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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스크랩 만주독립운동의 거점, 신흥무관학교
수주 추천 0 조회 9 13.08.21 08: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독립군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

 

 

독립전쟁 최고의 전투, 청산리 전투!

30년대 한중연합군의 대승리 쌍성보전투, 영릉가전투!

항일 비밀결사, 의열단!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까지!

독립전쟁의 한가운데는 언제나 신흥무관학교가 배출한 정예군인들이 있었다!

 

"역사 교사 천 명이 뽑은 역사이야기, 그 세 번째 주제는 쉰다섯 분의 선생님께서 적어주셨는데요,

독립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시대 우리 조선독립군사는 워낙 복잡해서 배우기도 가르치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인데요,

오늘 역사스페셜은 우리 독립운동사를 보는 새로운 방법을 하나 제시하려고 합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린 독립군 부대를 보면

연해주에 대한 독립군단,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광복군 정부,

또 만주에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군, 한국 독립군, 서로 군정서군, 조선 혁명군.

이렇게 많은 부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각 군부대들은 노선에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조국독립'이라는 이 목표만은 하나였는데요,

 

이 많은 독립군 부대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여기를 잠깐 보시겠습니다.

독립을 했던 많은 분들을 잠깐 모시겠습니다.

  

 

 

 

 

 

 

 

 

 

의열단장 김원봉,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과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임시정부 부통령 이동녕, 군정부 독판 이상룡,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그리고 무명의 이 독립투사들까지,

 

이런 독립투사들이 모여있던 곳,

바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입니다.

 

 

앨범 속에 보시는 분들은 모두 신흥무관학교 학생이거나 또 그곳에 교관들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만주에 세워진 독립군양성기관으로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다른 독립군 단체들이 몇 년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던 것과는 달리

이 신흥무관학교는 십 년간이나 지속되며 3,500명이 넘는 군사들과 장교들을 배출해 내었습니다. 

이 앞서본 독립군 부대 많은 군인들이 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거나 또 이 학교에 지위를 받았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신흥무관학교는 과연 어떤 곳일까요?"

 

 

압록강 건너 조선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삼원포.

현재 중국 길림성 유하현에 속해 있는 삼원포는 총인구 1만 6천명 가운데 3천여 명이 조선족이다.

 

이곳에 한국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경부터다.

그다지 풍요로운 땅은 아니었지만 일제시대 삼원포는 독립운동의 중심지와 같은 곳이었다.

 

삼원포를 벗어나 신흥무관학교의 주요 무대합니하로 가는 길!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이덕일 박사와 중국인 학자의 도움을 받아 합니하 현장을 찾았다.

 

합니하는 삼원포에서 동쪽으로 40킬로미터 정도에 있었다.

현재 지명은 길림성 통화현 광화.

합니하는 경운기와 소가 주요 운송 수단인 산간지역이었다.

 

"(여기가 학교가 있었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들어는 봤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학교가 어디에 있었는지 들어보셨나요?)

저기 산과 강 근처에 있었다고 했어요.

저기 강이 있잖아요."

                                                           - 탕운성, 90세

 

백 년 전의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을에서 가장 연로한 노인조차도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학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다른 자료는 신흥무관학교 생도대장이었던 원병상의 수기다.

수기엔 '합니하 북쪽 언덕 위에 학교터를 신축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노인이 말하는 강쪽과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강을 따라 탐색한 결과 언덕 위에 넓은 분지를 찾아냈다.

언덕을 감싸고 합니하 강이 돌고 있었다.

 

뒤는 험한 산을 경계로 하고 앞으론 강줄기를 해자로 삼은 곳.

신흥무관학교는 천혜의 요새였다.

군사학교를 세우는 데는 더없이 알맞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터는 옥수수밭으로 뒤덮혀 있었다.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물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주민들이 밭을 일구며 큰 돌들을 치워버려 주춧돌조차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취재팀은 옥수수밭 한가운데서 건물자리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냈다.

  

"나왔습니다. 이 돌이 10년 전에는 1미터 높이에 있었습니다.

5년 전에는 절반 높이였고, 지금은 농사짓기 때문에 거의 없어졌습니다.

