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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도산~삼성산 산행기
오늘은 불기(佛紀) 2559년 부처님 탄신일이다.불신자에게는 최고의 잔칫날이자
축제일이기도 한 날,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나 무종교인들에게
무관한 날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를 구성하는 직업군들이 휴일이나 휴업을 하고 있는 현실은 법적으로
이 날을 휴일로 지정한 사실에 근거를 두고있지만,법의 규제는 일쑤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유무에 상관없이 축제와 잔치 분위기에 동화하려는 문화의식은 이질적인
사상과 편향된 종교의식간의 융합에 이바지하게 되어 사회안정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는 예수탄신의 크리스마스 성탄절 행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겠다.
등산을 일상(日常)으로 삼는 나에게는, 대개의 불교시설이 산중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인이지만 자연스레 접촉이 잦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도 빠뜨릴 수는 없겠지만, 기왕지사 부처님 탄신일에 등산화 끈을
풀고 있을 수는 없는 일,비교적 느지막한 시간(10시쯤)에 호도산 들머리를 향해서
집을 나선다.오늘 산행은 호도산을 오른 뒤 삼막사를 방문하고, 삼성산을 거쳐
염불사를 둘러본 뒤, 안양유원지 쪽으로 하산하는 것을 일단 일정으로 삼아 본다.
석수전철역사를 빠져나와서 1번국도를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는 육교를 통과해서
오른 쪽 보도를 따르다가 첫 번째 왼쪽의 골목차도를 따른다(11시).
작은 차도 길가에 좌판이 줄을 잇는다.다양한 등산 물품을 펼쳐놓고 등산객을
기다리는 초로의 상인,산행시의 간편 행동식을 준비하여 손님을 맞이하려는 중년의 아낙,
등산도 하기전에 등산객들을 유혹하는 식당들에서 풍겨나오는 맛있는 음식냄새가
코를 찌른다.호도산 들머리,산행안내도 주변은 울긋불긋스러운 다양한 색상과
온갖브렌드의 맵시있는 입성으로 패션장을 방불케하는 입산객들로 북적인다.
초록의 그늘이 시원하게 드리운 오르막 산길에는 초록빛 녹음의 차양을 뚫고
쏟아지는 은빛의 햇살이 연두빛 네온등이 되어 산길을 밝혀준다.
오르막 산길은 자연석을 가벼운 손끝으로 얼기설기 배치한 계단길이다.
서울둘레길을 따르는 갈림길이 나오는가 하면, 관악전철역 방면으로의 갈림길을
알리는 산행안내팻말도 거듭 친절감을 표시한다.
운동기구가 설치되어있는 공터를 지나면, 한우물이 1.1km 전방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리는 팻말이 모습을 보인다.이제 산길은 바위 위를 걷는거나 다름없는 바윗길
일색이다.서울시 관악구와 금천구 일대의 시가지가 한눈에 시원하게 들어오는
전망바위가 심심찮게 산객의 발길을 잡는 산길,너럭바위,마당바위,운동장 바위따위의
별명을 붙여도 괜찮을 바위들이 줄을 잇는다.산아래 펼쳐진 시가지와 삼성산의
초록능선 그리고 인근의 관악산의 연봉이 파노라마를 이룬다.
널찍한 헬기장을 지나면 잡초가 우거진 개활지를 가로지르게 된다.
안내문이 눈에 띠는데,"이 지역은 국가사적 제 343호로 지정된 서울호암산성의
일부인 제2한우물과 옛 건물터입니다."라고 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곳은 임야로서 농작물을 경작할 수 없는 지역이니,무단경작하시는
분들은 농작물및 장비를 5월1일까지 자진수거 하시길 바란다는 안내문도 눈에 띤다.
제2 한우물 터는 맨땅이 드러난 상태를 보이고 옛 건물터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전망바위에서 마른 목을 적신 후 불영암으로 내려선다.
장방형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불영암 마당은 오색연등으로 하늘을 덮고 있다.
암자 앞 마당에는 뾰족한 돌탑 꼭대기 부분에 부처님 얼굴 넷을 사방을 바라보는
자세로 모셨다.특이한 모습이다.줄을 서서 예불순서를 기다리는 신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등산객들로 암자 주변은 그야말로 시장통을 방불케 한다.
암자 옆의 장방형의 연못이 "한우물"이며,한우물은 "큰 우물"이라는 뜻으로,
호암산성 안에 있는 커다란 연못이다.이 연못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1989년과 1990년 연못 터 아래에서 통일신라시대 연못이 추가로 발견되었다고.
