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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편 신앙 고백
제 1 부 “저는 믿나이다” - “저희는 믿나이다”
26 우리는 신앙 고백을 할 때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경으로 고백하고 전례 안에서 기념하며, 계명과 기도의 실천으로 생활화하는 신앙을 설명하기 전에, 우선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 신앙이란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내어 주시며 동시에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는 인간에게 풍요한 빛을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이와 같은 인간의 추구를(제1장), 이어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계시를(제2장), 끝으로 신앙의 응답을 고찰하고자 한다(제3장).
제 1 장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인간
I. 하느님을 향한 갈망
27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인간 존엄성의 빼어난 이유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간의 소명에 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존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을 자유로이 인정하고 자기 창조주께 자신을 맡겨 드리지 않고서는 인간은 온전히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없다.1)
28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그들의 신앙과 종교적 행위들(기도, 제사, 예배, 묵상 등)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하느님을 찾는 길을 표현해 왔다. 이러한 표현 양식들은, 비록 모호한 점들을 내포할 수 있기는 하지만, 매우 보편적인 것들이므로 인간을 종교적인 존재라고 일컬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 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사도 17,26-28)
29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과 이토록 친밀한 생명의 결합”2)을 종종 망각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명백하게 거부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태도들은 매우 다양한 근원에서 비롯될 수 있다.3) 곧 세상의 불행에 대한 반발, 종교적인 무지나 무관심, 현세와 재물에 대한 근심,4) 신앙인들의 좋지 못한 표양, 종교에 대한 적대적 사조, 그리고 끝으로, 하느님이 두려워 몸을 숨기며,5) 그분의 부름을 듣고 달아나는,6) 죄인인 인간의 태도 등이다.
30 “주님을 찾는 마음은 즐거워하여라”(시편 104[105],3). 비록 인간은 하느님을 잊거나 거부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아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모든 이를 끊임없이 부르신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느님을 찾으려면 자신의 모든 지성적 노력, 올바른 지향, ‘바른 마음’, 그리고 하느님을 찾도록 가르치는 다른 이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주님, 주님께서는 위대하시고 크게 기림직하옵시며, 그 힘은 능하시고 그 지혜로우심은 헤아릴 길 없나이다.” 당신께서 내신 한 줌 창조물인 인간이, 죽을 운명을 지녔으며, 자신의 죄와 “당신께서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신다.”는 증거를 스스로 지닌 바로 그 인간이 당신을 기리려 하나이다. 당신의 한 줌 창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찬미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찬미하여 기쁨을 누리도록 인간을 일깨워 주십니다. 주님, 주님을 위하여 저희를 내셨기에, 주님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7)
II. 하느님 인식에 이르는 길
31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부름 받아, 하느님을 찾고 있는 인간은 하느님께 대한 인식에 이르는 몇 가지 ‘길’을 발견하게 된다. 이 길은,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 얻어진 증거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참된 확실성에 이르게 하는 ‘일관성과 설득력을 가진 논증’이라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존재 증명’이라 하기도 한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이러한 ‘길’들은 창조계, 곧 물질 세계와 인간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32 세계: 운동과 변화, 우연, 세상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통하여 우리는 우주의 시작이요 마침이신 하느님을 알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교도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 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로마 1,19-20).8)
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땅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바다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드넓게 퍼져 가는 대기의 아름다움에게 묻고, 하늘의 아름다움에게 묻고……이 모든 실재하는 것에게 물어 보십시오. 모든 것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는 이렇게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들의 아름다움은 하나의 고백입니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들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그 누가 만들었겠습니까?”9)
33 인간: 진리와 아름다움을 향한 개방성, 윤리적 선에 대한 감각, 자유와 양심의 소리, 무한과 행복에 대한 갈망 등으로 인간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묻는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영혼의 표지들을 파악할 수 있다. “인간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씨앗은 한갓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10)이므로, 이 영혼의 근원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시다.
34 세계와 인간은 자신 안에 스스로 최초 원인과 최종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도 마침도 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의 ‘존재’에 참여함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여러 가지 ‘길’을 통해서 “모두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11) 제1원인이며 최종 목적인 실재가 존재한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35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격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과 친밀해지도록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자 하셨다. 그럼에도 하느님 존재에 대한 증거들은 신앙을 준비시킬 수 있으며, 신앙이 인간의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 줄 수 있다.
III. 교회의 하느님 인식
36 “우리 어머니인 거룩한 교회는, 인간이 이성의 타고난 빛을 통해서 피조물로부터 출발하여 만물의 근원이며 목적이신 하느님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가르친다.”12) 이러한 능력이 없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대로”(창세 1,27)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37 한편 인간이 처한 역사적 조건들 안에서 이성의 빛만으로 하느님을 인식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간단히 말해서, 실제로 인간 이성이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빛으로써, 당신 섭리로 세상을 보호하고 다스리시는 인격적인 하느님과, 창조주께서 우리 영혼 안에 심어 놓으신 자연법에 대한 참되고 확실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본성적 능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결과를 얻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진리들은 감각적인 사물들의 질서를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구체적인 행동에 적용되고 삶을 형성하게 될 때에는 자기를 바치고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진리들을 얻기 위해서 인간의 정신은 감각과 상상력의 충동뿐 아니라, 원죄에서 발생한 그릇된 욕망들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일들에서, 스스로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들이 거짓이거나 적어도 불확실한 것이라고 쉽게 믿어 버립니다.13)
38 그러므로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는 것들뿐 아니라 “이성으로 접근 가능한 종교적 윤리적 진리들도 현재의 인간 조건에서도 더 쉽게, 확실히, 오류 없이 알기 위해서는”14) 하느님 계시의 빛이 필요하다.
IV. 하느님께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39 교회는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옹호함으로써, 모든 인간에게 또 모든 인간과 더불어 하느님께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확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확신은 다른 종교, 철학, 과학, 그리고 또 믿지 않는 사람이나 무신론자들과 나누는 대화의 출발점이 된다.
40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말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우리는 단지 피조물들로부터 출발하여, 그리고 인식과 사고의 한계를 가진 인간적 방식으로만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41 피조물들은 모두 하느님과 어떠한 유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더욱더 그러하다. 피조물들의 다양한 완전성(진·선·미)은 하느님의 무한한 완전성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조물의 완전성을 근거로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것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 13,5).
42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신다. 따라서 “형언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15) 하느님을 우리의 인간적인 표현으로 뒤바꾸지 않으려면, 우리의 언어가 가지는 한계와 상상과 불완전성을 끊임없이 정화해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은 언제나 하느님의 신비에 미치지 못한다.
43 이처럼 하느님께 대해 말할 때 우리의 언어가 인간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 하느님께 실제로 다다르기는 하지만 그분의 무한한 순수성을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참으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그 차이점이 훨씬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16) “우리는 결코 하느님께서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다만 무엇이 아닌지 알 수 있을 뿐이며, 다른 존재들이 그분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17)
간추림
44 인간은 그 본성으로나 소명으로나 종교적인 존재이다. 하느님에게서 와서 하느님께 돌아가는 인간은 오직 하느님과 맺는 관계 안에서 자유로이 살아갈 때에만 그 삶이 충만해진다.
45 인간은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 안에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으며, 하느님 안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제가 온전히 당신 안에 있을 때 더 이상 고통도 시련도 없을 것이며, 당신으로 충만할 때 제 삶은 완성될 것입니다.”18)
46 피조물들의 알림과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들을 때, 인간은 만물의 원인이며 목적이신 하느님께서 존재하신다는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
47 교회는, 인간이 타고난 이성의 빛의 도움으로 우리의 창조주이고 주님이시며 유일하고 참되신 하느님을 그분의 업적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가르친다.19)
48 비록 한정된 우리의 언어가 하느님의 신비를 완전히 담아낼 수는 없지만, 무한히 완전하신 하느님께 대한 유사성을 지닌 피조물들의 다양한 완전성에 근거하여 우리는 실제로 하느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49 “창조주가 없으면 피조물도 없어진다.”20)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들은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과 그분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느님의 빛을 가져다 주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들을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6. 사도 2,42 참조.
7.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교육」, 1항: AAS 71(1979), 1277-1278면 참조.
8.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교육」, 18항: AAS 71(1979), 1292면.
19.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교육」, 18항: AAS 71(1979), 1292면 참조.
10.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교육」, 13항: AAS 71(1979), 1288면.
11.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최종 보고서, II, B, a, 4, 11면.
12. 요한 바오로 2세, 1985년 12월 7일에 한 연설, 6: AAS 78(1986), 435면.
13. 1985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최종 보고서, II, B, a, 4, 11면.
14. 마태 10,32; 로마 10,9 참조.
15.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권고 「현대의 교리교육」, 20-22항: AAS 71(1979), 1293-1296면; 같은 책, 25항: AAS 71(1979), 1297-1298면 참조.
16. 「로마 교리서」, 서문, 11항: P. Rodriguez`편(바티칸-팜플로나 1989), 11면.
17. 「로마 교리서」, 서문, 10항: P. Rodriguez`편(바티칸-팜플로나 1989), 10면.
1. 사목 헌장, 19항.
2. 사목 헌장, 19항.
3. 사목 헌장, 19-21항.
4. 마태 13,22 참조.
5. 창세 3,8-11참조.
6. 요나 1,3 참조.
7.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1, 1, 1: CCL 27, 1(PL 32, 659-661).
8. 사도 14,15-17; 17,27-28; 지혜 13,1-9 참조.
9.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241, 2: PL 38, 1134.
10. 사목 헌장, 18항. 14항 참조.
11.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1, q. 2, a. 3, c.: Ed. Leon. 4, 31.
12.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2: DS 3004. 같은 책, 「계시에 대하여」, c. 2: DS 3026; 계시 헌장, 6항 참조.
13. 비오 12세, 회칙 Humani generis: DS 3875.
14. 비오 12세, 회칙 Humani generis: DS 3876.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2: DS 3005; 계시 헌장, 6항;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1, q. 1, a. 1, c.: Ed. Leon. 4, 6 참조.
15. 비잔틴 전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감사기도: F.E. Brightman 편, 「동방과 서방의 전례」(옥스퍼드 1896), 384면(PG 63, 915).
16.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제2장, 「요아킴 아빠스의 오류에 대하여」: DS 806.
17.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이교도 논박」, 1, 30: Ed. Leon. 13, 92.
18.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10, 28, 39: CCL 27, 175(PL 32, 795).
19.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계시에 대하여」, c. 2: DS 3026 참조.
20. 사목 헌장, 36항.
50 자연적 이성을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업적으로부터 확실하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또 다른 인식의 질서, 곧 신적 계시의 질서가 존재한다.1) 하느님께서는 완전히 자유로운 결정으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내어 주신다.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하여 영원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과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심으로써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파견하시어 당신의 계획을 충만히 계시하신다.
제1절 하느님의 계시
I.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을 알려 주신다
51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성(善性)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뜻의 신비를 기꺼이 알려 주시려 하셨으며, 이로써 사람들이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도록 하셨다.”2)
52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신”(1디모 6,16)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자유로운 인간들을 당신의 외아들 안에서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3) 당신의 신적 생명을 인간들에게 주시고자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함으로써, 인간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넘어서서 당신께 응답하고, 당신을 깨닫고, 사랑할 수 있게 하신다.
