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가해자였을까, 피해자였을까?
*아래 글에는 뮤지컬 <잭더리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88년 영국 런던의 화이트채플에서는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엽기적으로 살해된 피해자들은 모두 성매매 여성들이었다. 최소 5명. 그 수치를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는 까닭은 이후 희대의 살인사건을 모방한 범죄들이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범인의 실체는커녕 범행 동기조차 밝혀지지 않은 이 사건은 이후 ‘잭 더 리퍼’로 회자됐다. 미상의 남자를 표현하는 이름 ‘잭(Jack)’과 거칠게 찢는다는 의미의 단어 ‘립(Rip)’이 결합된 ‘잭 더 리퍼’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칼잡이 아무개’ 정도가 되겠다.
스스로를 범인이라 칭한 이는 화이트채플 감시위원회 위원장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지옥으로부터(From Hell)’로 시작하는 이 편지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섬뜩하면서도 잔인한 이 사건은 꾸준히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살인 사건에 사람들은 호기심과 공포감을 느꼈고 다큐멘터리, 만화, 영화, 드라마, 소설 등의 소재로 변주됐다. 뮤지컬 <잭더리퍼>도 그 중 하나다. 1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끝내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미제사건으로 남은 희대의 살인사건, 그 속에서 <잭더리퍼>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엽기적 살인이 엔터테인먼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부모를 죽이고, 연인을 살해하고, 때로는 이유 없이 흉기를 휘두르는 사건들이 연일 뉴스를 채운다. 극악무도해지는 범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과정도, 방법도 더욱 잔인해지고 있다. 긴 세월을 관통하며 선과 악을 두고 수없이 많은 학자들이 논쟁했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 <잭더리퍼>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2008년 체코에서 출발한 뮤지컬 <잭더리퍼>는 성 불구자인 잭이 ‘살인을 할 때마다 여자를 한 번 안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2009년 이를 국내에 들여온 왕용범 연출은 극을 한국 정서에 맞도록 각색했는데, 범인이 시체를 훼손하고 장기를 꺼내어 간 이유에 의문을 품고 그에 따른 사연을 주요한 줄거리로 삼았다. 당시 왕 연출은 “신문기사도, 뉴스도, 이런 사건들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대중들은 이를 마치 엔터테인먼트처럼 여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며 “동정할 수밖에 없는 살인마를 그리되, 현대의 관점에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 블랙 코미디로 풀어보자는 선택을 했다”고 설명했다.
<살인마 잭>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랐던 초연은 원작을 뛰어 넘는다는 호평을 이끌어냈고, 이듬해부터 <잭더리퍼>로 관객들을 만났다. 네 차례 앙코르 공연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고, 2012년에는 한국 버전으로 일본에 진출해 개막 전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10년간 이어져 온 <잭더리퍼>의 성공 비결은 휘몰아치듯 흘러가는 스토리와 촘촘하게 이어지는 배우들의 연기, 시선을 사로잡는 무대 효과 등 어느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다. 이번 무대 역시 마찬가지다. 극 중 잭으로 활약해온 가수 겸 배우 신성우가 연출을 겸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대본이나 넘버는 대대적으로 수정하기보다 섬세하게 살을 덧붙이며 다듬었다”면서 동시에 “캐릭터를 바로 세우기 위해 대본이 걸레가 되도록 분석했다. 각 캐릭터의 서사에 집중해 관람하면 더 깊이 공감할 것”이라고 전했다.
“추리와 멜로의 줄다리기, 그 끝의 반전”
무대는 ‘잭 더 리퍼’ 사건을 담당한 수사관 앤더슨의 보고서로 시작된다. 잔인한 살인 수법으로 시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이 사건은 그에게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낸 치부와도 같았다.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펼쳐지는 가운데 범인을 알고 있다는 제보자가 등장한다. 그는 바로 미국인 의사 다니엘. 두 사람은 과거 시체 브로커인 잭의 체포 과정에서 마주한 바 있다.
거슬러 올라간 시간 속의 다니엘은 장기 이식 연구용 시체를 구하기 위해 영국을 찾은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그는 잭을 수소문 하는 과정에서 잭의 연결책이자 성매매 여성인 글로리아를 만난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다니엘에게 그녀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함께 떠나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잭은 자신의 살인을 방해하고, 배신했던 두 사람을 순순히 보내주지 않았다. 글로리아의 숙소에 방화를 저지르고, 그녀를 살해하려 했다. 이 일로 경찰에 쫓기던 잭은 총상을 입고 종적을 감췄다.
