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리 쓰는 유언장
시종 우리를 감싸고도는 안개에 연유해서 인가, 도의원 하던 완산의 친구인 홍모씨의 장례식 때문인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나눈 대화 중에 死後의 火葬이나 樹木葬, 또는 祭祀의 범위, 屍身寄贈 등 어찌 보면 어두운 이야기가 많았다. 산 사나이들답게 樹木葬에 대단한 호의를 보였으며 꼴찌는 제사의 범위를 부모에 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자기부터 실천하고 자식들에게 遺言하겠다고 했다. 남산은 자식들에게 남길 遺言을 CD로 제작하여 자신의 생전의 모습과 함께 제삿날 후손들이 볼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미리 쓰는 유언장’을 생각해 보았다. 몇 년 전부터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를 통하여 퍼지고 있는 유언장 미리 쓰기는 한번쯤 우리 삶을 정리하고 반추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한세상을 살면서 그 동안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한번쯤 결산하고, 물질과 자신과의 관계를 정산해보며, 자식들이 어떤 삶을 살길 바라는지를 생각해보는 기회도 된다.
내가 ‘미리 쓰는 유언장’을 쓴다면 어떤 내용을 쓸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나의 평생 반려자인 나루에게 ‘당신으로 인해 행복한 한 평생을 잘 살고 갑니다.’ 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자식들에게 특별히 나의 삶의 철학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들 자기만의 온전한 삶의 방법이 있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잘 적응하며 살고 있으니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형제간에 화목하고,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순리대로 살며, 매사에 성실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떠난 후 장례 문제는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그냥 매장 쪽을 택하겠다. 樹木葬이나 火葬 등은 우리 집안으로 보아서는 자식들에게 오히려 복잡한 문제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만 값싼 나무관을 사용하고 봉분 등은 보통보다 낮게 하라고 하고 싶다. 제사는 우리 가족만 하는 것이 아니라서 결정하기 어려우나 나의 유언이 실효성이 있다면 할아버지까지만 하되 부부 합제를 권하고 싶다.
그 외 유산문제는 되도록 유언에 남기고 싶지 않다. 나누어 줄 것은 생전에 다 자식들에게 주고 가고 싶다. 집 한 체만 나루 몫으로 남겨둘 생각이다.
쓸 것이 많을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별 쓸 것이 없다. 이런 게 필요하기나 한건지 회의감마저 든다. 그러나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 안개 속에 묻혀버린 서귀포휴양림
집중호우로 강원도를 비롯한 중부지방에 물난리로 쑥대밭이 되었다는 보도를 들으며, 제주 지방에도 호우주의보 예비령이 내려진 날이다. 새벽에 큰비가 한차례 쏟아지더니 아침까지 오락가락이다. 날이 밝자 친구들의 걱정스런 전화가 쇄도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천불구’ 원칙이 있는데 무조건 강행이다.
차가 한밝 저수지를 돌아 어승생 기슭에 접어들자 안개가 점점 심해진다. 어리목을 휘돌아 1100휴게소 가까이 가자 5m 앞도 안 보인다. 노란 중앙선이 겨우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비상등을 깜빡이며 바짝 움츠려 불안하게 달린다. 유리까지 안개와 사람의 체온으로 부옇게 흐려 정말 답답하고 불안하다. 정말 우리가 미친 짓을 하는 걸까. 이런 날 산에 오다니 확실히 미친 짓이다.
영실입구를 지나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길가에 누가 신호를 보내고 있다. 앞장이다. 안개 때문에 그냥 지나칠까봐 위험을 무릅쓰고 길에 서서 안내하다니. 정말 앞장의 親舊愛에는 손을 들었다. 휴양림 주차장에는 이런 안개 속에 남산네와 운공, 진시기, 은하수 등이 벌써 와 있었다. 모두 10명이었다. 남산이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진다.
“야, 아파트 나올 때 누가 볼까 봐 혼났다. 이런 날씨에 등산하는 미친 사람 보라고 할까봐”
안개와 비 날씨 때문에 휴양림은 거의 텅 비었다. 렌터카를 타고 온 관광객인 듯한 일가족이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뿐이다. 표를 사는 우리를 직원들이 친절하게 맞는다. 속으로는 아마 웃고 있을 런지 모르지만. 우리가 오늘 서귀포휴양림을 전세 내기로 했다.