53 이 계시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계획은 “서로 긴밀히 결합된 행적과 말씀으로 실현된다.”4) 이 계획에는 독특한 ‘하느님의 교육 방법’이 담겨 있다. 하느님께서는 점진적으로 인간에게 당신을 알려 주시며, 사람이 되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명 안에서 절정에 이르게 될 초자연적 계시를 받아들이도록 단계적으로 인간을 준비시키신다.
리옹의 이레네오 성인은 거듭 이러한 하느님의 교육 방법을 하느님과 인간이 서로 친해지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성부의 뜻에 따라 인간 안에 머무르셨고, 인간이 하느님을 깨닫는 데 익숙하게 하고 하느님께서 인간 안에 계시는 데에 친숙하게 하시려고 사람의 아들이 되셨습니다.”5)
II. 계시의 단계
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알게 하신다
54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며, 창조물을 통하여 당신에 관한 영원한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고 천상적 구원의 길을 터 주시고자 하셨을 뿐 아니라, 원조(元祖)들에게 처음부터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6)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빛나는 은총과 정의를 입혀 주시어 당신과 이루는 긴밀한 일치로 초대하셨다.
55 이러한 계시는 원조들의 죄로 단절되지 않았다. 실로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타락한 후에는 구속을 약속하시어 구원에 대한 희망을 일으켜 주셨고, 선업(善業)에 항구하며 구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끊임없이 인류를 돌보셨다.”7)
비록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잃었으나 죽음의 세력 아래 버려 두시지 않고……또한 사람들과 거듭 계약을 맺으셨나이다.8)
노아와 맺으신 계약
56 죄 때문에 인류의 단일성이 깨어진 뒤, 하느님께서는 우선 갈라진 민족들 하나하나를 구원하고 인류 전체를 구원하고자 하셨다. 대홍수 이후 노아와 맺으신 계약은9) “지방과 언어와 씨족과 부족을 따라 갈려 나간 백성들”(창세 10,5)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낸다.10)
57 우주적이며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다양한 민족들의 이 질서는11) 타락한 인류의 교만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교만하게도 바벨탑 사건에서처럼, 한 마음으로 악을 꾸며12) 스스로 일치를 이루려 하였다.13) 인류의 죄 때문에, 이 질서는 다신교라든가, 국가와 왕의 우상화 등 이교도적인 타락으로 끊임없이 위협받게 되었다.14)
58 노아와 맺은 계약은 민족들의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15) 곧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될 때까지 유효하였다. 성서는 이러한 “이방 민족들”의 몇몇 위대한 인물들을 공경한다. “의인 아벨”, 그리스도의 예표이며16) 왕이자 사제인 멜기세덱,17) “노아, 다넬, 욥”(에제 14,14)과 같은 의인들이 그러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성서는, 그리스도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러”(요한 11,52)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노아의 계약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드높은 성덕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다
59 하느님께서는 흩어진 인류를 하나로 모으고자,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창세 12,1) 하고 아브람을 부르심으로써 그를 선택하시어 아브라함, 곧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창세 17,5) 삼으신다. “세상의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창세 12,3).18)
60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백성은 성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어받는 선택된 백성이 될 것이며,19) 장차 교회의 일치 안에 하느님의 모든 자녀를 모을 준비를 하도록 부름을 받게 될 것이다.20) 그 백성은 이방인들이 신앙인으로 접목될 뿌리가 될 것이다.21)
61 구약의 성조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다른 위대한 인물들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교회의 모든 전례 전통에 따라 성인으로 공경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다
62 성조들 이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당신 백성으로 만드셨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에서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내려 주심으로써 당신께서만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이시요 섭리의 아버지이시며 정의의 판관이심을 알려 주셨고, 약속된 구세주를 기다리게22) 하셨다.
63 “주님의 이름을 받은”(신명 28,10)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제적 백성이다.23) 그들은 “우리 주 하느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신”24) 백성이며 아브라함의 신앙 안에서 ‘맏형’격인 백성이다.25)
64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구원의 희망을 간직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26) 모든 사람의 가슴에 새겨질,27)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기다리라고 가르치신다.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이 완전히 속량되고, 그들의 모든 불성실이 정화되며,28) 모든 민족을 망라할 구원을 선포한다.29) 이러한 희망은 특별히 주님의 가난한 사람들과 겸손한 사람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30) 사라, 리브가, 라헬, 미리암, 드보라, 안나, 유딧, 에스델 등과 같은 거룩한 여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생생한 희망을 간직했었다. 이 희망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마리아이다.31)
III. “모든 계시의 중개자이시며 충만”32)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65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2).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유일한 ‘말씀’이시다. 성부께서는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은 없다.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많은 사람들의 뒤를 이어 이러한 사실을 히브리서 1장 1-2절의 주석을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유일한 ‘말씀’이신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에게 주실 다른 말씀은 없습니다. 당신 아드님 전체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예언자들에게는 부분적으로 말씀하셨던 것들을 당신 아드님 안에서는 전부 말씀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 유일한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동시에 그리고 단 한 번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다시 그분께 문의한다든지 또는 어떤 환시나 계시를 바란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께 눈을 돌리지 않고 그분과는 다른 것이나 어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어리석은 일일 뿐 아니라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33)
더 이상 다른 계시는 없다
66 “새롭고 결정적인 계약인 그리스도의 구원 경륜은 결코 폐기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기 전에는 어떠한 새로운 공적 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34) 그러나 계시가 완결되었다고는 해도 그 내용이 완전히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신앙은 시대를 살아가며 계시의 내용 전체를 점진적으로 파악해 가야 할 것이다.
67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른바 ‘사적’ 계시들이 있었고, 그 중의 어떤 것들은 교회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신앙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결정적 계시를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한 시대에 계시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교도권의 인도에 따라, 신자들은 신앙 감각으로 이러한 계시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나 성인들께서 교회에 하신 진정한 호소를 식별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긿그리스도께서는 계시의 완성이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벗어나거나 수정하려고 시도하는 다른 ‘계시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스도교가 아닌 일부 종교들과 신흥 종파들은 바로 이런 부류의 ‘계시들’에 근거하여 세워진 경우이다.
간추림
68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내어 주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묻는 인간의 질문에 결정적이고도 풍부한 답을 주신다.
69 하느님께서는 업적과 말씀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당신 신비를 알리시어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하셨다.
70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 자신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셨으며, 더 나아가서 우리 원조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건네셨고, 그들이 죄를 지은 뒤에는 구원을 약속하셨으며35) 그들과 계약을 맺으셨다.
71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살아 있는 모든 존재 사이에 영원한 계약을 노아와 맺으셨다.36) 이 계약은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7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그와 그 후손들과 계약을 맺으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당신의 율법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모든 인류를 위하여 마련된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들을 준비시키셨다.
73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 주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고, 그분 안에서 당신의 영원한 계약을 세우셨다. 그 아들이 바로 성부의 결정적인 말씀이시므로, 그분 이후에 더 이상 다른 계시는 없다.
74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1디모 2,4).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3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셔야 하며, 계시는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계시하신 모든 것이 영구히 온전하게 보존되고 모든 세대에 전해지도록 매우 자비로이 배려하셨다.38)
I. 사도 전승
75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모든 계시를 자신 안에서 이루신 주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되고 당신께서 성취하시고 친히 전파하신 복음을 모든 진리와 윤리 규범의 원천으로 모든 이에게 선포하도록 사도들에게 명하셨다.”39)
사도들의 복음 선포
76 복음은 주님의 명에 따라 두 가지 방식으로 전해졌다.
- 구두로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리고 그분과 함께한 공생활에서 받은 것과 성령의 일깨우심으로 배운 것들을 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전달해 주었다.”
- 문서로는 “사도들과 그 직제자들이 성령의 감도로 구원의 소식을 기록하였다.”40)
사도적 계승으로 지속되는 복음 선포
77 “사도들은 교회 안에 복음이 영구히 온전하게 또 생생하게 보존되도록 주교들을 후계자로 세워 ‘자기 교도직의 자리를 넘겨 주었다.’”41) 그러므로 “영감 받은 책들 안에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사도적 설교는 세상 종말까지 지속적인 계승으로 보전되어야 했다.”42)
78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생생한 전달은 성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성서와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성전’(聖傳)이라고 부른다. 이 성전을 통해서, “교회는 그 교리와 생활과 예배를 통하여 자신의 모든 것과 자신이 믿는 모든 것을 영속시키며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한다.”43) “거룩한 교부들은 이 성전이 살아 있음을 증언하고, 믿고 기도하는 교회의 관습과 생활 속에 풍부히 흐르고 있음을 증언한다.”44)
79 이처럼 성부께서 성령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전해 주시는 통교는 교회 안에 현존하며 작용하고 있다. “예전에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신부(교회)와 끊임없이 대화하시며, 성령께서는 복음의 생생한 목소리가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 울려 퍼지도록 하시고, 신자들을 온전한 진리 안으로 이끄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 안에 풍부히 머물도록 하신다.”45)
II. 성전과 성서의 관계
하나의 공통적 원천
80 “성전과 성서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고 또 상통한다. 이 둘은 동일한 신적 원천에서 솟아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를 이루며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46) 이 둘은 모두 “세상 끝날까지 항상”(마태 28,20)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교회 안에 현존하게 하고 그 열매를 풍부히 맺게 한다.
두 가지의 다른 전달 양식
81 “성서는 성령의 감도로 기록되었으므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곧 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하느님의 말씀은 성전으로 후계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는데, 후계자들은 진리의 성령에게서 빛을 받아 자신의 설교로 그 말씀을 충실히 보존하고 해설하며 널리 전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47)
82 그러므로 계시의 전달과 해석을 위임받은 교회는 “오로지 성서로만 모든 계시 진리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이 둘을 똑같이 경건한 애정과 존경으로써 받아들이고 공경해야 한다.”48)
사도 전승과 교회 전승들
83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성전’(聖傳)은 사도들에게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배운 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제1세대에게는 아직 기록된 신약성서가 없었으며, 신약성서 자체가 살아 있는 ‘성전’의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역교회에서 생겨난 신학적, 생활 규범적, 전례적 또는 신심에 관한 ‘전승들’은 사도 전승과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전승들은 독특한 양식들을 이루게 되는데, ‘성전’은 다양한 장소와 시대에 따라 적용된 여러 표현들을 이러한 양식 안에 수용한다. 이 전승들은 교회 교도권의 지도 아래 ‘성전’에 비추어 보존되거나 수정되거나 또는 폐기될 수 있다.