그런데 다시 등장한 다니엘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잭을 용의자로 지목한 것이다. 설득력 있는 제보에 앤더슨은 함정수사를 펼친다. 성매매 여성들로 가득한 화이트채플의 거리, 다니엘의 지하 연구실, 경찰서 취조실 등이 2중 회전 무대를 통해 쉴 새 없이 전환되면서 긴장감은 배가 된다. 액션 영화와 칼군무를 방불케 하는 배우들의 몸짓에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다. 위태로움이 절정에 달한 시각, 코카인 중독자인 앤더슨의 약점을 빌미로 특종 정보를 요구하던 런던 타임즈 기자 먼로가 ‘살인 예고’ 기사를 보도하고, 앤더슨은 함정 수사에 투입했던 연인을 잃는다.
“왜 성매매 여성이었을까?”
이쯤에서 드는 의문은 실제 사건을 비롯해 이를 바탕으로 한 원작, 한국에서 재구성된 무대 등에서 범인이 성매매 여성을 표적으로 삼은 이유다. 사건이 발생한 1888년의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난 시기였다. 저임금, 열악한 노동 환경에 일자리는 부족했고, 특히 참정권조차 보장되지 않아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은 더욱 궁지로 내몰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 다수의 여성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성매매를 선택했다. 안타깝게도 ‘흔한’ 직업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이 한 번의 만남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은 고작 커피 한 잔 값. 하루의 일당으로 끼니와 숙박을 해결해야 했던 이들은 절박하게 일을 찾아야 했다. 범인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열악한 삶은 극 중 대사들을 통해서도 묘사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잭 더 리퍼’ 사건을 두고 “빅토리아 시대의 계급 문제, 인종 문제, 그리고 젠더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 문화적 현상”이라고 풀이한다.
추리와 멜로를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의 순간이 얽히고설키며 극은 순식간에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장면에 따라 무게감을 달리하는 넘버들이 곁들여지면서 활기로 가득했던 무대에는 살기만이 남는다. 1막 초반의 장면들이 되돌아 현재에 벌어지고 있었던 일이 밝혀질 무렵, 관객들은 진범이 다름 아닌 다니엘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을 재방문한 다니엘은 우연히 글로리아를 만났지만 그녀는 매독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이식 수술로 그녀를 살리고자 했던 다니엘에게는 ‘살아있는’ 사람의 장기가 필요했다. 때문에 그는 잭이 돌아온 듯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그림자에 숨어 살인을 자행했다. 즉 부활한 잭은 자신의 사랑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다니엘의 내면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질주하던 그를 멈추게 한 것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했던 글로리아의 죽음이었다. 무고하게 희생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다. 다니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른다.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앤더슨은 연구실을 폭파시켜 모든 증거와 증인을 없애버린다. 엇나간 다니엘의 사랑과 그로 인한 살인이 사람들의 동정으로 이어져 피해자들의 죽음이 희석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무대는 다시 수사관 앤더슨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첫 장면으로 전환된다. 수미상관으로 마무리 되는 극은 그가 시종일관 무엇 때문에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됐는지 설명한다.
만약 <잭더리퍼>를 하나의 문장으로 설명해야 한다면, ‘잔인하다’라는 표현이 적격일 것이다. 단순히 극 중 인물이 행했던 살해 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한 남자의 순애보가 잔인했고, 끝내 비극으로 마무리된 그와 그가 사랑했던 여인의 삶이 잔인했다. 동시에 이 모든 진실을 묻기 위해 살인자가 돼 버린 수사관의 인생 또한 잔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잭더리퍼>는 1888년 런던의 낭만을 강조한다. 잔인하고 섬뜩한 살인 사건에 어울리지 않는 ‘낭만’이란 단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잔인한 사랑’의 또다른 이름은 아니었을까.
뮤지컬 <잭더리퍼>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
2019.01.25 ~ 2019.03.31
기본가 6만 ~ 14만원
150분
미취학 아동 입장 불가
엄기준, 최성원, 정동하, 환희, 켄, 신성우, 서영주, 김법래, 이건명, 민영기, 김준현 등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