신흥학교의 주춧돌입니다."

                                                           - 백낙환, 55세 향토사연구가

 

건물의 흔적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옥수수대에 뒤덮힌 채 자취가 사라진 신흥무관학교 옛터.

그 위에 세워진 학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신흥무관학교 영농사진.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진을 통해 학교의 모습을 추측해보자.

 

이 사진은 흐릿하게나마 학교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원병상의 수기에 나오는 대로 학생들은 염색한 천으로 교복과 모자를 만들어 입었다. 

 

학생들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은 교실 건물일 것이다. 

교실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통나무집 형태로 지었다.

 

그 교실은 어디에 있었을까?

님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는 독립운동가 김산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소설에 따르면 이 교실의 위치는 매우 특이했다고 한다. 

 

자료들을 바탕으로 신흥무관학교를 복원해봤다.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선 18개의 교실. 

 

신흥무관학교의 교실은 교실이면서 동시에 비밀 아지트이기도 했다. 

교실 배치야말로 군사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성격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넓은 연병장의 안쪽엔 큰 병영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병영사엔 비품실, 나팔관, 취사실, 사무실, 식당, 숙직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내무반 안에는 생도들의 이름이 부착된 총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쓰는 총은 나무로 만든 목총에 쇠방아쇠를 부착한 것이었다.

 

학제는 3년제인 중등과와 1년제인 군사과가 있었다. 

그러나 과와 상관없이 군사훈련은 기본이었다.

 

넓은 연병장에선 수시로 각개훈련과 기초훈련을 하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공격전과 방어전을 펴기도 했다. 

  

 

 

군사과목으로는 총검술, 유격, 축성학, 육군형법, 구급의료, 측도학, 격검 등이 있었다.

교관은 대한제국 무관 출신의 이세영, 이관직, 김창환 등의 장교들이었다.

훈련은 철저하고 엄격했다.

 

"특히 이분들은 산악훈련 같은 것을 철저히 시켰고

그런 것이 북한 지역에 대한 침투도 있었습니다만 게릴라작전 같은 걸 많이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와 같이 실전에 대비해 엄격한 체력훈련에 산악훈련 같은 걸 많이 시켰습니다." 

                                                                                                 -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넓은 연병장에서

교관 김창환의 명량쾌활한 구령 아래

각개훈련과 기초훈련을 했었다.  

 

야외에서는 이 고지 저 고지에서

가상의 적에게 공격전, 방어전, 도강, 상륙작전 등을 

실전에 방불케 되풀이 했다.

 

엄동설한 야간에 파저강 70리 강행군을 비롯해

강인불굴의 체력단련에 힘썼다."

                                                                       - 원병상 수기 중에서

 

강인불굴의 군사를 길러내는 양성소, 그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였다.

 

 

 2. 신흥무관학교의 교육과정!~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신흥무관학교의 훈련병들이 아주 땀을 흘리며 훈련을 받았던 연병장입니다.

신흥무관학교의 훈련은 아주 강도가 높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잠시 이들의 일과를 드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읽어드린 것은 신흥무관학교의 생도대장  원병상의 수기였습니다.

이 수기를 바탕으로 신흥무관학교 훈련병들의 일과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아침6시 점호를 받고 나가 하루종일 훈련을 받았습니다.

 

또 수기에는 식사 내용도 아주 자세히 나와 있는데요,

중국인들이 사료로도 쓰지 않는 썩은 조밥 한덩이와 기름에 쩐 콩장 두어쪽이 식사의 전부였습니다.

 

오후에는 수업이외에 영농활동도 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런 자신들의 학교생활은 학병농투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생활 자체가 투쟁이었지요.

물론 공부도 빠질 수 없는 투쟁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의 목적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이었지만

독립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서 인재양성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군사교육 이외에도

일반 중등과정도 철저하게 진행시켰습니다.

 

 

이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요?"

 

국경지방시찰복명서(1914회도서관엔 일제시대 정찰보고서가 남아 있다.

