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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회의 3
행 15:12-21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행 15:12-21 / 이 말을 듣자 더 이상 아무도 반론을 펴지 않았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베푸신 여러 이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13) 두 사람의 말이 끝나자 야고보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제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14) 조금 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방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는 자들을 불러 주셨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15) 이방 사람들이 돌아와 믿음의 한 식구가 된 이 사실은 예언자들의 예언과도 일치합니다. 예언자 아모스의 예언에 나오는 이 구절을 들어 보십시오. 16) ㄱ) `그 뒤에 내가 다시 돌아와 무너진 다윗의 도성을 다시 세우겠다. 내가 폐허가 된 그곳을 보수하고 다시 세우겠다. (ㄱ. 70인역 암9:11-12) 17) 그래서 남은 백성이 다 주를 찾으며 내게 복종하는 이방인들까지도 다 주를 찾을 것이다. 18) 오래전부터 이것을 알려 주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9) 그러므로 내 의견으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방 사람들에게 우리 유대인의 율법에 복종해야한다고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20) 다만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지 말고, 모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써서 보내는 것이 좋으리라고 봅니다. 21) 예전부터 대대로 모든 도시의 유대인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이런 것을 금하는 글을 읽어 왔으니 말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선교 보고를 한 뒤에 야고보의 연설이 이어집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구원의 은혜 안에 있음이 확증되고, 이방인 구원의 당위성이 확정됩니다. 예루살렘 회의는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바르게 정리하고, ‘이신득의’의 원리를 기독교의 기본 진리로 확립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초기 기독교회의 일치 과정이 반목과 혼란, 다툼을 거쳐 아름답게 마무리됩니다. 그 결과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이방 선교는 더욱 힘을 얻습니다. 기독교는 성령님의 인도 아래 유대교의 한 분파가 아니라 전 인류를 구원하는 보편종교로서의 기초를 든든하게 놓아갑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12) 성령충만하고 위엄 있는 베드로의 발언이 끝나자 모두가 침묵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베드로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침묵은 하나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외침이었습니다. 이 침묵은 율법에 매여 있는 어리석은 바리새파 기독교인들의 침묵이었고, 인간을 얽어매는 죄와 율법의 패배였습니다. 인간의 침묵 뒤에 이어진 바나바와 바울의 증언은 이방인 구원의 정당성과 구원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합니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13-18) 예수님의 형제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큰 지도자였던 야고보가 연설을 시작합니다(마 13:55). 베드로의 연설을 언급한(14;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야고보는 아모스서 9장 11-12절을 인용하여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교회가 선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다윗의 무너진 장막”으로 표현한 “새 이스라엘”을 일으키는 것인데 그 대상이 남은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은 모든 이방인들임을 선지자의 말씀으로 확증합니다.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19-21) 야고보는 유대인에게는 ‘이방인에게 할례 강요 금지’를 요구합니다. 이방인에게는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먹는 것 금지’를 요구합니다. 야고보는 이 5가지로써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을 내립니다. 복음 안에서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과 의식에 친숙하지 않던 이방인 신자들을 받아들이고, 이방인들은 먼저 성도가 된 유대인들이 불편해하는 것에 주의하여 신경을 써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법을 성취하라는 권면이었던 것입니다(고전 8-10). 예루살렘 회의는 하나님의 인도 아래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립니다.
적용 :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은 자주 충돌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충돌할 때, 하나님 앞에 잠잠하게 머무는 겸손이 당신에게 있습니까? 최고의 순종은 주님 앞에서의 침묵입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참으로 복입니다. 기도의 불을 붙인다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교회와 이웃을 살리는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축복이 자랑으로 가면 무기가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율법주의가 별것 아닙니다. 율법이 나쁜 것입니까? 율법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 차별을 두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염려하고 섬김으로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하는데, 기도하지 않은 사람을 정죄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저렇게 기도 안하니까 복을 못 받지. 저래가지고 무슨 집사라고’ 이런 식으로 정죄하게 되면 그것이 율법주의입니다.
호크마 주석
=====15: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 베드로의 변론을 듣는 청중들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본문은 7절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논쟁으로 시끄럽던 회의장이 베드로의 변론으로 침묵하게 되었다는 말로 베드로의 주장이 회의에서 받아들여졌음을 암시해 준다. 이로써 공의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공인하고 바리새파 출신을 중심한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배격하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 이미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접을 받고 이방 선교에 관한 보고를 한 바 있다. 여기서는 공식적 회의장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여 이방인들이 구원받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즉 바나바와 바울은 여기서도 4절에서 언급한 바처럼 자신들의 이방선교를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임을 증언하고 있다. 표적과 기사 -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언급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기적적인 사건이었는데 아마 14:3,8-10에서 나타난 기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방 선교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5:13
야고보가 대답하여 - 여기서 언급된 야고보는 주의 형제(마13:55)를 말하며 예루살렘 교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것 같다(12:17;21:18;갈2:9).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의회에서는 의장의 직분을 담당하여 회의를 이끌고 마무리짓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13-21). 따라서 야고보가 베드로의 연설에 곧이어 응답한 것은 의장으로서 베드로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회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5:14
하나님이 처음으로...처희를 권고하신 것 -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내용을 다시 상기시키며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을 선택하여 부르신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 강림 사건(8절 주석 참조)을 예로 들고 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베드로의 히브리식 옛 이름으로서 베드로가 야고보와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며 회의장에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베드로의 옛 이름을 알 정도로 서로를 잘 아는 유대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이방선교 문제를 거론하면서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의장인 야고보가 아랍어로 말하고 있음을 암시하거나(Haenchen) 아니면 그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유대인들뿐이었음을 암시한다.
=====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 야고보는 구약성경 중 선지서를 인용하여 그 예언이 베드로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여줌으로써 베드로의 주장을 회의 결론(結論)으로 확정지으려 한다.
=====15:16
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 마소라 히브리 본문(Masoretic Text)에서는 '그 날에 내가 다시 돌아와'로 읽혀진다. 그리고 70인역도 마소라 본문과 동일하게 읽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가 인용할 때는 한글 개역성경과 같이 변형되어 있다. 이처럼 야고보의 인용이 정확히 70인역(LXX)의 암9:11,12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야고보는 70인역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읽혀지던 히브로 본문이나 아람어 본문을 인용했을 것이다. 다윗의...일으키리니 - 본문은 아모스의 예언을 베드로의 연설과 접목시키면서 아모스가 예언한 '그 날'이 바로 지금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야고보는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는 아모스의 예언을 유대주의의 배타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메시야에 의해 재건된 세계관으로 전환됨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했다.
=====15:17
그 남은 사람들 - 마소라 본문(MT)에서는 '에돔의 남은 자'로 되어 있는데 70인역에서는 단순히 '남은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살아남은 자가 마소라 본문에 따르면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으나(Robertson) 70인역의 번역은 유대인들 중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야고보는 마소라 본문 보다는 70인역과 유사한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본문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본문을 인용하여 유대인을 언급하고자 했던 것 같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 - 이는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했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이방인들을 한정짓는 관계절인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공동번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구약 시대에서부터 열려있었음을 확언하는 말이 된다.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게 되는 목적이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여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기독교인됨이 구약의 예언 성취임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이방 선교의 정당성이 구약의 예언(豫言)을 통해 확증된 셈이다.
=====15:18
예로부터...주의 말씀이라 - 본문은 야고보의 자유로운 변형이거나 인용일 수 있다. '예로부터'라는 말이 아모스의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으나 야고보의 말에서는 첨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야고보는 사45:21의 어투를 따왔거나 아니면 야고보가 인용한 사본에 이 말이 첨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 구절은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구약 시대에도 계시되어 왔음을 밝혀준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구원사업을 계속적으로 펴왔음을 뜻한다.
=====15:19
그러므로 - 여기서 사용된 접속사 '디오'(* )는 결론이 자명한 것을 연결해 준다. 즉 야고보가 인용한 아모스의 예언대로라면 자신이 제안하는 다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내 의견 - 이 말의 헬라어 '에고 크리노'(* )는 '내가 판단하다' 또는 '내가 심판하다'의 의미로 야고보 자신이 단순히 의안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토론의 결론을 내리는 재판장으로서 최종 판결을 내리는 듯한 어감을 주고 있다. 이는 '내가'(* , 에고)란 표현이 강족적으로 사용된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본절에서 야고보의 의견을 채택하는 형식 절차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야고보의 의견을 최종적 결정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이로 보아 예루살렘 교회에서 야고보의 권위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괴롭게 말고 - 여기서 괴롭히고 있는 주체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며(1,5절) 그 내용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는 요구인데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의 상징이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우월감을 유대인들이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제시된 네가지 권면 조항은 세 개의 의식적 부분과 하나의 도덕적 구분으로 구분된다. 이로보아 예루살렘 총회에서 논의된 내용이 단순히 할례 문제만이 아니라 율법 전반(全般)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20
다만...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 - 이 어투는 강제적 명령이라기보다는 권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우상의 더러운 것 - 29절에서는 '우상의 제물'로 다시 언급된다. 이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의미한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논쟁은 이방 선교 과장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 중의 하나였다. 예루살렘 총회는 우상의 음식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으나 고전8:1-13;10:27,28;갈2:11-14에서 바울은 각자의 양심에 맡김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이 부분의 권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음식 섭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로 빗나가는 신앙을 경계하는데 있다. 음행 - 십계명에 언급되어 있는 이 규정이 예루살렘 총회의 권면 조항에도 나타나게 되었으므로 학자들에게 여러 가지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그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우상에 바친 음식을 먹음으로써 범하는 영적 음행(Beza, Selden). (2)우상의 신전에서 행하는 육체적 음행(Stolz, Heinrichs). (3)음행을 조장하고 매개하는 포주(抱主)의 죄(Salmasius). (4)축첩행위(J.Calvin). (5)근친혼(Lightfoot). (6)이도교와의 결혼(Teller, Bruce, J.W.Packer). (7)재혼(Schwegler). (8)돼지고기(Bentl- ey). (9)금지된 혈존간의 결혼(Haenchen).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음행(* , 포르네이아)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향한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네일 (W.Neil)이나 마샬(H.Marshall)의 견해처럼 율법의 음행 조항들로 볼 수도 없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범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음행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Alford,Meyer). 목매어 죽인 것과 피 - 이는 이미 구약에서 금지된 것이다(창9:4;레17:14;신12:16,23). 여기서 목매어 죽인 짐승은 피가 체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피채 먹지 말라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구약에서 피를 먹지 못하게 규정한 것은 피가 생명을 뜻하기 때문이다(레17:11).
