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증심사
증심사(證心寺)는 광주광역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대한 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에 속한다. 1984년 2월 10일 증심사 일원이 광주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무등산은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호남의 명산이다. 증심사는 높지 않은 위치이고, 등산객들이 지나는 길목에 있다.
무등산 아래에는 사하촌이 잘 조성되어서, 아침 겸 점심을 그곳에서 먹기로 했다. 어제는 늦은 저녁식사에서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배가 고프지 않다. 이제 나이가 많은 나로서는 식사량을 줄여야 하는데, 이렇게 나들이를 나오면 체중 걱정을 할 만큼 많이 먹는다.
신라 헌안왕 4년(860년)에 철감선사 도윤이 처음 세운 절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선종 11년(1094년)에 혜조국사가 중수했으며 1443년(세종 25) 전라도관찰사 김오(金傲)가 자신의 녹봉으로 낡은 건물을 고쳐서 다시 지었다. 그 뒤에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지자 1609년(광해군 1년) 석경(釋經), 수장(修裝), 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힘을 모아 다시 지었다. 그 뒤에도 개수와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절집을 찾아다니기로 계획을 세운 후에 대구 땅에 살고 있는 내가 전라도 땅의 절은 답사 계획에서 제외했다. 이번에 큰 아들이 전라도에서 만나자고 연락했을 때도, 그들은 전라도 땅에서 식사대접을 하겠다는 뜻이었지만, 내가 좋다고 한 것은 전라도 땅에 가면 가기 힘든 절집에도 갈 수 있겠다 싶어서 였다. 아들에게 너네 계획표에서 지나치는 길가에 절이 있으면 쉬이 들릴 수 있을테니 잠시 들려보자고 했다. 그러겠다고 하였다. 자료 검색을 한 후에 추천해 준 절이 무등산의 증심사였다.
860년(헌안왕 4년)에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1094년(선종 11)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세종 25)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 증심사의 철불은 9세기에 창건한 선종 사찰에 많이 남아계시므로, 철감선사가 창건했다는 것은 신뢰가 간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 1)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였고,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중수를 거듭하다가 1951년 4월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버렸으며, 1971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1년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이 전화로 불에 타 없어졌다. 금동석가여래입상(당시 국보 제211호)과 금동보살입상(당시 국보 제212호)은 광주경찰서 금고로 옮겨 보관되고 있었으나 전쟁 중에 유실되어, 국보 지정도 해제됐다.
오늘날의 건물은 1970년에 크게 증축한 것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물로는 대웅전·오백전(五百殿)·명부전(冥府殿)·회심당(繪心堂)·학산장서각(鶴山藏書閣)·요사채 등이 있다.[
역사가 긴 절이니 전해오는 문화 유적도 많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보물 13호인 철조비로나자나불이다. 다음은 광주시 시도 유형문화제 14호인 석조보살입상이다. 나는 민간신앙에 관심이 많아서, 이 보살님도 민간이 신앙한 미륵보살님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이다. 이 보살님은 담양군 남면 서봉사에서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형상이 민불 형태여서 민간에서 신앙한 미륵불이 아닐까 싶다.
오백전 옆에는 높이 205㎝의 석불 1구가 있는데, 고려시대(10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으로 1989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로전 안에 안치된 높이 90㎝ 정도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철불은 본래 광산군 서방면 동계리에 있던 것을 1934년에 옮겨온 것이다.
이밖에도 문화재로는 증심사 창건 때 만들었다는 1972년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삼층석탑,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1933년의 보수 때 탑내에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금동보살 입상 등이 나왔던 오층석탑, 조선 중기의 것으로 보이는 칠층석탑 등이 있다. 특히,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석가여래입상과 석조보살입상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지도를 보니 의제 허백련 미술관과 이웃해 있다. 미술관을 조금만 더 지나면 증심사이다. 예전에 미술관을 찾은 일이 있었지만, 절은 찾아가지 않았다. 내가 운영했던 그림 공부방에서 미술관 순례로 찾아왔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절 입구의 왼쪽 산록에는 약 3만여 평의 차밭이 있다. 이 차밭은 원래 증심사에서 공양을 위하여 가꾸어왔던 것이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하였고 광복 후에는 의제 허백련(許百鍊)이 인수하여 고유의 차를 재배하였다. 그러고 보니 차밭도 생각난다.
아들과 집사람, 셋이서 터벅터벅 걸었다. 의제 미술관까지도 1km가 넘는 오르막 길이다. 그러나 안내판에서 의제 미술관 바로 뒤편이 증심사가 아닌가. 지난번에 의제 미술관에 왔을 때 절에 들린 기억이 없다. 절부터 먼저 들리기로 하고, 걸어 올라갔다. 포장된 길이지만 경사가 제법 있다. 등산을 가는 사람이 줄을 잇는다.
큰 절이다. 일주문, 사천왕문도 갖추어져 있고, 어제 초파일 행사를 한 흔적도 많이 남아 있다. 빗방울이 후두둑거리고, 서울에는 비가 왔다는 일기예보였지만, 빗줄기는 이내 가늘어지고, 곧 이어 비가 멎었다. 집 사람은 늘상 하듯이 법당으로 갔다.
산 아래에 사하촌에서 식사를 마치고, 광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데려다 주었다. 이들네는 서울까지 운전해서 간다고 하여, 비도 오니 조심하라고 당부당부 했다.
대구로 오는 버스는 최신형 고급 버스여서 너무 편안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렇게 좋은 세월이구나.
생각보다 늦은 시각에 며늘아이가 전화를 했다. 방금 서울에 도착하였다면서 서울에는 비가 많이 온다고 하였다. 아들네가 운전하는 날은 전화가 올 때까지 불안하다. 도착하였다니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