일제가 국경지방 조선인들의 행동을 감시해 놓은 기록이다.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있는 길림성, 봉천성 등은

일제의 요주의 시찰지역으로 이주민 수까지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삼원포, 합니하 등은 이들이 늘 관심을 집중하던 곳이었다.

바로 이곳에 독립군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조사한 보고서엔 교사의 이름과 생도들의 수, 입학 자격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배우는 각종 과목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교과목은 모두 열두 개였는데 군사학교인 만큼 무기와 관련있는 이과 계통이 중시되었다.

지리, 역사, 독서, 체조, 산술, 이화(理化), 한문, 창가과 중국어...

 

고려대도서관.

신흥무관학교에서 쓰이던 교재로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당시 많이 쓰이던 교재로는 국가론이나 대동역사, 독사신론 등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의 교과서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담겨있어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들 역시 대부분 일제의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다.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장지연), 말의 소리,

특히 역사학자 현채가 지은 <국민독본>은 일제가 압수한 책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유명한 책이었다.

 

 

 

이 책은 민족의 시조부터 20세기초까지의 역사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수나라 10만대군을 맞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던 을지문덕 장군,

당 태종을 물리쳤던 안시성의 양만춘 장군,

이런 역사를 통해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높히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거북선을 만든 이순신 장군을 한국 제일의 명장으로 기록하고 있다.

거북선의 우수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기도 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과의 전투들을 통해 임진왜란을 자세히 소개하기도 했다.

 

 

 

지리교과서로 쓰인 <배달족 강역형세도>

신흥무관학교 교재편수위원인 이원태가 지은 책이다. 

 

이 책 역시 일본의 금서 목록에 올라 있었는데 모두 44장의 지도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도엔 만주족의 여러 민족들이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표기되어 있다.

거기에는 고구려와 부여, 발해까지, 만주 일대가 우리 민족의 강역이라는 고토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1910년대 이후 참 어려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어떤 살아있는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만주가 예전에 우리 민족이 중요한 활동을 했던 곳이라는 의식이 있으면서

이제 중국과 우리는 같은 이웃이다, 이걸 강조할 수가 있었어요."

                                                                                                            - 서중석 교수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를 직접 편찬한 사람의 후손을 서울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사진입니다.

1925년에 찍은 우리 할아버님 사진입니다.

이것은 안동에 임청각에 거쳐하실 때의 사진입니다."

 

석주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중 한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며느리 허은은 만주에서의 생활을 엮어 책으로 내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아주 기억력이 좋으셨다면서요?)

예. 수백 곡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허은은 당시에 불렀던 많은 독립군가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시아버지 이상룡이 직접 지은 신흥무관학교 교가도 있었다.

 

"우리 민족이 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을 지켜준 광범위한 역사를 나타내고

그런데 그렇게 했던 것이 바로 우리 조상들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대목만 불러보겠습니다.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의 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 이범증, 이상룡의 증손자, 중앙중학교장

 

중국을 업어 기르고, 일본을 안아 길렀다,

가사에는 우리 민족의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나타나 있었다.

 

일제시대 독립군가를 전공한 중앙대 노동은 교수의 도움으로 신흥무관학교 교가를 복원해봤다.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멜로디였다.

 

"리듬으로 보니까 굉장히 당차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그 당시 대표적인 독립군가로 볼 수 있는데

리듬으로 봐서는 조지아행진곡 일겁니다.

신흥무관학교의 인재들을 키워내고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로 나아가는 그런 기개가 당찬 곡으로 볼 수 있습니다." 

                                                                                           - 노동은 교수, 중앙대 국학대학 

 

     신흥무관학교 교가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의 영절에

여러만만 헌원자손 업어기르고

동해섬 중 어린 것을 품에 다 품어

젖 먹여준 이가 뉘뇨

 

우리 우리 배달나라의

우리우리 조상들이라 

 

그네 가슴 끓는 피가 우리 핏줄에

좔좔좔 결치며 돈다. 

  

독립의 염원이 스며든 창가와 독립군가를 부르며 

학생들은 독립군으로 거듭 나고 있었다.

 

 

3.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 우당 이회영과 그 형제들!~

 

 

"신흥무관학교에 있던 열여덟 개의 교실 중 하나에 들어와 봤습니다.