=====15:21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읽음이니라 - 이는 이방인 지역마다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는 회당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유대인 교사들이 가르쳤다. 그렇게 때문에 유대인들의 율법이 이방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므로 이방인 개종자들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된 네 가지 조항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고보가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 권면 조항들이 지닌 의미에 대해 이방인 개종자들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회당 교사들에게 배우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 설 교 >
야고보의 증거
김영규 목사 / 행 15장 12~21절
회의의 진행
베드로의 발언이 있고 나서 바울과 바나바의 간증이 이어졌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12) 아마 베드로 사도가 증언한 내용, 즉 이방인들이 예수만 믿으면 얼마든지 구원 받고 성령 받고 정결해진다는 사실을 구브로와 소아시아 전도 현장에서 체험한 결과로 증거 했을 겁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발언을 듣는 청중들은 조용해졌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12) : “And all the multitude kept silent,” 적막할 정도로 조용해졌습니다. 이런 표현은 청중들이 할 말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청중들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조용해진 것은 그들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 믿으면 할례도 받고 모세의 법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증언은 정반대였습니다.
이어서 야고보가 등장합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아우 되신 야고보입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야고보란 이름 중에 뛰어난 두 인물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배대의 아들로써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목 베임을 당하여 12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행12:1) 둘째는 예수님의 아우이신 야고보입니다. 그는 본래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못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미친 사람 취급할 때에 그와 가족들 역시 염려스런 눈초리로 형님 예수를 붙들러 다녔습니다.(막3:21)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복음 전파에 앞장섰습니다. 신약 성경의 야고보서는 그가 기록한 서신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회의 당시에 그의 위치는 최고의 지도자 반열에 있었습니다.
야고보의 발언은 회의의 내용을 최종 결론짓는 중요한 발언입니다. 야고보의 발언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모두 발언 내용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복음이 이방인을 향하게 된 것은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것임을 밝힙니다. 셋째로, 복음을 믿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유대인과 이방인)의 생활 지침입니다.
야고보의 증거
그러면 구체적으로 야고보의 발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그는 베드로 발언을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그는 베드로라 하지 않고 시므온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모인 청중 대부분이 유대인인 점을 감안한 표현입니다. 즉, 이런 의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과 바나바나, 나 야고보는 다 당신들과 같은 유대인이다! 유대인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고 발언하고 있다!” 이방인을 위해 특별히 편파적일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베드로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고넬료 가족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정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여시는 하나님 역사의 시작이란 것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선지자의 예언을 특별히 인용합니다. 선지자들은 복음이 이방인을 향할 것을 이미 예언했습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15-17) 야고보는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을 구약 70인경에서 해석적으로 인용합니다. 아모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9:11-12) 야고보가 인용한 것과 아모스서의 내용 상 차이점은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합니다.
예언의 핵심은 다윗 왕국입니다. 즉, 멸망한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리라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고(ajnoikodomevw ,rebuild), 파괴된 것을 다시 지어(rebuild) 일으키리라.(ajnorqovw ,restore) 무너진 다윗의 집은 곧 다윗 왕국을 의미합니다. 다윗 왕국이 언제 세워지고 언제 무너졌습니까? 기억하기 좋게 대략 연대를 보면 이렇습니다. BC 1000년 경, 다윗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다윗 왕국이 시작되었습니다. 40년 후 BC 960년 경,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다시 40년 후 BC920년 경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왕국이 둘로 분열됨으로써 다윗 장막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북왕국 10지파가 떨어져나가 이스라엘 왕국이 되었습니다. 남왕국 2지파(유다, 베냐민)가 남아 유다 왕국이 되었습니다. BC 722년, 북왕국은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했습니다. BC 586년, 남왕국이 바빌론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이로써 다윗 왕국은 소멸되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1-16) 가장 중요한 약속은 다윗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다윗 왕국은 무너졌고 두 번 다시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 왕국은 과연 회복 될 것인가? 회복 된다면 언제 회복되고 어떻게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가?
바빌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로소 선지자들의 예언을 생각해 냈습니다. 선지자들이 한 예언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당했다가 다시 회복하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언의 내용들을 그들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장차 메시아가 올 것이다. 그 메시아는 유대인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에 유대인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종말적으로 유대인들은 세계 열방을 지배하고 이방인들은 유대 나라에 편입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기대하는 다윗 왕국은 세상 종말에 세워질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기대하는 구원관입니다.
유대인들의 구원관은 분명 잘 못 된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유대인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 나라 구성원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입니다. 육적 선민이 아니라 영적 선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에 세워지는 게 아니라 천상에 세워집니다. 지상 나라가 아니라 천상의 나라입니다. 영원한 다윗의 왕권은 곧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오시면 유대인만을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전 세계 만민을 구원하십니다. 세계 만민을 유대인에게 편입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도 세계 만민 중에 부름 받는 사람의 일원일 뿐입니다. 영원한 다윗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들은 참 메시아를 오히려 배척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안목이 현세와 물질세계, 육적 세계에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유대인과 뭐가 다른가요? 우리 역시 영적 세계보다는 육적 세계, 물질세계, 현실 세계에 매여 있지는 않은가요? 그래서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 나라가 피부에 와 닿지 않아서 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될 왕국은 세상 왕국이 아니라 그리스도 왕국 영적 왕국입니다. 오늘 어떤 집을 다시 세우려고 하십니까가? 육신의 집 무너진 것은 느껴지는데 영혼의 집이 무너진 것은 무감각 하지 않습니까? 아파트, 땅, 부동산 무너진 것, 돈 잃은 것은 슬퍼 죽겠는데, 영적 재산 날아간 것은 전혀 슬프지 않습니다. 세상 소유가 사라진 것은 눈에 보이는 데 영적 소유가 사라진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큰일입니다. 최근 중국 광동성 포산시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61세 된 여인을 중심으로 일가 13명이 검찰에 구속되거나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 모두가 소매치기에 종사했습니다. 현찰 수입이 좋으니까 집도 사고 꽤 괜찮은 생활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직업이 될 수 있습니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직업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춘도 세금만 내면 직업이고, 국가도 도박장을 지역 산업이라고 치켜세우고 있습니다. 로또 복권, 경마, 경정, 경륜, 온갖 사행성 오락을 산업이라고 내세우고 있습니다. 돈만 된다면 형제도 없고 부모 자식도 없는 파렴치한 일들이 매일매일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내게 무너진 집이 영적인 집인지 물질적인 집인지 살펴 보세요. 과연 물질적인 집만 다시 세우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지 심사숙고 하세요.
오늘 우리는 영적인 집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혼의 집을 먼저 재건(REBUILD)하세요. 영혼의 주인을 결정해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영생을 회복하세요. 주님을 따라 양심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가치관, 사상, 생각, 사고방식이 하나님 자녀답게 변해야 합니다. 배금의 가치관, 세상적 가치관, 현세 중심 가치관, 인간적 처세술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만 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영적인 것이 우선입니다.
영적인 집을 다시 세우지 않으면 멸망 그대로 영원히 몰락합니다. 현세가 끝나는 것과 함께 지옥으로 직행입니다. 두 번 다시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부자 청년은 돈 때문에 영생을 놓쳤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소산물이 늘어날 때에 창고만 늘렸습니다. 그는 그날 바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화려한 생활로 일관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잣집 대문에서 구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서 물 한 방울이 안타까워 애타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품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영혼의 집을 지은 사람과 육적 집에 매달린 사람의 차이입니다.
요즘 노후 문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심지어는 20대 30대 젊은이들까지 노후 대책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불행한 세대입니다. 저는 전후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참으로 행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교 가기 전에는 완전히 free lancer 였습니다. 어머니가 장사 나가시면 내 맘대로 가고 싶은 데 가고 놀고 싶은데서 놀았습니다. 바다든, 강이든, 산이든, 위험한 데, 온갖 모험 가득한 곳에 자유분방하게 다니면서 즐겼어요. 그래서 제가 톰 소여나, 허클베리 핀을 좋아합니다. 초등학교를 아홉 살에 들어갔지만 공부 때문에 머리 아픈 일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초등학교 시절의 이 행복을 과연 중학교에 가서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고등학교 역시 즐거웠습니다. 대학 시절도 마찬가지구요. 제 기억에 노후 문제를 앞당겨 걱정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렇게 풍족한 시대에 노후 걱정에 매달려 사는 게 얼마다 우스운 일입니까? 다 영적인 집이 세워지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영적인 집이 잘 세워져서 평안하십니까? 아니면 세상 재산, 돈, 건강 때문에 걱정이 태산입니까? 어디서 무슨 집이 무너졌는지 돌이켜 보시고 다시 지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육적 다윗 왕국이 아닌 영적 다윗 왕국, 그리스도 왕국에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야고보의 결론
이제 야고보의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야고보는 이 회의에서 의장 격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최종 결의문으로 정리하여 제안합니다. “내 의견에는”이란 말은 단순한 의견 제시가 아닙니다. “ejgw; krivnw”(에고 크리노)란 말로, “my sentence is”(KJV), “I judge”(NKJV), “my judgement”(NIV) 등으로 해석됩니다. 의장으로서, 일종의 재판장으로 제시하는 법정적 판결문 격입니다. 야고보의 제안에 따라 이의 없이 결의문이 채택되었습니다. 야고보의 제안은 크게 둘입니다.
1. 하나님께 돌이키는 이방인을 괴롭게 말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19) 예수 믿는 것으로써 구원 받는 조건에 충분합니다. 예수 믿는 것에 다른 것을 요구한다면 불필요한 짐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할례를 받으라, 음식을 가려 먹어라, 절기를 지켜라, 하는 따위는 이방인들이 하나님 자녀로 부름받는 일에 고통만 줄 뿐입니다. “괴롭게”(parenoclevw)란 말은 영문 성경에 TROUBLE(KJV, NASB), MAKE DIFFICULT(NIV)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누구든지, 과거의 어떤 신분, 행적, 능력을 불문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 한 가지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여기에 어떤 토를 단다면 불필요한 트러블일 뿐입니다.