휴양림을 한바퀴 돌며 법정이 오름을 오르고 마루가 깔린 산책로를 돌아 다시 주차장까지 온 다음 적당한 장소를 골라 점심을 먹기로 했다. 휴양림을 한 바퀴 도는 거리는 대략 5km이니 운동량도 적당하다. 송이포장을 한 붉은 색 산책로를 기분 좋게 출발했다. 길가에는 한창 물을 먹은 싱그러운 수목들이 부연 안개에 흥건히 젖어 축 늘어져 있다. 재잘거리는 우리 일행의 목소리만이 휴양림에 가득하다. 앞장과 꼴찌의 거리가 꽤 떨어져 있지만 물속에서 소리가 크게 들리듯이 안개 속에서 우리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웅웅 거린다. 우리가 오름을 오르면서 비를 맞고 눈보라를 헤치고 센 바람을 맞기도 했지만 오늘처럼 짙은 안개 속을 오랜 시간 걸어보기는 처음이다. 안개는 우리의 마음을 착 가라앉게 만들고 낭만적이 되게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 시인이 되는 기분이다. 우리가 보는 이 것을 또 우리가 느끼는 이 것을 시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우리 마음에는 분명히 시적 감흥이 일고 있다. 이런 때 내 친구 호길이나 무가 있었으면 이 감흥을 멋있게 시로 표현해 주련마는.
법정이 오름 등반로 입구에 닿았다. 은하수표 독새기와 복분자 술이 생각나 둥그렇게 주저앉았다. 복분자술 한 잔씩 딸아 ‘우리의 꿈과 뜻은 영원하다.’ 소리 높이 합창하고 원샷! 오늘 우리가 휴양림을 전세 냈는데....... 법정이 기슭으로 흐르는 물소리만이 우리의 건배에 화답한다.
▲ 땀 흘려 법정이 오름 전망대에 올랐으나
법정사가 있어서 법정이 오름인지 법정이 오름에 법정사가 있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비고 90m 정도의 보통 높이 오름이다. 등반로를 따라 밧줄이 매어있어 길 찾기가 용이하다. 등반길 따라 시원한 물소리가 우리와 같이 오름을 오른다. 오름 가득 활엽수가 가득하다. 이따금 안개비에 모인 물방울이 주루룩 떨어져 물벼락이 되기도 한다. 숲이 우거져 해가 나더라도 해 보기는 어렵겠다. 제법 가파르다. 조금 전에 마신 술이 땀이 되어 비오듯 한다. 바닥에는 조릿대가 좍 깔렸다.
한참 만에 정상에 닿았다. 정상에는 몇 개의 나무 의자로 전망대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삼면에 나뭇가지도 쳐서 주변 경관을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짙은 안개가 10m 앞을 볼 수 없는데 전망대가 무슨 소용인가.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는 것에 만족하고 웃으며 단체사진과 부부 사진을 찍으며 한참을 즐겼다.
내려오는 길에는 편백나무 숲이 인상적이었다. 편백은 원래 초기 생육이 늦어 키우기 상당히 힘든 수종인데 수 십 년 된 아름들이 나무들이 빽빽하다. 골짜기를 따라 줄곧 내려가면 편백나무 동산을 볼 수 있다는데 우리는 가족야영장 쪽을 택해 내려와서 본격적인 편백동산을 보지 못해 아쉬웠다. 내년에는 꼭 보고 싶다.
오름을 내려와 다시 휴양림 산책로를 걸었다. 키 큰 삼나무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젠 안개에 더해서 비까지 내리기 시작한다. 후문 쪽에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생태 관찰로를 따라 걸었다. 나무 판자로 숲속에 마루를 놓아 사람들이 걷기 좋게 만들어 놓은 길이다. 숲의 생태를 잘 관찰할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참식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졸참나무 등이 울창하다.
오늘은 점심을 특별히 마련했다. 휴양림에서는 조리행위가 허용되기 때문에 삼겹살 파티를 계획한 것이다. 작년에도 그랬다. 금년에는 날씨 때문에 참석률이 저조 했지만 준비는 철저했다.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음식 준비도 충분히 했다. 마침 새로 지은 취사장을 찾아 바닥에 자리를 깔고 맛있는 삼겹살 파티를 즐겼다. 손녀가 갑자기 태어나는 바람에 참석은 못했지만 고기와 밥과 커피까지 준비해서 보낸 운공부인과 진시기부인, 야외에 와서 까지 남편과 친구들 공양에 지극정성을 보여준 햇살엄마, 꼴찌공주, 남산부인께 머리 숙여 고마움을 전하다. 안개 속에 낭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이 있는 오늘의 산행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2006. 7. 20)
첫댓글 결석을 했지만 글을 읽고서 절반은 산행을 참가한 기분이 드네. 햇살의 표현방식이 부담없이 뱉어내는 산책 기분을 그대로 느낄 수 있으니 말이네. 결석을 하고보면 궁금증이 많더라. 김립은 해외로 갔나? 나의 유언장은 언제 쓸꼬?
산행보고 나름대로 열심히 썼는데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아 심란했었는데 도원이 댓글 달아주어 그나마 위안이 되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