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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역사의 고장 이 곳 산청은 예부터 위대한 분이 많으므로 선비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오고 있습니다. 선비는 먼저 학식과 덕망을 갖추어야하고 아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예절에는 실수나 과오를 저질러서는 아니 되고 자신에게는 추상(秋霜)같이 엄하면서도 남을 용서할줄알고 가난하게 살아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아니하며 옳은 일을 위해서는 생명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바른말을 하다가 벼슬이 떨어지고 귀양 가는 것을 오히려 큰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다. 우리 산청에는 일찍부터 이러한 기풍(氣風)이 조성되어 있다. 고려말엽에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당시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다가 원경(元京)에서 덕흥군(德興君)의 모반(謀反)에 불응(不應)하여 운남성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가 원나라에서 당시 엄하게 유출(流出)을 막는 목화씨를 붓대롱속에 넣어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나라에 가져와서 온 백성에게 따스한 솜옷을 입게 하여 주었는데 그것은 국민을 위해서는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의(大義)와 소리(小利)를 분명히 구분하여 행한 것이었다. 또한 선생은 부모에 대한 효행(孝行)이 뛰어나서 포악한 왜구(倭寇)마저도 선생의 효심에 감동되어 한 고을이 병화(兵禍)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항상 내 고장 위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우리 자손만대에 바르게 전하여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산청의 고유전통 문화를 바로잡는 일이며 이곳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며 이곳의 역사를 가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국 어디를 가든지 산청에 산다고 하면 참 좋은 곳에 살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으며 또 속으로 어깨를 추스르게 되는데 그 까닭을 알지 못하거나 또 알더라도 흔히 경관이 아름다워서 물 맑고 산 높은 지리산이 있어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산청 사람으로서는 결코 자랑스럽지 않다하겠다. 오늘날 여러 사가(史家)들이 이곳 산청을 선비의 고장, 충절의 고장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선중엽(朝鮮中葉)에 남명조식(南冥曺植)선생은 이곳 지리산을 찾아 덕산에 자리 잡고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뒷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되자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분연히 일어나 도포자락을 걷어 올리고 장검(長劍)을 뽑아 들고 이 강토를 지켰다. 그리고 덕계오건(德溪吳健)선생은 청렴강직으로 일관하여 국가의 비정을 바로잡고 그 정신을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구한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선생은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하여 전국유림을 대표하여 파리장서(巴里長書)를 평화회의에 보내고 일본경찰의 고초를 겪다가 옥고로 돌아가셨다. 이러한 정신이 온 고을에 팽배하여 이어져왔다. 고려조정에서 삼우당문익점선생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바른말을 하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이곳 산청 단성고을로 내려와서 두문불출하시고 오직 목화재배에만 정성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 뒤 이성계가 여러 차례 선생을 불러도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그 뒤 이성계 조정에서 만들어낸 태조실록과 고려사 열전에 충신을 역으로 몰아 문선생의 기록들이 잘못되게 전하여오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처럼 그릇된 역사로 인하여 선생의 거룩한 얼이 이 두 사서(史書)에 의하여 그 빛을 잃고 있으니 우리 산청의 큰 인물이신 삼우당선생의 절의(節義)와 애국애족의 참된 모습을 재 발굴하여 그 분의 인간상을 재조명하는 기회로 삼는 바입니다.
삼우당 선생의 위업과 왜곡된 역사의 기록
삼우(三憂)는 세 가지 근심과 걱정을 의미하며 자신의 호를 삼우라고 하셨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나라가 진흥(振興)하지 못함을 걱정하며, 둘째 성인(聖人)의 학문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며, 셋째는 자신의 뜻이 확립되지 못하였음으로 삼우란 호의 의미가 깊다 할 것이다.
삼우당 문익점 선생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 신미(辛未) 1331년 2월 8일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충정공(忠貞公) 문숙선(文叔宣)의 둘째 아들로 문벌높은 선비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올바른 가정교육을 받았으면 일찍이 학문의 길에 올라 가정이곡(稼亭李穀)선생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그 제자 삼은(三隱)의 한사람이었던 목은 이색(牧隱李穡)과 동문으로 함께 정동향시(征東鄕試)에 합격하였고 계속 학문에 정진하여 그 뒤에 또 포은정몽주(圃隱鄭夢周)선생과 같이 신경동당시(新京東堂試)에 급제하는 등 올바른 윤리관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높은 교육이 근본(根本)이 되어 당시에 세상이 기울어져도 휩쓸리지 않고 오직 바른 자세를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태풍이 불 때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부러지듯이 과도기의 정치혼란을 만나 숫한 역경 속에서 일생을 얼룩지게 살아오셨다.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朝鮮)이 서면서 도덕 정치가 폐쇄되고 세력정치를 주도함에 따라 당시 많은 중신(重臣)들이 함몰되었고 그 세도에 굽히지 않았던 문익점선생은 조선조의 사서(史書)에 유린되어 정의(正義)로웠던 선생의 위업이 왜곡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근거는 태조실록(太祖實錄) 고려사(高麗史) 열전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먼저 태조실록에 기록된 내용을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 7년 6월중에 전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문익점이 졸(卒)하다. 갑진년(甲辰年)에 진주에 도착하여 그 씨앗 반(半)을 본 고을사람 전객령(典客令)으로 치사한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어 심어 기르게 하였더니 오직 한 개만이 살게 되었다.