III. 신앙의 유산에 대한 해석
전체 교회에 맡겨진 신앙의 유산
84 성전과 성서에 담긴 “신앙의 유산”(depositum fidei)은49) 사도들을 통하여 전체 교회에 맡겨졌다. “거룩한 하느님 백성 전체는 이 유산에 충실하면서, 목자들과 일치하여 꾸준히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친교를 맺으며,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항구히 전념한다. 그리하여 전해진 신앙을 고수하고, 실행하며 고백하면서 주교들과 신자들이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50)
교회의 교도권
85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나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51) 곧 로마 주교인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를 이루는 주교들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86 “그렇지만 교도권은 하느님의 말씀 위에 있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봉사한다. 이 권한은 전해진 것만을 가르치며, 하느님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경건히 듣고 거룩히 보존하고 충실히 해석한다. 그리고 교도권은 하느님에게서 계시되어 믿어야 할 것으로 제시하는 모든 것을 이 유일한 신앙의 유산에서 얻어 낸다.”52)
87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다.”(루가 10,16) 하고 말씀하셨다. 신자들은 이
말씀을 명심하여 그들의 목자들이 여러 형태로 주는 가르침과 지도를 온순하게 받아들인다.53)
신앙의 교의
88 교회의 교도권이 교의(敎義)를 정의할 때, 곧 하느님의 계시에 담긴 진리나 이 진리와 필연적인 관계에 있는 진리들에 관한 번복할 수 없는 신앙의 동의를 그리스도 백성에게 의무적인 형태로 요구할 때, 이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받은 권위에 근거한다.
89 우리의 영적인 삶과 교의 사이에는 유기적인 관계가 있다. 교의는 우리 신앙의 길을 비추는 빛으로서 이 길을 밝혀 주고 확실하게 해 준다. 거꾸로 우리의 삶이 올바르면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개방되어 신앙 교의의 빛을 받게 될 것이다.54)
90 교의들 사이의 상호 관계와 일관성은 그리스도 신비의 계시 전체에서 찾을 수 있다.55) “가톨릭 교회의 여러 진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이루는 관계는 서로 다르므로, 교리를 비교할 때에는 진리의 서열 또는 ‘위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한다.”56)
초자연적 신앙 감각
91 모든 신자는 계시된 진리의 이해와 전달에 참여한다. 그들은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시고”(요한 16,13) 가르쳐 주시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57)
92 “……신자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에, 백성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의 중개로 이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58)
93 “실제로 진리의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고 지탱하여 주시는 저 신앙 감각으로,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한 교도권의 인도를 받는……‘성도들에게 한 번 전해진 믿음’을 온전히 지키며, 올바른 판단으로 그 믿음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믿음을 실생활에서 더욱 충만히 적용한다.”59)
신앙 이해의 발전
94 성령의 도우심으로, 신앙 유산의 실재에 대한 이해와 그 언어에 대한 이해는 교회의 삶에서 발전할 수 있다.
- “마음 깊이 그것을 새겨 간직하는 신자들의 명상과 공부”60)를 통하여;
특히 “계시 진리의 깊은 이해는……신학적 탐구로 이루어진다.”61)
- “영적인 것들에 대한 좀더 깊은 인식”62)을 통해 쌓이는 신자들의 경험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읽는 사람과 함께 성장한다.”63)
- “주교직 계승을 통해 확고한 진리의 은사를 받은 이들의 설교”64)를 통하여 그 이해가 깊어진다.
95 “그러므로 성전과 성서와 교회 교도직은 하느님의 지극히 지혜로우신 계획에 따라 각기 독립되어 존립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있으며 또한 셋 모두 함께 고유한 방식대로 성령의 활동 아래 영혼의 구원에 효율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이 명백하다.”65)
간추림
96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맡겨 주신 것을, 성령의 감도를 받아, 설교와 글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까지 모든 세대에 전달하였다.
97 “성전과 성서는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 말씀의 유일한 성스러운 유산을 형성한다.”66) 순례자인 교회는 이를 통해서, 마치 거울을 보듯이, 자신의 모든 풍요로움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관상한다.
98 “교회는 자신의 가르침과 생활과 예배를 통하여 그 자신의 모든 것과 그 자신이 믿는 모든 것을 영속시키며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한다.”67)
99 하느님 백성 전체는 초자연적 신앙 감각을 통하여 하느님 계시의 선물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더욱 깊이 이해하며, 더욱 충실히 생활화하게 된다.
100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는 책무는 오직 교회의 교도권, 곧 교황과 그와 일치하는 주교들에게만 주어졌다.
I. 그리스도 - 성서의 ‘유일한 말씀’
101 하느님께서 선하신 자비로 인간에게 당신을 계시하실 때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신다. “예전에 영원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취하여 인간들을 닮으셨듯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말씀들이 인간의 말과 같아졌다.”68)
102 성서의 모든 말씀으로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한 ‘말씀’을 하신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 ‘유일한 말씀’ 안에서 당신 전체를 표현하신다.69)
여러분은 상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동일한 한 ‘말씀’이 성서 전체에 펼쳐져 있으며, 그 ‘말씀’은 바로 여러 성서 기록자들의 입을 통해 울려 퍼진 동일한 한 ‘말씀’이시고, 태초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그분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한 마디 말도 필요하지 않습니다.70)
103 교회는 언제나 성서들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하여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특히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식탁에서뿐만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식탁에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빵을 취하고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71)
104 교회는 늘 성서 말씀으로 양식과 힘을 얻는다.72) 왜냐하면 교회는 성서에서 인간의 말뿐 아니라,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73)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성서 안에서 사랑으로 당신 자녀들과 만나시며 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신다.”74)
II. 성서의 영감과 진리
105 하느님께서는 성서의 저자이시다. “하느님의 계시는 성령의 감도로 성서에 글로 담겨지고 표현되어 보존된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사도의 신앙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을 그 각 부분과 함께 전체를 거룩한 것으로, 또 정경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이 책들이 성령의 감도로 기록된 것이고, 하느님께서 저자이시며, 또 그렇게 교회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75)
106 하느님께서는 성서의 인간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셨다. “성서를 저술하는 데에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선택하시고, 자기의 능력과 역량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활용하신다. 하느님께서 몸소 그들 안에 그들을 통하여 활동하시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또 원하시는 것만을 그들이 참 저자로서 기록하여 전달하도록 하셨다.”76)
107 영감 받은 책들은 진리를 가르친다. “영감 받은 저자들, 또는 ‘성서 저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것은 성령께서 주장하신 것으로 여겨야 한다. 따라서 성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성서에 기록되기를 원하신 진리를 확고하고 성실하게 그르침 없이 가르친다고 고백해야 한다.”77)
108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경전의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말씀’의 종교이다. 그 말씀은 “글로 된 무언의 말이 아닌, 사람이 되시어 살아 계신 ‘말씀’”78)이다.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이 죽은 문자로 머물지 않으려면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성서를 깨닫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79) 한다.
III. 성서의 해석자이신 성령
109 하느님께서는 성서에서 인간의 방식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셨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성서 저자들이 정말로 뜻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주의 깊게 연구해야 한다.80)
110 성서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 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시대와 문화의 상황뿐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과 이해·표현·서술 방식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본문에서 역사적, 예언적, 시적 양식 또는 다른 화법 등 여러 양식으로 각각 다르게 제시되고 표현되기 때문이다.”81)
111 그러나 성서는 성령의 영감을 받은 책이므로,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은 앞의 원칙만큼 중요하며 이 원칙이 없다면 성서는 “죽은 문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령을 통해 쓰여진 성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8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서에 영감을 주신 성령을 따르는 성서 해석을 위해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였다.83)
112 1. 우선 “성서 전체의 내용과 단일성”에 특히 유의할 것. 왜냐하면 성서를 구성하는 책들이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실제로 성서는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 때문에 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이후 밝혀진 그 계획의 중심이시며 심장이시다.84)
그리스도의 마음을85) 알려 주는 성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신의 수난 전에는 성서가 모호하였으므로 이 마음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수난 후에는 성서가 열렸다. 이 때부터 성서를 깨달은 사람들이, 예언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지를 고찰하고 식별하였기 때문이다.86)
113 2. 그리고 “전체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에 따라 성서를 읽을 것. 교부들의 격언에 따르면, 성서는 물질적인 수단들(문서나 기록)보다는 오히려 교회의 마음 안에 적혀 있다.87) 실제로 교회는 성전 안에 하느님 말씀의 생생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며, 교회에 성서의 영적 해석을 내려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성령께서 교회에 주시는 영적 의미에 따라……”88)).
114 3. “신앙의 유비”에89) 유의할 것. “신앙의 유비”란 신앙 진리들 상호간의 일관성과 계시의 전체 계획 안에 있는 신앙 진리의 일관성을 말한다.
성서의 의미
115 성서의 의미는 오랜 전통에 따라 자구적 의미와 영성적 의미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 중에서 후자는 우의적(寓意的) 의미, 도덕적 의미, 신비적 의미로 다시 세분된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서 읽기는 이 네 가지 의미들의 심오한 조화로써 더
욱 생생해지고 풍요로워진다.
116 자구적 의미
자구적 의미는 성서의 말씀으로 나타내고, 올바른 해석 원칙에 따른 주석으로 밝혀 낸다. “성서의 모든 의미는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다.”90)
117 영성적 의미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 때문에 성서 본문뿐 아니라, 그 본문이 말하는 실재와 사건들도 표징이 될 수 있다.
1. 우의적 의미. 사건들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음으로써 더욱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 가령 홍해를 건넌 일은 그리스도의 승리의 표징이며, 그로 인해 세례의 표징이 된다.91)
2. 도덕적 의미. 성서가 전하는 사건들은 우리를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이 사건들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도록”(1고린 10,11 참조) 기록된 것이다.92)
3. 신비적 의미(anagogia). 우리를 본향으로 인도하는(그리스어 anagoge는 ‘위로’라는 뜻의 ana와, ‘인도하다’는 뜻의 agoge의 합성어이다.) 영원의 의미에서 실재와 사건들을 바라볼 수도 있다. 예컨대 지상 교회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징이다.93)
118 중세의 한 이행시(二行詩)는 이러한 네 가지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글자는 행한 것을 가르치고, 우의는 믿을 것을 가르치며,
도덕은 행할 것을 가르치고, 신비는 향할 것을 가르친다.94)
119 “성서 해석자들의 임무는 이러한 규범에 따라 성서의 뜻을 더 깊이 이해하고 해석하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준비의 역할을 하는 연구로써 교회의 판단은 성숙하게 된다. 성서 해석에 관한 이 모든 것은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해석하라는 하느님의 명령과 그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의 판단에 속한다.”95)
만일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96)
IV. 정 경
120 교회는 사도 전승에 따라서 어떤 문서들이 성서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지를 판단하였다.97) 이렇게 결집된 목록을 성서의 ‘정경’(正經) 이라고 부른다. 이 목록에는 구약성서 46권과 신약성서 27권이 들어 있다.98)
구약성서: 창세기, 출애굽기(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판관기, 룻기, 사무엘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 역대기 상·하권, 에즈라, 느헤미야, 토비트, 유딧, 에스델, 마카베오 상·하권,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지혜서, 집회서, 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바룩, 에제키엘,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가, 나훔, 하바꾹, 스바니야,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
신약성서: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가 복음서, 요한 복음서,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토 1·2서, 갈라디아서, 에페소서, 필립비서, 골로사이서, 데살로니카 1·2서, 디모테오 1·2서, 디도서, 필레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1·2서, 요한 1·2·3서, 유다서, 요한 묵시록.
구약성서
121 구약은 성서의 사라지지 않을 한 부분이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책들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99) 옛 계약은 결코 철회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122 사실 “구약의 경륜은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오심과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구약성서는 비록 불완전하거나 일시적인 것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교육 방법 전체를 증언한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고, 하느님께 관한 숭고한 가르침과 인생에 관한 건전한 지식과 기도의 놀라운 보물을 담고 있으며, 그 안에 구원의 신비가 감추어져 있다.”100)
123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를 참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존중한다. 교회는 신약성서가 구약성서를 무효화하였다는 구실로 구약성서를 배척하려는 생각(마르치온 이단)을 항상 강력히 물리쳐 왔다.
