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원영교수를 변호하며
이병창 ( 시인, 진달래교회목사)
한 밤에 깨어나 손원영교수를 소환한 감리교 이단대책위원회의 자료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착잡한 감회가 구름처럼 일어난다. 감신대학장 변선환 교수를 죽음으로 몰고 간 마녀사냥을 다시 보는 것 같다. 변교수님이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익산에서 나는 하루를 교수님과 함께 지낸 바 있다. 스물에 만나게 되어 내 의식의 지평을 한 없이 열어 주었던 변교수님을 생각하면, 자기들 만의 시대착오적인 기독교를 지키려고 예수를 못 박아 죽이는 바리새의 후예들에 대한 슬품과 연민과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기독대학이라는 이름의 대학에서 마녀사냥이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자행되고 있다. 나는 지난 14년 동안 초파일에 절에서 축사를 해왔고 불자님들은 성탄절에 찾아와 축하 예배를 함께 해왔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닌가?
나는 기독대학 총장에게 묻고 싶다.
법당에 가서 불당을 때려 부수는 행동이 열렬한 믿음의 반영인가? 아니면 손교수처럼 피해 입은 암자에 찾아가 대신 사과하고 작은 성의지만 보상하고자 했던 그 일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공격할 만한 일인가?
불교는 이단이 아니라 타 종교이다. 우리의 이웃이다. 어떤 이유로든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지 공격의 대상일 수 없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던가. 이단이란 기독교 안에서 사용 되어져야 할 단어이다. 그럼에도 불교가 이단이라고 말하고 있다.(한기총)
손교수에 대한 고발 내용을 보니 절에 가서 예수를 보살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보살은 자비의 화신이다. 중생의 신음 소리를 귀로 듣지 않고 그 소리를 눈으로 보는 관세음( 觀世音)의 존재이다. 예수가 바로 그런 분이 아니었는가.
외국에 가서 설교를 하면 그 나라 언어로 말해야 한다. 절에 가서 불자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려면 불자의 언어로 이해하기 쉽게 비유적으로 예수를 설명해야 되지 않을까. 비유란 전하고자 하는 원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이다. 한마디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따라서 비유의 말에 집착하지 않고 비유를 사용하는 사람의 중심과 상황을 살펴 보아야 한다.
내가 만난 손교수는 양 같은 사람이다. 그는 영악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이해관계의 계산에 빠르지도 않다. 하지만 그의 중심에는
예수가 있고 목사로서 격변의 세상에서 어떻게 자기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나는 수렁에 빠진 한국 교회의 미래와 희망을 손교수에게서 보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죽이고 아테네는 망했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예루살렘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망했다. 의인의 피를 흘리게 하면 그 사회는 망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어쩌면 손교수가 그 대학 정문에서 신발의 먼지를 털게 되면 그 대학은 망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우주적으로 사고하고 지구적으로 살아 가야 할 긴박한 시대이다. 부디 하늘이 선한 자나 악한 자를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비를 주시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자연스러워(완전)라 하신 예수의 밀씀 앞에서 편견의 안경을 내려 놓고 손교수를 향한 돌팔매질을 멈추기를 소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