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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유신 헌법
조만희
1972년 가을, 박정희의 유신헌법이 선포될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고교 입시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발표된 유신헌법을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사회 선생님은 이번 입학시험에서는 유신헌법과 관련된 내용이 대폭 나올 예정이라면서 그동안 가르치던 사회수업을 전폐하고 긴급하게 만들어진 새로운 교재를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그 교재는 유신헌법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온통 유신 헌법에 대한 찬양 일색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학생 입장에서는 유신헌법이야말로 배우면 배울수록 만백성을 살리는 꿈의 헌법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 시절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높던 만화가 신동호 화백에 의해 그려진 유신헌법에 대한 해설 내용은 너무도 찬란해서 어린 우리들을 유신헌법의 찬양자로 앞장서게 하는데 크게 한 몫을 했다.
나는 태어나서 사물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 대통령은 오로지 박정희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박정희 말고 그 누구를 대체해서 대통령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박정희는 오롯이 영원한 대통령이었고 그에 의해 반포된 유신헌법은 그 누구도 거역해서는 안 되는 구국의 헌법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교 입학시험에서는 예상대로 유신헌법에 대한 문제가 대거 출제됨으로서 박정희에 대한 경외심은 더욱 높아만 갔다,
하지만 나의 유신헌법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고교 입학 후 얼마 안돼서 구국의 영웅 박정희 신봉자를 자처하던 나의 믿음을 일거에 무너트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고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아주 독특한 녀석이었다. 우선 그 친구의 집안부터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법대를 졸업한 분이셨고, 삼촌들도 서울 상대, 고대 법대 등을 나온 수재 집안이었다. 그는 그러한 집안의 장손이었는데 그의 할아버지 형제분 중 한 분이 정치에 발을 들여 놓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양반이 당시 박정희에 맞서서 대통령 후보로 나왔던 김대중 편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 친구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고급 정보를 너무나도 많이 알고 있었다. 유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처음 접하게 된 것도 그 친구를 통해서였다. 처음 유신에 대한 비판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유신을 비판하다니~~ 나는 틈만 나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그 친구와 유신을 놓고 대적했다. 특히 입학시험에서 사회 과목은 유일하게 만점을 맞은 터이기에 나는 큰 자부심을 갖고 끝없이 그 친구를 공박했지만 그 친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나의 논거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그해 여름에 있었던 김대중 납치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여름 내내 언론을 달구었다. 일본에서의 ‘김대중 납치 사건’은 어린 내 수준으로 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이때 친구는 이 사건이야말로 정치 공작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틀림없다고 했다. 그제 서야 나는 그 친구의 논리가 이해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전격적으로 유신 반대론자로 전향했다. 이후부터 나는 학교에서 아주 독특한 학생으로 돌변했다. 수업시간에 불쑥 유신 헌법 중에서 박정희의 종신 집권과 관련된 부분을 꼭 집어 질문함으로서 사회선생님을 난처하게 했을 뿐 더러, 어느 날은 수업 중에 엉뚱한 낙서로 인해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 당시 문제가 되었던 낙서는 ‘박정희는 독재자’라고 적은 쪽지였다. 그 때 나를 교무실로 끌고 가면서 발발 떨던 영어선생님의 표정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낙서장과 함께 인계 된 나를 대하는 담임 선생님의 태도는 오히려 쿨 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업 중에 딴 짓 한 것은 분명 잘못이라고 꾸짖으시고는 “이 낙서는 너와 나만 아는 걸로 하자.” 하시며 그 자리에서 라이터를 커내 불을 사르셨다. 당시만 해도 교무실은 많은 선생님들께서 대놓고 담배를 태우던 시절이라 나의 낙서는 다른 선생님들의 담배 연기 속에 묻혀 조용히 사라졌다.
1학년 2학기가 되자 나는 ‘청소년흥사단’에 가입을 했다. 청주시내에 소재한 고교생들로 이루어진 ‘청소년흥사단’은 도산 안창호가 창립한 바로 그 흥사단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 회장단 대부분이 여기에 가입을 함으로서 회원들의 조직에 대한 자부심은 남달랐다. 특히 여학생도 함께 함으로서 나는 이 모임에 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지도 선생님은 충북적십자사 청소년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조성훈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의 지도하에 우리들의 월례 모임은 충북적십자사 회의실에서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월례모임에서는 항상 새로운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토론의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해박한 지식과 독특한 언사로 토론을 이끌어 나가는 선배들의 역량도 대단했지만, 어쩌다 대학생 선배들이 자리를 함께 하게 되면 그 날은 경이로운 신세계를 맛보는 날이기도 했다. 긴급조치 하나로 세상의 모든 입을 틀어막던 그 시절에 나는 이곳에서 유신헌법의 허구를 은근슬쩍 비판하는 대학생 선배를 만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2학년 중반에 접어들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지도 선생님께서 청소년흥사단 모임을 더 이상 적십자사에서 할 수 없게 됐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대전 청소년흥사단과 친선 교류를 하는 등 점차 외연을 넓혀가던 그 시점에서 그만 유신의 악령이 씌워지고 만 것이다. 지도 선생님은 더 이상 우리를 지도 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 ‘만일 모임을 지속하게 되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 했다. 그 당시 ‘민청년사건’이라는 대형 사고가 터지면서 그 여파가 우리 청소년들에게 까지 미친 것이다.
