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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 조봉원(趙逢源) 묘갈명(墓碣銘) - 김창흡(金昌翕)
선생(先生)의 휘(諱)는 봉원(逢源)이요, 자(字)는 사달(士達)이고, 성(姓)은 조씨(趙氏)이며, 파서(坡西)는 호(號)이다. 계통이 함안(咸安)에서 나왔는데, 그 시조(始祖) 조단석(趙丹碩)은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원윤(元尹)이 되었고, 그 후로 7대 조열(趙悅)은 우리 조선(朝鮮)에 들어와 공부 전서(工部典書)가 되었다.
전서의 손자 조여(趙旅)는 문장을 잘했는데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할 때를 당하여 성균관 재사[泮齋]에서 달아나 향리(鄕里)로 돌아가서 산수(山水) 사이에서 노래(老來, 노년)를 보냈으니, 호(號)가 어계(漁溪)이다. 손자 조순(趙舜)은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었는데, 중종조[中廟朝]에 현달하였고, 참판의 손자 조감(趙堪)은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로 우계 선생(牛溪先生, 성혼(成渾))과 벗으로 지냈는데, 그의 죽음에 우계가 그의 행의(行誼)를 기록하였다.
그는 바로 선생의 증조(曾祖)이다. 조부(祖父)는 조의도(趙毅道)로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 증(贈) 호조 참판(戶曹參判)이며, 선고(先考)는 조일(趙鎰)로 평시서 영(平市署令)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다. 배위(配位)는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증 좌승지(左承旨) 허호(許昊)의 딸이며 좌의정(左議政) 문정공(文貞公) 허침(許琛)의 5대손이다. 만력(萬曆)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 9월 초7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농(弄)을 좋아하지 않고 엄중하기가 어른과 같았다. 스스로 글 읽기를 권장하며 마음을 가라앉혀 잠잠히 연구를 해서 더러는 스승에게 배움을 기다리지 않고도 다 해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공부[藝業]가 일찍 이뤄졌다. 일찍이 과거 응시에 천거되었으나 불리하자 문득 그것을 버리고 몸을 고인(古人)들의 학문에 의탁하여 무릇 경의(經義)를 연구할 때는 반드시 힘써 실천(實踐)할 것을 구하였고 입으로 외우고 귀로 듣는 것에 전념하지 않았으므로 행의(行誼)가 선배(先輩)들에게 추중(推重)받는 바 되었다.
효종(孝宗) 때에 천거(薦擧)에 응하여 동몽 교관(童蒙敎官)이 되었고, 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ㆍ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 겸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ㆍ사도시 주부(司寺主簿)ㆍ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ㆍ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ㆍ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ㆍ고령 현감(高靈縣監)ㆍ임피 현령(臨陂縣令)ㆍ고양 군수(高陽郡守)를 지냈다.
70세에 이르러서 시종(侍從)의 아버지로서 통정 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에 예승(例陞)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또 대질(大耋)로 대신(大臣)의 말이 있어 특별히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올리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691, 숙종 17) 2월 30일에 경성(京城)의 집에서 세상을 떴는데, 수(壽)는 84세였다. 파주(坡州)의 아가산(峨岢山) 신좌 인향(申坐寅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부인(夫人)은 초계 정씨(草溪鄭氏)로, 판관(判官) 정시혁(鄭時赫)의 딸이다. 효성스럽고 자애롭고 정숙하고 양순하여 아내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다. 선생보다 52년 먼저 세상을 떠서 상주(尙州)의 무량동(無量洞)에 장사지냈다.
2남을 두었는데, 조근(趙根)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내고 유술(儒術)과 문망(文望)으로 온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나 간당(奸黨)들에게 거슬림을 당하여 기미년(己未年, 1679, 숙종 5)의 화망(禍網)에 걸려서 뜻을 끝까지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마치었는데, 뒤에 부제학(副提學)에 증직되었다.
조해(趙楷)는 순창 군수(淳昌郡守)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측출(側出)로 아들 조송(趙松)은 첨사(僉使)이고, 딸은 박태숙(朴泰肅)과 이홍수(李弘遂)에게 각각 시집갔다. 교리(校理) 조근은 1남 조영기(趙榮期)와 4녀를 두니, 박태은(朴泰殷)ㆍ이지규(李志逵)ㆍ유봉휘(柳鳳輝)ㆍ윤은교(尹殷敎)는 사위이다.
