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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14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사도 6,1-7
복 음 : 요한 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삶의 중심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예전 요셉수도원의 본원이었던 왜관수도원이 규모나 수도회원수로 말하면
‘큰 바다’같다면 요셉수도원은 ‘작은호수’같습니다.
왜관수도원의 수도사제들의 소임지를 봐도 참 다양합니다.
산티야고 순례길 수도원에 파견되어 일하고 있는 분이 있는가 하면
쿠바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련장으로 파견되어 일하고 있는 분도 있고,
본원 병실에서 소임하고 있는 분도 있고, 어느 분원에서 암투병중인 분도 있고,
최근 카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름을 떨치는 분도 있습니다.
결코 비교하여 우열優劣이나 호오好惡를 말할 수 없는 참 다양한 각자 고유의 제자리임을 깨닫습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했습니다.
고유의 각자 제자리에서 ‘삶의 중심’을 잡고 평상심平常心, 평정심平靜心을 지니고
‘한결같이’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감이 참으로 구원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심, 큰 단풍나무 아래 큰 바위 판에 자리 잡고 있는 예수님 부활상이
늘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환대하고 있습니다.
큰 바위 판에 새겨진 예수님 말씀도 많은 위로가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수도원 십자로의 주님 부활상은 바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상징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 어디에나 현존하십니다. 오늘 복음이 상징하는바 참 의미심장합니다.
한밤중, 호수 한복판에서 큰 바람에 높게 일어나는 물결에
삶의 중심을 잊어버리고 혼란해 하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 말씀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I AM’는 바로 하느님 이름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 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 I AM for you’로 정의되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인지요.
두려워서 사람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원초적 정서입니다.
이런저런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서에 참 많이 나오는 주님의 말씀중 하나가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 뒤에는 어김없이 ‘내가 너와 함께 있다’라는 말마디가 나옵니다.
빛이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할 때 사라지는 어둠의 두려움입니다.
주님 사랑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배안에 있던 제자들은 주님의 이 말씀에 주님은 삶의 중심이심을 새롭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어디서나 삶의 중심에 계신 주님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요한6,21)
이 또한 기적입니다. 지나고 나면 순식간처럼 느껴지며
뒤늦게 깨닫는 주님이 함께 하셨던 추억과 비슷한 체험의 묘사입니다.
우리는 몰랐지만 뒤늦게야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은혜로이 깨닫게 되는 우리 삶의 성경책입니다.
하여 지난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감사’요 ‘모두가 은총’이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개인 삶의 성경책을 자주 렉시오 디비나 할 것을 권합니다.
오늘 사도행전 제자공동체의 식량배급문제로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히브리계 유다인들 간의
내적분열의 모습이 큰 바람 높이 이는 호수 물결 속의 배처럼 위태해 보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제자공동체 배가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모두가 세상 바다를 항해하는 인생항해여정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바다 풍랑에 난파되거나 조난당하는 공동체란 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요셉수도공동체란 배가 만 31년 인생항해 중 우여곡절,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렇게 건재할 수 있음은 공동체 삶의 중심에 계신 주님의 은총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제자공동체한 배가 내적분열로 위기에 처했을 때
사도들이 기민하게 분별의 지혜를 발휘함이 놀랍습니다.
이 또한 삶의 중심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사도들의 분별의 지혜로 주님을 중심으로 균형과 질서를 회복한 사도행전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다시 힘차게 일치단결하여 인생항해여정에 오른 사도행전 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6,7).
인생항해여정중인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이 진짜 선장船長이십니다.
이런 삶의 중심이신 주님이 없다면 그 인생항해여정은 얼마나 두렵고 위태롭겠는지요.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심을 믿고 순종할 때 성공적 인생항해여정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말씀하시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인생항해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시편33,18).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제가 있는 갑곶성지로 저의 강의를 들으러 오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적게는 1시간, 많게는 2시간 30분 이상의 강의를 들으러
자신의 집에서 멀다고 할 수 있는 강화의 갑곶성지까지 오십니다.
한 번은 이분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 강화에 살고 있습니다. 강화하면 무엇이 유명합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진달래 축제, 화문석, 인삼, 장어, 복어, 벤뎅이, 숭어.... 그러면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제가 지금 강화에 살고 있습니다. 강화하면 무엇이 유명합니까?”
그러면 눈치 빠른 분들이 답변합니다. 뭐라고 답변할까요?
맞습니다. “빠다킹 신부여.” 그리고 저는
“제 강의를 들으러 이 강화까지 왔으니 당연히 저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것을 찾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씀을 드리지요.
사실 이 강의의 도입은 제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어느 유명 강사가 사용하던 방법을 제가 살짝 바꿔서 사용해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전체가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삶의 목표를 분명히 알고 살아야 그 안에서 집중을 하면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엉뚱한 곳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저의 강의를 듣고서 삶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강의에 집중할 수 있지,
만약 강의 후에 사람들과 함께 먹을 장어만 떠올리고 있다면,
강화의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볼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
강의를 통해 가졌던 원래의 목표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가정 안에서, 사회 안에서, 신앙 안에서 그리고 삶 전체 안에서 얻고자 했던
내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목표를 분명히 알고 집중할 때 분명히 의미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뀐다고 말이지요.