우리들은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들은 겁도 없이 모임을 이어가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모임 장소를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새로 구성된 지도부는 모임 장소를 야외에서 열기로 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모임 장소를 정했다. 미호천 미루나무 숲이나, 청주대, 충북대 캠퍼스 등을 전전하는가 하면 회원들 집을 찾아 모임을 이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모임의 동력은 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는 새로운 세계를 안내해 주던 대학생 선배들마저 외면하는 상황이 되면서 3학년에 진급할 즈음에는 그만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3학년이 되자 유신의 광기는 극에 달해 대학교를 포함한 모든 학교의 학생회는 해산되고 학도호국단 체제로 바뀌었다. 그 바람에 내 친구는 하루아침에 학생회장에서 떨려나야 했다. 사실 이 당시의 학생회장은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됐다. 유신체제가 되면서 모든 학교는 간접선거로 학생회를 구성해야만 했다. 유신 이전 만 해도 모든 학교는 직접선거로 학생회장을 선출했다.
나는 지금도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치러진 회장 선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때 나는 두 곳 다 회장에 출마를 했었는데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군내에서 가장 작은 미니학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어린이회장은 직접선거로 뽑았다. 유권자는 4학년이상 재학생이었는데 선거 당일 나는 학견발표회 장에서 차마 나를 찍으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경쟁자가 나보다 더 훌륭하니 그를 찍으라.’고 하고는 내려왔다. 그런데 경쟁자 역시 나와 똑같은 말을 하고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투표지에 기표할 때도 나는 나를 찍지 못하고 상대방을 찍고 말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경쟁자 역시 그리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학교 때 선거는 달랐다. 그 당시 치러진 학생회장 선거는 유신헌법이 반포되기 전에 치러진 마지막 직접선거였다. 당시 나의 경쟁자는 다섯 명이었다. 학년 말 연례행사로 치러지는 학생회장 선거는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이벤트로 인기 높은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초등학교 때와 달리 규모가 제법 커서 학생 수가 1500명 쯤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회장 선거는 그 규모만큼이나 열기가 대단했다.
선거철이 되면 기존의 학생회는 선거관리위원회 체제로 전환되고 입후보자는 다섯 명의 선거운동원과 함께 이곳에 등록을 했다. 이 당시는 선거운동원 조차 인기가 많아서 이를 뽑는데도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자 나는 운동원들과 함께 교실을 순회하며 유세를 펼쳤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순회하며 유세를 펼치는 것은 전부터 내려 온 관행이었기 때문에 선거철이 되면 학교는 내내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 당시 선거에 있어 최고의 하이라이트는 선거 당일에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펼치는 합동유세였다. 이때는 교장선생님 이하 전 선생님께서 자리를 함께 했기 때문에 후보자들은 너나없이 이날을 위해 맹연습을 했다. 그런데 당시 합동 유세에서 특이했던 점은 후보자 연설에 앞서 찬조연설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누구든 공개된 자리에서 대놓고 자기자랑을 하기 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닌지라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찬조 연설자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오늘날 어른들의 선거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선거과정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이 당시의 학생회장 선거는 훌륭한 리더를 뽑는 것에 주안을 두기 보다는 전 학생에게 민주주의를 올바르게 체험시키고자 하는 데에 더 큰 방점을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이때 낙선하고 말았지만 나는 이 당시의 경험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유신헌법에 대해 남다른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된 것도 바로 이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학생회 대신 학도호국단 체제로 전환되면서 학교는 급격히 병영화 되어 갔다. 우리는 졸업 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공부대신 끝없는 군사훈련에 동원돼야만 했다. 특히 교련검열에 통과하기 위해 우리는 진종일 퇴약 볕 아래 똑 같은 훈련을 거듭해야만 했다. 이때 학생회장 대신 연대장으로 호칭되던 학생대표는 허리에 큰 칼을 차고 부관의 호위 아래 제식훈련의 선두를 이끌었다. 생각만 해도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이때의 풍경이야말로 유신이 청소년들에게 저지른 가장 큰 만행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나는 유신의 찬바람에서 잠시 비껴 있었다. 나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업전선으로 뛰어 드는 바람에 당시 대학생들이 겪었던 유신의 고초를 직접 체험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전전하다 군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뜻밖에도 거기서 유신의 종말을 맞게 되었다. 군대 내에서 비상계엄과 함께 찾아 온 유신의 종말은 먼저 육신을 고달프게 했지만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으로 그쯤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군대에도 중앙일간지가 배달되고 TV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늠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5.18이 찾아왔다. 병영은 좀 더 업그레이드 된 비상계엄체제로 전환되었는데 이때는 육신의 아픔보다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더 컸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곳은 논산훈련소였는데 인접한 곳이 전라도인지라 온갖 흉흉한 소문이 금방 영내로 퍼졌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소문도 믿을 수가 없었다. 특히 신문에 주먹만 한 활자로 찍혀 나온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어찌 해석해야 할 지 난감 했다. 