천익이 가을에 씨를 따니 백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그 씨를 향리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익점자신이 심은 것은 번영하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이 천익의 집에 머무르면서 인하여 실 뽑고 베짜는 기술을 가르쳐주어 천익이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한필을 만드니 마을에 전하여 십년이 못되어 온 나라에 퍼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 년에 익점을 불러서 전의주부(典儀主簿)를 삼았다. 이상과 같이 기록하였는데 이는 목면 유래를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그 근거는 첫째, 목면배양년도를 갑진년이라고 한 것이 잘못된 것이다. 선생의 연보와 사실기(事實記) 효자 비각기, 묘비 등 여려고증에 의하면 계묘년에 순유박사로 좌정언(左正言) 벼슬에 승진하여 이공수(李公遂)와 같이 사신으로 원조(元朝)에 들어가서 그 부당성을 간하다. 순제(順帝)의 미움을 사서 갑진년에는 원나라의 운남성(雲南省)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삼추(三秋)의 세월을 보내고 귀향하였는데 그때가 정미년 2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갑진년 목화시배(木花始培)설은 날조 된 것으로 보아진다.
둘째, 목화 천익 배양 설에 대하여 의문이 되고 있는 것은 3년 동안 귀양살이에서 풀려 죽음을 무릅쓰고 오직 내 조국의 헐벗은 백성을 생각하여 소중히 감추어서 가지고 온 몇 알에 불가한 그 귀중한 것을 남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는 것이 공감 할 수 없는 것이며 더욱이나 일가친척과 부모형제가 번창하게 한곳에 살고 있었는데도 타인에게 부탁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설령 사실이 그렇다면 그처럼 가까운 사이에 네 것 내 것을 가려 재배공적을 내 세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천익이심은 것이 살아서 3년을 가종하여 정미년봄에 향리사람들에게 씨를 나누어 주었는데.... 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번영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목면의 가공기술까지 정천익이 모두 창조하였다... 라고 하여 물레와 무명베의 유래를 무색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물레를 개발한 사람은 문선생의 손자 래(萊)라는 사람 이였으므로 그 이름을 인용하여 실 뽑는 기구를 문래(文萊)라고 하였는데 와전되어 물레라고 하며 또한 베짜는 기구는 래의 동생 영(英)이 개발하여 문영(文英)틀이라 하였으며 베 이름 또한 문영베라고 하였는데 문영베로 불러지다가 와전되어 무명베라고 불러지고 있다... 라고 선생의 실기에 적고 있다.
셋째, 이사실(목면가공기술보급)이 알려지니 익점을 불러 전의주부로 삼았다..라는 내용은 정천익과 그 여종까지 공로를 기록하면서(천익과 그 여종에게는 아무런 대우를 보이지 않고) 익점에게 벼슬을 주었다.. 라는 것은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있으며 문익점선생에게 전의주부를 주었다는 것은 선생의 품위를 크게 위축시킨 것이다. 그 당시 전의주부는 종7품의 하급관리로서 선생의 초기 관직인 좌정언 정6품에도 못 미치고 있으며 그때 우왕원년에 선생은 중현대부 좌대언우문관제학 정3품에 보임되셨다... 이상은 태조실록에 관한 것이며 다음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기록된 내용을 열거하여 본다.
고려사열전 문익점편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고려의 사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德興君)에 부(附)하였다가 덕흥군이 패(敗)하므로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와서 그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거의 다 말라 죽고 한 포기만 살아 삼년 만에 크게 번식되었다. 씨뽑는 기구와 실빼는 기구도 모두 천익이 창제하였다...
