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일원이라고 했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두 군데였다. 화천 비수구미와 평화의 댐. 지난 9월에 정식 결성된 중동중고등학교 기독신우회(약칭 중동신우회)의 추계 단합대회 여행지가 말이다. 어떤 이들은 가을 소풍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들은 단풍놀이라고 했다. 아무러면 어떠랴!
모두 부지런했다. 장노년의 어른들이 초등학교 저학년마냥 시간을 지켜 모였다. 새벽이라고 해도 좋을 시각이었다. 오전 6시 30분부터 모이기 시작해 7시 정각에 출발하기로 했으니….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것이 눈으로 확인될 즈음이었다. '여주동행'을 믿으로 속으로 기도했다.
김동진 장로(70회)의 차에 동승해 순복음강남교회에 도착하니 6시35분, 문흥식 집사(72회)가 1착으로 도착해 책상 위의 명찰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이번 행사에서 명찰을 준비해오기로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손수건 위의 명찰이 오버랩되었다. 색지에 앞뒤로 정겹게 인쇄한 이름이 그랬다.
7시가 조금 지나 우리는 달뜬 마음으로 출발을 했다. 이번 소풍의 참석자들은 51회부터 74회까지 23년을 터울로 하고 있었다. 중동고 110년의 역사에서 23년이 결코 긴 기간은 아니지만 참석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볼 때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든든한 마음으로 치환되었다.
30 여 명의 신우회 회원들이 '중동신우회 추계 단합대회'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출발 직후 예배를 드렸다. 우리 교회 행사는 예배로 시작해 예배로 끝내는 좋은 전통을 갖고 있다. 나의 인도로 김성환 장로(65회)가 행사를 위해 기도했다. 이어 신진수 목사(63회)가 '100배의 결실'(창 25:12)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이른바 차상(車上) 예배! 숙연한 출발이 여느 것과는 달랐다.
이어 자기 소개 시간 수개월에서 몇십년에 이르기까지 만남의 간격은 다양했지만 지닌 마음은 한결같았다. '반가움'과 '기쁨'. 비슷한 의미 같지만 우선 이 두 단어로 정리해 두어야겠다. 모두의 얼굴에 씌어 있었다. 회장 백강수 장로(64회)의 인사말과 황교장 선배(51회)의 격려의 말은 자기 소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중간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려 차 마시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논스톱으로 달린 것이 되었을 것이다. 해산령쉼터에 도착했다. 현대화에 물든 눈은, 쉼터를 잘 포장된 마당에 네모반듯한 건물들을 그리고 있었지만 크게 빗나갔다. 그런데 통쾌함이 뒤따른 것은 왜일까. 인공보다는 자연이 더 좋다는, 그런 마음의 반영이 아닐까.
'해산령'이란 크지막한 표지석이 아니었다면 이름 없는 여느 산촌의 초라한 뜰과 다를 바 없었다. '육지 속의 섬 마을'로 불리는 오지 중의 오지 비수구미 마을을 찾아가면서 번듯한 쉼터를 그렸다는 것이 갑자기 미안해졌다. 마치 신성한 하나님의 작품을 사람의 힘으로 변형시킨 것을 기대한 것 같아서 말이다.
우리는 표지석을 등지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플랜카드를 앞에 펼치고 누른 사진기 플래시는 이곳을 처음 찾은 사람들의 신고식이기도 했다. 화천 입구에서 합류한 최남식 목사(68회)가 해박한 지식으로 화천을 아니 강원도를 청산유수(靑山流水)로 소개해 주어 우리의 여정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비수구미 마을 트레킹 코스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힘은 들었지만 상쾌함이 수반되는 이유는 왜인가
'비수구미 마을 6Km'라고 되어 있는 표지판을 일별하며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다리가 불편한 내가 조금의 무리를 감수한다면 6Km 산길쯤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었다. 허나 두 가지가 나를 저어케 했다. 힘의 축적이 꼭 필요한 날이었다.