지금을 바라보는 내 생각을 바꾸어야 할 때입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는
제자들은 귀신이라고 생각했기에 깜짝 놀라면서 두려워하지요.
주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면 진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두려움과 불안의 굴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힘주어 말씀해주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제자들이 주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했을 뿐인데,
그 배가 어느새 가려던 목적지에 닿았다고 복음은 전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내 안에 모시려고 노력해보십시오.
분명히 내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가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기회
반영억 라파엘 신부
나를 지켜줄 후원자가 있다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지 않고 남모르게 후원하는 이도 있습니다.
후원 받는 이들은 누가 후원을 하였든 든든한 그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쁨을 간직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마음껏 노력을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늘 지켜주고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신나는 일이고 힘이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후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이유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큰 바람이 일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졌을 때 호수 위를 걸어 배에 있는 제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6,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요한6,21)
여기서 어둠은 세상의 빛(요한8,12)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체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배가 원하던 곳에 닿았다는 것은 자연의 힘, 파괴하는 힘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의 행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모든 방해물과 모든 거리를 넘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의 위력, 그 어떤 혼돈의 소용돌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십니다.
바람에 휘둘리고, 물결에 흔들리는 것은 바로 우리이고,
그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우리입니다.
이 상황은 우리 인생항로에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기치 않은 바람과 물결은 뜻하지 않은 위기 상황입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이 어디 계시냐고 투덜댑니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 앞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물결도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문제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좋은 것입니다.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갈망한다면 우리는 평정을 되찾을 것이며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려고 해도 걸림돌이 많습니다.
내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려고 해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당장 희생하고 베푸는 것이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하느님을 몰랐더라면 더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욕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포기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반드시 주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저마다 좋은 일을 하면 주님께 상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에페6,8).
사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밑지고 손해보고 불이익을 당할지라도 하느님을 선택하십시오.
희생은 주님 사랑의 표징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에 추호의 의심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부활시기에 내내 <사도행전>과 <요한복음>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곧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시는 장면입니다.
5천명을 먹이신 기적 후에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낌새를 알아채시고 이를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호숫가로 “내려”가서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공관복음>(마태 14,22; 마르 6,45)에서는
예수님께서 마치 제자들을 군중들과 떼어놓기라도 하듯 재촉하여 제자들을 가파르나움으로 보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스스로 떠나가는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치 군중들과 같은 생각을 하였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시자
반발이라도 하듯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만나를 먹고도 고기가 먹고 싶다고 에집트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히브리인들처럼,
좌절하고 엠마오로 돌아가는 제자들처럼, 자기 고장으로 되돌아가듯 말입니다.
그러나 떠나온 호수에는 어둠이 짙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납습니다.
배는 이미 뭍에서 10여리쯤 떨어졌고 호수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큰 바람이 불러 물결이 높이 일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절망과 죽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어서 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시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바다는 밟혀졌기에,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 새 땅”(21,1)에서 ‘새 바다’는 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당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요한 6,20)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탈출기>(3,14)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계시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구원하는 하느님이다”라고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때에야, 제자들은 눈이 열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지만,
배는 “어느새”(6,21) 이미 그들의 목적지에 가 닿았습니다.
곧 배가 뭍에 가까이 왔기 때문에 가 닿은 것이 아니라,
호수 한복판에서 풍랑에 시달리던 배가 제자들이 믿음으로 받아들이자
“어느새” 목적지인 가파르나움에 도착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공관복음>(마태 14,32; 마르 6,51)에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배에 타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믿고 받아들이자 “어느새”(즉시, 갑자기) 목적지에 가 닿음으로써
‘신적 권능’을 드러내며,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짧은 장면 안에서 세 번에 걸쳐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물 위를 걸으심이요, “나다”라고 스스로 밝히심이요, 풍랑 속의 배를 “즉시” 뭍에 이르게 함입니다.
이처럼, 앞 장면인 <5천명을 먹이신 이야기>가 출애굽의 만나의 기적을 떠올리게 한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5천명을 먹인 이야기>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준다면,
<풍랑이 이는 호수를 건넌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줍니다.
곧 “믿음”으로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은 풍랑과 어둠의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이 ‘건너감’, ‘지나감’이라는 파스카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풍랑과 좌절 속에서도 언제나 돛대를 높이 세워,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흔들리지 않고는 나아갈 수도 없음을 알기에, 아니 흔들릴 때 오히려 앞으로 나아감을 알기에,
주님께 믿음으로 의탁하며 성령의 바람을 타고 나아가야 할 일입니다.
고통과 좌절에서도 언제나 “믿음”과 “기쁨”을 간직하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시
풍랑의 시간을 지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풍랑을
다스리시는 분
또한
우리의 주님이심을
믿게 됩니다.
제 마음에서
일어나는
아프고 두려운
풍랑입니다.
풍랑도
은총입니다.
풍랑도
감사입니다.
