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정선 향교(旌善 鄕校) |
지정번호 : |
도 지정 문화재 자료 제 101호 |
지 정 일 : |
1985년 1월 17일 |
소 재 지 : |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봉양 7리 385번지 |
소 유 자 : |
정선향교 재단 |
수량및규모: |
목조와가 (건물 6동) | |
유 래
정선군 정선읍 봉양 7리 (旌善郡 旌善邑 鳳陽七里)에 정선향교가 있다. 구기(舊基)에 의하면 원래의 향교는 정선읍 녹도(綠島) (지금의 봉양 8∼9리) 삼봉산 아래 있었으며 삼봉산은 녹도섬 북상단에 있었다고 구전되고 있다.
그 뒤 정선읍 덕송리(德松里) 반점(半點) 고개 밑 햇빛이 잘 드는 언덕 석교(일명 돌다리) 북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을산년(1605년) 대홍수에 향교가 유실된 후 광해(光海) 신해년(辛亥年)까지 7년간 이곳에 있었고, 그 후 다시 봉양리 녹도 삼봉산 아래 구 향교가 있던 서편에 2차로 이전하여 현 향교 건물을 건축하기 전까지 소재 하였다고 한다 향교는 만고(萬古)의 성현을 모시고 인재를 배양하는 곳이라 군내에서 가장 좋은 터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며, 현재의 향교 뒷편에서는 비봉산(飛鳳山)이 하늘 높이 솟아있고 앞에는 조양강이 어천(魚川)을 합류하여 흐르며 맞은편에 있는 기우산(祈雨山)은 문필봉이 우뚝 솟아 산수의 정기가 총 집결한 대지라고 한다.
정선 향교의 창건년대와 창건자 그리고 선조조(宣祖朝) 이전의 교사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이는 임진왜란 병화(兵火)와 선조(宣祖) 38년 7월 20일에 뽕나무밭이 변하여 푸른 바다로 변하는 대홍수로 삼봉산이 양류(壤流)되어 삼봉산에 있던 향교가 표류(漂流)되고, 모든 문헌도 유실되어 향교사를 고증할 길은 없으나 성균관사(成均館史)로 보아 약 900여년전에 본 향교가 건립된 것으로 추측 한다.
고증에 의하면 고려 태조 13년 겨울에 왕이 서경에 친히 행하여 학교를 건립하였고, 성종조(成宗朝)에 제·주·군·현에 명하여 자제를 선발해 옛 서울에 나와 수업토록 하였고, 동왕 6년 8월 12목(牧)에 경학박사를 두었고, 동왕 11년에 명하여 문무재략자(文武才略者)를 선택하라 하였으며, 예종(睿宗) 5년 강인 3월에 제주(諸州)에 명하여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보급하라 하였으며, 본 군이 산간 지방으로 교통이 불편하다 하더라도 어명의 시행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하여 이때 정선지방에도 향교가 설립되었다고 추상(推想)된다.
혹(或)자는 공민왕 6년(1357년)에 명하여 수학하고 공양왕 4년(1392년)에 지방 수령으로 하여금 문묘(文廟)의 석존제(釋尊祭)를 친행하라 하였으므로 지방 향교의 설립년대를 이때로 추상하기도 하나 이는 사리가 맞지 않는다고 한다.
먼저 학교가 설립되어야 유생(儒生)이 배출되고 유교사상이 보급됨에 따라 성현(聖賢)을 존중하는 마음과 성현을 사모하는 정성이 생기는 것으로 제사(祭祀)를 올리게 되는 것이 순리라고 한다.
정선군은 임진왜란때 참혹한 전화(戰火)와 을사년에 대 수재(水災)로 읍내가 물에 잠겨 관가는 민가를 사용했으며 향교가 유실되었으나 누구하나 재건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때 향유(鄕儒), 정유설(鄭有設), 유대방(劉大邦), 최흥립(崔興立) 3현이 마음을 합해 정선읍 덕송리 반점고개 및 석교(돌다리) 북쪽에 가옥 수간을 건립하고 동면(東面) 설암산(雪菴山)에서 율목(栗木)을 구하여 오성위패(五聖位牌)를 다시 근조하여 봉안하고 훈도하니 이때부터 유학이 부흥하였다 한다.
광해군 3년(1611년) 1월에 강원도 감사 신제(申堤)공이 민정순찰차 평창군(平昌郡)을 순시하다 정선군의 향교가 중건(重建)되지 않음을 듣고 읍사(邑史)를 문책하고 태장(笞杖) 80대의 엄벌을 주니 동년 2월에 군수 한여징(韓汝徵)공이 북면 화천사(꽃벼루)에서 나무를 벌채하여 강물에 뗏목으로 운반하여 구기(삼봉산)에 5월 초 착공하여 군인으로 5일씩 교대로 사역, 6월 1일 기둥을 세우고 보를 얹혔으며 공사감독에 좌수 김응추(金應秋), 별감 전회경(全會慶), 전기문(全起文)을 보하고, 읍사는 권응수(權應守) 향인으로 숙직도록하니 매일 밤 호랑이가 와 소동을 부리고 울어대어 현종(顯宗) 2년에 부근 구기(삼봉산 밑) 서편으로 이전 건립하니 지사(地師)가 말하되 신기가 불길하다하여 구기로 복귀하려 하였으나 지연미수(遲延未隧)할 즈음에 조정사목내(朝廷事目內)에 문성공 이이와 문간공 성혼(成渾) 양현을 첨배(添配)하여 십철을 배순(配淳)하였다.
영조(英祖) 8년 3월 현 위치에 이전할 것을 조정의 승인을 얻어 유림의 구재(鳩財) 일천오백량으로 착공하여 동년 9월 24일에 기둥을 세우고 10월 19일에 상낭하니 대성전(大成殿) 동서무(東西無)가 완성되고 명륜당(明倫堂)과 기타 건물은 다음해 8월에 완성하였으며, 그 후 10여 차례 중수와 단청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88년부터 '95년까지 총 사업비 2억 7천여만원을 들여 전면 해체 보수를 완료하였다.
찾아가는 길
- 서울기점
- 청량리에서 열차 이용시 : 정선역 하차 → 시내버스
· 중부고속도로 → 원주 → 제천 → 영월 → 신동읍 → 남면 → 정선읍
→ 진부 → 나전삼거리 → 정선읍
→ 평창 → 정선읍
 | 정선향교 |
|
위 치 : 강원 정선군 정선읍 봉양7리 385번지
|
소 유 자 : 정선향교 재단
지정번호 : 도 지정 문화재 자료 제 101호
지 정 일 : 1985. 1. 17
연 락 처 : 033-560-2365 (정선군청 관광문화과)
개 요 : 본래 향교는 성현을 모시고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라 하여 정선군 안에서
산수의 정기가 한데 모인 가장 좋은 자리에 세운 것이 정선향교이다.
정선마을은 강원도를 대표하는 선비들의 고장이어서 향교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었다. 정선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교육공간
인 명륜당, 기숙사인 동재, 서재, 종무, 서무, 기타 부속 건물들로 구성
되어 있다. |
도로안내 : 서울기점
- 청량리에서 열차 이용시 : 정선역 하차 → 시내버스
·중부고속도로 → 원주 → 제천 → 영월 → 신동읍 → 남면 → 정선읍 → 진부 →
나전삼거리 → 정선읍 → 평창 → 정선읍
현지교통 : 정선군청에서 도보로 10분 소요
정보제공자 : 강원도 정선군청 관광문화과 (033-560-2365 / 팩스 033-560-2593) |
 | 정선향교 대성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