신약성서
124 “믿는 모든 이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힘인 하느님의 말씀은 신약성서 안에서 탁월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그 능력을 드러내신다.”101) 이 기록들은 하느님 계시의 궁극적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 준다. 신약성서의 중심 주제는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활동, 가르침, 수난과 영광 받으심, 그리고 성령의 활동을 통한 그리스도 교회의 탄생 등이다.102)
125 복음서는 “우리의 구원자, 사람이 되신 말씀의 삶과 가르침에 관한 으뜸 가는 증언이기 때문에”103) 모든 성서의 핵심이다.
126 복음서의 형성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 교회는 네 복음서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서 사시는 동안, 승천하신 그 날까지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실제로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을 이 복음서들이 충실히 전해 주고 있음”을 확고하게 주장한다.
2. 구전(口傳). “사도들은 주님 친히 말씀하시고 행하신 것들을 주님의 승천 후에 충분히 깨달아 청중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와 같이 깨닫게 된 것은 사도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건들을 직접 겪고 진리이신 성령의 빛으로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다.”
3. 복음서의 기록. “성서 저자들은 예수님께 관한 참되고 바른 것을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어떤 것은 말이나 이미 쓰여진 글로 전해지는 많은 전승들 가운데서 선택하고, 어떤 것은 종합하고, 또 어떤 것은 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설명하면서 선포 양식으로 네 복음서를 썼다.”104)
127 네 복음서는 교회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례에서 복음서들이 존중되고, 모든 시대의 성인들이 복음서에 비할 데 없는 매력을 느껴 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복음서보다 더 훌륭하고 소중하며 더 빛나는 교리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행동으로 실현하신 것을 직접 보고 간직하기 바랍니다.105)
기도 중에 내가 머무는 곳은 무엇보다도 복음서입니다. 나는 거기에서 내 불쌍한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습니다. 복음서에서 나는 늘 새로운 빛과 감추어진 의미와 신비의 의미를 발견합니다.106)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단일성
128 교회는 이미 사도들 시대에107) 그리고 그 후에도 성전(聖傳) 안에서 일관되게 예형론(typologia)에 의거하여 신·구약에서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을 천명해 왔다. 예형론은, 때가 찼을 때 강생하신 당신 아드님의 인격 안에서 이루신 일들의 예형(豫形)을 구약의 하느님의 업적에서 식별해 낸다.
129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비추어 구약성서를 읽는다. 이러한 예형론적인 성서 읽기는 구약성서의 고갈되지 않는 내용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 때문에, 나중에 우리 주님께서 친히 재확인해 주셨듯이, 구약성서가 자신의 고유한 계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108) 한편 신약성서 역시 구약성서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교리교육은 끊임없이 구약성서를 활용하였다.109) 옛 격언에 따르면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In Vetere Novum lateat et in Novo Vetus pateat).110)
130 예형론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고린 15,28) 때 이루어질 하느님 계획의 완성을 향한 역동적인 순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예를 들어 성조들에 대한 부르심이나 출애굽 사건이 하느님 계획의 중간 단계라고 해서, 하느님 계획에서 그 고유한 가치를 잃지는 않는다.
V. 교회 생활과 성서
131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게는 버팀과 활력이 되고, 교회의 자녀들에게는 신앙의 힘, 영혼의 양식 그리고 영성 생활의 순수하고도 영구적인 원천이 되는 힘과 능력이 있다.”111)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서를 가까이할 수 있는 길은 넓게 열려 있어야 한다.”112)
132 “성서 연구는 신학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어야 한다. 말씀의 봉사직, 곧 사목적인 복음 선포, 교리교육과 모든 그리스도교 교육은 성서 말씀으로 구원의 양식과 거룩한 힘을 얻는다. 그리스도교 교육에서는 전례적 설교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113)
133 교회는 “모든 신자가……성서를 자주 읽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존귀한 지식’(필립 3,8)을 얻도록 강력하고 각별하게 권고한다.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114)
간추림
134 “성서 전체는 단 하나의 책이며, 그 하나의 책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성서 전체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성서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115)
135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으며,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116)
136 하느님께서는 성서의 참 저자로서, 성서의 인간 저자들에게 영감을 주신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서 활동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기록이 구원의 진리를 오류 없이 가르친다는 사실을 보증하신다.117)
137 영감을 받은 성서를 해석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거룩한 성서 저자들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한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령에게서 오는 것은 오로지 성령의 작용을 통해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118)
138 교회는 구약성서 46권과 신약성서 27권을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저술된 책으로 받아들이고 받든다.
139 네 복음서는 성서의 중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중심이시기 때문이다.
140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단일성은, 하느님 계획의 단일성과 그분 계시의 단일성에서 비롯된다.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를 준비하며 신약성서는 구약성서를 완성한다. 둘은 서로를 밝혀 주며, 둘 다 참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141 “교회는 언제나 성서를 주님의 몸처럼 공경하여 왔다.”119) 이 둘은 그리스도인 삶 전체를 양육하고 인도한다. “주님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 118[119],105).120)
1.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4: DS 3015 참조.
2. 계시 헌장, 2항.
3. 에페 1,4-5 참조.
4. 계시 헌장, 2항.
5. 리옹의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3, 20, 2: SC 211, 392(PG 7, 944). 예를 들면, 같은 책, 3, 17, 1: SC 211, 330(PG 7, 929); 같은 책, 4, 12, 4: SC 100, 518(PG 7,1006); 같은 책, 4, 21, 3: SC 100, 684 (PG 7, 1046) 참조.
6. 계시 헌장, 3항.
07. 계시 헌장, 3항.
08. 「로마 미사 전례서」, 감사기도 제4양식, 118, 표준판(바티칸 1970), 467면.
09. 창세 9,9 참조.
10. 창세 10,20-31 참조.
11. 사도 17,26-27 참조.
12. 지혜 10,5 참조.
13. 창세 11,4-6 참조.
14. 로마 1,18-25 참조.
15. 루가 21,24 참조.
16. 창세 14,18 참조.
17. 히브 7,3 참조.
18. 갈라 3,8 참조.
19. 로마 11,28 참조.
20. 요한 10,16; 11,52 참조.
21. 로마 11,17-18,24 참조.
22. 계시 헌장, 3항 참조.
23. 출애 19,6 참조.
24. 「로마 미사 전례서」, 성금요일 보편 지향 기도 VI, 표준판(바티칸 1970), 254면.
25. 요한 바오로 2세, 로마 시의 시나고가에서 유다인 공동체와 만나는 동안 한 연설(1986.4.13.):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II」, IX/1, 1027 참조.
26. 이사 2,2-4 참조.
27. 예레 31,31-34; 히브 10,16 참조.
28. 에제 36장 참조.
29. 이사 49,5-6; 53,11 참조.
30. 스바 2,3 참조.
31. 루가 1,38 참조.
32. 계시 헌장, 2항.
33. 십자가의 성 요한, 「가르멜의 산길」, 2, 22, 3-5: 같은 책, 최민순 옮김, 1977, 바오로딸출판사, 227-228면.
34. 계시 헌장, 4항.
35. 창세 3,15 참조.
36. 창세 9,16 참조.
37. 요한 14,6 참조.
38. 계시 헌장, 7항.
39. 계시 헌장, 7항.
40. 계시 헌장, 7항.
41. 계시 헌장, 7항.
42. 계시 헌장, 8항.
43. 계시 헌장, 8항.
44. 계시 헌장, 8항.
45. 계시 헌장, 8항.
46. 계시 헌장, 9항.
47. 계시 헌장, 9항.
48. 계시 헌장, 9항.
49. 1디모 6,20; 2디모 1,12-14 참조.
50. 계시 헌장, 10항.
51. 계시 헌장, 10항.
52. 계시 헌장, 10항.
53. 교회 헌장, 20항 참조.
54. 요한 8,31-32 참조.
55.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4: DS 3016; 교회 헌장, 25항 참조.
56. 일치 교령, 11항.
57. 1요한 2,20.27 참조.
58. 교회 헌장, 12항.
59. 교회 헌장, 12항.
60. 계시 헌장, 8항.
61. 사목 헌장, 62항, 44항; 계시 헌장, 23항, 24항; 일치 교령, 4항 참조.
62. 계시 헌장, 8항.
63. 성 대 그레고리오, 「에제키엘서 강론」, 1, 7, 8: CCL 142, 87(PL 76, 843).
64. 계시 헌장, 8항.
65. 계시 헌장, 10항.
66. 계시 헌장, 10항.
67. 계시 헌장, 8항.
68. 계시 헌장, 13항.
69. 히브 1,1-3 참조.
70. 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해설」, 103, 4, 1: CCL 40, 1521(PL 37, 1378).
71. 계시 헌장, 21항 참조.
72. 계시 헌장, 24항 참조.
73. 1데살 2,13 참조.
74. 계시 헌장, 21항.
75. 계시 헌장, 11항.
76. 계시 헌장, 11항.
77. 계시 헌장, 11항.
78.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 「성자 강론」, 4, 11: Opera, J. Leclercq-H. Rochais 편, 4권(로마 1966), 57면.
79. 루가 24,45 참조.
80. 계시 헌장, 12항 참조.
81. 계시 헌장, 12항.
82. 계시 헌장, 12항.
83. 계시 헌장, 12항 참조.
84. 루가 24,25-27.44-46 참조.
85. 시편 21,16(22,15) 참조.
86.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시편 해설」, 21, 11: Opera omnia, 18권(파리 1876), 350면.
87. 푸아티에의 성 힐라리오, 「콘스탄티누스 칙령에 대하여」 9: CSEL 65, 204(PL 10, 570); 성 예로니모, 「갈라디아서 주해」, 1, 1, 11-12: PL 26, 347 참조.
88. 오리게네스, 「레위기 강론」, 5, 5: SC 286, 228(PG 12, 454).
89. 로마 12,6 참조.
9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1, q. 1, a. 10, ad 1: Ed. Leon. 4, 25.
91. 1고린 10,2 참조.
92. 히브 3,1-4,11 참조.
93. 묵시 21,1-22,5 참조.
94. 다키아의 아우구스티노, Rotulus pugillaris, I: A. Walz 편: Angelicum 6(1929), 256.
95. 계시 헌장, 12항.
96. 성 아우구스티노, 「마니교도 서간 반박」, 5, 6: CSEL 25, 197(PL 42, 176).
97. 계시 헌장, 8항 참조.
98. 「다마소 교령」: DS 179-180; 피렌체 공의회, 「야고보 교령」: DS 1334-1336; 트리엔트 공의회, 제4회기, 「성서와 성전에 대한 교령」: DS 1501-1504 참조.
199. 계시 헌장, 14항 참조.
100. 계시 헌장, 15항.
101. 계시 헌장, 17항.
102. 계시 헌장, 20항 참조.
103. 계시 헌장, 18항.
104. 계시 헌장, 19항.
105. 성녀 체사리아, 「리킬다와 라데군디스에게 보낸 편지」: SC 345, 480.
106.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 유고」 A, 83v: Manuscrits autobiographiques(파리 1992), 268면.