2. 삶의 몇 가지 지침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행15:20-21) “to abstain from food polluted by idols, from sexual immorality, from the meat of strangled animals and from blood.”(NIV) 여기 언급 된 네 가지 내용은 반드시 지켜야 될 계명이 아니라 권고 사항입니다. “멀리하라”(ajpevcw, to abstain from)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항구적 명령이 아니라 과도적인 삶의 지침이란 뜻입니다. 여기에는 계명적인 것도 있고, 건덕 상의 문제도 있습니다. 우선 네 가지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❶ “우상의 더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주로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를 말합니다.(고전8:1-13, 10:23-33) “eating meat sacrificed to idols,”(NLT) 당시 그리스 로마 사회는 제우스를 비롯한 각종 우상 숭배가 극심했습니다. 사방에 신전이 있었고 신전마다 황소와 같은 동물의 제물들이 바쳐졌습니다. 사제들은 이런 제물들 중 상당부분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제물은 단순한 음식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고전8:8) 신앙 안에 굳건히 선 사람은 무엇을 먹든지 상관이 없습니다.(고전10: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 제물을 멀리하라고 한 것은 우상 숭배에서 돌이킨 初信者들 때문입니다. 이들은 우상 제물 먹는 것을 우상 숭배의 일부로 알았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우상 제물을 먹는다면 예수 믿으면서 우상도 섬기는 줄로 오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오해를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삼가라고 한 겁니다.
❷ 음행입니다. “sexual immorality”(NLT,NIV) “fornication”(KJV,NASB)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 중의 하나입니다. 여기서 이 계명을 특별히 언급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보편적으로 성이 문란했습니다. 남녀 간의 난잡한 성생활은 물론 동성애 같은 일도 다반사였습니다.(롬1:27) 성전에서는 종교를 빙자한 신전 매춘도 성행했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성문화에서 구별되어야 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은 성문화가 개방적입니다. 형법상의 간통죄도 사라지고 성인들의 성관계는 상관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예전 같으면 부끄러운 단어였던“SEXY”라는 말이 이제는 모든 매체에서 “매력” 정도로 사용됩니다. 그만큼 성이 상품화 되고 개방되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의 표준이 바뀐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간음은 간음이고 동성애는 동성애입니다. 하나님께 벌 받을 죄악입니다. 인간 법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법정에서 판결 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면 하나님의 명예를 크게 훼손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해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처음 탄생된 초대교회의 이미지는 세상과 다른 성결과 경건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굳이 교회원이 되어야 될 필요가 뭡니까? 성도들은 세상 사람을 향한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라고 했습니다. 좋은 이미지의 편지들이 되고 향기들이 되어야 합니다.(고후2:15, 3:3)
❸❹ 목매어 죽인 것과 피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금기시 하는 부정한 식품입니다. 목매어 죽인 짐승은 피를 빼내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피를 먹는 것과 똑같이 부정한 식품으로 분류됩니다. 유대인들은 음식을 먹는 것을 곧 제물을 먹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정한 음식을 먹어야 했고, 그것은 그들의 평생 과제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중에 상당수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조상 대대로 혐오스런 식품으로 여겨 오던 것을 당장에 먹으라고 한다면 가치나 계명 문제를 떠나서 모욕적인 일로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야고보가 이를 멀리하자고 한 것은 유대인과의 화합을 위한 제스처입니다.
이상 야고보가 말한 네 가지 삶의 지침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는 점입니다. 우상 제물 문제는 믿음이 약한 초신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음란 문제는 초신자는 물론 교회 밖의 사람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목매어 죽인 것과 피는 유대인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비록 그것이 계명이든지 아니든지 교회를 화합시키는 데 방해가 된다면 일시적으로나 항구적으로 금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 삶의 지침입니다. 여러분, 저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습니다. 술과 담배를 먹었다고 예수 믿는 사람이 지옥에 떨어질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윤교회 담임목사님이 담배를 피우신다면 성도들이 은혜를 받겠습니까? “와! 우리 목사님 담배를 다 피우시네. 참 멋지시네!” “와, 우리 목사님 소주 한 잔 잘 하시네. 감동 받았네!” 그렇습니까? 그것 때문에 성도들이 실족한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지겠습니까? 오늘날 개고기를 먹는 문제나 혐오 식품을 먹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화합을 깨뜨린다면 굳이 먹지는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은 불변하는 구원 진리입니다. 여기에 단 한 가지라도 더하거나 덜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족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유인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것 외에 어떤 율법이나 정죄에도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범사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으로 절제(SELF CONTROL)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 회의에서 내려진 결론입니다.
야고보에게 본 받을 점
박봉수 목사 / 행 15장 12~21절
서양 사람들은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 흔히 성경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해 왔습니다. 성경 인물을 닮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영어권의 예를 들어보면 이런 이름들입니다. ‘다윗’을 뜻하는 “데이빗”(David), 베드로를 뜻하는 “피터”(Peter), 바울을 뜻하는 “폴”(Paul), 요한을 뜻하는 “존”(John) 등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뜻하는지 알기 쉽지 않은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제임스(James)입니다. 이 이름은 성경 원어가 라틴어를 거치면서 변형됐습니다. 그 이름은 성경의 ‘야고보’를 뜻합니다.
이 “제임스”라는 이름은 영미권 사람이 아닌 우리에게도 익숙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James Bond), 전설적인 영화배우 “제임스 딘”(James Dean), 과학자 “제임스 와트”(James Watt)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도시 이름에도 흔히 성경 인물들의 이름을 사용해 왔습니다. 성경의 인물을 그 도시의 수호성자로 섬기려는 마음에서입니다.
역시 누구를 뜻하는지 쉽게 알지 못하면서도 많은 도시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산티아고”(Santiago)입니다. 대개 스페인 문화권의 나라에 이 이름의 도시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칠레의 수도가 이 “산티아고”이고, 쿠바에도 대도시 가운데 “산티아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리지널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있습니다. 이 이름이 영어권으로 넘어오면서 “샌디애고”(SanDiago)로 변형됐습니다. 이 도시는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있습니다.
이 이름은 “산토”(Santo)와 “이아고”(Iago)가 합해진 것입니다. “산토”는 성인을 뜻하는 말이고 “이아고”는 헬라어 “야고보”가 스페인어로 변형되면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도시가 야고보를 기리기 위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산티아고”라고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문화권에서 야고보는 대단히 추앙을 받고 존경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야고보는 어떤 인물로 등장하고 있을까요? 우선 야고보라는 이름은 신약적인 이름입니다. 즉 야고보라는 이름은 헬라어식 표기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이름이 야곱으로 나옵니다. 즉 야고보의 히브리어식 표기는 야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야고보라는 이름은 신구약 성경에 참 많이 나오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정말 흔한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님과 긴밀한 연관이 있었던 사람 중에 야고보가 세 명이나 나옵니다. 우선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두 사람이나 야고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사도 요한의 형이고 사도 중에 첫 번째 순교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흔히 “대야고보”라고 부릅니다. 다른 하나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성경에 특별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소야고보”라 부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예수님의 친 동생 야고보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야고보를 주목해 보면 우리 신앙에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변화
막 6: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야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 바로 밑의 동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야고보는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이 죽은 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며 가장노릇을 성실히 담당하는 형 예수님을 마음으로 의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형 예수님을 진심으로 존경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 예수님이 메시야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집을 떠나셨습니다. 사생애 30년을 마감하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야고보는 그런 형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저버렸습니다. 객지를 떠돌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갑자기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는 누가 모실 것이며 가족들은 누가 돌볼 것인가?’ 걱정이 됐습니다. 형 예수님에게 화도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설득해 보려고 찾아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깊은 배신감도 느끼게 됐을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찾아가 볼만도 한데 매정하게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 시신이라도 수습하고 돌아볼 만도 한데 외면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던 야고보가 변했습니다. 고전 15:5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 만남이 야고보를 변하게 했습니다.
행 1:1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승천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성령을 받게 됐습니다. 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성령 체험이 야고보를 예수님의 위대한 종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야고보는 약 1:1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 야고보는 자기가 이제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는 더 이상 예수님의 동생이 아니라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와 보면 저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기둥처럼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는 약 30년 뒤인 주후 62년경에 유대인들의 박해 속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변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혈연관계 속에서 형님으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음의 관계 속에서 주님으로 믿고 따르게 됐습니다. 주님으로 섬기며 충성을 다하게 됐습니다.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뒤에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께서 그 심령 속에 임재하시면서 그 변화는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 그 속사람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 미국 탈봇 신학교 학장인 마이클 윌킨스 박사가 쓴 [그분의 형상대로]라는 책에 솔직한 자기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나는 청소년 시절에 가게에서 도둑질을 하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내 눈에 보이는 것을 갖고 싶어서 훔쳤다. 열세 살 때, 한번은 사탕 한 봉지를 슬쩍하다가 붙잡혀서 경찰에 넘겨졌다. 나는 경찰관에게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뒤로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결과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망만 칠 수 있다면, 여전히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고 싶어했다. 좀 더 나이가 들자 나는 내가 쓴 비용들에 대한 보고서를 마음대로 위조 작성했다. 회사용품을 개인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나는 밖으로는 변해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오랜 기간 동안 여전히 도둑이었다. 참된 내적 변화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찾아왔다. 나는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중시하는 가치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소유를 존중하기 시작했다. 또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쓸 것을 공급해주실 것이며, 내가 원했던 것들이 결코 만족을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마음이 변화되자, 행동도 바꾸고 싶었다. 더 이상 누구의 것도 훔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외적인 품행은 내적인 확신과 나란히 가게 되었다. 참된 외적 변화는 내적인 변화와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매일 그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아름다운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의 기도
오늘 본문에 보면 최초의 기독교 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방교회의 대표인 바울과 바나바가 어머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이방인 전도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 의장 역할을 바로 야고보가 맡았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영적 지도자며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초대 교회를 이끌던 사람은 바로 야고보였습니다. 그래서 갈 2:9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해 보니까 야고보가 기둥처럼 든든하게 교회를 이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예수님의 12 제자도 아니었으면서 초대 교회에서 이렇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의 기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역사를 기록했던 유세비우스는 이 야고보를 “낙타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고보가 죽은 뒤 그 시신을 보니 무릎이 마치 낙타의 무릎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낙타 무릎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한 마디로 기도의 양을 말합니다. 낙타 무릎은 사람의 무릎과는 생김새가 다릅니다. 무릎 관절이 크게 튀어나왔습니다. 야고보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처럼 변했다는 것은 그 무릎이 변형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도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에 변형된 것입니다. 이 낙타 무릎의 기도가 야고보를 기둥처럼 여김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그의 남다른 기도가 큰 영향력을 미치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두 사람의 발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입니다. 발이 온통 굳은살 투성입니다. 추하고 기형적인 발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외모에 천사 같은 춤을 추는 사람의 발이 저렇게 생겼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녀가 왜 세계 최고의 프리마 발레리나인가를 저 발이 말해줍니다. 그녀가 어떻게 나이 40이 넘어서도 무대에서 최고의 발레를 보여줄 수 있었는지 저 발이 말해 줍니다. 얼마나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을까요?
