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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에 성불의 길 있으니
다른데서 찾으려 마세요
월운스님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소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온통 편리하고 즐겁게,
등따시게 사는 것들이예요.
생각이 나 위주로 국한되면 아상에 빠집니다.
아상이 생겨 내가 세워놓은 기준에 못맞추면
마음이 아프고 괴롭게 되지요.
이를 이기는 방법은
어려움을 참고 고행함으로써 업장소멸을 하는 것이예요.
고행을 하는데 있어서도 사견고행(邪見苦行)은 안되고
내가 힘들다고 고행이라 생각해도 안됩니다.
선인선과(善因善果)의 법칙을 믿는 고행은 정견 고행이요,
선인선과의 법칙을 믿지 않으면 사견고행입니다.
나를 아름답고 빛나고 돋보이게 하는 것이 바로 정견고행이지요.
남이 공들인 것을 슬쩍 꿀꺽해 버리고
콩을 심어놓고 팥이 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사견입니다.
부처님은 선업에는 선과가 오고
악업에는 악과가 온다는 인과법문을 하셨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이웃집에 정직한 형이 살고 있었어요.
하루는 그 형의 모친이 밤 한 되를 삶아 주고는
너는 먹지 말고 동생에게 다 먹이라는 말을 하고 출타를 하셨어요.
모친이 돌아와 보니 형은 하나도 안 먹고
동생에게 삶은 밤을 억지로 먹이더랍니다.
이렇듯 정직하고 착한 것이 마음에만 머물러 있으면
오히려 악한 것보다 못할 때도 있습니다.
선을 닦아라 악을 멀리 하라는 말이 시일이 지나면
형식적으로 흐르고,
얼만큼 선을 닦았는지 얼만큼 악을 멀리했는지 집착이 생겨요.
이 집착을 없애기 위해서 반야가 필요한 것입니다.
불자님들도 부처님이 설법하신 인과법문을 통해
자신의 집착과 사견을 털어버리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지혜와 자비의 마음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귀중한 것으로
이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항상 침착하고 조용해야만 해요.
진정한 자기에 눈을 뜨게 되면
타인의 괴로움이 곧 자신의 괴로움으로 느껴지고
타인의 기쁨이 곧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 들여지는 것이예요.
이 지혜와 자비를 완전하게 갖춘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극단을 경계하고
어느 한 쪽에도 빠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양극인가를 제대로 알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실천 기준이 있지 않으면
자칫 관념의 함정에 빠져 헛된 삶을 살기 십상이예요.
이것이 가장 무서운 중도의 함정입니다.
인간이 있는 곳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고
어려움에 부딪치면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기 마련이지요.
인간이 자신의 처지에서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
어려움없는 삶을 영위하려 노력한 결과 오늘의 문물이 탄생한 것입니다.
숱한 어려움의 난관을 종교에 의지해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려는
노력이 필요했던 거지요.
나는 가끔 불법을 배우고 이를 믿고 체험해 가는 가운데
형용키 어려운 감사함을 느낍니다.
그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기쁨이며 영원한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불교에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을 법 속에 파묻어 버리므로
어려운 교리나 개념은 잊어도 문제시되지 않아요.
이런 것을 문제시하는 것은 불법 따라 사는 것을
잊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지요.
진심으로 법에 살고 있으면 전혀 문제될 바가 아닙니다.
내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열일곱살 되던 해였습니다.
해방은 됐지만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지요.
내 속가집은 유달리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부모님에게 ''
이렇게 희망없이 사느니 나가겠다고 선언을 했지요.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는데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업은 채 집 떠나는 나를 따라 오셨어요.
그 무렵 밤마다 똑같은 꿈을 꿨습니다.
산자락에 도랑이 흐르고,
돌다리를 건너면 집이 보이고 아련한 냄새가 나는데
누군가가 나를 오라고 손짓하는 그런 꿈이였어요.
똑같은 꿈을 하도 여러번 꿔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해요.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 고향인 장단(판문점 근처)에서부터
떠돌다가 도착한 곳이 바로 남해 화방사였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이 바로 늘 보던 곳이었으니까요.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고,
꿈에 느껴지던 그 냄새도 똑같았습니다.