호암산성은 해발 325m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테뫼식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1250m다.성 내부에서는 여러 기의 건물 터와 두 기의 연못 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불영암의 한우물 조망점이라고 이름붙인 전망대에서의 조망이 화려하다.
화려하고 장대한 서울시 조망에 잠시 눈이 호강을 누려본다.
불영암 마당 앞에 일렬 횡대로 늘어 서 있는 돌탑과 네 부처의 얼굴상,그리고
비닐 천막 그늘아래의 범종,서울시가지 조망대와 한우물 등의 볼거리를 뒤로하고
불영암을 벗어난다.곧바로 만나는 헬기장을 지나면 산길 우측으로 석구상(石狗像)이
초록의 그늘아래 자리하고 있다.돌로 빚은 개의 석상이라는데,길이는 1.7m,폭은 0.9m,
높이는 1.0m의 비교적 몸집이 큰 편에 속하고 꽤 비만인 몸통이다.
이 석구상은 해태상으로 전하여 왔으나,이곳으로부터 남서쪽 50m지점의
한우물 조사 발굴 때 조선시대 쌓은 석구지(石狗指)라 음각된
장대석이 나왔고, 또 시흥읍지 형승조에 이곳 호암산 남쪽에 석견(石犬)
사두(四頭)를 묻어 개와 가깝게 하고자 하였으며,지금 현남7리에 사견우(四犬偶)가
있다라는 내용의 기록으로 석구상으로 판단되었다고.북쪽을 바라보고 앉은 석구상 주위에는
자연암 네 개가 있으며,석구상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발과 꼬리도 잘 묘사되어 있다.이런저런 내용이 전해오는 기록으로는 석구상이
틀림없어 보이는데,석구상의 생김새를 살펴보건데 개 모습으로 인정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들고, 오히려 나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순한 양의
모습을 닮았다.
초록의 그늘아래에 자리한 석구상의 곁을 떠나면 산길은 또 다시 바윗길이다.
뜨거운 햇살을 머금은 바윗길에서 훅훅 열기가 피어 오른다,소나무 숲이 다소나마
그러한 열기를 식혀주려 하지만 역부족이다.차라리 작은 운동장이나 다를게 없는
너럭바위에서 바람받이 노릇을 자청하는 편이 오히려 더위와 땀을 식혀준다.
테니스 코트장만큼이나 널찍한 헬기장,사방을 두리번 거려봐도 주변으로 이제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다소 밋밋하고 붕긋한 멧부리이기도 한 곳이다.
헬기장 바로 옆으로 붕긋하게 솟은 암봉이 있는데,암봉으로 이루어진 정수리 복판에는
태극기도 세워져 있다.이곳이 해발 395m의 호암산 정상인게다.
정상 바로 아래에 세워놓은 안내팻말이 보이는데, 좌측으로 30m 이동을 하면
조망대가 있음을 알린다.조망대에서 펼쳐지는 전경은 강남일대가 눈에 들어오고
관악산의 전모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시야를 압도한다.
시선을 잡아끄는 파노라마에 마냥 취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마지못해
발길을 되돌려 삼막사 방면으로 발길을 재우친다.
호암산 멧부리를 내려서면 산길은 바윗길에서 육산의 부드러운 산길로
바뀐다.육산의 맨땅과의 접촉은 부드러움이 으뜸이고 푸근함과 온화함 그리고
훈훈한 감성이 묻어나는 인자함이다. 수렛길이나 다름없는 산길 우측변으로
관악산기상관측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 관측소는 관악산 일대의 기후와 바람 그리고 강수량 등을 관측하여
국민들에게 실시간으로 산의 날씨를 제공하는 것을 주 업무로 하고 있는 곳이다.
시원하고 삽상한 기운이 감도는 초록의 그늘이 드리운 산길이 한가로이
이어지더니 이내 널찍한 헬기장을 내놓는다.헬기장을 뒤로한 산길은
비교적 가파른 내리막산길로 바뀌기 시작한다.
호암산 멧덩이를 벗어나는 과정일 터이다.
비탈을 내려서면 삼거리 안부에 닿게 되는 곳,깔닥고개다
산행안내팻말(좌측~철쭉동산,서울대.직진~삼막사 1.8km)이 예외없이
세워져 있는 곳을 뒤로하면, 또 다른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세워놓은
안내팻말에도 호암사와 서울대 그리고 삼막산의 산길 방향을 거듭 일깨우고 있다.