107. 1고린 10,6.11; 히브 10,1; 1베드 3,21 참조.
108. 마르 12,29-31 참조.
109. 1고린 5,6-8; 10,1-11 참조.
110. 성 아우구스티노, Quaestiones in Heptateucum 2, 73: CCL 33, 106(PL 34, 623). 계시 헌장, 16항 참조.
111. 계시 헌장, 21항.
112. 계시 헌장, 22항.
113. 계시 헌장, 24항.
114. 계시 헌장, 25항. 성 예로니모, 「이사야서 주해」, 서문: CCL 73, 1(PL 24, 17) 참조.
115. 생 빅토르의 위고, 「노아의 방주」, 2, 8: PL 176, 642. 같은 책, 2, 9: PL 176, 642-643 참조.
116. 계시 헌장, 24항.
117. 계시 헌장, 11항 참조.
118. 오리게네스, 「출애굽기 강론」, 4, 5: SC 321, 128(PG 12, 320).
119. 계시 헌장, 21항.
120. 이사 50,4 참조.
142 계시로써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1) 이러한 초대에 합당한 응답이 바로 신앙이다.
143 신앙으로써 인간은 온전히 자신의 지성과 의지를 하느님께 복종시킨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전체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동의를 드리는 것이다.2) 성서는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인간의 응답을 “신앙의 복종”이라고 부른다.3)
제1절 저는 믿나이다
I. 신앙의 복종
144 신앙의 복종이란(‘복종하다’라는 라틴어 oboedire는 ob[에게]와 audire[듣다]의 합성어이다) 자신이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자유로이 복종하는 것이며, 이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그 말씀이 진리임을 보증하시기 때문이다. 성서는 아브라함을 이러한 복종의 모범으로 제시하며, 동정 마리아께서는 이를 가장 완전하게 실현하셨다.
아브라함 - “모든 믿는 이의 조상”
145 히브리서는 조상들의 믿음을 찬양하면서 특히 아브라함의 신앙을 강조한다.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히브 11,8).4) 신앙으로, 아브라함은 약속된 땅에서 이방인으로 또 순례자로 살았다.5) 신앙으로, 사라도 약속된 아들을 잉태하게 되었다. 신앙으로, 마침내 아브라함은 자신의 외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6)
146 이처럼 아브라함은 히브리서가 제시하는 신앙의 정의(定義)를 그대로 실현한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 11,1).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그것이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되었습니다”(로마 4,3).7) “굳게 믿음”(로마 4,20)으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이의 아버지”(로마 4,11.18)가8) 되었다.
147 구약성서에는 이러한 신앙에 대한 증언이 풍부하다. 히브리서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히브 11,2.39) 만한 조상들의 모범적인 신앙을 찬양한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마련해 두셨는데”(히브 11,40), 그것은 바로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히브 12,2)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은총이다.
마리아 - “복되어라, 믿으신 분”
148 동정 마리아께서는 가장 완전하게 신앙의 복종을 실천하신 분이시다. 마리아께서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루가 1,37)9) 하는 말씀을 믿으시고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주님의 탄생 예고와 약속을 받아들이시며,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고 동의하신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께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하고 인사하였다. 바로 이러한 신앙 때문에 모든 세대가 마리아를 복되다고 일컫는 것이다.10)
149 일생 동안, 그리고 극도의 시련,11) 곧 그 아드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끝까지 믿으셨다. 그래서 교회는 마리아를 가장 순수한 신앙을 실현하신 분으로 공경한다.
II.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2디모 1,12)
하느님만을 믿음
150 신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느님께 귀의(歸依)하는 것이며, 또한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 전체에 대해서 자유로이 동의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 인격적으로 귀의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에 동의하는 것이므로, 인간을 믿는 것과는 다르다.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기며 그분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그러한 믿음을 피조물에 두는 것은 헛되고 어리석은 일이다.12)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151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서 보내 주신 아들, “그분의 마음에 드는 아들”을13) 믿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라고 우리에게 명하신다.14) 주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느님이시며 강생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믿을 수 있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다”(요한 1,18). 그분께서는 “아버지를 본”(요한 6,46) 분이시기 때문에,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보여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15)
성령을 믿음
152 그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할 수 없기”(1고린 12,3) 때문이다. 인간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려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경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통찰하십니다.……하느님의 생각은 하느님의 성령만이 아실 수 있습니다”(1고린 2,10-11). 하느님 홀로 하느님을 온전히 아신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이시므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
교회는 한 분이신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 대한 신앙을 끊임없이 고백한다.
III. 신앙의 특성
신앙은 은총이다
153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마태 16,17)라고 밝히신다.16)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덕이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려면 먼저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도와 주셔야 하고, 또한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께서는 마음을 움직이시고, 하느님께로 회개시키시며,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고 ‘진리에 동의하고 믿는 데에서 오는 즐거움을 모든 이에게 베푸신다.’”17)
신앙은 인간 행위이다
154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은총과 내적인 도움으로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믿는 것이 참으로 인간적 행위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따르는 것이 인간의 자유나 지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에서조차 우리가 상호 일치를 위해 타인이나 그 의향을 믿고,(예를 들어 남자와 여자가 혼인할 때처럼) 그 약속을 믿는 것이 우리의 인간적 품위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신앙을 통하여 드러내고”,18) 하느님과 친밀한 일치를 이루는 일은 결코 우리의 품위를 해치는 것이 아니다.
155 신앙 안에서, 인간의 지성과 의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협력한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움직여진 의지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19)
신앙과 지성
156 계시된 진리들이 우리의 자연적 이성에 비추어 참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이 신앙의 동기는 아니다. “스스로 그르칠 수 없고 우리를 그르치게 하지도 않으시는, 계시하시는 하느님 바로 그분의 권위 때문에”20) 우리는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의 신앙적 동의가 이성에도 부합하도록,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내적 도움이 당신 계시의 외적 증거들과 함께 주어지도록 하셨다.”21) 예를 들어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기적,22) 예언, 교회의 확산과 그 거룩함, 그 풍요함과 확고함은, “모든 이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계시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며”,23) 신앙의 동의가 “결코 정신의 맹목적인 작용이 아니라는 것”24)을 보여 주는 믿음의 동기들이다.
157 신앙은 확실한 것이며, 그것이 거짓 없으신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 근거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인식보다 더 확실하다. 물론 계시된 진리들이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에 비추어 모호하게 보일 수는 있으나 “자연적 이성의 빛이 주는 확실성보다 하느님의 빛이 주는 확실성이 더 크다.”25) “만 가지 어려움도 하나의 의심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26)
158 “신앙은 이해를 요구한다.”27)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는 분을 더 잘 알고자 하며 그분의 계시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한다. 한편 더 깊은 이해는 다시금 더 강하고 점점 더 사랑에 불타는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신앙의 은총은 “마음의 눈”(에페 1,18)을 열어 줌으로써 계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한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계획 전체, 신앙의 신비, 신비들의 상호 관계, 계시된 신비의 중심이신 그리스도와 이루는 관계에 대한 이해가 포함된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계시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도록 당신의 은총으로 항구히 신앙을 완성시켜 주신다.”28)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금언대로 “믿기 위하여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29)
159 신앙과 과학. “신앙이 이성보다 우위에 있기는 하지만, 신앙과 이성 사이에 진정한 불일치는 있을 수 없다. 신비를 계시하고 신앙을 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정신에 이성의 빛을 비춰 주시기 때문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시거나 진리가 진리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30) “그러므로 모든 분야의 방법론적 탐구가 참으로 과학적 방법으로 도덕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결코 신앙과 참으로 대립할 수 없을 것이다. 세속 사물이나 신앙의 실재는 다 똑같은 하느님에게서 그 기원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한 마음으로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하더라도, 만물을 보존하시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31)
신앙의 자유
160 신앙이 인간적인 응답이 되려면, “인간이 하느님을 자유로이 믿고 응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억지로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사실 신앙 행위는 그 본질상 자유로운 것이다.”32)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시므로 인간은 이에 양심으로 매이지만 강제당하지는 않는다.……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33)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신앙과 회개로 초대하시지만 결코 이를 강요하지 않으신다. “진리를 증언해 주셨지만, 반대자들에게 그 진리를 힘으로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그분의 나라는……진리를 증언하고 들음으로써 굳건해지며 사랑으로 넓혀진다.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으로 인간을 당신께 이끌어 들이신다.”34)
신앙의 필요성
161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 구원을 위하여 그분을 보내신 분을 믿는 신앙이 필요하다.35) “‘믿음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고’(히브 11,6), 하느님 자녀의 신분을 얻지 못하며, ‘끝까지 신앙을 간직하지’(마태 10,22; 24,13)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36)
신앙의 항구함
162 신앙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이 선물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훌륭한 싸움을 싸우시오. 믿음과 맑은 양심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파선을 당했습니다”(1디모 1,18-19). 신앙 안에서 살고, 성장하고 마지막까지 항구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신앙을 키워야 하며, 주님께 신앙을 키워 주시도록 간구해야 한다.37) 이 신앙은 “사랑으로 표현”(갈라 5,6)되고,38) 희망으로 지탱되며,39) 교회의 신앙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신앙 - 영원한 생명의 시작
163 신앙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순례해 가는 목표인 지복직관(visio beatifica)의 기쁨과 빛을 미리 맛보게 해 준다. 그 때에 우리는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고”(1고린 13,12), “그분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미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
우리가 비록 지금은 신앙의 축복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바라보지만, 그것은 장차 누리도록 신앙이 우리에게 보증해 주는 놀라운 것들을 이미 소유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40)
164 한편 지금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며”(2고린 5,7),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1고린 13,12) 하느님을 알 뿐이다. 우리가 믿는 그분께서 신앙을 비춰 주신다 해도 우리의 신앙은 종종 어두움 속을 지나기도 한다. 신앙은 시련에 처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흔히, 신앙이 우리에게 보장해 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도 한다. 악과 고통, 불의와 죽음의 경험은 ‘기쁜 소식’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며, 때로 신앙을 흔들기도 하고, 유혹이 될 수도 있다.
165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증인들, 곧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로마 4,18) 믿은 아브라함, “신앙의 순례길에서”41) 당신 아드님의 수난과 그 무덤의 어두움을 함께함으로써42) “신앙의 어두운 밤”43)에까지 도달하였던 동정 마리아와 그 외의 많은 신앙의 증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히브 12,1-2).
166 신앙은 인격적인 행위이다. 곧, 먼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다. 그러나 신앙은 고립된 행위가 아니다. 누구도 홀로 믿거나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누구도 스스로에게 생명을 줄 수 없듯이 스스로에게 신앙을 줄 수 없다. 신앙인은 다른 이로부터 신앙을 받으며, 그 받은 신앙을 또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예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신앙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우리를 재촉한다. 각 신앙인은 마치 신앙인들이 이루는 커다란 사슬의 고리 하나하나와 같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으며, 또한 나의 신앙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지탱하는 데 이바지한다.
167 “저는 믿나이다.”44) 이는 주로 세례 때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이다. “저희는 믿나이다.”45) 이는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이, 더 일반적으로는 신자들의 전례 모임이 고백하는 교회의 신앙이다. “저는 믿나이다.” 이는 교회가 자신의 신앙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 하고 말하도록 가르치는 것 또한 우리 어머니인 교회이다.