다음 날(10월10일)로 예정되어 있는 결혼식 주례가 마음에 걸렸고, 또 6Km에 더해 비수구미 마을에서 점심을 먹은 뒤 2Km가 넘는 파로호 수레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트레킹 할 마음을 접어야 했다. 마침 버스 기사로 섬기는 집사님이 1인 탑승 자가용 기사를 자처(?)한 것도 한 몫 거들었다.
덕분에 우리 두 사람은 비수구미 행 파로호 임시 선착장에 버스를 주차한 뒤, 마침 데리러 온 보트를 타고 그 마을로 들어갔다. 이런 경로로 비수구미 마을로 들어가니 '육지 속의 섬 마을'이라는 것이 더욱 실감났다. 1인당 3천원의 보트 타는 삯을 받지 않는 특별 봉사라고 했다.
해산령쉼터에서 출발한 지 2 시간 가까이 흐른 것 같은데 예약한 민박 음식점(청기와집)에 와 있는 사람은 문흥식 집사 외 너댓 명 뿐이었다. 내리막길 트레킹 코스라고 해도 자갈이 널려 있는 비포장 길이 걷기에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술과 체력의 차이로 달리기 선수가 시차를 두고 골인하듯 한 명 두 명 도착했다.
힘들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비수구미 트레킹 코스는 하나님께서 주신 천혜의 선물이라며 감탄사를 아끼지 않았다. 육지와 하늘을 차단해 놓은 듯한 울창한 수풀, 그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수정보다 더 맑은 청정 계곡물, 이곳도 열흘쯤 뒤면 울긋불긋 단풍 향연이 절정을 이룰 것 같다며 일찍은 소풍을 아쉬워했다.
30 여 분(시간)을 사이에 두고 30 여 분(사람)의 일행들이 청기와식당(이렇게 명명되어 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청기와집이 아니라 청슬레이트집이라고 해야 옳다) 한 열(列)의 식탁을 독점했다. 메뉴도 산채나물밥으로 통일! 이런 곳까지 와서 먹을거리를 고르는 것은 사치일 터!
산채나물밥은 시장하던 우리의 배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청정지역 비수구미 마을 근처 산에서 직접 채취한 나물은 먹어도 먹어도 자꾸 수저가 갔다.
에너지를 소진했을 때 음식을 대하는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음식을 단숨에 해 치우는 타입이 그 하나이고,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아 입맛까지 상실한 경우가 또 다른 하나이다. 내 주위에 자리잡은 분들도 그렇게 나뉘었다. 나 역시 후자에 속했다.
여러 종류의 산채나물이 접시에 담겨 나왔다. 청정지역인 그곳에서 직접 채집한 나물들이라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나물 이름들을 알지 못한다. 종류의 다양함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발 딛고 사는 지역의 상이(相異)에서 기인하는 탓이 더 크리라.
매일 먹는 밥은 아껴 두고 산채 나물을 계속 입에 담았다. 마치 새우깡 과자를 먹었을 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먹으면 먹을수록 손이 가는…. 세 접시까지 비운 사람도 있다는 말이 들렸다. 이 산채나물밥이 생각 나 일부러 이곳까지 온 사람이 적지 않다고 주인장은 자랑하듯 말했다.
파로호로 단절된 비수구미 마을과 뭍을 이어주는 현수교. 이곳에서 우리는 피로함도 잊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현수교(懸垂橋)에서 우리는 동심으로 돌아가 마음 무장을 해제한 채 기념사진을 찍었다. 누군가가 우리의 삶에서 남는 건 시진밖에 없다며 분위기를 북돋우었다. 그때까지 일행은 남은 수레길의 고난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2Km 남짓의 길이었지만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길이었다.
나는 운전기사와 함께 타고 왔던 보트에 의지해 버스에 도착해 있었다.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 자연의 한 가운데 내버려진 듯한 나를 운전기사는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이런 데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기뻤다.