군수(郡守) 조해는 4남 1녀를 두니, 조영복(趙榮福)은 관찰사(觀察使)이고, 조영록(趙榮祿)은 정랑(正郞)이며, 조영제(趙榮禔)는 진사(進士)이고, 조영우(趙榮祐)는 참봉(參奉)이며, 사위는 이덕함(李德涵)이다. 내외 증손(曾孫)은 모두 약간인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돈독하고 중후하며 기국(器局)이 높고 정돈되어서 평소에 긍지(矜持)를 일삼지 않았으나 그의 기상[眉宇]을 바라보면 사람들이 감히 의리(義理)아닌 것으로 가까이하지 못했다. 사람을 접촉할 때에는 언제나 온화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였으며, 오직 시비(是非)를 가리는 즈음에 있어서는 확연(確然)해서 흔들 수가 없었다.
효도와 우애에 독실하여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참판공(參判公, 조일(趙鎰))을 받들고 영남에 옮겨가서 우거했는데, 엎어지고 자빠지는 경황없는 때에도 맛있는 반찬이 끊어지질 않았고, 그 곁에서 기쁘게 해 드려 객지에서 궁하게 지나는 것을 잊을 수 있게 했는데, 이렇게 지낸 것이 10여 년이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그의 정성스러운 효도에 모두 감탄하였다.
대부인(大夫人)의 병환을 시봉(侍奉)할 때에는 옷에서 띠를 풀지 않았고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약에 타서 올렸으며, 전후의 상(喪)에 여묘살이[居廬]를 하면서 슬픔에 수척하여 거의 온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젊어서 아내를 잃어 15년 동안을 혼자 살았는데, 아우와 누이의 장가보내고 시집보내는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새장가를 들지 않은 것이었다. 계씨(季氏)를 위하여 부족한 양식을 넉넉히 대주고 고아들을 돌보기에 더욱 정성과 힘을 다하였다.
정사(政事)를 함에 이르러서는 약속을 엄히 하는 것으로 스스로 긍지로 하였고, 일을 만남에 구차하게 하지 않았다. 장례원(掌隸院)에 있을 적에 옳고 그름을 부결(剖決)함에 있어 법대로 하였고 사정을 용납한 것이 없었는데, 재산이 많은 의원(醫員)이 있어 온 세상의 호걸을 턱으로 부리고 남의 노복[臧獲]을 빼앗는가 하면 귀척(貴戚)들을 사주(使嗾)하여 송사를 꾸미고 간혹 서신을 선생에게 보내어 위협하는 말로 공갈 협박을 하였으나 선생은 못들은 척하고 그 자리에서 의원을 굴복시켰으므로, 그 일을 들은 자들은 통쾌하게 여겼는데, 장관(長官)이 평소 서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도 또한 크게 기뻐하며 복종하였다.
고령(高靈)에 있을 때는 간사한 자를 다스리고 궁핍한 자를 돌보니, 경내(境內)가 화목하고 흡족해 하였다. 고을 치소(治所)의 지대가 낮아서 해마다 장맛비에 범람(泛濫)하는 우환이 있었는데, 이민(吏民)들과 약속하여 제방(堤防)을 쌓아 범람을 막고 소통하는 수문[斗門]을 만들어서 때로 물을 가두고 흘러내려 보내어 1천여 경(頃)의 농지에 물을 대도록 하였으므로, 백성이 그 이득을 얻게 되었다.
임피현(臨陂縣: 전라북도 군산시에 있었던 옛지명)에서는 풍속이 고루하여 학문에 어두웠으므로, 이에 그중에서 빼어난 백성을 선발하여 글방에 거처하게 하여 녹봉으로 먹여 주면서 날마다 공부를 시키고 다달이 시험을 보여서 차등을 매기어 풍동(風動)시키니, 선비들이 깨끗하게 씻고 닦을 줄 알아서 비늘과 껍질을 벗은 것과 같았다.
진사시(進士試)에서 뽑혀 태학[國庠]에 들어가는 자들이 연달아 있으니, 고을 사람들이 추로[鄒魯, 공맹(孔孟)의 이칭(異稱)]의 고장이라면서 자랑을 하였다. 고양군(高陽郡)은 서관(西關)의 길목으로서 오고 가는 손님들이 붐비는 곳이고 또 이때에 흉년이 들어서 굶어 죽은 사람이 길에 가득했는데, 선생이 군수로 부임해서는 손님을 맞이하고 전송하며 백성을 보살피고 먹여 살리게 해줌에 있어 이리저리 주선함에 마땅함을 얻게 되었으므로 넉넉하게 일이 성취되고 백성이 소생하였으니, 무릇 선생이 고을을 다스려 시험한 것이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았다.