국기봉으로의 길목이 있는 삼거리,국기봉으로 향하는 길목 초입 바위 절벽에
기다란 밧줄이 손님을 기다린다.밧줄에 몸을 의탁하고 오르면 운동장 바위가
산객을 반긴다.여지껏 지나온 호암산과 주변의 조망 그리고 시가지의
풍모가 빠짐없이 눈안에 들어온다.모든 고난과 시름이,땀과 노고가 단숨에
사라지는 환각의 순간이다.산행중에 맞닥드리는 오르가즘이라고나 할까?
국기봉 멧부리를 오르는 암릉 오르막이 다소 위험스럽긴 하다.보조이동 시설도
전무하고 안전이동을 답보할 근거는 산객 스스로 찾아야 하고 판단해야만 한다.
차근차근 한발한발 조심스레 올라선 국기봉 멧부리에는 태극기가 깃대에서
펄럭인다.해발 446m.반대방향에서 오른 산꾼들과 이쪽에서 오른 산꾼들로
가뜩이나 비좁은 국기봉 멧부리는 인증샷을 하기에도 버거울 지경이다.
하물며 조망을 즐기며 망중한을 누리기에는 주위시선을 감당할 수가 없을게다.
되돌아 내려서는 과정은 오를 때보다 더욱 세심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다.
오를 때보다 내려설 때의 산악사고율이 곱절이나 높은 것은,서로 상이한
무게 중심의 위치에 따른 것이다.국기봉을 내려선 뒤 널찍한 운동장 너럭바위
한구석의 노송그늘아래에서 출출함을 달래본다.
뱃구레를 채우고 운동장 너럭바위를 벗어나면 거북이의 등짝을 닮은 커다란
너럭바위를 거듭 지나게 된다. 산길은 이내 능선을 횡단하는 임도로 내려선다.
삼막사는 우측의 길을 따르면 되고, 좌측으로 향하는 길은 무너미 고개를 향한다.
임도 좌측 바위 절벽에 바위를 매끈하고 평평하게 갈아내고, 그 바위면에
부도(浮屠)를 조성한 것이다.이 마애부도는 부도란 스님이 열반 후 사리나 유물을
모신 묘탑(墓塔)이라 하며,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의 부도로
추정될 뿐이라고 한다.세멘트 포장길은 산허리를 구불거리며 꼬리를
이어간다.반월암 입구,예불을 위한 불신자들을 안내하는 아낙들의 한복차림이
화사하다.입구 오르막 계단 우측으로는 서너 기의 부도가 초록의 그늘아래
자리하고 있으며, 오르막 대리석 계단 석책위로는 오색연등이 줄을 잇고 있다.
반월암 입구를 지나면 곧바로 삼막사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三聖山 三幕寺"(삼성산 삼막사)란 현판이 금빛 찬란하다.
일주문 우측으로 사람들의 긴 줄을 서고 있다.산문을 나서려는 손님들을
산아래로 실어나르는 셔틀차량을 이용하기 위함이다.서너 대의 승합차량이
아금맞고 부산하게 손님들을 실어나르느라 분주하고,
일주문을 들어서니 빈 구석마다 차양 그늘막아래에서 방문객들 공양이
또 한창이다.공양주를 맞느라,예불의 순서를 기다리느라 긴 줄을 잡고 있는
신자들,경내에 울려퍼지고 있는 스님의 독경소리,등산을 왔다가 절 안을
이곳 저곳 기웃거리는 나같은 등산객들,경 내는 북적이는 인파로 혼잡스럽기
그지없다.범종각과 명부전 그리고 6관음전,그리고 산신각과 삼층석탑을
둘러보고 돌계단으로 꾸며놓은 칠성각과 남녀근석을 만나려 발길을 재촉한다.
그런데 계단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삼귀자(三龜字)"라고 하는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안내문 곁으로는 커다란 바위면을 장방형으로 다듬어 음각으로
거북 귀(龜)자를 새겨 놓은 곳인데,거북 귀(龜)자(字) 를 각기 다른 글자체로,
앞의 두 자는 상형문자에 가깝게 새겼으며 세 번째의 서체는 정자(正字)로 새긴 것이다.
이 글씨는 조선 말기 종두법을 실시한 지석영의 형 지운영이
이곳 백련암지(白蓮庵址)에서 은거할 당시에 쓴 글이라고.
칠성각으로 가는 화강암 계단에는 석책까지 함께 세워 한껏 품격을 높였다.
"七寶殿(칠보전)"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칠성각에는 마애 삼존불이
모셔져 있는데,이 마애불은 조선 영조 39년(1763)에 조성된 것으로
암벽을 얕게 파서 만들었으며,칠성각이 전실(前室)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석굴사원 형식이다.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협시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거느린 삼존불로 모두 연화좌에 앉아 있다.