또 하나는 박지성의 발입니다. 온통 상처투성입니다. 평발이라서 축구 선수로는 적합하지 않은 발입니다. 그러나 발이 저렇게 되기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했습니다. 그가 왜 하루에 천만원씩 버는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됐는지 저 발이 말해 줍니다. 그가 왜 사람들에게 그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저 발이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의 낙타 무릎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발레에 강수진처름 굳은 살 박인 발이 있고, 축구에 상처투성이인 박지성의 발이 있다면 기도에는 낙타 무릎과 같은 기도의 사람들의 무릎이 있습니다. 바로 이 기도의 무릎이 영적인 영향력을 키워줍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을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겉으로 볼 때 말 잘하는 사람이 영향력이 있어 보입니다. 또한 실력 있는 사람이 영향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업적을 낸 사람이 영향력이 있어 보입니다. 세상에서는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공동체에서는 다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기도의 무릎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 무릎은 어떻습니까? 난세일수록 기도의 무릎이 힘을 발휘합니다. 야고보처럼 더욱 기도에 힘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의 신앙
야고보는 어떻게 보면 두 얼굴을 가진 신앙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되도록 그토록 철저하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하게 믿음을 실천하려고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 두 모습을 하나로 통합해서 균형있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가 쓴 야고보서에서 철저하게 믿음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보기에 따라 바울과 다른 말씀이라고 오해 받을 정도로 믿음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야고보는 약 2:17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리고 약 2:22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의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는 진정한 믿음은 행함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행함 곧 믿음의 실천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생활한다고 하면서 믿음과 실천이 분리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겼는데 그 믿음대로 살지 않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 1:22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는 오랜 세월 가까이에서 지켜본 예수님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말씀과 삶이 하나이셨습니다. 늘 믿는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언제나 믿음과 실천이 하나인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그 예수의 제자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과 생활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믿음과 실천이 분리되어갑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자신이 먼저 형님으로 가까이에서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고자 힘썼습니다. 믿은 것은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믿음과 행함을 결코 분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신앙인이었던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세 가지 의문을 품고 살았답니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 자기 나름대로 답을 찾았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마주치고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오늘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실천하려고 힘을 쓰며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그 어떤 세계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대하는 구체적인 삶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오늘 여기에서 그대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 때 그 믿음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믿음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실천적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종인 야고보는 정말 철저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에 철저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믿음대로 살았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의 야고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로 오는 자를 괴롭게 말라
행 15장 12~21절 / 서금석목사
요즘 항상 뉴스시간마다 보도된 내용가운데 우리를 답답하게 한 것이 바로 "의료대란"이라고 일컬어지는 의사들의 파업문제였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의사도 있고 약사도 있고 하니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만 이쪽 얘기와 저쪽 얘기가 다르니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의약분업이 너무 빠르지 않느냐는 얘기도 들리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지금의 내 직업이 의사냐 약사냐는 접어두고 어떤 것이 국민건강을 위해 바람직하냐 하는 관점에서 결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권리와 의견이 존중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긴 하지만 자칫 지나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버릴 위험도 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미묘한 문제로 대립될때는 두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양측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중도적인 '안(案)'이 있어야 합니다. 정치건 신학이건 사회적인 문제건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언제나 있을 수있는데 문제가 생겼을 때 이쪽도- 그게 좋겠네 저쪽도- 그게 좋겠네 할 수 있는 중도적인 안이 있을 때 새로운 질서와 발전이 있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쪽도 저쪽도 다 신임할 수 있는 지도자, 아무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누구나 존경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에 복잡한 일이 많이 생길때일수록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흔히 원로라고 하지요.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런 저런 문제로 시끄러울 때 원로지도자가 나서서 한마디 하면 다 따라올 수 있는 지도자. 이런 지도자가 있으면 됩니다.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바로 이런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말씀이지만 초대교회는 박해보다도 더 힘들고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모세의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이제껏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왔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그대로 유지해야 하는지? 어떤 것은 바꾸고 어떤 것을 지켜내야 하는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을 잘못 분별하면 공연히 지켜도 좋은 문화가 한순간에 우상이 되어버리지요. 그래서 신학에서도 '토착화'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서양의 문화적 배경을 깔고있는 서양기독교 그대로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변하지 않더라도 우리 문화에 적합하게 토착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입는 가운같은 것도 처음보다 많이 모양이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든 유대적 배경을 가지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서 유대종교의 율법과 할례, 전통을 어디까지 지켜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쉽게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드디어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처음으로 회의를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베드로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율법이나 할례와 관계없이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성령께서 역사하셨음을 증거합니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 야고보가 문제해결의 방안을 제시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1. 야고보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입니다. 친동생입니다. 캐도릭은 야고보가 예수님의 친동생임을 부인합니다. 이유는, 마리아는 예수님 하나만 낳은 동정녀 였음을 주장하기위해서입니다. 캐도릭에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한 이유가 있지요. 그러나 많은 성서학자들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임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열두제자들도 예수님과 3년 밖에 같이 있지 않았지만 야고보는 30년을 같이 있었으니 예수님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깊이 알았기에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가 아니었으면서도 사도이상으로 존경 받는 사람이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는 철저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매사에 철저했습니다. 율법지키는 데에도 철저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의 율법지키는데에 철저했던 유대주의자들로부터도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뿐아니라 기도하는데에도 철저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의 무릎은 낙타무릎과 같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도를 오래해서 무릎에 굳은 살이 박혀서 마치 낙타무릎같았다는 말입니다. 매사에 철저하게 기도하며 주님 중심,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고 따라서 자신은 검소하게 살며 남을 구제하는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늘 기도하며 생활 속에 먹고 입는 것 별로 신경쓰지 않고 검소하게 살면서 남을 돕기를 즐겨하면서 사랑과 은혜 속에 살았던 지도자.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을 30년이나 지냈고 전설대로 순교한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야고보서를 쓴 사람도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로 알려져 있습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주장합니다. 믿음대로 실천하며 살았던 참된 지도자였습니다. 그렇니까 신뢰를 받게 되는 것 아닙니까?
13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라사대" 야고보는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의 사람이요, 사람을 인정할 줄 아는 아량이 넓은 지도자였습니다. 남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었습니다. 베드로의 얘기도 들어 주었고 바나바와 바울 얘기도 들어주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자기 얘기를 다 들어 주는 사람을 신뢰하게 됩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아랫사람 얘기를 끝까지 잘 듣지 않습니다. 남의 얘기를 듣는 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 않습니까?
이러한 야고보가 지녔던 지도자로서의 훌륭한 자격은 유대주의자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간에 발생한 구원문제에 대해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을 맺게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지도자는 평소에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공동체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타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야고보는 이 문제를 어떤 과정과 방법으로 해결했습니까?
2. 야고보의 해결 과정과 방법(제안)
(1) 먼저 문제를 가져온 바나바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죽도록 돌까지 맞으면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와 구원받게 했는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모여있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고했습니다. 중요하게 보아야 할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앉은뱅이도 고치셨습니다. 병자도 낫게 하셨습니다. 귀신도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행하셨습니다. 또 하나 "자기들로 말미암아" '말미암아'라는 영어로 through ∼을 통하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쓰셔서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다는 말씀입니다.
12절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모든 열방,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으로 택하신 유대인, 율법을 지키고 전통을 지켜왔던 유대인들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계모든 민족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모든 민족/이방인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하여 사람을 택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만 복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근원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아닙니까?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실 때 모세를 쓰셨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실때는 여호수아를 도구로 쓰셨고, 바알숭배자와싸울때는 엘리야를 도구로 쓰셨습니다.
여러분. 도구는 도구일뿐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영적교훈 -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면, 나를 쓰시면 나를 통해서도 엄청난 역사가 나타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영광은 누구에게? 하나님께 돌려야 함을 깊이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2) 야고보는 베드로의 경험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14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眷顧)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여기서 시므온이란 시몬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들 가운데 고넬료를 희생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음을 상기시킵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도 율법에 대하여도 전혀 아는바 없어 다만 경건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던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가 기도하다가 환상중에 하나님의 지시대로 만났습니다. 지시대로 베드로가 복음을 고넬료에게 전했고 성령께서 고넬료를 변화시키셨던 사실을 야고보는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의 백성은 희랍어로 '라오스(λαοσ)'인데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만 사용되었었는데 여기서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로 이제부터 '라오스'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포함하게 됩니다. '권고하다'는 희랍어로 '에피스케토마이(επισκετομαι) 로 '방문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직접 방문하셨다는 뜻이 권고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직접 방문하실 때 구원받는 변화가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방인을 구원하시려고 방문하셔서 변화시키셨는데 사람이 무슨 이의를 제기할 것이 있느냐?는 의미입니다.
(3)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을 통하여도 설명합니다.