또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떠나고 머무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이 임기를 채우고 갈린 적이 없었다. 고양 군수로 있을 적에는 을묘년(乙卯年, 1675, 숙종 원년)의 시국 변천을 보고는 즉시 군수의 인끈을 풀어 던지고 고향인 파산(坡山)의 선영(先塋) 아래로 돌아가 쉬었는데, 집안 전체가 쓸쓸하고 먹을 양식[菽水]이 넉넉하지 못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맑고 돈독하고 청검하고 소탈함이 늙도록 한결같았는데, 아들 교리공(校理公, 조근(趙根))이 일찍이 한 벌의 털 갖옷을 생신날에 올리니 선생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나로 온포(縕袍) 입은 것을 부끄럽게 하는가? 지금의 나는 바로 옛날의 나인데 이것으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였다. 선생의 평생을 모아보면, 마음을 세우고 행동을 절제함이 장벽처럼 곧고 바름은 본디 뻣뻣하고 굳센 성품에서 얻은 것이나 또한 의(義)를 익힌 본바탕이 있어서이다.
소싯적부터 함께 갈고 닦은 자들이 모두 유림(儒林)의 석덕(碩德)으로 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과 같은 분은 곧 그중에 더욱 훌륭한 분이었다. 선생이 거처를 상산(商山)에 정할 적에 우재가 인근 사람을 불러서 서로 도우며 학문과 덕을 닦게 하였다.
효종을 보좌하기에 미쳐 생도를 모아 교훈하는 것을 일로 삼았을 때 제일 먼저 선생을 천거하여 훈몽(訓蒙)하는 관직을 맡겼다가 선생이 나오기를 어렵게 여긴다고 하여 또 서신을 보내어 초청하였는데, 그 글에, “오늘날 성상(聖上)의 뜻이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니, 나의 뜻은 장차 생각하기를 아무리 벙어리ㆍ귀머거리와 절뚝발이ㆍ앉은뱅이일지라도 또한 기운을 더하여 성주(聖主)가 하려고 하는 뜻을 도우려는 것이지 감히 녹사(祿仕)로써 서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또 존형(尊兄)이 서울에 있으면 스스로 논의(論議)가 서로 통할 수 있어서이고 또한 한 관직을 주려고 함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또 말하기를, “성주께서 목마르듯이 하시는 정성을 끝까지 쓸쓸하게 만들까 두려우며, 세상을 매우 걱정하는 자들이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당시에 촉망(囑望)한 것이 정중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선생이 남의 스승이 될 만한 것은 그 아들을 가르침으로부터이나 그러나 이미 교리공을 우재에게 부탁하여 심신(心身)을 단련시키게 하였으며, 과거 급제를 하여 청요직(淸要職)에 오르자 조급한 마음으로 권세 다툼을 경계하고 마음을 비워 겸양하기에 힘쓰게 한 것이 모두 제일의 의방(義方)이었다.
그러므로 교리공이 조정에서 강직하게 정의를 잡고서 형틀에 매이어 귀양 가서 위리 안치되었다고 하여 자신의 지킴을 바꾸지 않았으니, 어찌 말미암은 것이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몽학(蒙學)으로 그 문하(門下)에 들어온 선비로 선생의 훈도를 받은 자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학문을 갈고 닦아서 성대하게 재능과 학문으로써 세상에 나타나고 있으니, 또한 어찌 그리 성대한가?
진실로 국자 사유(國子師儒)의 자리로 하여금 선생이 차지한 바 되어서 준수한 학자들을 가르치게 하였다면 즐겁게 교육하는 효력이 반드시 적지 않았을 것인데, 아! 개탄스러울 뿐이다. 나 김창흡이 어려서 두 분 형의 뒤를 따라서 일찍이 한쪽 구석에서 모습[德宇]을 우러러보았는데 아직도 선생이 궤(几)에 의지하고 거룩하게 앉아서 회초리로 제생들을 엄숙히 계도하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서릿발 눈발처럼 찬 기운이 등줄기에 핍박해 오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장성해서 두 분 형님이 선생의 덕을 못 잊어 사모하기를 종시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선생이 돌아가시자 상복을 지어입고 곡하기를 매우 슬프게 하는 것을 보고서 은혜롭게 훈도하신 풍류(風流)가 넓고 장원하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중형(仲兄)이 계실 때 대개 묘비문에 정성을 드러내려고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차질(蹉跌)이 생겨 이루지 못했는데, 지금 관찰군[觀察君, 조영복(趙榮福)]이 또 나에게 옮겨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니, 감히 문장을 못한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명(銘)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벗이 누구냐 하면 태산 북두(泰山北斗) 같은 사람이며,
아들이 누구냐 하면 굳센 금[剛金]과 깨끗한 옥[貞玉] 같은 자들이네,
바르게 경계하고 가르치되 나로부터 엄하게 조심했네.
