 10 17 13 38 40 -2
5 일화 40 37 13 11 16 56 62 -8
6 LG 40 33 9 15 16 44 53 -9
’92 정규리그 (승점 : 승 2 무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무 패 득점 실점 차
1 포철 30 35 13 9 8 32 28 4
2 일화 30 34 10 14 6 27 21 6
3 현대 30 32 13 6 11 38 31 7
4 LG 30 29 8 13 9 30 35 -5
5 대우 30 28 7 14 9 26 33 -7
6 유공 30 22 7 8 15 33 38 -5
’92 아디다스컵 (T : 승부차기, 승점 : 승 3 T승 1.5 T패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T승 T패 패 득점 실점 차
1 일화 10 16.0 3 4 1 2 11 10 1
2 LG 10 15.5 4 1 2 3 15 11 4
3 포철 10 15.0 3 2 3 2 15 12 3
4 유공 10 15.0 4 2 0 4 12 14 -2
5 현대 10 11.5 3 1 1 5 10 13 -3
6 대우 10 11.5 2 1 4 3 7 10 -3
‘93년 정규리그 (승점 : 승 4 T승 2 T패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T승 T패 패 득점 실점 차
1 일화 30 68 13 5 6 6 35 23 12
2 LG 30 59 10 8 3 9 28 29 -1
3 현대 30 56 10 6 4 10 22 22 0
4 포철 30 52 8 6 8 8 34 29 5
5 유공 30 48 7 7 6 10 25 31 -6
6 대우 30 40 5 5 10 10 22 32 -10
’93 아디다스컵 (승점 : 승 2 T승 2 T패 0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T승 T패 패 득점 실점 차
1 포철 5 8 4 0 0 1 9 4 5
2 현대 5 8 4 0 0 1 8 5 3
3 대우 5 6 3 0 0 2 6 3 3
4 LG 5 4 1 1 0 3 5 6 -1
5 일화 5 4 1 1 0 3 4 10 -6
6 유공 5 0 0 0 2 3 1 5 -4
’94 정규리그 (승점 : 승 3 무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무 패 득점 실점 차
1 일화 30 54 15 9 6 42 30 12
2 유공 30 51 14 9 7 47 31 16
3 포철 30 50 13 11 6 49 37 12
4 현대 30 46 11 13 6 38 30 8
5 LG 30 43 12 7 11 53 50 3
6 대우 30 27 7 6 17 37 56 -19
7 전북 30 14 3 5 22 30 62 -32
’94 아디다스컵 (승점 : 승 3 무 1 패 0)
순위 팀명 경기수 승점 승 무 패 득점 실점 차
1 유공 6 11 3 2 1 11 7 4
2 LG 6 11 3 2 1 7 5 2
3 대우 6 9 2 3 1 8 5 3
4 일화 6 8 2 2 2 4 3 1
5 현대 6 6 1 3 2 7 8 -1
6 전북 6 6 2 0 4 7 15 -8
7 포철 6 5 1 2 3 7 8 -1
첫댓글 귀한 후추 명예의 전당 글이라니...감사합니다(수원일반팬님, 혹시 다른 글도 갖고 계시나요?)
김호-차범근- 고재욱 - 김정남 감독 순이죠. 수원도 곧 고재욱감독님이 부임할지도 모르겠네요.. 이 라인따라간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