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바라본 단계 종택과 창렬서원.
사람이 숭고한 것은 신념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신념이 자신보다 국가나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라면 더욱 옷깃을 여미는 것이다. 단계 하위지(1412~1456)는 사육신중의 한 명으로 당시 유학자들의 최고의 가치인 불사이군의 원칙을 철저히 따른 것이다. 모든 가치기준은 시대마다 달라 그 시대상황을 우선 고려하고 지금의 시대와 견주어야 된다.
그리고 멸문지하를 당했는데 후손은 어떻게 이어졌는가. 사육신 중 순천박씨 박팽년과 진주 하씨 하위지만 드라마보다 더 극적으로 후손이 이어진다. 그 하위지를 모신 창렬서원은 후손으로 명맥을 이어온 종택 옆으로 옮겨왔다.
서원입구 유의문.
#. 사육신과 단계 하위지
“낳았느냐.”
“낳았느냐”
“낳았느냐.”
이렇게 하늘에서 세 번 묻는 소리가 난 뒤 사육신의 대명사 성삼문(1418~1456)을 낳아 이름을 삼문(三問)으로 지었다지만, 하위지를 낳자 집 앞의 계곡물이 붉게 물들어 사흘 동안 흘렀다 한다. 피비린내 나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하위지는 자신의 호를 예사롭지 않은 붉은 계곡 단계(丹溪)로 했다. 지금 중국의 단동(丹東)은 옛 안동(安東)인데 마오쩌뚱(毛澤東)이 공산화 하면서 동쪽을 붉게 물들인다고 단동으로 바꾼 것이다.
세종(1397~1450)도 20살(1418)에 왕이 되어 32년 동안 재위(1418~1450)하면서 우리 민족에 농업, 과학, 특히 한글창제 등의 빛나는 업적을 남긴다. 그리고 자신같이 학문은 좋아했지만, 병약한 첫째 아들 문종(1414~1452)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문종은 재위(1450~1452) 2년 만에 죽는데 불안한 마음에 어린 세자를 문무를 겸비한 김종서와 황보인 등에게 잘 보필하라고 부탁하고,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신숙주 등에게도 당부한다.
12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 문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단종(1441~1457)은 불과 1년(1453)만에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계유정란) 영의정이 되어 실권을 쥐고, 동생 안평대군도 죽여 버려 조카 단종은 형식적인 왕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1455년 단종을 보필했던 중신들을 제거한 한명희, 권람 등의 강요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상왕이 된다. 특히 옥쇄를 세조에게 받칠 때 성삼문은 옥쇄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자 세조(1417~1468)의 눈과 마음에 찍힌다.
옆에서 내려다본 창렬서원.
이때 집현전 학사들과 불사이군으로 무장된 신념에 가득 찬 뜻있는 신하들은 울분을 토하며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한다. 거사 날을 미루자 함께하기로 했던 김질(1422~1478)이 겁에 질려 장인 정창손에게 밀고하여 주모자 17명의 거사주역들이 잡히고 사육신은 능지처참된다.
하위지는 형 강지와 함께 남들이 얼굴을 모를 정도로 공부에 몰두하여 1438년에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에 근무했으나 병약하여 사직을 반복한다, 그때마다 세종은 경상감사에게 그를 보살피라고 특별히 부탁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그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죽이고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던져버리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해버린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하고 왕이 되어 그를 간곡히 불러 일단 부름에 응하여 예조참판에 승진한다. 그러면서 마음은 단종에 가 있어 세조가 주는 녹봉을 방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다.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여 국문을 받을 때 세조가 재주를 아껴 모의한 사실을 고백하면 용서하겠다 하자 “이미 반역의 죄명을 씌웠는데 죽이면 되지 무엇을 더 물어요.” 이처럼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성삼문은 불에 달군 쇠로 맨살을 지지는 작형(灼刑)을 당했고 유응부는 살가죽을 벗기는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복하지 않고,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서생(선비)과는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중국사신 초청 연회 날 칼로 거사하려 할 때 그대들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획이 아니오’하더니 오늘의 화를 당했구나.” 일갈하면서 세조에게 “이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화가 나서 달군 쇠를 배 밑에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쇠를 집어던지고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하위지는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하고 가족은 연좌제에 걸려 쑥밭이 되어버린다. 조선은 명나라의 ‘대명률’을 따랐는데 모반죄나 대역죄는 능지처참하고, 연좌제를 적용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16세 이상이면 목매 달아 죽이고, 15세 이하이거나 어머니, 딸, 아내, 할아버지, 손자, 형제, 자매, 며느리는 모반죄를 고발하여 공을 세운 자의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몰수한다고 되어있다.