그 냄새는 잡목을 태우는 냄새였어요.
화방사에 있으니 그리 편할 수가 없었어요.
그곳에서 불경을 접했지요.
그때까지 불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불경을 보니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특히 <금강경 오가해·金剛經 五家解>가 머리 속에 쏙 박혔습니다.
일곱 살 때부터 한학자인 재당숙에게 10여년 동안 한문책을 두루 익힌 덕에
그 어려운 한문 경전들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지요.
한문 경전을 줄줄 읽는 나를 눈여겨본 스님들이 당신들의 양식을
내 몫으로 주시면서 화방사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셨어요.
그 곳 스님들이 출가를 권했지만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출가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화방사에서 장작 패고 지붕 수리하고 담장 고치고
공양 준비하는 일 등을 하면서 틈틈이 불경을 읽었습니다.
누가 시켜서라기보다는 일할 것이 눈에 띄면
배운다는 생각으로 찾아서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때가 바로 행자생활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화방사에 자리잡은 것을 보고 어머니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셨고 서너 해동안 화방사에 머물렀지요.
그 무렵 화방사에는 열분 남짓한 대처승들이 머물며
조석 예불을 드리는 외에는
공부하고 수행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일하는 틈틈이
'''' 경전을 읽으며 신심을 키우고 있었지요.
그렇게 서너 해를 보낸 후 육지에서 온 스님들이
내 한문 실력이 좋다고 양주 봉선사 운허스님(1892∼1980)이
계신 곳으로 가서 그 분을 은사로 모시고 출가를 하라고 권해줬습니다.
화방사 스님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며
우선 삭발을 하고 운허스님을 뵙고 은사로 모시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은사스님 얼굴도 모르는채 출가를 했습니다.
그 때가 스무살이었는데
운허스님을 찾아뵈려는 터에 덜컥 전쟁이 나 버렸어요.
피난다니다가 운허스님을 뵈었어요.
스님이 동래 범어사에 계시다는 얘기를 듣고 부랴부랴 찾아갔지요.
다른 스님들로부터 내 이야기를 들으셨던지 운허스님께서는
별 말씀없이 나를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당시 범어사에서 운허스님이 하셨던 <능엄경> 강의는
지금도 명강의로 유명해요.
교학과 수행에서 단연 일인자였던 운허스님은
강의 도중 ‘<능엄경>을 설하게 된 동기를 쓰라’는
과제를 주셨고 나는 한문으로 답을 써 냈지요.
다음날 저녁 스님은 나에게 참선하는 사람은 많으니
경학을 붙들고 익히도록 분부를 내리셨어요.
경학이 불교를 일으킬 것이라구요.
운허스님은 동 서양 학문에 두루 조예가 깊은 석학이셨어요.
칠판 앞에서 경전을 강의하실 때는 참으로 자상하게 말씀해 주시더니
나에게 찬주(纂註)를 보라 하시고는 이렇다 할 설명을 해주시지 않으셨어요.
죽으나 사나 혼자 하루종일 끙끙 대다 다음날 제출하면
보시고는고개를 좌우로 저으시기만 했어요.
하루는 너무 답답해서 경전을 번역,
현대적으로 개편해서 가르치고 배우면 어떨까 하고 여쭈었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종교,
특히 부처님 말씀에는 현대도 구대도 있을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경업을 그만두겠다고 말씀 드렸더니
스님께서는 “옛 어른들도 보고는 또 잊고,
잊고는 또 보고 그렇게 성취하였다”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요.
오늘날까지 내가 운허스님이 머물던 봉선사에서
한 평생 경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스님에게 어렵게 수학했던 탓도 있겠지만
수억겁에 걸친 인연 때문일 겁니다.
출가한 지 얼마되지 않아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한참을 방황하다가 고성 문수암의 청담스님이
실천도인이라는 말을 듣고 지도를 받기위해 찾아갔지요.
그곳에서 얼마간 생활을 했는데 하루는 청담스님께서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도고마상(道高魔尙)이 생기는 법이야” 하시더군요.