"16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帳幕)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頹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야고보는 정통유대인으로 성경에 대해서도 해박한 성경학자였습니다. 16절은 15절에서 이야기하는 예언자들의 예언내용으로 아모스9:10-12의 70인역 성경의내용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성경은 히브리 성경 마소라 본문의 번역이고 70인역은 희랍어로 번역된 성경입니다) 무너진 다윗의 집을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시겠다는 것으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심으로 다윗혈통을 통하여 하나님 왕국이 이땅에 다시 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를 통해 퇴락한 것이 다시 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17절은 유대인가운데 남은 사람들이 주를 찾게 될 것이고 또한 이방인들 가운데라도 내 백성이라는 이름을 받은 사람은 - 주님을 찾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주님을 찾기만 하면 - 주님을 부르기만 하면 그들이 엄격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구원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피흘려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땀흘려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눈물흘려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예수가 주님이시라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받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의 예언을 통하여 이미 이방인도 구원받게 될 것이 예언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여기에서 일방적으로 유대인들의 주장을 물리치지는 않았습니다. 이방인가운데 성령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할례는 받지 아니할지라도 몇가지는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4) 야고보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한 몇가지
왜 지켜야 한다고했습니까? 21절을 봅니다.
"21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이방인들 가운데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읽은 내용을 통해 알터이니 그 정도는 지키라고 권면하여 유대주의자들의 입장을 고려합니다. 참으로절묘한 절충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이라도 지켜야 할 것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1.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을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우상이 제물을 먹습니까? 예수 믿기전 어릴 때 조상들에게 제사드릴 때 때로 밥에다, 평소 즐겨드시던 음식에도 수저를 놓고 잠간 밖으로 나갔다오지요? 왜? 좀 드시라구요. 후손의 정성과 사랑은 나무랄 것이 없지만은 나갔다와도 한 숫가락, 한젓가락 잡수신 것이 없어요. 누가 먹습니까? 가족들이 쌀밥 구경이 힘들던 때라 그래도 제삿날이 기다려지지 않았습니까? 제물은 사람이 먹게 되어있습니다.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물은 당시에는 제사드리는 자리에서 소비되기도 했고 시장에서 다른 고기와 함께 팔기도 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고기를, 제물을 먹지 않도록 요청했습니다. 먹으면 우상제사에 동참했다는 오해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우상제물에 대해서는 손대지 말라(물론 먹지 말아야 지요) 는 것입니다.
2. 음행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음행에 대한 얘기는 학자들마다 다양합니다.(Beza : 우상숭배, 영적간음, lightfort : 근친결혼, calvin : 축첩행위, Teller : 이교도와 결혼)그 가운데 Heirichs라는 학자의 설명입니다. 이교신전에서 행해지던 신전창기와의 음행을 뜻합니다. 다이아나 신전 같은 곳에서는 3천명이나 되는 창기가 있어서 제사 지내고 그 창기들과 성적관계를 갖습니다. 절대로 정상적 결혼관계 이외의 모든 성적 관계는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3.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는 것입니다.
목매어 죽인 것 - 아직 피가 남아 있는 고기와 피 -그냥 피 뿐만 아니라 고기에 남아있는 피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참으로 철저했습니다. 짐작입니다만 목매어 죽을 때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독이 생긴답니다. 피 잘못 먹으면 그 동물이 가지고 있는 병균을 그대로 받아 치명적 위험이 올 수도 있다고하지요? 중요한 것은 야고보가 금한 서너가지 조건은 구원과 관계되는 - 믿음의 본질과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도로 세상사람과 구별된 삶을 위한 조건일 뿐입니다.
3. 하나님께로 오는 자를 괴롭게 말라
마지막 한 절 다루지 않은 것이 있지요? 몇절입니까? 19절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장로님들과 서울 어느 장로교를 방문했을때의 일입니다. 안내하시던 장로님께서 교회 본 예배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결혼식하는 장소로 빌려준다고 하자 우리 교회 어느 장로님께서 '담배 피우면 어떻게 하느냐?' 거룩한 성전에서 담배 피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랫더니 '담배피우다가도 예수만 믿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만 믿게 된다면야 담배 한번 피운들 어떻겠습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하게 하는 설명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해서 교회에 갔습니다. 예배 중 술냄새 나니 어떻겠습니까? 찡그리고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묻습니다. '술마시면서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좋습니까? 술마시니까 교회에 안나오는 것이 좋습니까?' 술 먹는 것은 나쁘지만 교회에 나오는 것은 좋은 일 아닙니까? 취해 가지고 나오는 것은 곤란하지만 어쨋든 교회는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복음 15장 탕자이야기 아시지요? 돌아올 때 얼마나 걱정했습니까? 아버지가 나를 받아주시기나 할까? 형은 나를 어떻게 대해줄까?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하자'했겟어요? 자 돌아왔습니다. 제가 묻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뭐라 했습니까? "꼴 좋다, 애비말 안듣고 뛰쳐나가더니 세상 맛 어떻드냐? 다시 나가거라 꼴도 보기싫다 이놈. 이제까지 어디서 뭐하다 왔다드냐?" 야단했습니까? 아니지요. 아무것도 묻지 않았어요. 그냥 기뻐 맞기만 햇습니다. 소잡고, 목욕시키고 옷갈아 입히고, 반지끼우고…
야고보 사도의 말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이방인 중에 하나님께 오는 자 - 얼마나 반가우냐? 얼마나 기쁘냐? 이런 저런 제약과 장애물로 피곤치 말게 하라 이런 말 아닙니까? 쓸데없는 말로 남의 마음 상하게 하지 마세요. 나는 뭐그리 대단하다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다고 남을 책망합니까? 먼저 믿는 사람들이 첫째아들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잘 믿다보면 다 고쳐집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족해야 합니다. 차차 고쳐져요. 괴롭게 하지 마세요.
정리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뢰받던 야고보가 드디어 문제해결하지요? 베드로 바울과 바나바의 경험과 구약의 예언에서 이방인도 구원받아야 할 백성임을 설명합니다. 이방인 성도들에게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라 권면하면서도 예수를 통한 구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야고보의 권면을 마음에 담읍시다. - 예수 믿겠다고 온 사람들 괴롭게 말라. 그렇지 않아도 어색하고 불안할 터인데 차차 나아지지 않겟나? 먼저 믿은 성도들 문턱도 낯추고 자세와 눈도 낮춰 따뜻하게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잃어버린 예배를 찾아서
행 15장 16~17절 / 김병삼목사
1. 예배의 중요성과 갈급함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예배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년 주제가 '성령 안에서'였다면, 그때 가장 강조했던 핵심은 '갈급함'이었습니다. 토미 테니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곳으로 그분의 마음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저리에서 맴도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악한 길의 일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갈급함만이 하나님의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2. 돌 같은 내 마음을 만지시는 하나님김성경 목사의 글 중에는 딱딱하게 굳은 진흙을 화장실로 데려가 물을 묻히니 다시 말랑말랑해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를 보며 목사님은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습니다. "돌 같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실 주를 사랑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기브업(Give Up)', 즉 완전히 맡겨드리는 시간입니다. 염려를 다 주께 맡기고 믿음 안에 굳게 서는 것이 이번 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예배자의 태도입니다.
3. 다윗의 장막이란 무엇인가?사도행전 15장에는 이방인 선교와 할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최초의 공의회가 나옵니다. 이때 야고보는 아모스서의 예언을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장막 회복은 단순히 유대인만의 회복이 아닙니다. 담을 허물고 이방인과 만국이 함께 하나님을 찾게 하는 '열려진 예배'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4. 법계와 하나님의 임재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울 왕은 법계를 잃어버린 채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법계가 없어도, 즉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도 제사라는 형식만 있으면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법계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모세의 성막이 성소와 지성소로 엄격히 구분되어 두려움 속에 드려지는 제사였다면, 다윗의 장막은 하나님의 말씀(법계) 앞에서 전심으로 드리는 찬양과 예배가 중심이었습니다. 이는 형식보다 그 안에 담긴 진심과 하나님의 임재가 본질임을 말해줍니다.
5. 소외 없는 예배 공동체다윗의 장막이 회복된다는 것은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예배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예배 중에 커피를 들고 오거나, 옷차림이 자유로운 청년들, 혹은 아기가 울어 당황해하는 엄마들을 봅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예배에 방해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예배가 너무나 고파서 아이를 안고서라도 나온 그 엄마의 마음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만든 규칙으로 벽을 세우지 말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공동체가 다윗의 장막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6. 찬양과 감격의 회복다윗의 장막에는 찬양이 넘쳐났습니다. 다윗은 수천 명의 찬양대를 세워 하나님을 송축하게 했습니다. 악기의 종류나 음악의 스타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악기든 하나님을 위해 쓰이면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다윗은 법계가 들어올 때 바지가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미갈은 그 모습을 천박하다고 비웃었지만, 그것은 미갈에게 다윗이 누린 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들릴 때 반응하고, 찬양할 때 손을 들거나 무릎을 꿇는 것은 영이 깨어나는 증거입니다.
7. 결론: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Worship)는 곧 섬김(Service)입니다. 예배의 감격은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 자체가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2026년 한 해, 잃어버렸던 신앙의 형식을 되찾고 그 안에 뜨거운 내용을 담아냅시다. 다윗의 장막처럼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고, 함께하는 기쁨이 넘치는 진정한 예배가 우리 모두에게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정신치유가 일어나는 상황
행 15장 16~18절 / 박지온목사
1. 요원
치유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원(일꾼)이 있어야 합니다. 요원에게 반드시 준비되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치유는 곧 전도입니다. 치유 받았다면 곧 전도가 된 것입니다.
둘째, 전도는 구원입니다. 자신이 구원의 축복과 은혜 없이는 전도한다는 것은 아예 말도 안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바르게 준비된 사람이 요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받을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전도될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치유될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이 준비가 되면 저절로 다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려고 설쳐대는 것은 아직 치유가 안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전도가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조금씩 되어갈 뿐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우리는 좀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1) 사도행전 16장 16-18절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치료가 나오고, 전도가 나왔습니다.
(2) 마가복음 9장 19-23절
예수님께서 가시는 바로 그 자체가 전도요, 치료입니다.