그저 전두환이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 정변을 일으킨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내가 군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분명 광주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는데, 이러한 시점에서 내가 배운 군사훈련이 적이 아닌 내 이웃에게 쓰여 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당시 내 심정을 가까운 군대 동기에게 토로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 내 이야기를 가만 듣더니 대뜸 하는 말이 “광주사람들 다 죽어도 대한민국 돌아가는데 지장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결국 광주도 잠잠해지고 전두환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던 어느 날 나는 ‘국난극복기장’ 이라는 훈장 비슷한 것을 군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그것은 국난을 자초한 파렴치들이 마치 적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켜내기라도 한 듯 사실을 호도하기 위해 전 장병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받자마자 연병장에 내동이 치고 말았다. 그것은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파렴치범 전두환에게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분노 표시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 부대에는 새로운 신병이 전입해왔다. 그때 전입해 온 친구는 바로 광주 출신이었다. 드디어 광주의 실체를 증언해줄 수 있는 친구를 만난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그는 ‘광주 5.18 민주항쟁’ 현장에 있었던 친구였다. 나는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나름대로 작전을 폈다. 그때 나는 병장을 단 고참병이었기 때문에 제법 운신의 폭이 있었다. 그래서 경비 근무조를 편성할 때면 되도록 그와 한조를 이루도록 조치했다. 군대에서는 고참과 신참이 한조를 이루어 근무하는 것이 규정으로 돼 있어서 우리들의 근무 상황을 의아하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함께 근무를 서면서 우리는 금방 친숙해졌다. 어느 정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자 그는 드디어 광주의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당시 그를 통해 들은 광주의 실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대학교에 적을 둔 학생으로 5.18 광주 항쟁 당시 시위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학교의 리더였기 때문에 항쟁 내내 시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광주의 대 참극이 일어나던 날에는 총 맞은 시신들을 직접 수습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광주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유신의 종말과 함께 민주화 시대가 열릴 것이라 믿었던 내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를 새삼 깨달아야만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입대하게 된 배경도 광주 항쟁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광주에서 제법 알아주는 집안의 자제였는데 광주 항쟁이후 세상이 너무도 험하게 돌아가니까 그의 부모는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군대로 빼돌린 것이라 했다.
우리는 광주의 진실을 공유하면서 훨씬 더 가까워졌다. 그는 군대에 들어와서 광주이야기를 진정어린 마음으로 들어주는 사람을 처음 봤다면서 내게 무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후 우리는 보다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는 사이가 되었는데, 때로는 대화의 주제가 역사, 민주화, 통일 등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휴가를 다녀오거나 외박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몇 권의 책을 사 들고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가져 온 책은 내게 맡겨졌다. 그 책은 당시 대학생들이 즐겨 보는 책이라 했는데 대학물을 먹지 않고 입대 한 나에게는 다소 생소한 책이었다.
말년 병장으로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많았던 나는 그 책을 한 권 두 권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충격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제도권에서 받았던 교육이 얼마나 허구였는지 그 책들은 여실히 증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비로소 박정희가 유신에 그렇게 광분했던 이유와 내 노라 하는 대한민국의 엘리트 무리들이 스스럼없이 유신에 부역하게 되는 이유 등이 이해되었다. 광주의 비극 또한 청산하지 못한 친일의 잔재와 분단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 읽었던 책은 소위 386 운동권 학생들이 즐겨 읽었다는 바로 그 책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이러니 하게도 군대에서 운동권으로 의식화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그 당시에 읽었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 박현채의 ‘민족 경제론’, 그리고 송건호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이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통해 송건호를 알게 된 것은 뒤에 그와 특별한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나는 현재 옥천에 살면서 송건호를 옥천의 인물로 부각시키는데 나름대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송건호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고 그의 이름을 앞세운 ‘청암 송건호 언론문화제’가 옥천에서 열릴 수 있도록 하는데 조금이나마 일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당시에 만난 송건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들의 위험스런 독서 게임은 내가 전역하는 날까지 계속 됐다. 1981년 초여름 드디어 나는 군문을 나서게 되는 데, 이때 읽었던 책들은 이후 대학을 진학 하거나 진로를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돌이켜 보면 나의 정체성은 유신시대를 살아오면서 규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평생을 몸 바쳐 온 교직생활에서 전교조 활동을 일관되게 할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유신이 끼친 영향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역사 교사가 되어 유신시대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다가 유신시대에 이르게 되면 나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에 휩 쌓여 그만 목소리를 높이고 만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 생생한 이야기에는 아랑곳 않고 오히려 그 시대를 메이지유신시대의 이야기나 되는 것처럼 아득히 여기고 마니 어쩔거나.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직접 체험한 역사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역사는 없을 것이다. 또한 살아가는데 있어서 자신이 체험한 역사보다 더 값진 교훈을 주는 것이 어디 있으랴!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