교실 내부의 구체적인 모습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여기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걸려 있군요.

안중근 의사는 당시 우리 조선인에게 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토대로 학생들의 일과표를 한 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여기 보면 중국어화학 과목이 눈에 띄는 군요.

 

중국어는 제1외국어로 필수과목이라 부를 만큼 강조가 되었고 

확학은 폭탄을 제조하거나 무기를 다루는데 필요해서 개설이 되었고

또 창가 시간이 있는데, 아마도 신흥 교가나 용진가와 같은 군가를 부르면서 결의를 다졌을테죠. 

 

그 다음에 축성학, 측도학, 육군형법, 구급의료, 이런 과목들은 앞서 말씀 드렸듯이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의 교육과 별 차이가 없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거사를 일으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돈, 재정입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는 학생들에게 전혀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토지 매입부터 무기 구입비, 의료비, 관리 운영비 등 엄청난 재정이 필요했을텐데요,

어떻게, 어디서, 이 많은 비용을 구해낼 수 있었을까요?

 

여기엔 당시 돈 40여 만원,

오늘날으로 환산하면 600억원의 돈을 내놓은

한 명문가의 독립을 위한 헌신이 있었습니다."

 

 남대문 상동교회.

세워진 지 110년이 지난 이곳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다.

 

1907년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던 젊은이들이

이곳에 모여 항일 애국계몽단체 신민회를 조직한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전까지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생각한 것은

세계 열강 앞에서 일본의 강제 합병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애국지사들은 신민회 결성 직전,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거사를 논의한다.

이른바 '헤이그 밀사 파견'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열강들은 약소국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다.

 

점차 독립운동진영 내부에서는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어 무력항쟁을 해야 한다는 논의가 퍼져가고 있었다.

 

1909년 봄, 이동녕, 이동휘, 안창호, 양기탁 등이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상동교회 지하에서 비밀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해외독립운동기지건설론이 중요하게 논의된다.

이 모임을 주도한 이가 바로 우당 이회영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에 여러가지 노력이 있었는데요

1907년 만국평화회의 때 외교적인 노력을 기우리는데 이게 실패로 돌아갔고

의병전쟁, 애국계몽운동도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 신민회가 있었습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의 어려움을 깨닫고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국가적이고 민족적인 미래를 염두에 두고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런 노력을 실질적으로 하신 분이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  신주백 박사, 역사문제연구소

 

서울 종로 우당기념관.

아흔을 넘긴 우당 이회영의 셋째 아들 이규창옹이 기념관을 찾았다.

 

이회영 일가는 정승, 판사만 아홉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우당의 육형제들은 모두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로 집단망명을 떠났다.

 

 

 

육형제의 망명을 설득한 것은 넷째인 우당이었다.

이회영은 둘째형 이석영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건의한다.

 

이석영은 당대 재력가인 이원영의 양자로 들어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었다.

이석영은 흔쾌히 동의하며 상속한 모든 재산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모은 재산은 60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우리가 서울에서 살 때는 참 잘 살았거든.

누가 어쩌지도 못하고 또 집안이 세력도 있고 돈도 있고...

그 때는 돈과 세력만 있으면 그만이었거든.

그걸 그만 두고 만주에 갈 때는 어떻게 갔느냐 그건 도리가 없었다구..."            

                                                                                               - 이규창, 90세 독립운동가

 

"이회영 육형제가 만주에 독립운동을 하러 전재산을 팔아갈 때,

그 재산이 보통 재산이 아니라 조선에서 몇 째 가는 이석영의 전재산을 다 팔아치우고

만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은 세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만,

특히 양반이라든가 권문세가 같은 이런 세도가들이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친일파로 변해버린 이런 상황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가 있는 역할로 그 당시 칭송을 많이 받았습니다." 

                                                                                                          - 서중석 교수, 성균관대 사학과

 

이렇게 해서 이회영가의 6형제와 그 식구들, 그리고 부리던 하인들까지

모두 60여 명의 대가족들이 모두 만주를 향해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리고 뜻을 같이 한 사람들도 그 해 겨울 모두 만주로 떠났다.