고향에 있던 16살 하호, 14살 하박 두 아들이 사형을 받게 되었을 때 금부도사가 차마 죽일 수 없어 살아날 방법을 알려주자 어린 둘째 하박은 “아버지가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어찌 살아남기를 바라겠는가.”하고는 태연히 죽었다 한다. 형 강지, 동생 가지와 소지, 두 아들이 모두 죽어 절손되었다. 그러나 10세 미만이었던 미성년자 하분(형 강지의 아들), 하귀동(동생 히기지의 아들), 조카 하포는 살아남았다. 숙종 때 복권되면서 왕명으로 하귀동은 하원으로 개명하여 아들 자징(自澄 소지의 손자)으로 대를 잇게 했다.
앞에서 바라본 창렬서원.
#. 초라한 종택과 쓸쓸한 창렬서원
아침에 출발하여 안동 서후면 교리의 창렬서원에 도착했다. 송암 권호문의 종택과 창성서원이 옆 마을에 있다. 배산임수의 아늑한 전형적인 마을이 아니라 길옆 두어 채 집 뒤에 가파르고 경사진 산이 가난의 때가 졸졸 흐르는 외딴곳이다. 지난번에도 왔지만 문이 잠겨 있어 사진 찍기도 뭐하여 그냥 돌아섰던 곳이다. 집 앞에서 풀 뽑는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종부를 만났다. 서원보고 사진 좀 찍으려 왔다니까 어디서 왔느냐 물었다. 경주에서 왔다 하면서 수오재 고택에 산다니까 어렴풋이 경북의 고택 종부들 특강할 때 나에게 강의 듣고 뒷 풀이 술 잔 나눈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종택 옆에 비탈진 서원입구에 높은 유의문(由義門)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충신의 위폐를 모신 서원이라고 이해하면서 들어갔다. 대문을 열어주시고 음료수를 갖고 오신다. 한사코 거절해도 권하여 받았다. 다리 수술하여 불편한 몸으로 돌아서면 자라는 풀과의 전쟁이야기, 사육신 하위지 선조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세조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하는 거사를 함께 하기로 한 안동김씨 김질이 고변하였다고 지금도 종손은 안동김씨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신단다. 세조가 김질을 불러 대질 신문하자 성삼문은 “이놈, 김질아! 너는 글깨나 읽었다는 선비 놈이 하루도 못되어 일신의 영화만을 노려 친구를 배반하느냐? 이 더러운 놈 같으니!”했던 김질이었다.
종부에게 선조는 선산이 고향인데 어떤 연유로 안동에 정착하였는지 여쭤보니 하위지의 동생 아내(하위지의 제수)가 봉화 금씨라 봉화에 왔다가 안동으로 오게 되었단다. 서원은 비탈진 협소한 공간이라 경사가 급했다. 좋은 목재로 잘 지은 서원은 아니다 보니 건물 그 자체에서 주는 품격이나 권위는 없었지만,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신하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다 처참한 죽음을 당하고 온 가족이 몰살하는 비극을 당하고 이름만 충신으로 남게 된 서원이다. 지금의 종손은 건축업을 하여 1년에 관급공사 7개 정도 따다가 생활에 어려움은 없다하니 다행이다.
위에서 바라본 창렬서원.
생육신 남효온의 추강집 ‘육신전’에 하위지 인품을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이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기 위해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고 했으니 침착 과묵한 엘리트 청백리였다.
이 창렬서원은 1804년(순조 4년)에 창열사를 지어 위폐를 봉안하고 1809년(순조 9년)에 안동 서후면 송야리에 창렬서원을 창건하고 그 뒤 사람의 중의로 서후면 이개리로 이전했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89년 서후면 교리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었다.
능지처참당하고 길가에 버려진 사육신들의 시신을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이 거두어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 한다. 민간에서만 전해오다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1679년(숙종5년)에 왕이 노량에 군사검열을 가는 길에 육신묘의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었으며, 1681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을 위한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1691년 관원을 보내 사육신묘에 제사를 올리게 했다. 원래 4신(성삼문, 이개, 박팽년, 유응부)만 있다 하위지, 유성원과 군사동원의 총책임자 김문기가 추가로 인정되어 사육신이 아닌 사칠신(死七臣)이다.
뒷산에서 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서있는 듯한 창렬서원과 송야천 위로 중앙선 고속화철도의 흉물스러운 다리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충신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삶이 아름다운 삶인가?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출처 : 경북매일(http://www.kbmaeil.com)
[출처] 단계 종택과 창렬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