다음 방문할 곳은 평화의 댐, 전에 한 번 들렸던 적이 있는데 규모와 내용이 많이 확장되어 있었다. 이곳 방문엔 한국수자원공사 산하 기관 대표를 지낸 노재화 선배(51회)가 신경을 쓰고 많이 도와주었다. 시간에 쫓겨 골고루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먼저 찾은 곳이 물문화관. 내부에 볼거리가 많았지만 우리는 평화의 댐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격인 15분짜리 영상을 보았다. 평화의 댐 건설의 당위성과 용도를 북한의 금강산 댐과 비교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도 분단으로 인한 낭비의 한 부분을 생각했다.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은 남북 모두에게 군사비뿐만 아니라 쓸데없이 기간시설에까지 혈세를 쏟아 붓게 만든다. 이런 예산을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해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평화의 종. 탄피를 모아 만든 이 종은 1만 관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타종을 하면서 남북의 평화 통일을 염원했다.
그 다음 찾은 것이 평화의 종. 신라 선덕여왕 신종을 본떴음직한 이 종은 1만 관의 무게를 갖고 있다고 했다. 분쟁국들에게 기증받은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전쟁의 상징 탄알 껍데기를 녹여 만든 종은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들은 뒤 우리는 양방 다섯 명씩 짝을 지어 타종의 경험을 했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긴 여음(餘音)이 내게는 "평~화~여~ 어~서~ 오~라~"라는 소리로 들렸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그 울림은 평화 통일의 간절함을 배가시켰다.
우리는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5시 30분 춘천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춘천에서, 아니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막국수집이라고 했다. 벽엔 전직 대통령이 와서 식사를 한 곳이라는 선전 문구와 함께 주인장과 악수하는 사진을 보란 듯이 붙여 놓고 있었다.
춘천 막국수 집에서 저녁을 대접한 김병렬 선배에게 중동신우회장 백강수 장로가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메인 요리 막국수가 나오기 전 수육과 빈대떡이 우리의 구미를 당겼다. 유명세를 타는 집답게 맛이 있었다. 오늘 여행에 안내를 맡아 풍요로움을 더한 화천 명성교회 최남식 목사(68회)의 식사 기도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오늘 저녁은 그곳에서 병원을 경영하는 김병렬 선배(51회)가 제공했다.
110년의 중동학교 역사에서 8만 명 가까운 동문을 배출하다 보니 한반도 방방곡곡 나아가 세계 곳곳에 동문들이 산재해 있다. 연(緣)이 가늘어져 가는 세태에 중동 동문이라는 끈은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고마운 일이다.
고등학교 동문들이 서로 지니고 있는 중요한 끈이 가감 없는 정(情)이다. 여기에 우리 중동은 '의리'라는 귀한 미덕을 하나 더하고 있다. 잠깐의 친교 같았는데 시간이 훌쩍 흘러 갈 때가 되었다. 석별은 늘 아쉬움을 동반한다.
우리는 음식점 앞에서 오늘 춘천에서의 호스트 김병렬 선배, 재춘천동문회 우종춘 교수(65회)를 가운데 세우고 기념사진을 찍어 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마치 악동들의 유희마냥 우리의 치기는 끝에 방점을 찍을 줄 몰랐다.
석별의 정을 기념사진으로 남겼다. 좌로부터 백강수, 황교장, 김병렬. 노재화 제 선배와 필자 이명재 목사
이렇게 해서 한글날 공휴일 하루를 꿈결처럼 보냈다.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숨어있는 동심을 맘껏 발산했다. 버스가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진입할 즈음 고속도로가 극심한 체증을 보였다.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교제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니 그것조차 고마웠다.
출발지 순복음강남교회에 도착하니 밤 9시 반. 14시간 반을 우리는 자연에 몰입되고 사람들에 심취되어 보낸 셈이다. 이런 것을 두고 몰아지경(沒我地境)이라고 하는가. 함께 한 분들이 고맙고 뒤에서 사랑으로 지켜주신 하나님이 더 감사했다. 그분께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