두려운 건 공평함이 아닌가? 어리석은 자 가르침에 이용했네.
성대한 세상에 작은 벼슬을 했으나 장래를 기대하는 것이 융숭했네.
세 군(郡)을 다스릴 때의 정사는 대략 (옛 한(漢)나라 때의) 황패(黃覇)ㆍ공수(龔遂)의 자취를 남겼네.
등용하면 무엇을 끝까지 할 수 있는가?
덕의 융화일 뿐이네.
성대하게 벼슬길에 오른 제자들 와서 헌수(獻壽)하는데,
오래 산 것 무어 차탄(嗟歎)하랴?
나의 질장구 치며 즐겁게 여겼도다.
그 이행(履行)한 것 보니 주선(周旋)이 완벽하여 죽음도 기뻐하였네.
돈사(惇史: 우수한 사)에 언행을 기록하였고,
시골의 마을에는 유사비(遺思碑)가 있네.
아가산(峩岢山)의 저 봉분에 애도와 경의를 어찌 베풀꼬?
무덤가에 심은 나무 아름드리 되었는데,
그 묘비(墓碑)는 훌륭하지 못하네.
모든 지나는 자제들이 우러러불 곳 여기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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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趙逢源 墓碣銘[金昌翕]
先生諱逢源, 字士達, 姓趙, 坡西號也。 系出咸安, 其始有諱丹碩, 仕高麗爲元尹。 後七世諱悅, 入我朝爲工部典書。 典書之孫諱旅, 能文章, 當端宗內禪, 自泮齋走歸鄕里, 終老山水間, 號漁溪。 有孫諱舜, 官吏曹參判, 顯於中廟朝。 參判之孫諱堪, 宗簿寺主簿, 與牛溪先生友善, 其卒, 牛溪志其行誼, 寔先生之曾祖也。 祖諱毅道, 軍資監僉正, 贈戶曹參判。 考諱鎰, 平市署令, 贈吏曹參判。 配陽川許氏, 贈左承旨諱昊之女, 左議政、文貞公諱琛之五代孫也。 以萬曆戊申九月初七日生先生。
幼不好弄, 儼若成人。 自勸讀書, 潛心默究, 或不待師承而了解, 由是藝業早就。 嘗薦公車不利, 輒舍之, 委己於古人之學。 凡硏經義, 求必力踐, 不專口耳爲也。 行誼爲先輩所推重。
孝廟時, 應薦爲童蒙敎官, 歷活人署別提、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司䆃寺主簿、掌隷院司評、儀賓府都事、漢城府判官、高靈縣監、臨陂縣令、高陽郡守。 至年七十, 以侍從父, 例陞通政階, 除僉知中樞府事。 又以大耋, 有大臣言, 特陞嘉善, 除同知中樞府事。 以辛未二月三十日, 卒于京城第, 壽八十四。 葬于坡州峩岢山寅向之原。
夫人草溪鄭氏, 判官諱時赫女。 孝慈貞順, 配德無違。 先先生五十二年卒, 葬于尙州之無量洞。 有二男: 曰根, 弘文校理, 以儒術、文望重一世, 見忤姦黨, 罹己未禍網, 未究志業而卒, 後贈副提學; 曰楷, 淳昌郡守, 贈吏曹參判。 側出男曰松, 僉使。 女曰朴泰肅、李弘遂。 校理一男, 榮期。 四女: 朴泰殷, 李志逵, 柳鳳輝, 尹殷敎。 郡守四男: 榮福, 觀察使; 榮祿, 正郞; 榮禔, 進士; 榮祐, 參奉。 一女, 李德涵。 內外曾孫總若干人。