* 공양왕원년(1389) 이성계 시중(侍中)의 무리들이 추진하고 있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조준(趙浚) 이정(李靖)등이 강행을 시도하고 사전(私田) 불가론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나라 안은 매우 어지러워지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선생께서는 이색, 이림, 우현보들에게 앞으로의 나랏일을 염려하고 아프다는 핑계로 그들의 계혁에 서명을 거부하고 다음날 바로 서연(書筵)(임금을 모신 회의장)으로 나가니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조준이 선생을 탄핵(彈劾)하기 시작하였다. 탄핵골자는 문익점은 본시 무명인사로서 시골에서 밭갈이를 하였는데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현량(賢良)이라 불러 간의대부로 제수하사 좌우에 있게 하시고 중략하고.... 왕의 곁에서 성치를 보좌해야 할 것임에도 충직한 모양만 꾸미고 간정(정치의 옳고 그름)하는 절개가 없으며 근일같이 주상을 모시고 있는 동료 오사충, 이서 상소하여 전제에 찬동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익점은 가진록(봉급)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말도 언급한바 없고 그 의논에도 참여하지 아니하고 대중의 비방을 피하여 자기 안전을 지키는데 급급하고 있으니 이는 왕과 사림이 기대하는 뜻을 져버리는 행위로서 마땅히 간직을 물러나야 할 것이라고 하여 어린 왕이 그들의 뜻을 따라 선생을 물러나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선생의 인품을 흐리게 하였는데 이 모두가 날조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 수 있다.
첫째, 덕흥군에 부하였다는 것이 왜곡된 것이다. 선생은 원나라에 가서 원제로터 덕흥군에 따르라는 명을 받고 바르지 못한 덕흥군의 뒤를 따를 수 없다는 글을 다음과 같이 올렸다.
“미천한 소신이 외람되게 천자님께 글을 올리나이다. 신은 이제까지 원통함을 품과 마음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을 올립니다. 비록 적은 나라 소신이라고 바르지 못한 일을 보고도 어찌모르는척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거짓을 구며 남을 헐뜯고 죄 없는 군주를 물러나게 함은 정당한 일이 못 되오니 이들의 야망을 버리게 하옵소서. 저의 나라 왕은 이제까지 선정을 베풀어 왔던바 아무런 잘못이 없나이다. 소신은 정의롭지 못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리들과 같은 하늘아래 있다는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차라리 죽어 지하에서 백이숙제와 같이 머물지라도 사대부의 자존의식은 버릴 수 없나이다.
이상과 같은 글을 올려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하셨고 선생은 또한 덕흥군의 정치업무 문서 수십 통을 소각하였으므로 그 모략을 저지하였던 대담성을 나타내었는데 그러한 큰 뜻을 무시하고 덕흥군에 아부하였다고 한 것은 충신을 역으로 몰아 역사의 오점을 남긴 것이다.
둘째, 선생은 좌사의 시학으로서 상서하여 위학 하는 도를 논하니 그때에 조준 간관 이정 등이 사전(사유농지법)은 불가하다고 다투므로..... 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다음 이어지는 글에는 익점은 갖인록(봉급)을 잃을까 걱정하여 한말도 언급하지 않고 그 의논에도 참여하지 않았다하여 글이 일관성이 없으며 또 록을 잃을까 걱정하여 전제개혁에 찬동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그와는 달리 전제개혁에 찬동하지 않았으므로 록을 잃게 된 것이다. 속임수로 글을 구며 사서의 이미지를 흐리게 한 것이다.
셋째, 전제개혁안은 마치 조준이 창안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으나 그 당시에 토지제도가 물란 하여 백성들이 소작권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과도한 조세를 바쳐야 하므로 굶주리는 백성들이 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실태를 감안하여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여론이 여러 신하들로부터 거론되어 왔던바 그 당시에 국가에 공적이 두터웠던 선생이 구국정신으로서 시무론(시급한 정책) 8조를 상소하였는데 그것을 한번 살펴보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우리는 알수 있다. 건 학당(建學堂), 치향교(置鄕校), 입묘주(立廟主), 혁호복(革胡服), 정기강(整紀綱), 박세렴(薄稅斂), 건 의창(建義倉), 설 수침(設水砧)등인데 이중에서도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적게 하고 수로를 개척하여 물자 운반을 쉽게 하고 각 고을에는 창고를 지어 흉년에 대비케 하고, 5부에 학당을 세우고 작은 고을이라도 향교를 설치하여 인재양성에 힘쓸 것을 강조한 것을 보면 토지사전제도와 문교진흥정책의 비중이 높았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시무론8조는 신세력들의 저지로 모두 이룩되지 못했고 이성계의 조언에 따라 구상된 조준의 전제개혁안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조준의 전제개혁안은 모든 토지를 복구적인 국유정신에서 재편성하는 것으로 구세력이 가지고 있는 토지를 환원하여 새로운 규정에 의하여 재편성하게 되므로 고려 왕조의 최후를 종결하려는 의미와 동시에 신세력을 확장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그때 조준의 개혁안에 반대하였던 사람은 문익점, 이색, 우현보, 변안열, 권근, 유백유 등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반듯이 그 서열에 들어야할 문익점선생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역사가 잘못된 기록을 남기게 한 것이다.