1910년 겨울의 일이었다.

 

 

 

압록강을 건너 두 달만에 도착한 곳은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마을.

추가가는 추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집성촌이었다.

 

조용한 산골마을에 낯선 사람들이 수백 명씩 들이닥쳤으니

추씨들이 경계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주민들은 정착 초기 한족의 심한 텃세를 받아야 했다.

 

"이회영선생이 올 때 재산이 곡마차로 10차나 되어서

한족들은 무엇때문에 망명해서 중국에 온 사람이 이렇게 부자인가 놀라서 유하현 경찰서에 고소했습니다.

 

경찰서에서 와서 조사한 결과 이회영, 이상룡, 이동녕 선생이 중국어를 몰랐지만

한자로 써서 여기 온 목적은 조선이 망해서 망명해 왔는데

교육을 향상시키고 농업을 향상시켜 독립운동을 하러왔다고 말해서

유하현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 백낙환 55세, 향토사연구가

 

추가가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독립운동의 기지였다.

추가가 마을 곳곳에는 독립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1911년 4월 마을 뒤의 대고산에서 300여 명의 이주 한인들이 천인대회를 열었다.

새땅에 정착했음을 하늘에 알리고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일종의 민중집회였다.

 

이 자리에서 이주민 자치단체인 경학사가 설립되었다.

해외독립군기지건설의 첫걸음이었다.

그 자리에선 경학사 취지문도 발표된다.

 

"부여의 옜 땅은

눈강(송화강 지류)에 달하였으니

이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요,

고구려 유족들이 발해에 모였으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 동료들이 아닌가..."

 

   

 "경학사를 통해서 이곳으로 망명해온 전 주민들을 하나로 묶고

외부 중국과의 각종 교섭을 중계하는 공수창고 역할도 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경학사를 통해서 독립운동의 일체감을 형성하고

이 경학사가 모체가 되어서 이곳에 온 목적인 독립군기지건설의 기초를 이루는 단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덕일 박사, 한가람 역사연구소

 

중국 요녀성 신빈현.

그러나 정착은 쉽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의 망명으로 인해 일본군대가 들어올 것을 염려해

조선인들에게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신빈 만족자치현 당안관(문서보관소). 

신흥학우보.

 

신빈현 지역의 정부 공식 문서를 모아둔 곳인데

이주민들이 땅을 매입하기 위해 청원한 공식 문서가 발견되었다.

자료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권에 달하는 청원기록은

당시 이곳에서 땅을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가 보여준다.

 

거듭된 청원에도 불구하고

중국 당국에서 돌아온 대답은 토지 매매 불가라는 통보였다.

 

"중국 정부가 한국민들의 입적 문제에 대해 대단히 신중한 정책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십 년이 되지 않으면 정식으로 귀화 입적을 시켜주지 않는 그런 정책을 썼던 것이죠.

그런 문제로 애로가 많았고 그래서 이회영이 바로 북경에 있는 원세개를 직접 만나러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서중석 교수 

 

당시 중국 총리대신인 원세개는

청나라의 사신으로 조선에 와 있을 때 이회영 일가와 친분을 쌓은 적 있었다.

이회영과 원세개의 담판으로 토지 문제는 일단락 될 수 있었다.

 

조선의 망명자들은 허름한 옥수수 창고 하나를 장만했다.

마침내 학교를 세울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4.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

                      교육계몽활동에서 의열투쟁까지!~

 

 

"이렇게 해서 1911년 봄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당시에 세워진 이 간판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라고 되어 있습니다.

 

새로울 신(新)에 부흥할 흥(興), 우리 민족을 새롭게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왜 무관학교가 아닌 강습소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감시를 피하고

또 중국 당국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신흥강습소, 신흥중학교, 신흥무관학교라는 명칭을 두루 사용하게 됩니다.

명칭이야 어떻게 되었든 신흥무관학교는 엄연히 군인을 양성하는 곳이었습니다. 

 

시작부터 학교는 운영이 내내 쉽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14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학교는 3,500명이라는 많은 학생을 배출합니다.