이곳에도 예불을 하려는 신자들이 줄을 잇고 있으며,칠성각 비좁은 마당
맞은 편에는 남녀근석(男女根石)이 낯간지러운줄 모르고 밑천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이 남녀근석은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 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외견상으로는 실물의 형태와는 상이한 점이 없지않지만 굳이
고집을 부리며 우긴다면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2개의 자연암석으로 그 모양이 남 녀의 성기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남녀근석이라고
부르는데,남근석의 높이는 1.9m이고,여근석은 높이가 1.1m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신라 문무왕 17년(677) 원효대사가 삼막사를 건립하기 전부터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 이 바위를 만지면 순조로운 출산을
하게 되고,가문의 번영과 무병장수를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4월 초파일과 7월 칠석 등 이름있는 날이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촛불과 과일을 차려놓고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남녀근석과 마애삼존불을 모신 칠보전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려 십여 미터
계단을 내려가면 좌측으로 석책이 터진 출입구를 만나는데, 이 길을 따르면
국기봉 직전 사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사거리 갈림길,삼성산 정상 국기봉을 오르려면 좌측의 계단 오르막을 올라야하고
염불사를 경유하여 안양예술공원으로의 하산은 우측의 능선길를 따라야 한다.
국기봉으로의 비탈진 오르막은 험로의 암릉이 기다린다.
꺼림칙하면 우회로를 이용하면 안전은 담보가 되겠지만 눈의 호강과
산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맛보려면 암릉을 차근차근 기어오르는 묘미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삼성산의 8부능선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삼막사 일대의 전망이
놓칠 수 없는 조망거리다.날등을 이어나가는 암릉으로 시원한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바윗돌은 뜨거운 햇살에 따뜻한 온돌이나 다름없다.
암릉에서 솟아오르는 열기로 온 몸은 이미 땀투성이가 되어간다.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는 해발 477m의 삼성산 정상인 국기봉,사방팔방 거침이 없는
조망에 눈이 부시다.관악산 연봉이 손을 뻗으면 곧 닿을 듯하고,멀리 북한산의
멧덩이들도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곳 삼성산(三聖山)의 이름에 대한 유래가 두 종류가 전해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원효,의상,윤필거사 세 분이 이 산에 들어와 원효대사는 삼막사에,
의상대사는 연주암을,윤필거사는 염불사를 각각 짓고 수도하였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하고,또 하나는 삼막사에 지공,나옹,무학 세 분이 주석(柱石)했던 까닭에
삼성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온다.참고로 주석(柱石)이란 기둥과 주춧돌을
일컫는 말인데,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제는 삼성산 남릉을 타고, 염불사와 안양예술공원으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삼성산 멧부리에서 올랐던 길을 다시 되밟아 삼거리 갈림길로 내려선 뒤
남릉으로 들어선다.남릉의 날등 능선도 호락호락한 암릉이 아니다.무턱대고 덤비다간
불시에 횡액을 당할 수 있을 만큼 곳곳에 위험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암릉 산길은 미로찾기 게임을 하 듯이 불가칙성을 띠며 이어진다.
상월암으로의 갈림길을 지나면 산길은 내내 내리막 산길만을 고집하더니
이내 아스팔트 포장이 된 염불사 진입로에 이르게 된다.
우측으로 뻗은 오르막 길은 염불사 경내에 이르는 길,줄을 잇는 연등을 따라
백여 미터 오르면 염불사,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면 곧바로 오른 쪽으로
약 500여 년이 된 보리수 나무가 초록의 그늘을 시원하게 드리우고 있다.
석가모니가 이와같은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해서 깨달음의 나무라고
널리 알려진 나무,이 보리수는 고려 말인 14세기에 이곳에서 불도를 닦던 한 스님이
심었다고 전한다. 정면으로는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으며,대웅전 뒷편 절벽 같은
비탈위에는 높이 8m의 미륵불이 온화한 미소를 띠며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이곳 염불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기도 한 사찰로
고려 태조9년에 창건된 아주 오래 된 사찰이기도 하다.
염불사를 둘러보는 것으로 오늘 산행은 막바지로 치닫는다.이곳에서도
절을 찾는 신자들이나 일반 탐방객들을 산문 밖으로 실어나르는 셔틀차량이
분주하게 임도를 오르내린다.오색연등이 줄줄이 걸려있는 초록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임도를 휘적거리며 따른다.산문을 나서는 것이다.
극락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인내하고 견뎌야 하는 사바세계로 나가는 중이다.
초록의 희미한 네온등이 숨을 죽이며 연두빛을 쏟아내는 숲길을 벗어나면
오월의 햇살답지 않은 땡볕이 사바세계의 입문을 축하라도 하려는 듯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다(16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