(3) 사도행전 13장 1절-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가는 곳에 똑같은 역사가 나왔습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4) 사도행전 19장 8절-
바울로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제자들)이 나가는 곳곳마다 치료가 나왔습니다. 이들을 통해 복음을 받게 된 우리 송현교회 성도들이 가는 곳곳마다 잠잠히 있어도 치료가 나와야 합니다.
2. 팀
이러한 요원들이 팀을 구성해서 나갈 때마다 사람을 붙여주시고, 만남 속에서 치료와 전도가 나오게 됩니다.
(1) 전도 이해
팀사역 훈련은 전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요원들이 팀으로 나아가서 만날 때마다 치료 받을 자, 전도 받을 자, 구원 받을 자를 붙여주십니다. 즉, 하나님은 구원 받은 자에게 구원 받을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가 막상 요원들이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배경은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때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닥쳐와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전도는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간표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질병의 치유도, 남편의 구원도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시간표가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기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도할 때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2) 팀 이해
전도 이해가 되고 팀이 이해되는 요원이 되면, 하나님께서 대구와 세계를 우리에게 붙여주실 것입니다.
(3) 주제 =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되어야 바른 생각, 판단,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생각이 안되면 범사에 비뚤어집니다. 판단과 선택이 망할 것으로만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팀의 요원들이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가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전도가 되면 구원 받은 기쁨과 감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작은 일에도 감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엄청난 감사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가 안되어 작은 일에도 불평이 나오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엄청난 불평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4) 사역 이해
주제가 그리스도로 이해되었으면 사역이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사역은 바로 '말씀 운동'입니다. 이 때부터 만남과 사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말씀 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흑암 세력이 꺽여집니다. 이것이 실제로 와야 합니다. 말세가 될 수록 흑암 세력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그냥 고함을 쳐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운동이 진정으로 나와야 됩니다.
3. 치유와 전도
말씀 운동이 나올 때부터 치유와 전도가 나옵니다. 이것을 능력이라고 합니다. 즉,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날카로워 영육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한편, 말씀이 임할 때 사단이 틈탑니다. 말씀으로 찔러오는 것이 나의 탓이 아니라 남의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능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말씀으로 찔러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1) 요원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2) 시설은 따라오게 됩니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너'는 다락방이요, '네 집'은 미션 홈입니다. 이에서 사회와 민족과 국가로 나아가는 것이 전문 교회입니다.
(3) 말씀 운동과 가정
먼저 가정 속에서 말씀 운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4. 개인
이 모든 사실들이 이루어지기 전에 꼭 되어야 할 것은 개인 치유, 개인 전도, 개인 구원입니다.
(1) 적용
말씀이 임할 때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내게 임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나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바꾸시면 다 되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순간에 적용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사단이 틈타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적용이 될 때에 작은 문제에도 감사와 기쁨이 나오게 됩니다. 내가 먼저 해결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믿음을 얻기까지 많은 일들을 겪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배 중의 보배입니다.
(2) 자신의 기도
이 때부터 기도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지속해서 감사와 기쁨이 올려면 기도 응답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자로 만들어 가실 때, 기도 응답의 체험이 나오고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정시 기도와 무시 기도가 되어집니다. 특히 집중 기도가 필요합니다. 어떤 환경에 부딪힐 때 집중할 수 있는 기도가 나옵니다. 이 때에 삶이 부쩍 부쩍 성장합니다. 그러나, 집중이 쉽지는 않습니다. 영육간에 어려움을 겪을 때가 집중 기도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됩니다.
(3) 남을 위한 기도
그 때부터 하나님이 때와 시간을 따라서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가정과 이웃의 전도 대상을 놓고 집중 기도가 되며, 하나님께서 시간표가 되면 붙여주십니다. 가만히 있어도 찾아돕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가 나가는 것입니다.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상담
상담하는 그 자체가 전도입니다. 그 배경이 하나님의 주권과 예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 때에 성경적 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제 개개인이 이 사실을 붙잡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계를 바꾸실 것입니다. 이 중요한 시대에 먼저 나 자신을 바꾸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과 후손을 바꾸실 것입니다. 이 사실이 가슴에 와닿으면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시행됩니다. 기도함으로 응답될 것입니다.
지도자 야고보
행 15:12~21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오늘의 본문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의 모습이 마치 그림같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 사도행전 15장은 전 장에 걸쳐서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실상 세계 제 1차 교회 공의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공의회에 모이게 된 주제는 선교 신학적 문제와 특별히 실제적 문제, 교회가 선교에 나아감에 있어서 부딪히는 문제, 또 어떤 의미에서는 믿는 사람 모두가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그의 풍속과 관계되고, 문화와 관계되고, 생활 습관에 관계된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답을 얻고 살아가야 하느냐----이에 대한 해결을 주는, 매우 중요한 공의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그들 나름대로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은 저들이 가지고 있던 스스로의 문화, 그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며, 무엇을 버리며 무엇을 그대로 취해야 하느냐, 어떤 것이 바뀌어야 하며 어떤 것을 보수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문제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로 부딪히게 됩니다. 하나는 믿는다 하는 신앙적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믿고 살아가는 생활의 문제입니다. 산다는 것은 실질적인 문제인고로 필연적으로 생활 양식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이것이 과제가 됩니다. 이를테면 내일이 추석이라 합시다. 우리네 문화로는 이 명절에 여러 가지 풍속이 있습니다.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이것은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 대이동'을 한다는 말까지 나올 만큼 귀성(歸省) 러시가 빚어지고 큰 행사가 되고 있습니다. 누가 하라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와 우리의 신앙 생활은 어떻게 관련지어져야 하나--문제가 안될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15장 처음 부분에서 고소하는 몇 사람들을 보았고, 또 지난 시간에는 베드로가 일장 연설을 합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에서는 야고보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렇게 모이게 되면 두 의견이 대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당수는 이렇다하게 큰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중의 일부는 반드시 의견의 극단적 대립을 보이게 됩니다. 흔히들 보수파니 진보파니, 우파니 좌파니 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그렇습니다. 우. 좌가 있고, 더 보수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진보적인 사람이 있게 마련이어서 서로 정면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수습하느냐 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그런 경우의 수습 방도에 대하여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지난 시간에 공부한 것을 복습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보수파 사람들이라고 하면 할례 문화를 보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보수파가 아닙니다. 사실은 신앙과 문화와의 관계를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유대사람, 그 중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옛날에 가지고 있던 생활 의식, 특별히 특권 의식, 혹은 머리 속에 있는 frame of reference, 이런 것들을 아직도 고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예수는 믿지마는 그들의 생활 철학은 여전히 바리새적이었다는 것이지요. 해서 고집을 부립니다. 할례 문화는 꼭 지켜져야 한다, 이방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은 다음이라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베드로 쪽은 저들의 보수에 대하여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실제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보니 할례가 중요하지 않아요. 할례 받기 전에 벌써 성령 받았어요. 성령 받고, 방언하고…… 예수 믿는 사람 다 되었는데 여기다 대고 새삼스럽게 할례 받아라, 세례 받아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들 진보파 입장에서 볼 때에는 신앙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형식보다는 내용이요 생활 양식보다는 질적인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선교에 집착합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이루셨어요. 하나님께서 다 이루었는데 뭘 뒤따라가면서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 하는 것이냐, 그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가지고 된다 안 된다 하는 공염불이 아닙니다. 실제 선교 현장에서 경험을 했습니다. 그 경험이 그 모든 것을 초월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같은 진보와 저러한 보수가 팽팽히 맞서 논쟁을 하고 있을 때에 야고보가 중간에 나타납니다. 그가 중용을 취합니다. 이쪽도 저쪽도 다 수긍할 수 있는 중도 안에 내놓습니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옳게 여깁니다. 보수파도 아, 그거 좋다, 진보파도 아, 그거 좋다--이렇게 해서 합의된 바로부터 이제 새로운 교회 질서를 찾아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릇 합의가 이루어지는 데는 첫째, 지도자가 있어야 됩니다. 지도자,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쪽도 저쪽도 다 신임할 수 있는 지도자, 모두가 다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 특별히 아무에게도 치우치지 않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높이 존경을 받을 위상을 지닌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때때로 그런 경우를 많이 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어지러운 것도 확실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문제가 생길 때에 누가 확고부동한 자세로 나서고 그 앞에 모두들 무릎을 꿇고 순종을 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말도 듣지 않습니다. 누구의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지도자에게 권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도를 받는 대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만해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될 때에 합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도 되겠습니다.
아무튼 여기 예루살렘교회에는 야고보라고 하는 중요한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영적 권세를 가졌고, 지도력을 가졌고, 신앙적 인격도 가진 것 같습니다. 그이 사람됨에 대해서 성경에 나타난 대로 몇 가지를 보면 첫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굳이 야고보가 예수의 친동생임을 부인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마리아를 철저하게 동정녀로 못박아둠으로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다음에 다시 자녀를 낳았다는 것을 숫제 상상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라든가 혹은 성경을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읽어보면 확실히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무난합니다. 예수님의 동생이니 외모부터 예수님을 많이 닮았다, 예수님의 사생활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을 같이 있었지만 야고보는 예수님과 30년을 같이 있었다--이렇게 됩니다.
당연히 야고보는 예수님께 대해서 가장 많이, 깊이 알고 있을 것이다--그래서 야고보는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야고보를 가리켜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보면 더욱 의미 깊은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성경상으로 미루어보면 열한 번 나타나신 걸로 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시고,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오백 문도에게 나타나시고, 그리고 특별히 야고보에게는 단독적으로 나타나십니다. 일대 일로 나타나셔서 교훈 하시고, 그리고 주의 종으로 삼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야고보는 중요한 지도자가 됩니다. 이 사람은 실질적으로 실천의 사람이었고, 전설대로는 무릎이 약대 무릎과 같이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항상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서 무릎에 굳살이 박혔기 때문입니다.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도왔습니다. 전적으로 주님께 모든 생활을 바친 일꾼이었고 마지막에는 순교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야고보를 이해함에 있어서 꼭 생각하고 넘어가야 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사람들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겸손하고 기도하고 실천적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유대 율법에 의한 경건한 사람이 아닙니다.