I. “주님, 당신 교회의 믿음을 보십시오.”
168 교회가 먼저 믿고, 이로써 나에게 그 신앙을 전해 주고, 키워 주고, 지탱해 준다. 어디에서나 먼저 주님을 고백하는 것은 교회이며(“땅에서는 어디서나 거룩한 교회가 당신을 찬미-고백-하나이다.” 하고 우리는 사은 찬미가(謝恩讚美歌)에서 노래한다.), 교회와 함께, 교회 안에서 우리는 “저는 믿나이다.”, “저희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도록 인도된다. 우리가 세례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과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이다. ‘로마 예식서’에서 세례 집전 사제가 예비신자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하고 물으면 그는 “신앙을 청합니다.” 하고 응답한다. “신앙이 당신에게 무엇을 줍니까?” 하고 물으면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46) 하고 응답한다.
169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생명을 교회를 통하여 받게 되므로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교회를 새로운 생명의 어머니로 믿는 것이지, 교회를 우리 구원의 창시자로 믿지는 않는다.”47)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이므로 또한 우리 신앙의 스승이기도 하다.
II. 신앙의 언어
170 우리는 신앙 조문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조문이 표현하고 있는, 신앙이 우리에게 “접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실재를 믿는다. “신자의 (신앙) 행위는 진술 그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진술된) 실재에 머무른다.”48) 우리는 이러한 신앙 조문(신경)의 도움으로 실재에 다가갈 수 있다. 이로써 신앙의 표현과 전달, 공동체의 신앙 거행(전례), 신앙의 생활화가 점점 더 가능하게 된다.
171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인”(1디모 3,15) 교회는 “성도들에게 한 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을49) 충실히 지킨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지키는 것도 교회이고, 사도들의 신앙 고백을 대대로 전하는 것도 교회이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말을 가르치고 그 말을 통해서 깨닫고 그것을 나누도록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 어머니인 교회 역시 우리를 신앙의 이해와 삶으로 이끌기 위하여 신앙의 언어를 가르친다.
III. 하나인 믿음
172 교회는 오래 전부터 수많은 언어와 문화와 민족과 나라들을 거치면서 줄곧 한 분이신 주님께 받은 자신의 유일한 신앙을 고백해 왔다. 이 신앙은 하나의 세례를 통하여 전달되며, 모든 사람이 오로지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확신에 뿌리박은 신앙이다.50) 이러한 신앙의 증인인 이레네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73 “땅 극변에까지 온 세상에 전파된 교회가 사도들과 그 제자들로부터 이어받은 가르침과 신앙을……교회는 충실히 간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 세상 곳곳에 퍼져 있지만 같은 한 집안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온 교회는 마치 한 영혼과 한 마음만을 지니고 있듯 이것을 믿고, 또한 흡사 하나의 입만을 가진 듯 일치된 목소리로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또 전수합니다.”51)
174 “세상의 언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신앙 전승의 내용은 하나이며 같습니다. 게르마니아 지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믿고 또 전수하는 것과 켈트 지방이나 동방의 교회들, 이집트나 리비아의 교회들, 그리고 세계 중심에 있는 교회들이 믿고 전수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52) “그러므로 전세계에 걸쳐 나타나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 교회 안에 있으므로 교회의 선포는 참되며 확고합니다.”53)
175 “우리는 교회로부터 받은 이 신앙을 정성스럽게 보호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성령의 작용으로, 훌륭한 그릇에 담긴 값진 유산과 같은 이 신앙은 끊임없이 스스로 젊어질뿐더러, 그것을 담은 그릇 자체도 젊게 하기 때문입니다.”54)
간추림
176 신앙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인간이 인격적으로 온전히 귀의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행위와 말씀을 통해서 당신 자신에 대해 밝혀 주신 계시를 지성과 의지로 따르는 것이다.
177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인격과 진리, 이 두 가지와 관련되어 있다. 진리를 증언하는 인격에 대한 믿음을 통해 진리를 믿게 되는 것이다.
178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 이외에 다른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
179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믿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180 ‘믿는다는 것’은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행위로서, 인간의 존엄성에 부합한다.
181 ‘믿는다는 것’은 교회의 행위이다. 교회의 신앙은 우리보다 앞서가며, 우리의 신앙을 낳고, 지탱하고, 기른다. 교회는 모든 신자의 어머니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삼을 수 없다.”55)
182 “우리는 문서와 구전으로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에 포함된 모든 것과, 교회가 거룩한 계시로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56)
183 신앙은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주님께서 몸소 이렇게 확언하신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을 것이다”(마르 16,16).
184 “신앙은 미래에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앎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57)
신앙 고백
사도신경58)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59)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심을 믿나이다.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1. 계시 헌장, 2항.
2. 계시 헌장, 5항 참조.
3. 로마 1,5; 16,26 참조.
4. 창세 12,1-4 참조.
5. 창세 23,4 참조.
6. 히브 11,17 참조.
7. 창세 15,6 참조.
8. 창세 15,5 참조.
09. 창세 18,14 참조.
10. 루가 1,48 참조.
11. 루가 2,35 참조.
12. 예레 17,5-6; 시편 39,5(40,4); 145(146),3-4 참조.
13. 마르 1,11 참조.
14. 마르 9,7 참조.
15. 마태 11,27 참조.
16. 갈라 1,15-16; 마태 11,25 참조.
17. 계시 헌장, 5항.
18.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08.
19.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2, a. 9, c: Ed. Leon. 8, 37.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10 참조.
20.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08.
21.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09.
22. 마르 16,20; 히브 2,4 참조.
23.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09.
24.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10.
25.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171, a. 5, 3um: Ed. Leon. 10, 373.
26. 존 헨리 뉴먼, 「자기 생애를 위한 변호」(Apologia pro vita sua), c. 5, M.J. Svaglic 편(옥스퍼드 1967), 210면.
27. 성 안셀모, 「프로슬로기온」, 서문: Opera omnia, F.S. Schmitt 편, 1권(에딘부르그 1946), 94면.
28. 계시 헌장, 5항.
29.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43, 7, 9: CCL 41, 512(PL 38, 258).
30.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4: DS 3017.
31. 사목 헌장, 36항.
32. 종교 자유 선언, 10항. 교회법 제748조 2항 참조.
33. 종교 자유 선언, 11항.
34. 종교 자유 선언, 11항.
35. 마르 16,16; 요한 3,36; 6,40 등 참조.
36.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3: DS 3012. 트리엔트 공의회, 제6회기, 「의화에 대한 교령」, c. 8: DS 1532 참조.
37. 마르 9,24; 루가 17,5; 22,32 참조.
38. 야고 2,14-26 참조.
39. 로마 15,13 참조.
40. 성 대 바실리오, 「성령론」, 15, 36: SC 17bis, 370(PG 32, 132).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4, a. 1, c: Ed. Leon. 8, 44 참조.
41. 교회 헌장, 58항.
42.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 18항: AAS 79(1987), 382-383면 참조.
43.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구세주의 어머니」, 17항: AAS 79(1987), 381면.
44. 사도 신경: DS 30.
45.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그리스어 원본).
46. 「어른 입교 예식서」, 75, 표준판(바티칸 1972), 24면; 같은 책, 247, 91면.
47. 리에즈의 파우스투스, 「성령론」, 1, 2: CSEL 21, 104(1, 1: PL 62, 11).
48.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2-2, q. 1, a. 2, ad 2: Ed. Leon. 8, 11.
49. 유다 1,3 참조.
50. 에페 4,4-6 참조.
51.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1, 10, 1-2: SC 264, 154-158(PG 7, 550-551).
52.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1,10,2: SC 264, 158-160(PG 7, 531-534).
53.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5,20,1: SC 153, 254-256(PG 7, 1177).
54.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3,24,1: SC 211, 472(PG 7, 966).
55. 성 치프리아노, 「가톨릭 교회의 일치」, 6: CCL 3, 253(PL 4, 519).
56. 바오로 6세,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 20: AAS 60(1968), 441면.
57.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개요」, 1, 2: Ed. Leon. 42, 83.
58. DS 30.
59. DS 150.
신경(信經)들
185 “저는 믿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앙의 일치는 모든 이에게 규범이 되는, 그리고 동일한 신앙 고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주는 신앙의 공통 언어를 요구한다.
186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는 처음부터 자신의 신앙을, 모든 사람을 위한 간결하고 규범적인 신앙 조문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전달해 왔다.1) 또한 아주 일찍부터 교회는 신앙의 핵심을 유기적인 조문 형태로 결집 요약하고자 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세례를 원하는 예비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종합은 인간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서 전체에서 핵심이 되는 것들을 골라 구성한 것으로서, 신앙의 유일한 가르침을 이룹니다. 아주 작은 겨자씨 안에 많은 가지가 들어 있듯이, 이러한 신경도 몇 마디의 말 속에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담겨 있는 참된 신앙심의 모든 지식이 들어 있습니다.2)
187 이러한 신앙의 종합을 ‘신앙 고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를 “크레도”(Credo)라고도 부르는데, 이러한 종합적인 기도문이 보통 “저는 믿나이다.”(Credo)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를 ‘신경’(Symbola fidei)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8 그리스어 ‘심볼론’(Symbolon)은 깨뜨린 물건의 반쪽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원의 증표로 제시되던 것이다. 제시된 물건을 나머지 반쪽과 맞추어 보아 그것을 가진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경’은 신앙인들 사이의 확인과 일치의 표시였다. 그리고 ‘심볼론’은 요약, 전서(全書) 또는 종합을 의미한다. ‘신경’은 신앙의 중요한 진리들을 요약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경’은 교리교육의 첫째 기준이며 근본 기준이다.
189 첫 ‘신앙 고백’은 세례 때에 이루어진다. ‘신경’은 무엇보다도 세례 신앙의 고백이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베풀어지므로, 세례 때 고백하는 신앙의 진리들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位格)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190 그러므로 신경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제1 위격’(성부)과 그분의 놀라운 창조 업적, 다음에는 ‘제2 위격’(성자)과 인간 구원의 신비, 끝으로 우리 성화의 근본이며 원천이신 ‘제3 위격’(성령)에 대한 부분이다.”3) 이것이 “우리 세례 인호(印號)의 세 가지 주제이다.”4)
191 “이 세 부분은 서로 결합되어 있지만 또 서로 구분된다. 교부들이 종종 사용하던 비유를 따라 우리는 이 구분을 절(節)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 몸에 사지를 구별하고 구분해 주는 관절이 있듯이, 이 신앙 고백 안에서 우리가 특별히 구분해서 믿어야 할 진리들에 대해서 ‘절’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타당하고 옳은 일이었다.”5) 암브로시오 성인이 이미 확인한 오랜 전통에 따르면,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신앙 전체를 사도들의 수로 상징하고자 신경을 열두 절로 구분하는 관습이 있었다.6)
192 시대가 흐르면서 다양한 시대적 필요에 따라 많은 신앙 고백 또는 신경들이 있었다. 곧 사도 교회와 옛 교회의 여러 신경들,7) 이를테면 아타나시오 신경이라고도 불리는 ‘퀴쿰퀘(Quicumque) 신경’8); 몇몇 공의회의 신앙 고백들(톨레도,9) 라테라노,10) 리옹,11) 트리엔트12)); 교황들의 신앙 고백들(5세기 ‘다마소의 신앙 고백’13); 1968년 교황 바오로 6세의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14))이다.