 

 또 독립전쟁이 본격화되는 1920년대 이전에도 이들은 각가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학생들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독립기념관 지하수장고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학생들의 독립활동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있다.

발간된 지 85년이 된 신흥학우보.

이것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만든 학우보다.

 

학우보는 주민을 대상으로 배포되기도 했는데  

많은 졸업생들이 학우보를 통해 주민 계몽 활동을 벌였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2권 이후에는 전쟁을 주제로 한 내용이 보이고

시나 수필 등 문학 작품도 보인다.

 

연재물도 많았다.

학우보에는 '보병전투연구'라는 제목으로 전쟁 관련 연재물도 있었고,

학우보에는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안중근전이 연재물로 실려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내의 문제만 다루는 게 아니라

간도 지방의 한인들의 민족운동,  

또는 주민들의 생활과 직결되는 민족운동을 망라해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 체제를 가질 수 있었고,  

또 거기에 바탕하여 신흥무관학교 체제가 유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박민영 연구원,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중국 요녕성 환인현 보락보진 쾌모자촌 마을 깊숙한 곳에는 공들여 만든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만주지역 여성항일계몽운동가인 노학당 윤희순 여사가 설립한 동창학교터다.

 

학교의 목적은 항일인재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그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신흥무관학교에서 파견된 학생들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만주지역 내에서 학교를 짓거나 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모금해서 학교를 지었는데 광장이 넓어

운동장에서 군사훈련도 시키고 공부도 하고 반일사상도 고취했어요.

그 선생들은 신흥무관학교 필업생들로 1~2년 봉사하고 군사훈련시키고 정치사상도 가르치고..."

                                                                                   - 이영훈, 환인 조선족 문화활동 회장

 

학교 운동장에서는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학교 운동장 깊숙히에는 학교 식당과 숙소가 자리잡았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와 비슷한 구조다.

 

등뒤로 험한 산을 두고 앞으론 강을 해자 삼아 쳔연요새로 들어선 형태.

신흥무관학교와 입지조건이 닮아 있었다.

 

"여기 강돌은 강에서 가져온 것이고

큰 돌들은 그때 윤희순 할머니(학교설립자) 독립단 학생들은 데리고 앞산에서 가져왔다고 그래요...

(일부러 깍은 돌들이죠?) 예.."

                                                                                                              - 김영순, 61세

 

이 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항일운동가가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배운 것을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그것은 제2, 제3의 신흥무관학교를 만드는 작업이었고

제2, 제3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신흥학우단이나 교육활동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일부 학생들은 좀더 직접적인 항일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 활동이었다.

 

1920년 이후 각 신문에 놀랄만한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고 일제를 향한 폭력 테러를 기치로 내건 의열단 활동이었다.

 

이들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수뇌부,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거두, 적탐, 반민족적 인물들을

살해 대상으로 정하고 의열단 활동을 펼쳤다.

이른바 의열단 '칠가살(七可殺)'이었다.

 

또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각 경찰서 등을 파괴 대상으로 삼았다.

실제로 각 경찰서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했다.

 

 

                      <1909년 조직 의열단 - 김원봉, 곽재기, 김익상, 박재혁, 김상옥>

 

단장 김원봉, 곽재기,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육군대장을 요격한 김익상,

부산경찰서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박재혁, 김상옥,

의열단의 활동은 일제에게큰 두려움이었다.

 

의열단은 애초에 어떻게 결성되었는가?

 

모임의 출발은 신흥무관학교였다.

의열단 13명의 단원 중 8명이 신흥무관학교였다.

 

"의열단은 말 그대로 의열투쟁입니다. 

개인의 의열투쟁을 통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단체로써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웠던 적극적인 무력투쟁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개인적이고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투쟁방식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신주백 박사, 역사문제연구소 

 

의열단은 단순한 테러단체가 아니라

정확한 이념과 목표와 독립운동단체였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을 통해서 의열단의 이념과 목표를 강조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조국의 독립과 이상적 사회건설이었다.

 

 

 

 

5. 20년대 청산리전투에서 40년대 광복군까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활약했다!~

 

 

"서슬 푸른 그 시기에 조선총독부며 경찰서를 폭파하겠다는 것은 참 대단한 포부였습니다.