유대 율법에 의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철저한 신앙으로 검소했고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생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것이 야고보의 모습이었습니다. 철저한 초대교회의 대표자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시간시간 그 생활 속에서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입는 것, 먹는 것,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아주 검소하게 실천하고, 늘 기도하고 명상하는 사람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30년 동안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을 지냈고, 전설대로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생각하면 야고보는 신앙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성경과 성서신학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화해의 사람입니다. 합리적인 지도자였습니다. 야고보서를 읽어 나가느라면 야고보는 경건한 사람인 동시에 특별히 인내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래오래 참는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장 큰 특징은 희생적이고 사람을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을 이해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어느 잡지에 난 기록을 보면, 미국 주요 기업이 요구하는 소위 지도자가 갖출 여건 열다섯 가지를 말하는 중에 아홉 가지가 인간 이해입니다. Understanding mind----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야 됩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가장 훌륭한 자질을 갖춘 지도자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의 본문 12, 13절에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말을 마치매"라고 합니다. "듣더니 말을 마치매"-----결코 서두르지 않았어요. 바나바와 바울이 얘기하고, 베드로가 얘기하고, 그 하는 얘기를 조용히 들었어요. 끝까지 들었어요,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도 할말이 있고 저도 할말이 있어요. 대답할 말도 있어요. 그러나 끝까지 듣고, 말을 마친 다음에 얘기했습니다. 때로 우리네 지도자는 실수하는 경우가 있어요. 좀 위에 있다고 해서 남의 말을 중간에 막는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데 다 듣지 않고 "말도 안돼. 그만둬." 그러면서 "나 좀 얘기하자." 이래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러나 야고보는 그러지 않았어요. 여러 사람이 하는 말을 다 경청했어요. 그리고 말을 마친 다음에 얘기를 했어요. 잠언에도 남의 말을 다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했어요. 다 들어봐야지요. 아무리 내게 할말이 있어도 다 듣고 나서 말을 해야 됩니다. 간단한 것 같지만 야고보의 그런 인격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말을 마치매"--그 때에 입을 열어서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취하시려고"--이 주어, 동사를 연결해보면 대단히 중요한 의미의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통찰력이 있었어요. 바나바의 이야기, 바울의 이야기, 베드로의 이야기, 누구의 이야기든 간에 그가 이야기 속에서 들은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고 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자기가 이룩한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고 보지 않았어요. 그가 생각하고 그가 관심 있게 들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의 사역은 어디에 있는가---그것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어요. 그런 면에서 그는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지지를 받으려고 한다면 지도자가 아닙니다.
영국의 정치가 처칠은 그의 글에서 진정한 지도자는 2년 후에 지지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장에 지지 받으려 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당장은 지지 받지 못해요. 어쩌면 강한 배척을 받을 수도 있어요. 그게 지도자입니다. 지금 당장 백성에게 듣기 좋은 말로만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약속하고 해서는 지도자가 못되는 것이예요. 사실상 며칠 가지도 못해요. 적어도 지금은 백성들을 괴롭힐 수도 있고, 요새 하는 우리말로 '고통 분담'을 시킬 수도 있어요. 혹은 경제가 내려갈 수도 있어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2년 후에 가서 '아, 구분의 말씀이 옳았다'하는 평가를 받아야 지도자라는 것이지요. 또, 적어도 2년은 앞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고, 사람에게 잘 하고, 사람을 위하고…… 이게 아닙니다.
오늘 야고보라고 하는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계시는지를 깊이 통찰하고 있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또한 그러면서 그는 성경을 생각했어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보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함께 '가만있자, 성경의 어느 대목에 합한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모스 9장 11, 12절을 인용하게 됩니다. 본문 16절에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적어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바울의 말씀을 들으면서 야고보는 아모스 9장 11, 12절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구약에 주신 그 말씀이 오늘 여기에 응했든 확증을 얻었던 것입니다. 성경적인, 다시 말하면 객관적 진리가 확증해주지 않으면 나의 주관적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면 안됩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요새 보면 종종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자기가 하는 일이 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해요. 저마다 덮어놓고 하나님의 일입니다, 합니다. 객관적 진리가 없어요.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성경을 참고하세요. 성경의 맥락에 따라서 '이것은 맞는 이야기다, 바로 그것이 여기에 이루어졌다'하고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야 자기 의견을 말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이라고 말씀합니다(19절).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하고 성경과 합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역, 그것을 보는 통찰력과 성경의 증거, 그 다음에야 나의 의견입니다. 하나님의 뜻 먼저, 성경 다음, 그 다음이 내 생각입니다. "내 의견에는" 곧 '에고크리노'라고 하는 이 말은 조금 강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판단하기는"이라는 말입니다. "내 판단대로는"하고 판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적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리브가와 이삭의 결혼 이야기를 창세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아내를 맞이하게 되는데 직접 가지를 못하고, 아브라함의 몸종이 갑니다. 이 몸종이 라반의 집에 가서 리브가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만나게 될 때에, 요새같이 어디 전화를 하였겠습니까? 사진을 보았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인 이삭에게 이런 아들이 있습니다, 그가 장가를 가야 되겠으므로 지금 규수를 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와서 보니 당신이 마음에 드는데 어떻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말이 재미있어요. 하나님의 뜻인 고로 나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이렇게 말해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때에 키가 큰지 작은지, 코가 둘인지 셋인지 알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에 예스, 노를 말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따라갈 따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신앙--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성경적 증거로써 확증을 받고, 그 다음에는 겸손하게 "나의 의견에는"하고 결론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판단의 내용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내용이 아주 지혜롭습니다. 신앙 문제와 식사 문화 문제를 구분합니다.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 혼동하면 안됩니다. 신앙은 절대적입니다. 구원의 문제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 문제,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바울의 입장에서는 양보 안 합니다. 야고보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언제든지 확고한 보수적 신앙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신앙 문제에는 불변입니다. 양보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화 문제와 대해서는, 특별히 생활 양식에 대해서는, 혹은 식사 문화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바울의 입장에서나 베드로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런 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식사, 자기 마음대로 할 것이지 이것은 먹어라, 저것은 먹지 말아라 할 것이 무엇이냐--그렇게 말하고 싶지마는 아마도 야고보가 이 문제를 내놓은 것은 그 강력한 보수주의자들, 그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을 좀 풀어주려고 해서인 것 같아요.
"바울은 옳고 바리새인들은 틀렸어"라고 딱 자르면 하나될 수가 없거든요. 그쪽도 체면을 세워주어야지요. 그래서 신앙 문제에 대해서는 바울 편이요, 문화에 대해서는 유대사람들 편을 많이 들어주었습니다. 곧 중용을 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마리를 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무엇을 금했나요? 식사 문제, 한마디로 말하면 처음에는 우상의 더러운 것 먹지 말아라 했습니다. 당시 우상에게는 제물을 많이 바쳤습니다. 그러나 우상이 제물을 먹습니까? 한 점도 못 먹어요.
우리네의 제사 지내는 사람들도 그렇지요. 제사지낼 때에 조상에게 드린다는 밥에다 숟가락 꽂아놓았다가 문 열고 나갔다가 들어오지만 한 숟가락도 '잡수신' 것 없어요. 괜히 차려놓고 마는 겁니다. 제물은 사람이 먹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상에게 많은 제물을 바쳐놓고 그걸 도로 갖다 팔기도 하고 먹기도 해요. 그러니까 시장바닥에는 온통 우상의 제물투성이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제물인 줄 알면서 꺼림칙한 기분으로 먹는 거예요. 먹으면 우상의 제사에 동참하는 게 되니 소화도 잘 안될 뿐더러 안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예수 믿으면서 우상 섬긴다는 손가락질 받기도 합니다. 그런고로 우상의 제물 먹는 것은 그만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아주 지혜롭게 말씀해요. "묻지 말고 먹어라." 음식 놓고 마주 앉아서 제물이요 아니요 하고 따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먹으면 되겠고, 제물인 줄 알았을 때에는 먹지 말아라, 그러나 묻지 말고 먹어라---이렇게까지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아무튼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이래저래 피곤하고 시끄러우니 숫제 우상의 제물은 삼가라 합니다.
두 번째로, 음행을 삼가라 합니다. 여기서 음행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 문제이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의 얘기가 있는데 재미있어서 열거해보겠습니다. 베자라고 하는 학자는 우상을 섬기는 것은 영적 간음이기 때문이 그것을 삼가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라이트후드는 근친 결혼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칼뱅은 축첩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펠러라고 하는 사람은 이교도와의 결혼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하이니크라고 하는 사람은 꽤 뜻이 깊은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우상숭배 하는 사람의 의식 중에 간음이 있습니다. 특별히 다이아나 신전 같은 데는 3천 명이나 되는 창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가지고 제사지내는 사람들이 종교의식이라고 행하는 것이 그 창녀들과 관계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음행'은 바로 이런 짓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이니크는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음행'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우상숭배와 직결된 말이다, 창녀나 포주 행위를 말한다고 달마시우스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세 번째는, 목매어 죽인 짐승은 먹지 말아라--이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의 터부입니다. 레위기 17장 13절로 14절이라든가 신명기 12장 16~23절에 보면 잘 나타납니다. 왜 목매어 죽인 짐승은 안 된다고 했는가--다른 데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을 매어 죽였으니 피가 빠지지 않았어요. 피가 안 빠진 짐승을 먹는 것은 이스라엘사람들의 금기입니다. 그들의 완고한 풍속입니다. 율법입니다. 피라고 하는 것을 생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에서는 양이나 소를 죽일 때에 흐르는 피를 하나의 제사 의식으로 받아서 거기에는 있는 사람들이 먹었어요. 이방사람들은 제사 의식 중에서 이렇게 피를 마시거든요.