아, 아... 선생께선 무엇을 위하여 몰아치는 태풍에도 휩쓸리지 않았을까? 고려조 절개가 그토록 중요하였을까? 오늘에 와서 그분의 백성을 위하는 깊은 마음속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근거로 조선조의 사서에 선생의 위업이 유린되고 있음을 알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사실을 개탄하여 저명하신 퇴계이황선생께서는 문선생의 효자 비 각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조준이 한순간에 억지로 험담을 꾸민 말이 어떻게 공(公)을 더럽힐 수가 있으랴. 그로인하여 선생의 절의가 더 한층 빛나게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잘 모를까 염려가 되도다. 하셨다.
또, 가선대부, 이조참판(吏曹參判), 이미(李彌)선생께서도 문선생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조준의 견식이 선생의 숨은 뜻을 엿보기에는 부족하여 이에 반문으로 그릇된 말을 만들어 선생을 탄핵하여 물러가게 하였으되... 그 후에 태종대왕이 선생의 뜻을 기리어 공에게 벼슬을 추증하고 세종대왕이 다시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를 가증하셨으며 그 자손들을 돌보아 출세하는데 특혜를 내리셨으며 이 문순공 황 퇴계선생은 선생의 효자비 각기에 기록하고 조 문정공 식 선생이 공의 묘사기를 기록하였는데 이 모두가 역사를 전하는 뜻이 높음을 근거한 것이다. 선생은 목면으로 나라의 커다란 공을 세우셨지만 학문에 있어서도 큰 뜻을 이룩하셨다.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정주(程朱) 정자와 주자의 서적이 왔을 때 이를 침착하고 세밀하게 추구하여 그 깊은 뜻을 깨달아 이 땅에 전할 수 있었으니 하늘이 도와 진실된 일을 내린 것이다.
아, 아... 문공(文公)이시여 교양의 시작 이였도다. 보이지 않는 그 혜택이 무궁토록 흐르지로다. 모든 함생(含生)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어찌 가히 있게 할 것인가? 라는 글을 쓰셨고 또 선생과 소년시절부터 농문으로 사귀어 온 목은 이색은 대사성의 직위에 있을 때 사성 이였던 선생에게 치하한 글이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문공(文公)은 목면으로 큰 공을 이룩하였는데 학문에 있어서도 역학을 창명하였고 효제와 성리학으로 사마한의 과습을 세거(洗去)하여 어두웠던 천도(天道)가 밝아졌으니 가히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종(宗)이 된다“라고 하셨고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사후서에 선생에게 드리는 글에는 내가 문충선공의 공로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남명조식, 퇴계이황, 일두정여창. 점필재 김종직, 한허당 김굉필, 모제 김안국, 사제 김정국, 추강 남효온 등 여러 현인의 유가(儒家) 유교의 학문에도 큰 뜻을 이룩하셨다. 문성공 안유(안향으로 전해짐)와 문충선공 두현인께서 우리나라에 유도를 계승하여 전해왔는데 그 덕의 깊은 뜻을 격양가(노래제목)의 한 구절에 임금님 힘이 어찌 미칠 것인가? 라고 했다. 안문(安文) 두어진 분의 덕택으로 고려가 되놈의 습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씨 왕조가 지위를 존엄케 할 수 있었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큰 뜻을 이룩하셨도다.
아, 아... 문공의 절개와 의리 조촐한 풍격이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이 되었도다.. 하시며 시로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전의 사람도 문공과 같으니 없었고, 후의 사람으로서 또한 문공과 같은 이 없었으며 뒤의 뒤에도 역시 문공과 같은 이는 없을것다. 내뒤의 뒷사람들이 선생에 대하여 알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이글을 남기노라. 이와같이 간곡한 글로서 선생의 위업을 극찬하셨다.
