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퇴근길이다. 하늘은 단단한 어둠으로 조여있고, 거리의 불빛이 밤바람에 일렁인다. 미등을 켜니 시야에 흐릿한 밤안개가 비춰온다. 낮에는 볼 수 없었던 작은 하루살이들이 빛살을 뚫고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잠시 속도를 줄여 그들을 비켜주는 여유도 가질만한 시간이다. 밤 숲길로 들어섰다. 굽이진 길을 타고 재를 넘어서니 나무들의 속살거림이 들려온다. 진달래 꽃도 지고 동백꽃도 떨어진 봄의 끝자락에 무성한 초록 잎만 남았다. 이팝나무는 잔가지를 흔들며 마지막 봄을 털어낸다. 산 어귀로 들어서니 아카시아와 토끼풀이 하늘과 땅을 마주하며 하얗게 깨어난다. 시심詩心이 몸을 툭 건드릴만한 풍경이다. 자정 무렵에 지켜보는 고요는 늘 남다르다. 구름이 걷히면서 머금었던 뚜렷한 빛들이 스며 나오니 어둑했던 산길이 꿈틀꿈틀 똬리를 풀기 시작한다. 엉긴 단어들이 머릿속에 고여 있다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밤멀미를 피할 겸 차에서 내려 나무를 바라본다. 담쟁이 덩굴이 노송의 밑둥부터 휘추리까지 온몸을 비틀면서 친친 둘러 감으며 천천히 기어오르고 있다. 줄기마다 흡착근을 깊게 내린 생명력이 놀라워 덩굴 잔가지를 하나 꺾어 살짝 깨물어본다. 내 마음의 글샘에도 옹골찬 생각이 차오르기를 바라지만 옭아맨 글줄기는 세월 먹은 새끼줄마냥 툭툭 끊어지고 만다. 하고픈 말이 글로 옮겨지지 않아 자꾸 마음만 계절을 앞질러 간다. 한여름의 세찬 계곡물 소리를 떠 올리고, 가을 산의 붉은 아우성에도 귀 기울여 보며, 설국의 계절도 생각해 본다. 그러나 떠올려진 글자들은 배배 마르고, 갈지 못한 날선 문장은 폐부를 찌르며, 무딘 길은 거치적거리기만 하다. 생각의 구덕에는 빈곤의 무게만 쌓여진다. 밤바다로 고개를 돌린다. 바닷물의 찰찰찰 차오르는 소리가 다가온다. 바위는 상처 난 파도를 잠재우려고 보득솔 그림자를 한껏 끌어당긴다. 등댓불이 휘돌며 까물거린다. 실눈을 뜨고 생각줄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본다. 검은 바다가 섭섭하도록 돌아앉은 작은 섬이 보인다. 마치 굴려내지 못한 언어들이 마음에 갇힌 채 꿈쩍하지 않는 모양 같다. 물 속에 잠겼던 바위가 파도 위로 드러나는 모양을 보니 글의 씨앗이 터질 것 같기도 하다. 봉긋한 글의 씨앗, 그 모양새의 섬을 어디선가 본 듯하다. 대가야 유적지인 고령의 고분군에 간 적이 있다. 비탈진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능선에는 봉분들이 낙타 등처럼 줄지어 솟아 있었다. 봉분 위에는 길섶에서부터 피기 시작한 하얀 개망초가 수의를 입혀놓았다. 사막의 낙타 섬을 지고 다니는 낙타 뙤약볕에 타고 있는 봉분을 보며 능 비탈에 앉았다. 오월 햇살은 겉눈을 가리고 심안心眼을 드러내주며 무딘 살갗을 태워 심감心感을 일깨우게 해 준다. 봉분의 잔디를 손길로 쓰다듬는다. 천오백 년 전 고대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우륵의 가얏고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는 울림으로 이어져 바람을 타고 계곡을 넘어 사람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 울림은 다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넘나들며 흔들리고 구르고 굽이치면서 깊고 크게 때로는 애절하고 절박한 떨림의 몸짓으로 실려갔을 것이다. 이제 망국의 음이 되어버린 비창한 가야금 선율은 봉분 속으로 스며들어 멸망한 왕국의 아픔만이 까슬하게 전해진다. 봉분은 땅 위에 드러난 섬이다. 왕의 무덤은 가야의 역사를 전해주니 언어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그 속에는 지금까지 읽어내지 못한 언어들이 가득 차 있다. 왜 가야 백성들은 신라인들과 다르게 왕을 평지에 묻지 않고 하늘 아래 언덕에 묻었을까. 죽어서도 높은 곳에 자리 잡아 백성을 다스리기를 바라는 순박한 마음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들의 권위에 제대로 숨 쉬지 못했을까. 봉분은 가까이 기대어 선왕의 체온을 느껴보라 하고, 귀 기울여 순장된 신하의 한을 들어라 눈짓한다. 개망초가 바람결에 흔들리니 대가야의 전설이 다시 살아 숨 쉰다. 섬은 흔들리지 않는다. 바다의 섬은 갯바람과 거친 파도에도 묵묵히 버텨나간다. 산의 섬은 골바람과 차디찬 폭설에도 봉분 끝으로 위엄을 지킨다. 바다의 섬은 등댓불이 감싸안고 산의 섬은 달빛이 지켜준다. 지금 내 마음에도 작은 섬 하나를 품고 있다. 그 섬은 글의 씨앗을 보듬고 새순을 틔우기 위해 밤새워 이슬을 맞기도 한다. 마음의 섬은 스스로 지켜가야 한다. 과욕의 버캐를 걷어내고 해풍을 견딘다면 언젠가 언어의 물살에 흠뻑 젖어드는 날이 올게다. 송간松間을 비집고 들어오는 새벽공기를 한 모금 들이키니 비워낸 몸이 가벼워진다. 마음의 행간行間에 햇동이 고이기 시작한다. 등살에 글이 꿈틀댄다.
(김정화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