그런고로 이런 것도 역시 종교 문화와 관계가 되기 때문에 먹지 말아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통합적으로 생각해야 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 21절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 그리고 피를 멀리하라 말씀하고 나서, 그 이유로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합니다. 여기에 암시된 것인즉 이방사람들도 벌써 모세의 율법을 배워서 이스라엘사람들의 풍속 중 상당한 부분을 배워 가지고 '이러한 것은 나쁜 것이다'하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그런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고로 나쁜 것입니다.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의식이 더 중요합니다. 벌써 머리 속에 '이것은 나쁘다, 이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다, 이건 속된 것이다, 이건 우상이다, 분명히 우상에 속한 것이다'---이렇게 알고 있어요. 그런고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의식 속에서, 그 개념 속에서 벌써 우상적인 것이라고 종교문화화된 행위를 그대로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풍속에 관한 것이라면 상관이 없어요. 그러나 이것이 종교적 색채를 가지고, 종교적 관념을 가진 풍속이라면 버려야 돼요. 부적(符籍)이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어떤 식당에 가보면 물 수(水)자 거꾸로 쓴 것을 벽에 붙여놓았어요. 그거 남의 집 것이니 내가 뗄 수는 없지만 나는 볼 때에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 아버님이 가르쳐준 것이 있거든요. "원래 무식한 도깨비는 부적도 모르느니라." 부적 아무리 있어봤자 귀신이 글자 읽나요? 그래서 상관없는데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을 부적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 집에는 그런 것 없어야 되겠지요.
금할 수밖에요.
이런저런 것들은 금하자 한 다음에 본문에서는 마지막 말이 아주 은혜스럽게 맺어지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19절 말씀에 보면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참, 야고보다운 말씀입니다. 탕자가 돌아옵니다. 얼마나 조마조마했겠어요? 자,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맞아 주실까, 형이 나를 어떻게 대해줄까? 걱정이 태산같습니다. 얼마나 걱정을 했으면 "나를 품꾼의 하나로" 대해달라 했겠습니까? 아들 자격이 없습니다, 나는 이제 아들이 아닙니다, 돌아오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이제 아들이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이렇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돌아와요. 그런데 돌아온 이 사람을 아버지는 그대로 가슴을 열어서 영접합니다.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노라--다른 말은 없어요. 그래, 소를 잡아라, 반지를 끼워라, 목욕을 시켜라, 신발을 신겨라 하지 않아요? 그런데 형은 그렇지 않아요. 조금 까다로워요.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동생을"--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재산 문제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절반이라도 가지고 돌아와야지 몽땅 날리고 돌아온 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돌아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돌아온다고 하는 것만 극대화하고 기뻐하게 되면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무슨 과거를 묻는다는 것입니까? 여기에 특별히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돼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돼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다니기는 다니는데 좀 시원치 않았던가 봐요. 자기네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때마침 예배 시간인지라 그 교회에 들어갔어요. 술이 잔뜩 취해 있었어요. 술 냄새를 피우면서 뒤쪽에 앉아서 코까지 골아요. 예배가 끝나자 그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그를 자기네 교회 목사님한테 데리고 갔어요. "이 사람 이거, 술 냄새도 나고, 아주 못쓰겠어요" 했더니 그 목사님이 술을 마시면 쓰나, 하고 책망을 주었고, 그는 알았습니다, 하고 나왔어요. 나와 가지고는 자기를 끌고 갔던 그 교회 청년을 끌고서 이번에는 자기네 교회로 왔어요. 자기네 목사님한테 가서 앉아 입을 엽니다. "목사님, 우리가 한 가지 질문을 할께요. 술을 마시면서라도 교회에 나오는 게 좋습니까?" "물론이지요"라고 목사님이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보아란듯이 끌고 간 청년보고 말합니다. "거 봐라, 우리 목사님은 다르지 않니?"
교회에 나오면서 술 먹는 것은 나빠요. 그러나 술을 마시면서도 교회에 나가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좌우간 나와야 언제든 고칠 것이 아닙니까? 담배를 피우든 술을 먹든 교회에는 나와야 돼요. 취해 가지고 나오는 것은 좀 곤란하지만 어쨌든 나와야 돼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이방사람들 교회에 나오는 것 얼마나 고마우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나오니 얼마나 반가우냐, 그런고로 이런 제약, 저런 간섭으로 피곤하게 만들지 말라, 장애물을 놓지 말라, 문턱을 높이지 말라--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여러분, 쓸데없는 얘기 해 가지고 남의 마음 상하게 하지 마세요.
내가 무엇이 그렇게 깨끗하다고 남을 비판합니까? 교회 나오는 사람들 마음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문턱을 낮추세요. 아주 낮추어야 합니다. 절대로 문턱을 높이던가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이치는 간단합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족하다, 생활은 차차 고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러니 괴롭게 하지 말아라 얼마나 덕스럽습니까? 그런고로 신앙 문제와 문화 문제는 구별해야 되고, 하나님의 역사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신앙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집시다
행 15:12-21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지난 주일 본문에 이어서 초대교회가 역사상 가장 큰 전환점이자 위기를 극복했던 순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 세계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던 때,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라고 하는 믿음의 근본이 되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유대교 출신 성도들과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처음으로 ‘다름’을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신앙의 배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느냐?”라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모여 성경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여 충분한 논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격렬한 논쟁 끝에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내고 19~20절에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공로도 배제한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확정했습니다. 그를 통해 흩어졌던 마음을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하나가 되게 했었습니다.
당시 내렸던 결론에 대한 말씀은 지난 주일에 충분히 상고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어떠한 삶인지?’,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떠한 변화를 이루게 되는지?’, ‘선지자로서의 성도의 삶이란 어떠한 삶인지?’, 이 세 가지를 함께 나누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먼저, 12절 함께 읽습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여기에서 ‘가만히 있어 ἐσίγησεν’라는 말은 단순히 조용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주장을 그치고 침묵했다’, ‘논쟁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혔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과 논쟁을 멈추고 하나님의 뜻 앞에서 침묵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집중하게 된 것은 바나바와 바울이 자신들의 성취를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대하여 증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지식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논리적으로 설득할 자신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자기주장을 하면, 지금까지 참고 들어온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논쟁이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은 오직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만을 간증했습니다. 자신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통로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교회 안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멈추게 하는 힘은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함께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논리, 내 지식,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한마음 한뜻으로 바라볼 때, 우리의 입은 잠잠해지고(ἐσίγησεν),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도 세대 간의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의 강조점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역을 바라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앞에서 잠잠히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마음을 모을 때, 교회는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더욱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에 귀를 기울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를 통해, 바나바와 바울처럼 간증의 주인공이 되어, 분열된 마음을 주 안에서 하나로 이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13절 함께 읽습니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갑자기 의외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의 권위 있는 모습은 베드로를 능가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혹 그가 사도 야고보가 아닌가?”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야고보는 이미 순교했습니다(행 12:2).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야고보는 사도 야고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야고보는 누구일까요? 성경 갈라디아서 1:19에 의하면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 최초의 공의회를 주재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바르게 확립할 수 있는 정통한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권위 있게 회의를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렇게 신앙과 인격을 부족함 없이 갖춘 훌륭한 그릇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을 박해하던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예수님을 힘들게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요 7:5). 심지어 예수님을 미친 사람으로까지 취급했습니다(막 3:21).
그런데 그런 그가 어떻게 이처럼 변화되었을까요? 누가 이런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개인적으로 야고보를 만나 주셨습니다(고전 15:7). 야고보는 그 이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갈 2:9).
이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다 변하게 됩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변화의 폭이 워낙 넓고 크기 때문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변화됩니다.
여러분, ‘세리장 삭개오’며, ‘세리 마태’, ‘박해자 사울’, ‘방탕아 어거스틴’, ‘깡패 이기풍’ 등 그들이 변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변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변하리라고 누가 꿈이라도 꿨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변화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변화’입니다. 그 변화의 폭은 무한합니다. 강도, 살인자도 예수님을 만나면 얼마든지 성자로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사람을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누구라도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지탄받는 사람에게도, 악한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지은 죄가 클수록, 그래서 변화의 폭이 클수록 주를 위한 헌신과 봉사의 크기도 큼을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무수히 확인하게 됩니다. 이를 기억하고 오늘부터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3. 이어지는 14절 함께 읽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여기에서의 ‘시므온’은 베드로의 본명입니다. 야고보는 베드로가 간증한 고넬료 구원 사건을 언급한 후, 이어지는 15-18절에 이러한 이방인 구원은 구약시대의 ‘선지자’ 아모스가 이미 예언한 일의 성취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는 적게는 수개월에서, 많게는 수백 년 앞을 내다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예언하는 직분입니다. 아모스는 예수님이 오시기 800년 전의 선지자입니다. 그러한 그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일을 미리 예언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직분을 갖지 않았으면서도 선지자처럼 살다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무려 2천여 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예수님의 시대를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8:56에서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칭합니다(창 20:7). 왜 그렇습니까? 선지자라는 직분을 갖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선지자적인 안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지자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후손에서 나실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난의 삶, 나그네로 유리하는 삶 가운데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인물이 또 있습니다. 다윗 왕입니다. 다윗 역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지는 않았지만, 성경은 그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합니다(행 2:30). 그 역시 예수님을 미리 보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비록 공식적인 선지자 직분을 받지 않았을지라도 선지자의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를 선지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 또한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자들이기에 선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던 사역이 우리 성도들에게 넘겨진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성도들은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평안을 소유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백 년, 이백 년, 천년 앞을 내다보며 사는 사람이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작은 고난에, 시험에, 행복과 불행에 요동하겠습니까? 눈앞의 ‘일희일비’로 믿음이 흔들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선지자적인 믿음의 안목을 가진 사람은 아브라함이 이천 년 앞을 내다보며 즐거워했듯이 즐겁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선지자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은 몸은 현재에 살지만, 마음은 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썩을 육체의 쾌락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삽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교회든 가는 곳마다 그곳을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적인 안목을 갖고 사는 사람은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선지자적인 안목을 갖게 합니다. 그들에게 이 땅의 썩어질 것이 아니라, 가장 소중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산으로 물려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 선지자적인 안목으로 가정과 직장과 교회를 든든히 세워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일꾼으로서 서 있는 곳마다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선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일희일비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선지자적인 안목을 갖고 살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저희에게 성령의 권능 부어주셔서 이 시대의 선지자로서,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하나님 자녀로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함께하여 주옵소서. 복음의 원칙을 굳게 지키되, 연약한 지체를 사랑으로 ‘배려’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