근세에 와서는 영특하고 현명하신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목화시배지에 사적비를 건립하게 하였으며 그때에 박대통령께서 내린 서한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귀선조 강성군 충선공 삼우당선생을 기념하는 비가 이제 강성(단성)의 옛고을에 우리생민(生民)이 모두다 축하를 올려야 할 것이요. 라고 하셨고 또 사단법인 진주문화원에서는 향토의 얼을 캐는 시리즈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제1집은 남명조식선생에 이어 제2집에는 삼우당문익점선생편을 발간하였는데 거기에 선생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고이창호(故李昌鎬)문화원장께서 발문을 쓰시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반론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삼우당 문익점선생은 우리겨레 불망(不忘)의 공덕을 세운 위대한 선인(先人)이다. 중략하고...
당시 공민왕의 사신으로 원나라에간 사람이 어찌하여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던가.. 또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귀국하였다 되어있는데.. 이를테면 모반의 대역죄를 저질렀던 사람이 어찌 다시 공민왕 치하로 귀국할 수 있었으며 또 귀국한 즉시로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겸 지제교 및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해서 덕흥군이 어떤 인물인지 살펴보았다.
덕흥군은 고려충선왕의 서자로서 이름은 탑사첩목아이며 어머니는 궁인인데 출궁하여 백문거집에서 낳았다. 어려서부터 원나라에 있었으며 원나라 황제께 아부하여 고려에 많은 해를 끼쳤으며 고려의 왕이 되려고 공민왕13년에는 최유와 함께 군사 일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침입하였다가 안우경, 최영장군 등에게 참패를 당하고 돌아갔다로 되어 있는데 선생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나라 황제가 덕흥군을 따르라는 것을 반대하다가 남방으로 귀양 갔던 것이다. 그런 것을 뒷날 이태조 4년에 구민 고려사 열전에 유부덕흥군이라는 허위의 말을 써 넣어 오늘의 혼선을 빚게 한것인데 그 원인은 선생께서 이씨 왕조의 혁명을 지지했거나 또 이태조의 부름에 응하여 벼슬에 나갔으면 이런 곡필(曲筆)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미루어 선생께서 덕흥군편에 서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또 하나의 근거로 이태조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건만 같이 여조(麗朝)에서 벼슬을 살았을 때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으로 끝내 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절개를 지켜낸 사실을 들고 싶다.. 라고 적고 있다.
이와 같이 선생의 업적이 역사에 왜곡된 사실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서에 의존하는 오늘의 학자들이 영남의 인물지를 발간하면서 가장 제일먼저 앞서열에 모셔야할 문 선생을 일천 명의 서열에도 들지 않게 하고 있으니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목면유래또한 정천익공적설이 가시화되면서 최근에는 우리나라에 살아있는 역사유적의 하나인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 있는 이 나라 대통령이 지정한 사적제108호 문익점선생 면화시배지명칭도 고려사 및 태조실록 기록에 맞추어 문익점 선생 이름을 빼고 그냥 목면시배지로 지정한다고 문화재청에서 말하고 있으며 또한 이홍직박사는 몇 년 전에 국사대사전을 만들면서 목화유래에 대하여 실 뽑는 기구 문레와 베짜는 기구 베틀을 개발한 사람은 문선생의 손자인 문래와 문영인데 이 두 분을 정천익의 아들과 손자라고 오도하는 실수가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릇된 역사로 인하여 선생의 거룩한 얼이 두 사서에 가려서 그 빛을 잃고 있으니 이는 오늘의 사회를 다스리는 지성인들의 책임으로서 하루속히 역사에 왜곡된 실체를 밝혀 사리에 맞도록 역사가 전해지도록 해야 할 것이며 아울러 사서에 가려져 은폐되고 왜곡되어 있는 고려조 충신이시며 우리산청의 큰 인물이신 삼우당선생의 절의와 애국애족의 참된 모습과 인간상을 재 발굴하여 그분의 정신과 얼을 후세 사람들이 본받게 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삼우당 실기, 삼우당선생 연보, 효자비각기, 신도비문, 고려사열전, 태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원나라에서 남황(남황)으로 귀양살이 가면서 남긴 시문
이젠 이내 얼굴 대하기 어려울걸세
낯선 거친 먼 땅에서 살수 있을까
하늘이 감동하여 혹시라도 말머리에 뿔나면
그대는 알아라. 내 살아온 줄을
눈물이 쓸쓸한 비를 가려
만리남항길 아득하도다.
사람들아 의심 말라 나는 신염있어
젊은 기운 태산과도 같도다.
빨리 가자고 수레군 재촉하지 말어라
내 마음 고향 갔다 아직 오지 않았다
가을달이 뜰 때 그대 곁을 떠나
거친 땅에 가고 있네.
봄바람 불 때 다시 만나서
한번 웃어 볼때를 기다려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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