그 뜻은 도를 닦지 않는 이에겐
마가 생기거나 극성을 부리는 법이 없으니
마 생김을 오히려 반갑게 받아들이라는 뜻이었어요.
방황과 번민은 수행자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관문이라는 것이지요.
정작 문제는 나태와 안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역경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너무 자질구레하게 지적해주고 설명해 주는 것은
오히려 공부를 해치는 것입니다.
운허스님의 수업방식이 그러했고 나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역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중국의 역경 일인자인 구마라습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구마라습(343∼413)은 서역 출신으로
어머니가 출가하자 5세 때 자신도 따라서 출가한 사람입니다.
서역은 요즘 같으면 이란 이라크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지요.
중국 전진왕 부견은 서역으로 사람을 보내 구마라습을 빼앗아왔어요.
그런데 중국에 와보니 전진이 이미 망하고 없어
구마라습은 국양이라는 나라에임시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다시 후진에서 구마라습을 데려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자 결국 후진에서 머물며 활발한 역경사업을 벌였지요.
역경은 부처님과 만나는 지름길입니다.
그러기에 역경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인재 쟁탈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불경 속에 성불하는 길이 있어요.
길을 이탈해 무엇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경을 통해 부처님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자신의 업을 소멸하는 길은
경을 읽고 부처님이 가르치신대로 실천하는 것이
모래 한 줌이라도 보탤 수 있는 길이예요.
나는 93년도 12월에 동국대 역경원장에 임명됐어요.
한글대장경 간행계획에 의하면 전부 250책을 만들기로 했는데
그때까지 180책이 나와 있었어요.
그해 대통령에게 30억원 보조해주면 5년동안 해마다
14책씩 70책을 끝마치겠다고 했더니 좋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취임하더니 맘이 바뀌어서 연 3억원씩만 준다고 해서
받아가지고서는 나보고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책을 만들려고 보니까 은사스님이 원장 때
고려대장경 아닌 것을 많이 번역했더라구요.
3천6백매로 책 한 권을 만들던 것을 3천2백매로
한 권을 만들었던 탓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180책 나온 것이 실제로는 145책 정도 분량밖에 안되는 거예요.
출간해야 될 분량이 배로 늘었으니 재정지원을 더 해 줘라 못하겠다
실갱이를 벌였지요.
1년에 30책을 만들어야 5년동안 150책을 채울 수 있어요.
돈도 인원도 모자랐지요.
1년 예산이 11억원 가량 소요되는데 정부는 3억원밖에 안주고
책을 만들어 팔아봐야 4∼5억원밖에 안들어왔어요.
그렇게 어려운 때 역경후원회가 만들어져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열심히 마무리를 해 여법하게 회향해야지요.
역경후원은 바로 법공양입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중에 법공양이 으뜸이예요.
법당 건립 불사에 동참하는 것만이 공덕을 쌓는 것은 아닙니다.
역경사업은 당대뿐 아니라 우리 후손들이 경전을 한글로
쉽게 읽을 수 있는 터전을 닦는데 일익을 담당하는 큰 불사입니다.
불자들 중에 어떤 경전을 봐야 좋으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불경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거나 읽어보고 마음이 끌리는 경으로 선택해도 무방합니다.
경전을 선택했으면 열심히 공부해야 해요.
뜻도 모르고 읽기만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읽는다면 훨씬 좋겠지요.
요즘 방송 출연을 하니까 전화가 많이 와요.
한결같이 좋았다는 말들만 늘어놓지요.
뭐가 그리 좋았냐고 알맹이를 물어보면
스님을 TV로 보아서 좋고
법문 들어서 좋다는 그런 얘기예요.
그런데 정작 법문내용이 무엇인지,
틀린 것이 있는지 지적하는 불자들은 아무도 없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예요.
법문을 하면 그 내용을 듣고 체화를 시켜야 합니다.
소리만 들으면 뭐합니까.
아니 소리도 제대로 못듣고 스님 얼굴만 쳐다보면 성불할 수 있답디까.
진정한 부처님 말씀을 이 시대 수행자를 통해
다시 듣는다는 자세로 한마디도 놓치지 말고
듣고 경전공부도 병행해서 하세요.
성불하는 수행법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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