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이상한 영화경험은 처음이다. [호텔 비너스]는 일본 영화다. 그런데 출연배우들이 전부 한국어로 대사를 한다. 조은지 등 몇몇 한국배우들이 출연하기는 하지만, 일본 배우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고 감독이나 스텝들도 모두 일본인들이다.
영화의 국적을 구분하는 기준은 자본이다. 이명세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으면 한국 영화가 아니라 미국 영화다. 박중훈이 호주에서 영화를 찍으면 그것은 호주 영화다. 감독이나 배우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영화를 만든 자본이 어느 나라인가에 따라 영화의 국적이 달라진다. 따라서 [호텔 비너스]는 일본 영화다.
최근, 다국적 영화제작이 늘어나고 있다. 박찬욱, 미이케 다카시, 프루트 챈 감독 등의 단편 영화 3편을 모은 [쓰리, 몬스터]는 한국 일본 태국의 3개국 합작 영화다.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는 거의 대부분 홍콩 자본으로 만들어졌다. 홍콩의 프로듀서 빌 콩이 제작비 전액을 투자했지만 한국측 지분이 있어서 한국 홍콩 합작영화로 기록된다. 이렇게 영화 제작에 있어서 외국 자본이 유입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EU로 통합되고 있는 유럽에서 이런 다국적 영화 제작은 더 이상 뉴스거리도 못된다.
그런데 [호텔 비너스]는 일본 자본으로 만들어졌고 일본 감독이 연출했으며 스텝들이 전부 일본인이고 배우들도 대부분이 일본인이지만, 한국어로 대사가 만들어졌다. 영화 찍고난 뒤 나중에 성우들이 더빙한 것이 아니라, 일본 배우들이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어로 대사를 한 것이다. 그러니 125분동안 극장 안에는 서툰 한국어로 가득 넘쳐 난다.
연세대 외국어학당의 한국어 공부하는 교실도 아니고, 추석 때 외국인 장기자랑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서툰 한국어로 말하는 외국인을 보는 것 같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125분의 상영시간을 견디어야 한다. 견디어야 한다 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영화 매체의 가장 중요한 전달 수단인 배우들의 대사가 자연스럽지 않고, 그 언어를 너무나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귀에는 거의 고문으로 느껴질 만큼의 인내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호텔 비너스]는, 우리에게는 초난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쿠사나기 쯔요시 주연의 영화며, TV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나 광고,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던 다카하타 히데타 감독의 데뷔작이다. 한국어로 앨범도 내고 국내에서도 한동안 활동했던 초난강은, 일본 내에서는 대표적인 아이돌 스타로 무서운 지명도를 갖고 있는 가수다. SMAP의 멤버로서 가수 활동을 하는 한편, TV 드라마, 연극, 영화 등에서 연기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초난강은 일본 내의 대표적인 친한파로서 한글 교본 [Book]도 출판했고 노무현 대통령과의 대담이 일본 TV 프로그램에 방영되기도 했다.
영화 자체보다 우리가 갖는 가장 큰 의문은 왜, 일본 자본으로 일본 배우들과 스텝들이 만든 영화에 한국어로 대사가 사용되었을까 하는 문제다. 아직 제작사측의 명쾌한 해답은 없다. 혹시 어떤 마케팅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은 아닐까 의심의 시선도 여전하지만, 그러나 한일 양국의 문화교류를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들에게는 외국어인 한국어로 125분동안의 대사를 하는 고통스러운 작업을 오직 문화교류를 위해서 시도했을까, 그리고 영화는 거대 상업자본이 들어가는 매체인데 아무런 상업적 이해 없이 그런 일들이 가능할 것인가, 아직도 의문은 명쾌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이 독특한 영화는 한국도 일본도 아닌,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지난해 9월부터 10월 사이에 촬영되었다. 그래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로 휩싸여 있다. 모노톤으로 찍혀진 화면은 매우 예술적이다. 정성스럽게 찍혀진 감각적인 쇼트는 이 영화의 지향점이 말초적인 상업적 흥행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특한 스타일리스트의 영화로 기억될 [호텔 비너스]의 마지막 엔딩 부분에서 비로소 칼라의 색감이 나타난다. 현재의 시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무대는 비너스 호텔. 여장 남자인 호텔 주인 비너스는 항상 1층 카페 구석에 앉아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고 있다.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이라는 남자와 그의 딸 사이라는 소녀가 비너스 호텔에 찾아온다. 웨이터 초난(초난강 분)은 말이 없는 사이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비너스 호텔에는 한때 유능했지만 한 번의 실수를 자책하며 알콜중독자가 된 닥터(카가와 테루우키 분)와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는 그의 와이프(나카타니 미키 분), 꽃가게 주인을 꿈꾸는 처녀 소다(조은지 분), 킬러 흉내를 내는 소년 등이 거주하고 있다.
호텔 거주자들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인물들은 각각 다른 사람들과 조금씩 관계 맺기 시작한다. 초난의 슬픈 과거는, 3년 전 사랑하는 여인이 마약중독자가 운전하는 차에 치어 숨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소다는 다음 날 사라진다. 그녀는 그동안 꽃가게를 맡기 위해 마약 운반 일을 하고 있었다. 인물 관계의 핵심에는 웨이터 초난이 있다. 그의 직업은 다양한 구성원들을 서로 연결짓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내러티브의 핵심은 부녀간인 가이와 사이다. 그들의 슬픈 과거는 후반부에 탄력을 부여한다.
비너스 호텔의 거주자인 8명의 이야기가 서로 관계 맺으며 전개되는 [호텔 비너스]의 내러티브는 새롭지는 않다. 호텔 구성원들의 각각 다른 인생 여정이 들어나면서 그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가 전개되는 방식은 매우 낯익은 것이다. 그러나 자극적이지 않고 상업적 충동이 느껴지지 않는, 미학적 쇼트와 미장센, 그리고 모노톤의 화면과 서툰 한국어 대사는 이 영화를 매우 독특하고 낯설게 만들어준다.
엔딩 부분에 삽입된 짧은 씬,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한국인 손님에게 초난은 [한국에서는 한국말을 써야지]라고 핀잔을 준다. 이 말은, 지금까지 125분 동안 거의 고문에 가깝게 전개된 서툰 한국어 발성을 모두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초난강의 한국 사랑이 일시적이거나 상업적인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시청각적 요소가 종합된 영화 매체에서 청각적 대사는 매우 중요하다. 시각성의 압도적인 영향력 아래서 영화의 청각적 요소가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었다면, [호텔 비너스]는 얼마나 배우들의 대사나 발성 등 청각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역설적으로 가르쳐준다. 물론 이 영화의 의미는 또 다른데 있다. 그 많은 대사를 한국어로 외우고 또 그 대사에 감정을 실어 연기했을 일본 배우들을 생각하면, 이 정성이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욘사마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한국과 일본은 예전보다 훨씬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호텔 비너스]는 그 가장 중요한 징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