이렇게 독립전쟁이 본격화 되기 이전에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결정적인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그들에게 계기를 가져다 준 것은 바로 3.1운동이었습니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젊은이들은 이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만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이 찾아온 건 바로 신흥무관학교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미 국내외에 유명해져서 독립군이 되는 정식 루트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1919년부터 1920년 한 해 사이에

작게 잡아 6백 명에서 많게는 2천 명까지 정규교육을 받은 정예부대원이 배출이 됩니다. 

 

1919년 봄 드디어 만주지역에 정식 군부대가 성립이 됩니다.

마침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고대하던 참전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 전야에 이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일본방위청방위연구소에는 일제시대 일본 육관에 대한 각종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취재팀이 찾은 것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역사책.

일본 육군사관학생들의 학적부라 할 수 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는 소수의 조선인 유학생들도 끼여 있었다.

취재팀은 수백 명에 달하는 제23기 졸업생 명단 속에서 중요한 이름 하나를 찾고 있었다.

 

 

 

지석규.

후에 지청천으로 이름을 고치고 독립군의 장군이 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의 병사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지청천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의 정식장교였다.

그러나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험난한 독립군의 길을 선택했다.

 

신팔균과 김경천 역시 마찬가지 선택을 했다.

이들의 망명은 일본 뿐만 아니라 국내외에 화제가 되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신흥무관학교로 찾아들었다.

독립군을 꿈꾸던 젊은이들에게 이들의 소식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지청천, 신팔균, 김경천 이러한 분들이

조국독립에 몸을 바쳤야지 일본군은 될 수 없다고 독립군에 투신을 했습니다.

 

특히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생인 지청천이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어서 독립군을 양성한다고 하니까

신흥무관학교에 청소년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습니다."

                                                                                          - 신용하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

 

젊은이들이 몰려들자 신흥무관학교는 포화상태가 된다.

신흥무관학교는 밀려오는 젊은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요하현 대두자에 새로운 학교를 세운다.

 

이로써 신흥무관학교는 추가가합니하에 이어 고산자까지 세 개의 학교를 갖게 된다.

이 세 학교를 통해 1919년에서 1920년 사이 1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신흥무관학교는 개교 이래 가장 큰 성장을 한다.

 

중국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

신입생이 몰려오는 동안 만주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1919년 봄 만주에서는 독립운동 사상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자치조직인 한족회를 중심으로 해서 정규군대를 보유한 서로군정서가 만들어진다.

 

서로군정서는 군부대와 행정기관을 갖춘 군정부였다.

신흥무관학교가 염원하던 독립군부대가 드디어 만들어진 것이다.

 

“군정서라는 것은 이중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부로써의 기능, 즉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 대책세워주는 기능이 있고,

다른 하나는 총을 들고 직접 일본과 싸운다는 무장투쟁의 기능입니다.

이러한 서로군정서가 1919년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신흥무관학교를 중심으로

유하현 지역에 강한 독립운동기지가 건설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구요,

또 다른 하나는 대단히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겠습니다.“

                                                             - 신주백 박사

 

 

서로군정서가 만들어진 비슷한 시기에

연길에서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가 조직된다.

 

3.1운동의 영향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독립군 부대가 연합시도한 것이다.

 

서로군정서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서로군정서의 군사령관은 부총재인 지청천이었다.

 

북로군정서는 무기 공급이 원활했던 반면 군인들을 훈련시킬 교육체계가 없었다.

서로군정서는 신흥무관학교라는 훌륭한 교육기구가 있었지만 무기가 충분하지 않았다.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의 연합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안성맞춤의 결합이었다.

 

두 독립군 부대가 협력을 도모하는 가운데

만주의 독립군은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로군정서에서는 많은 군사학 관계의 책

서로군정서에서 훈련받았던 사람들이 직접 가서 군대의 기둥 역할을 하거나

또는 사관양성소 같은 곳에 가서 훈련을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철저히 잘 해낸 것이죠.”

                                                                         - 서중석 교수

 

그렇게 해서 청산리전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계곡에서 일본군과 독립군의 첫 교전이 있었다.

