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리는 화곡공 정사호 할아버지께서 이곳에 머물면서 화곡이라는 호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화곡공이 청주에 머물게 되면서 큰아드님 정현원은 우암송시열의 문인록에 올라 있고 송시열이 둘째 아드님 정성원의 비문을 썼습니다.
이곳에 있는 수락서원에 화곡공을 모시게 되었고 화곡 정사호는 이곳의 낭성팔현으로 불렸습니다.
화곡공이 이곳에 잠깐 머문 이후 둘째 아드님 자연정 정성원의 후손이 살게 되면서 현재까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습니다.
화곡공이 이곳에 머문 이후 많은 광주정씨에서 마지막 문과급제자 사마시 합격자와 외세를 물리치고자 3.1민족대표와.동학 충북도임.
정용승교수(서울대 재학중 학과 대표로 4.19에 가담).정명호 교수.등을 비롯 정용방.정주환.정화세.정화국 등 인재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외 후손도 많아서 신규식의 증조모가 광주정씨이고 한범덕 청주시장 할머니도 광주정씨입니다.
정화국도 19세로 화곡공의 후손입니다.
정화국의 큰 아드님은 청은 정광환으로 서예가로 활동했으며 충북미협회장과 성균관 유도회 청년회장을 지내셨습니다
정중환은 제천시 부시장.정사환은 현재 충북도청의 서기관으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직접확인은 안했지만 정사환이란 이름이 흔치 않아 정화국의 아드님으로 보입니다)
광주정씨에서 가장 벼슬을 많이 하고 인구도 많은 광주정씨의 대표적인 문중입니다만 가장 큰문중이면서도 단합이 안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종손인 정재선께서 일제때는 독립운동을 하였고 이후 월북하면서 그 아들 정용호(정건웅)께서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문중산을 처분하게 되면서 문중이 화합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정용호씨의 아들이 서울대.고려대를 나오고 생활이 나아지면서 문중의 화합을 도모하고는 있지만 화합이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이곳 문중에서 서울대 출신자만 수십여명에 달합니다.
정화국공은 사간공파가 아니고 성재공파 입니다.
동두천은 성재공의 큰 아드님 정사호의 큰아들 정현원의 후손.이곳 청주는 화곡공의 둘째 아드님 정성원의 후손입니다.
광주정씨에서 마지막으로 문과에 오르신 정면수공은 동두천에서 청주로 양자를 오신 이후 과거에 급제하셨습니다.
정면수공은 영의정 이유원의 탄핵을 주도하였으나 오히려 흑산도에 유배되었습니다.
성재공 정이주의 큰아드님 정사호-정현원-정전창으로 이어지는 성재공의 종가인 정전창의 세아드님중 막내인 정제상께서 논산으로 양자를 가게 되면서 사간공파가 되었습니다.
정전창의 큰 아드님 허주 정치상의 종손이 정영호씨.둘째 아들 정수상의 종손이 정기호 족보편찬위원장 세째 아들 정제상의 후손이 논산.부여에 세거하게 된 사간공파입니다.
6.25때는 정영호 종손이 부여로 피난을 오는 등 화곡공 종가의 후손으로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첫댓글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화합하는 우리 가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정윤칠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