193 교회 역사상 다양한 시기에 생겨난 신경들 가운데 어느 것도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신경들은 변함 없는 신앙에 대한 요약을 통해서 우리가 오늘날에도 그 신앙에 다다르고 깊어지도록 돕고 있다.
이 모든 신경 가운데 두 가지가 교회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194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을 충실히 요약했다는 점에서 이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신경은 로마 교회의 세례를 위한 옛 신경이다. 이 신경의 막중한 권위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좌가 있고 그 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다.”15)
195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고 불리는 신경은 초기의 두 세계 공의회(325년, 381년)에서 나온 신경이라는 의미에서 큰 권위를 가진다. 이 신경은 오늘날에도 동방과 서방의 양대 교회에 공히 간직되어 있다.
196 이 책에서 신앙 교리는 이른바 “가장 오래 된 로마 교리서”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에 따라 제시할 것이며, 때때로 더 명확하고 세밀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참조하여 보완해 나갈 것이다.
197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우리 모든 삶을 “진실한 가르침에”(로마 6,17) 맡겼던 것처럼, 우리는 생명을 주는 우리 신앙의 신경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앙을 가지고 신경을 외우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 주고 그 품안에서 우리가 믿는 온 교회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신경은 영적인 인장이고, 우리 마음의 묵상이며, 늘 현존하는 보호이고, 우리 영혼의 보물임이 확실합니다.16)
198 우리의 신앙 고백은 하느님으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첫째이시며 마지막”(이사 44,6)이시고,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마침이시기 때문이다. 성부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제1위격이시기에, 사도신경은 천주 성부로 시작한다. 창조는 하느님의 모든 업적의 시작이며 기초이므로, 신경은 천지 창조로 시작한다.
제1절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제1단락 천주를 믿나이다
199 “천주를 저는 믿나이다.”라고 하는 이 신앙의 첫 언명은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신경 전체는 하느님께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인간과 세상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그것을 하느님과 관련시켜 말한다. 십계명 전체가 첫째 계명을 밝혀 주듯이 신경의 모든 구절은 이 첫 구절에 종속된다. 다른 구절들은 인간에게 점진적으로 당신을 계시해 주신 그대로의 하느님을 더 잘 깨닫도록 해 준다. “신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1)
I.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200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구약의 하느님 계시에 근거한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고백은 하느님 존재에 대한 고백과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둘은 모두 근본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하시다. 오직 한 분의 하느님만이 계신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본성과 실체와 본질에서 오직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2)
201 하느님께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께서 ‘유일한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주 하느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5).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유일하신 분, 하느님 당신께 돌아오도록 부르신다. “온 세상 모든 인간들아, 머리를 돌려 나에게로 와서 구원을 받아라. 나만이 하느님, 다른 신은 없다.…… 사람마다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민족들이 제 나라 말로 나에게 신앙을 고백하리라. ‘정의를 세울 힘은 주님께만 있다’”(이사 45,22-24).3)
202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주님’이시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4)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친히 확인하신다. 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그 ‘주님’이심을 암시하신다.5)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다. 이는 유일하신 분, 하느님께 대한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 또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께 대한 신앙도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영원하시며, 무한하고 불변하시며, 불가해하고 전능하시며, 말로 표현할 수 없으신 참 하느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한 분이시며, 삼위이시나 순전히 하나의 본질,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우리는 확고하게 믿으며 명백하게 고백한다.6)
II.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203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써 당신을 계시하신다. 이름은 본질과 인격의 신원과 그 생명의 의미를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이름 없는 어떤 힘이 아니시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을 알리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타인이 자신에게 다가와 자신을 더 깊이 알고 인격적으로 부를 수 있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그들에게 내 주는 것이다.
204 하느님께서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 이름을 통해서 당신 백성에게 당신을 알리셨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을 위한 근본적인 계시로서 확인된 것은 출애굽과 시나이 산의 계약 전에, 불타는 덤불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신 그 계시이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
205 하느님께서는 불타면서도 타 없어지지 않는 덤불 속에서 모세를 부르신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출애 3,6). 하느님께서는 성조들을 먼 여행으로 부르시고 이끌어 주신, 조상들의 하느님이시다. 그들과 그들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하시는, 성실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그들의 후손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오신다. 그분은, 공간과 시간의 저 너머에서,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고,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며, 이 계획을 위하여 당신의 전능을 발휘하실 하느님이시다.
“나는 곧 나다”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출애 3,13-15).
206 “나는 곧 나다.”, “나는 있는 나다.” 또는 “나는 있는 자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당신의 신비한 이름 야훼(YHWH)를 알려 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누구이시며 어떤 이름으로 당신을 불러야 할지를 말씀해 주신다. 하느님께서 신비이시듯이, 하느님의 이 이름도 신비롭다. 그것은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이고 동시에 이름 밝히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 이름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무한히 초월해 계시는 그대로의 하느님께서 가장 잘 표현되신다. 그분께서는 “숨어 계신 하느님”(이사 45,15)이시며 그 이름은 말할 수 없고,7) 그분께서는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이시다.
20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알려 주심으로써, 과거에도 그랬고(“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출애 3,6) 미래에도 그러할(“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출애 3,12), 변함 없고 영원한 당신의 성실함도 동시에 알려 주신다. 당신의 이름을 “나다.”라고 알려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 곁에 늘 계시는 하느님이심을 알려 주신다.
208 당신께로 이끄시는 신비로운 하느님의 현존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미소함을 깨닫는다. 불타는 덤불 앞에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대면하여 모세는 자신의 신발을 벗고 얼굴을 가린다.8)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광 앞에서 이사야는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사 6,5)이라고 부르짖는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하느님의 표징을 보고 베드로는 부르짖는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가 5,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므로 당신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다.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다”(호세 11,9). 요한 사도도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19-20).
209 하느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성서를 읽을 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은 ‘주님’(Adonai, 그리스어로는 Kyrios)이라는 명칭으로 바꿔 읽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천주성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말로 표현될 것이다.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
210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금송아지를 숭배한9) 죄를 저지른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전구를 들으시고, 불충한 백성과 동행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셨다.10)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실 것을 청하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내 모든 선한(아름다운)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출애 33,19). 그리고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시며 선포하신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출애 34,6). 이에 모세가 주님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한다.11)
211 ‘나다’ 또는 ‘있는 자’라는 ‘하느님 이름’은,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께 불충했고 그에 따라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데도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시는”(출애 34,7) 하느님의 신의를 드러낸다. 당신의 아드님을 내어 주시기까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한없이 자비로우신”(에페 2,4)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자 당신의 목숨을 내 주심으로써, 바로 당신께서 ‘하느님 이름’을 가지고 계심을 알려 주신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8,28).
하느님만이 ‘있다’
212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은 ‘하느님 이름’의 계시 안에 담긴 내용의 풍요로움을 더 펼치고 심화할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며, 그분 외에 다른 신은 없다.12) 그분은 세상과 역사를 초월하신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은 바로 그분이시다. “그것들은 없어져도 당신께서는 남으시니, 모든 것은 옷처럼 낡아지리이다.……당신께서는 같으시고, 그 세월은 끝이 없으리이다”(시편 101,27-28[102,26-27]). 하느님께서는 “달라지는 법도 없고 운행하면서 어두워지는 일도 없으신”(야고 1,17) 분이시다. 그분은 항상 영원히 ‘있는 자’이시며, 그렇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약속에 항상 성실하신 분이시다.
213 “나는 있는 나다.”라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 이름’의 계시에는 “하느님만이 ‘있다.’”는 진리가 담겨 있다. 칠십인역 성서와 그에 뒤이은 교회의 성전(聖傳)은 이미 ‘하느님 이름’을 이러한 의미로 이해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충만한 ‘존재’요 ‘완전’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은 그분께 존재와 소유를 받았으나, 오로지 그분께서만 자신의 존재 자체이시며, 그분의 모든 것은 그분 자신에게서 나온다.
III. ‘있는 자’ 하느님께서는 진리와 사랑이시다
214 ‘있는 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을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출애 34,6)으로 드러내신다. 이 두 단어는 ‘하느님 이름’의 풍요로움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업적을 통해서 당신의 자비로움과 선함, 은총과 사랑을 보여 주시며, 또한 당신의 신뢰성과 항구함, 신의와 진실도 보여 주신다. “어지심과 진실하심 우러르며, 당신 이름을 찬양하오리다”(시편 137[138],2).13)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으시다”(1요한 1,5). 또 요한 사도가 가르치듯 하느님께서는 “사랑”(1요한 4,8)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다
215 “당신 말씀 줄거리는 진리니이다. 정의로운 그 결정은 다 영원하시니이다”(시편 118[119],160). “주 하느님, 주님이야말로 참 하느님이시며, 하시는 말씀에 거짓이 없으십니다”(2사무 7,28). 그러므로 하느님의 약속은 언제나 실현된다.14) 하느님께서는 진리 자체이시며, 그 말씀에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적인 신뢰로 모든 일에서 당신 말씀의 진실과 성실에 우리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하느님의 말씀과 자비와 성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유혹자의 거짓말에서 시작되었다.
216 하느님의 진리는 창조하신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리시는 당신의 지혜이다.15) 홀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16) 하느님께서만 당신과 피조물의 관계에 비추어 모든 것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주실 수 있다.17)
217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실 때에도 진실하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가르침은 “참된 법”(말라 2,6)이다. “진리를 증언하도록”(요한 18,3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시어 그 참되신 분을 알아보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1요한 5,20).18)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218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모든 민족 가운데서 그들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가 오로지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 때문이었다는 것을, 자신의 역사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다.19)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자신들을 구원하시기를 멈추지 않으시고,20) 그들의 불성실과 죄를 용서하신 것도21) 모두 사랑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219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비유된다.22) 이 사랑은 자녀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보다 강하다.23)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사랑하신다.24) 이 사랑은 가장 큰 배신도 이겨 낸다.25) 이 사랑은 가장 귀중한 선물까지도 주실 것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다”(요한 3,16).
220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다”(이사 54,8).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이 무너져도 나의 사랑은 결코 너를 떠나지 않는다”(이사 54,10). “나는 한결같은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변함없는 자비를 베풀었다”(예레 31,3).
221 요한 사도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인 것이다.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외아들과 사랑의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깊은 비밀을 알려 주신다.26) 그분은 영원한 사랑의 교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이시며, 우리를 그 사랑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IV.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결과
222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바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 전체에 대단한 결과를 가져온다.
223 하느님의 위대함과 위엄을 깨달음. “하느님께서 정말 얼마나 위대하신지, 그 누가 알겠소?”(욥 36,26).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을 “제일 먼저 섬겨야”27) 한다.
224 감사하며 살아감.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분이시며, 우리의 본질 전체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온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1고린 4,7).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사오리”(시편 115,3[116,12]).
225 모든 인간의 단일성과 참된 존엄성을 깨달음.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의 모습으로”(창세 1,26) 창조되었다.