풍랑 속에서
점점 깊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풍랑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비워야 할 것을
비우게 됩니다.
예수님을
진정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앞으로 한걸음도
나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풍랑이 있기에
화창하고 고요한 날씨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알게 됩니다.
풍랑을 치유하듯
우리 마음을 치유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장 좋으신
예수님을
풍랑 속에서도
만나는
은총 가득한
부활시기 되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전삼용 요셉 신부
‘강연 100도씨’에서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건축 대학원에 재학 중인
이주호씨의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남과 다른 오른 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른 손의 손가락이 없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 때도 항상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추고 찍었고
길을 걸을 때도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자신이 좋아하던 여자 앞에서 오른손을 보였을 때
그녀가 놀라는 것을 보고는 더욱 큰 상처와 열등감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청년이 되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악수를 해야 할 때는 더욱 자신의 손을 내미는 것이 창피했고,
그러다보니 점점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싫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성당에 갔을 때 새 보좌신부님이 오셔서 악수를 청하더랍니다.
머뭇머뭇 거리며 오른 손을 내밀었더니 신부님이 자기에게 호통을 치며 혼을 내었다고 합니다.
뭐가 부끄러워서 손을 자신 있게 내밀지 못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신부님에게 야단맞은 것이 자신에게는 더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의 불완전한 손에 대해 부끄러워했음에도
아무도 그런 모습에 대해 야단을 쳐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장애인으로 보았지만 신부님은 그를 정상인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당당해 질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고나니
‘두려움은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구인 손에 대해 자신만 부끄럽게 느낄 뿐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받아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 혼자 열등감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자신 안의 괴물이고
그것이 실제가 아니고 허상임을 알게 된다면 어떤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풍랑 속으로 예수님이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줄 알고 두려워 떱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두려움을 버리고 예수님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하자
배는 이미 목적지에 닿아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는 분이지만 항상 두려움과 함께 오십니다.
그 두려움을 거부하지 말고 내 안으로 받아들이려 할 때 평화는 이미 내 안에 와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깨는 것이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 안으려고 할 때
평화가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물고기 잡고 있던 시절 처음으로 예수님이 오른 쪽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해서
많은 물고기가 잡혔을 때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떠나가 주실 것을 청하였습니다.
두려움을 대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받아들이려고 하니 풍랑은 잦아들고 평화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은 사실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이고
그 허상 뒤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분의 평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두려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 두려움도 이길 수 없고
예수님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두려움 ‘너머’에 평화가 있습니다.
저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지금도 완전히 극복된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두렵습니다.
여자를 만날 때는 헤어질 것 때문에 두려웠고, 학생일 때에는 선생님이, 군인일 때는 선임 병이,
신학생 때는 신부님이, 신부가 되니 선배들이 무섭습니다.
아마 그런 두려움을 회피하려고만 했기 때문에 질질 끌려 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젠 깨닫습니다.
내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사람을 두렵게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내 안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보이고,
악이 있기 때문에 악이 보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나의 탓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서로에게 핑계를 대게 된 것은
이제 자신 안에 죄가 들어와서 상대의 잘못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로 남이 나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탓일까요?
내가 잘못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것 또한 상대의 문제입니다.
상대 안에 미움으로 가득 찼다면 내가 아무리 잘 해 주려 해도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행동의 변화로 상대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 저를 좋아하도록 모든 수단을 다 써봤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놓으니 상대가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걱정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상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상대를 나쁘게 보지 않도록 나를 정화하는 것뿐입니다.
정화해서 사랑으로 가득 채워 모든 이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뿐입니다.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하느님께서 해결 방법도 함께 주십니다.
그러나 외면하면 언제나 두려움 속에 살아야만 합니다.
하느님은 두려움을 통해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음을 깨달으라고 두려움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뒤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나를 가로막고 있는 산 위로 올라야 합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화는 항상 그 두려움 뒤에 있습니다.
두려움을 먼저 품지 않으면 평화는 뒤따라오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회피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또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두려움이란 것이
그저 나의 그림자나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고 그 뒤에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성체의 겉모습은 밀떡입니다.
마찬가지로 평화의 겉모습은 두려움입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 뒤에는 반드시 평화가 선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운데 두렵지 않다고 나를 속이지 맙시다.
먼저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인정합시다.
그래야 자유와 평화가 따라오게 됩니다.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멈춘 듯 아니 멈춘 듯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기적은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병자들을 고쳐주는 등
예수님의 공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시에
예수님께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마태 11,23)는 무거운 질책을 받기도 한 곳입니다.
말하자면,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를 두고 언제나 선택과 망설임이 공존하던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카파르나움’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오늘 카파르나움에서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동시에 두려운 마음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두려워했다고 해서 제자들이 탄 배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님에 주목합니다.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아”(21절) 있었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망설이거나 두려워해도 배는 조금씩 조금씩 그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함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함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은 자라나고 전진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멈춘 것 같고 흔들리는 것 같아도 우리는 ‘어느새’ 예수님께 가 닿아 있을 테니까요.
* ‘두려워 함’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생활성서 ‘소금항아리’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