先生天資敦重, 器局峻整。 平居不事矜持, 而望其眉宇, 人不敢以非義狎進。 接人一以和敬, 惟於是非之際, 確然不可撓。 篤於孝友, 丙子寇亂, 奉參判公轉寓嶺南, 顚沛中甘旨無缺, 而婉愉其側, 使忘其羈窮, 如是者十餘載, 南土咸歎其誠孝。 其侍大夫人疾, 衣不解帶, 斮指和藥而進之。 前後居廬, 毁幾不全。 少喪配, 獨居十五年, 以未畢弟妹婚嫁, 不有室也。 爲季氏贍匱恤孤, 尤竭其誠力。
及施於爲政, 嚴約自持, 遇事不苟。 其在掌隷院, 剖斷一以法, 無所容私。 有醫者饒於財, 頤指一世豪, 奪人臧獲, 嗾貴戚搆訟, 間以書抵先生, 危語恐嚇, 先生若不聞, 立屈醫人, 聞者快之。 爲長官者素不相能, 而亦大悅服。 在高靈, 繩姦字窮, 境內和洽。 縣治汚下, 歲患泛溢, 約吏民築堤而扞之, 疏爲斗門, 以時畜泄, 漑田千餘頃, 民賴其利。 於臨陂, 以俗陋昧學, 乃簡其秀民, 黌處而俸養之, 日課月試, 以次風動, 士知刷濯, 若脫鱗介。 選自南省而入國庠者比比, 邑人以鄒、魯自夸焉。 高陽爲西關首路, 冠蓋所旁午, 又時丁大殺, 餓莩載路。 先生至則迎送撫哺, 左右得宜, 裕然事濟而民蘇。 凡先生所試於莅邑者, 不過如斯。 又有所齟齬, 不吝去留, 故未嘗滿限而遞。 在高陽, 見乙卯時變, 卽投紱歸休于坡山壟下, 環堵蕭然, 菽水不給, 晏如也。
雅敦儉素, 至老如一。 校理公嘗以一毛裘爲壽辰獻, 先生不悅曰: “豈以我恥縕袍耶? 今我自是昔我, 無以是溷我。” 最先生平生, 其立心制行, 墻壁斬然, 固自剛毅性得, 而亦其講義有素。 自少所與砥礪者皆儒林碩德, 如尤齋宋先生, 乃其尤也。 先生之卜居商山也, 尤齋招與隣近, 以資麗澤。 及佐孝廟, 以生聚敎訓爲事, 首擧先生, 縻以訓蒙之職, 以先生難進, 又移書速之, 有曰: “今日聖意實非偶然, 鄙意將謂雖喑聾跛躄, 亦且增氣以贊聖主有爲之志矣, 非敢以祿仕相招。 且如尊兄在京, 自可論議相通, 又非欲效一官而已。” 又曰: “聖
主如渴之誠, 恐一向落莫, 深爲憂世者所惜。” 觀此則當時所屬望者, 可知其鄭重已。
抑先生之可堪人師, 自其訓子而然, 旣託校理公於尤齋, 使之陶鑄矣。 及其釋褐而躋淸要也, 所戒躁競而勖沖退者, 皆第一義方, 以故校理公能侃然秉正于朝, 不以桁楊栫棘易其守, 豈無所自而然哉? 至於蒙學及門之士被其提撕者, 多磨礱淬濯, 彬彬以才學顯世, 亦何盛也? 誠使國子師儒之席爲其所據, 以迪俊造, 則其樂育之效, 必不但已。 噫! 其可慨也已。
昌翕幼從兩兄後, 嘗一趨隅而仰德宇矣, 尙記其據几大坐, 檟楚肅諸生, 凜乎霜雪逼背。 旣長而見兩兄所誦慕終始不怠, 及先生捐館, 制服而哭又甚哀, 竊感夫惠訓風流之弘長也。 仲兄在時, 蓋欲效忱於墓文, 而不幸蹉跌, 今觀察君又以移屬于余曰: “不可不亟。” 余不敢以不文辭, 謹爲之銘曰:
以爲友誰? 魁斗喬嶽。 以爲子誰? 剛金貞玉。 規焉誨焉, 自我嚴恪。 可畏非公? 利用擊蒙。 盛際微官, 屬望者隆。 三郡之政, 粗迹黃、龔。 用何能究? 惟德之融。 莘莘袍笏, 弟子來壽。 大耋何嗟? 樂我鼓缶。 視履則旋, 乘化其怡。 惇史記言, 里社遺思。 峩岢之封, 哀敬何施? 有拱者木, 不豐其碑。 凡過子弟, 式瞻在玆。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