 

백운평 계곡은 산림이 우거진 80도의 급경사를 이루는 지역,

북로군정서군은 100미터의 계곡을 낀 채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다.

 

수적인 우세와 막강한 화력을 믿고 있었던 일본군은

두 편으로 나누어 독립군을 공격하다가

상대방 부대를 서로 공격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낸다.

 

백운평에서 이루어진 첫 전투는 독립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청산리에서 이루어진 6일간의 대승리의 서막이었다.

 

"백운평전투는 청산리전투에서 첫 승리로써

일본에 맞서 이길 수 있다는 신심과 용기를 준 전투로써

청산리전투의 서막으로써 역사에 장식됩니다.”

                                           - 김춘선 교수, 중국 연변대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와 어랑촌, 천수평, 야지골 등

청산리 일대에서 십여 차례 접전이 이루어졌다.

 

청산리전투의 주력부대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였다.

 

그리고 북로군정서에는

서로군정서의 교관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었다.

 

서로 연합한 독립군 부대는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 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리며 승전을 거듭 한다.

 

청산리대첩.

그것은 독립군의 연합으로 가능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오래도록 기다려온 준비된 군인들이 있었다.

 

“청산리 일대는 대단히 험준한 산악지대였습니다.

여기서 무기나 수적으로 우세했던

일본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큰 힘 중에 하나는

신흥무관학교에서 정기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 받았던 안정된 지위체계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기동성 있게 싸울 수 있었던 단결력,

이게 바로 무기나 수적으로 열세했던

독립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고 봅니다.”

                                                                - 신주백 박사

 

청산리전투가 끝난 후 만주 일대의 한인이주민들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길림성 통화현 부강향.

이곳 마을 입구에 일곱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진 무덤이 있었다.

비석엔 ‘반일 지사의 묘’라고만 쓰여 있다.

 

하지만 무덤 주인들의 이력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사람들은 모두 같은 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일곱 분 중 승병균, 조용석 외에는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교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시교사였는데

당시 학교 규정에 따라 모든 졸업생은 관할지역 내에서 1~2년간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신흥학우단에 파견해 교사된 것으로 후에 일본군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 조문기, 사회과학원 연구원

 

 

청산리대첩 직후인 1920년 11월.

일제는 만주일대에서 대대적인 보복을 자행한다.

 

전투와는 상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한 만행.

이른바 ‘경신대학살’이었다.

 

일제는 한 달도 안 된 사이에 수천 명의 조선인을 죽였다.

 

무덤의 주인공들도 그 와중에 죽임을 당했다.

무덤의 주인 중에는 친형제간도 있었다.

 

형 승대언은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이었고

학교의 뜻에 따라 교편을 잡았었다.

 

3,500명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경신대학살을 피해

독립군기지를 밀산으로 옮긴 세력과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세력들은,

 

러시아 알렉세예프스크에서

소련군에게 속아 무장해제를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합니다.

이른바 ‘자유시참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군들은 끊임없이 독립군 조직과 활동을 이어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임시정부 직속군단인 참의부, 길림성 지역의 정의부, 북만주 지역의 신민부 등입니다.

 

이렇게 각지에서 흩어져 독립활동을 하던 독립군들은

1940년 충칭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창립이 되자 대부분 이리로 합류가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1945년 국내진공작전을 세워 마지막 독립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기지건설에서부터

20~30년대 무장투쟁, 그리고 40년대 광복군까지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지금 제 뒤로 해방후 고국에 돌아온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의 사진이 보이고 있습니다.

3,500명이 넘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가운데 그 이름이 확인된 사람은 306명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기록되지 않은 3,200여 명의 졸업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대부분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이국의 전쟁터에 묻혔을 것입니다.

 

역사교사 천 명이 뽑은 역사이야기,

오늘의 주제는 독립군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우리가 추적한 신흥무관학교의 이야기는 그대로 독립군의 역사였습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 신흥무관학교가 운영된 것은 꼭 1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는 이어져서 조국 독립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 유인촌의 역사스페셜을 보고(좋은 가을날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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