226 창조된 만물을 선용함.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이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면 선용하고, 하느님께 등을 돌리게 하는 것이면 멀리하도록 해 준다.28)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거두어 가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께 가까이 가게 하는 모든 것을 주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를 당신께 온전히 바치기 위하여 저 자신을 버리게 하소서.29)
227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함. 신앙은 역경 가운데서도 하느님을 신뢰하게 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 무엇에도 너 흔들리지 말며
그 무엇에도 너 두려워하지 마라.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하느님께서만 변치 않으신다.
인내는 모든 것을 얻는다.
하느님을 가진 자는 부족함이 없으니
하느님만으로 충분하다.30)
간추림
228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마르 12,29). “최상의 존재는 단 한 분이어야 합니다. 곧 다른 동등한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만일 하느님께서 유일하지 않으시다면 그는 하느님이 아닙니다.”31)
229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우리를 오직 우리의 최초의 근원이요 최종 목적이신 하느님께만 향하게 하고, 하느님보다 먼저 다른 무엇을 선택하거나 하느님을 다른 무엇으로도 바꾸지 않도록 한다.
230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시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신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32)
231 우리 신앙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있는 자’라고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다. 그분은 당신을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출애 34,6) 분이라고 알려 주셨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진리’이며 ‘사랑’이다.
제2단락 성 부
I.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232 그리스도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받는다. 먼저 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요구하는 세 가지의 질문에 “믿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삼위일체에 근거한다.”33)
233 그리스도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지 그 ‘이름들’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다.34) 왜냐하면 전능하신 성부, 독생 성자, 성령, 곧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한 분 하느님께서만 계시기 때문이다.
234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35)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이다. “구원의 역사[救世史]는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신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리시고, 죄에서 돌아서는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결합시키시기 위한 길과 방법의 역사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36)
235 이 단락에서는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가 어떤 방법으로 계시되었으며(II), 교회는 어떻게 이 신비에 관한 신앙 교리를 정형화하였고(III), 끝으로 천주 성부께서는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심으로써 창조와 구원과 성화의 ‘자비로운 계획’을 어떻게 실현하시는지를(IV) 간략하게 제시할 것이다.
236 교부들은 신학(Theologia)과 경륜(Oikonomia)을 구별해서, 앞의 용어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인 생명의 신비를, 뒤의 용어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는 모든 업적을 가리켰다. 그러므로 신학은 경륜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다. 그러나 반대로 경륜 전체를 밝혀 주는 것은 신학이다. 하느님의 업적은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준다. 반대로 당신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는 당신의 업적에 대한 이해를 밝혀 준다. 유비적인 의미에서 볼 때 이러한 사실은 인격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격은 그의 행동으로 나타나며, 한 사람의 인격을 이해하면 할수록 그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237 삼위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의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어, 하느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들”37) 가운데 하나이다. 틀림없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 업적과 구약의 계시 안에 삼위일체이신 당신 존재의 자취를 남겨 놓으셨다. 그러나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파견 이전에는, 거룩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존재의 본질은 이성만으로 또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신비였다.
II.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계시
성자를 통해 알려지신 성부
238 많은 종교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 하느님은 종종 ‘신들과 사람들의 아버지’로 여겨졌다. 세상의 창조주라는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38)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맏아들 이스라엘”(출애 4,22)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율법을 주신 까닭에 더더욱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또한 이스라엘 왕들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신다.39) 하느님께서는 특히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 고아와 과부들의 아버지이시며, 이들은 하느님 사랑의 보호를 받고 있다.40)
239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신앙의 언어는 주로 두 가지 측면을 가리킨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근원이시며 초월적인 권위를 지니셨으며, 동시에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신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부성은 또한 모성의 모습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데41) 이는 하느님의 내재성과, 하느님과 당신 피조물 사이의 친밀성에 더 주목하여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앙의 언어도 부모들에 대한 인간적 경험에서 도움을 얻는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부모에게서 처음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인간인 부모들이 그릇될 수도 있으며 부성과 모성의 모습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성별을 초월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분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인간적인 부성과 모성의 근원이며 척도이시면서도42) 이를 초월하신다.43)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일 수 없다.
240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당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만 영원히 아들이시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마태 11,27).
241 이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으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신 말씀”(요한 1,1)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골로 1,15)이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히브 1,3)이시라고 고백한다.
242 그 뒤 사도들의 전통을 따라, 교회는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자께서 성부와 “한 본체”44)이심을 고백하였다. 곧 성자께서는 성부와 함께 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열린 제2차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신경에 포함된 이러한 표현을 그대로 지켜,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이신 분”45)이라고 고백하였다.
성령을 통해 계시되신 성부와 성자
243 당신 파스카 전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파라클리토’(변호자)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알려 주신다. 창조 때부터46) 활동하시는 성령께서는 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47) 이제 제자들 곁에, 그들 안에 계시면서,48) 그들을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요한 16,13) 깨닫도록 가르쳐 주실 것이다.49)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자와 성부와 구별되는 하느님의 한 ‘위격’으로 계시되셨다.
244 성령의 영원한 근원은 그분의 지상 파견으로 드러난다. 성령께서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에 의해서, 또 성자께서 성부의 곁으로 돌아가신 뒤에는 직접 성자에 의해서 사도들과 교회에 파견되신다.50)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후에 성령께서 파견되신다는 사실은51) 삼위일체 신비를 온전히 계시하는 것이다.
245 성령께 대한 사도적 신앙은 381년에 열린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된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시나이다.”52) 이로써 교회는 성부께서 “모든 신성의 원천이며 근원”53)이심을 고백한다. 한편 성령의 영원한 근원은 성자의 영원한 근원과 무관하지 않다. “삼위일체의 제3위격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하나이시며 동일하시고, 같은 실체와 같은 본성을 지니고 계신다.……그러나 성부만의 성령 또는 성자만의 성령이시라고 할 수 없고, 성부와 성자의 성령이시라고 해야 한다.”54) 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 신경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신다.”고 고백한다.55)
246 신경의 라틴 전승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고 고백한다. 1438년의 피렌체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성령께서는 그 본질과 존재를 성부와 성자에게서 동시에 받으시며, 유일한 근원이신 한 위와 또 다른 위에게서, 유일한 발출(spiratio)을 통하여 영원히 나오신다.……그리고 성부께서는 아버지로서 외아들을 낳으시고, 당신의 존재만을 제외하고는 당신께 있는 모든 것을 외아들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자에게서 나오신 성령의 이 발출도 영원으로부터 성자를 낳으신 성부에게서 영원히 이루어지는 것이다.”56)
247 필리오퀘(Filioque)에 대한 이러한 언명은 381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신경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라틴 전통과 알렉산드리아 전통에 따라 성 레오 교황은, 로마가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에서 381년의 신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전인 447년에57) 이미 이를 교의로 고백하였다. 신경 안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관습은 점차 라틴 전례 안에 받아들여졌다(8-11세기). 한편 이러한 라틴 전례에서 필리오퀘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포함시킨 문제는 오늘날까지 정교회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248 동방 전통은 우선 성부께서 성령의 첫 기원이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요한 15,26) 성령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성령께서는 성자를 통해서 성부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을 확언한다.58) 그러나 서방 전승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필리오퀘) 발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우선 성부와 성자께서 한 본체로서 이루시는 일치를 표현한다. 서방 교회는 이를 “정당하고 합리적”59)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한 본체로서 일치를 이루는 하느님 위격의 영원한 질서는, 성부께서 “근원이 없는 근원”60)으로서 성령의 일차적 근원이심을 내포하고 있지만, 한편 독생 성자의 성부로서 성자와 함께 “성령께서 나오신 유일한 근원”61)이시라는 사실 역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당한 보완은, 그것을 지나치게 고착시키지 않는다면, 동일하게 고백하는 신비의 실재를 믿는 신앙의 단일성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III. 신앙 교리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
삼위일체 교의의 형성
249 삼위일체에 대해 계시된 진리는 초기 교회 때부터 주로 세례에서 그 신앙의 생생한 근원이 되었다. 세례를 위한 신앙 고백문에 표현된 이 진리는 설교나 교리교육, 교회의 기도 안에 정형화하였다. 이러한 정형화는 사도들의 글에서 이미 발견되는데, 성찬 전례에서 사용되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은 이를 증명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62)
250 초세기 교회는, 삼위일체 신앙을 왜곡시키는 오류에서 이 신앙을 지키고 더 깊이 이해하고자, 이를 더 명확하게 정형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교회 교부들의 신학적 노력으로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감각으로 떠받친 옛 공의회들의 업적이다.
251 삼위일체 교의를 정형화하기 위하여 교회는 철학적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 ‘실체’(substantia), ‘위격’(persona 또는 hypostasis), ‘관계’(relatio) 등의 고유한 용어들을 발전시켜야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신앙을 인간적 지혜에 종속시키기보다, 오히려 이제부터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한히 초월하는”63) 형언할 수 없는 신비까지도 의미하게 된 이 용어들에, 새롭고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252 교회는 ‘실체’라는(때로는 ‘본질 essentia’이나 ‘본성 natura’이라는 단어로도 표현되는) 단어를 단일성에서 본 하느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며, ‘위격’이라는 단어는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실제적 구분에서 본 삼위를 가리킬 때, ‘관계’라는 단어는 그 위격들의 구분이 한 위격과 다른 위격들의 관련에서 존립한다는 사실을 지적할 때 사용한다.
삼위일체 교의
253 삼위는 한 하느님이시다. 세 신들이 아니라,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느님, 곧 “한 본체의 삼위”64)에 대한 신앙을 우리는 고백한다. 하느님의 삼위는 신성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시다. “성부께서는 성자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며, 성자께서는 성부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의 본성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다. 곧 본성으로 한 하느님이시다.”65) “삼위의 각 위는 이러한 실재, 곧 하느님의 실체, 본질 또는 본성이시다.”66)
254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된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홀로는 아니시다.”67) 세 위격은 서로 실제적으로 구별되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 양상을 가리키는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성자이신 분은 성부가 아니시며, 성부이신 분은 성자가 아니시고, 성령이신 분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시다.”68) 세 위격은 그 근원이 가진 관계들로써 서로 구분된다.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하시는 분이시다.”69) 하느님의 단일성은 삼위로 이루어져 있다.
255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느님의 단일성은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므로, 세 위격의 실제적 구분은 오로지 위격이 다른 위격과 가진 관계에 국한된 것이다. “삼위의 이름에서 성부는 성자에 대하여, 성자는 성부에 대하여,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 대하여 관계를 갖는다. 한편 이 관계로 보아 삼위를 일컬을 때에도, 삼위는 오직 하나의 본성 또는 실체라고 믿는다.”70) 사실 “관계의 대립이 없다면 모든 것은 하나이다.”71) “이러한 단일성으로, 성부는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시며, 성자는 온전히 성부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시며, 성령은 온전히 성부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신다.”72)
256 ‘신학자’라고도 불리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예비신자들에게 삼위일체 신앙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전한다.
모든 것에 앞서 이 훌륭한 유산을 간직하십시오. 이를 위하여 나는 살아 싸우고 있으며, 이 유산과 더불어 죽기를 원합니다. 이 선물은 나에게 모든 악을 견디고 모든 즐거움을 하찮게 여기게 합니다.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대한 신앙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이 신앙을 맡깁니다. 이제 이 신앙으로 나는 여러분을 물 속에 넣었다 들어올릴 것입니다. 내가 맡기는 이 신앙은 여러분 생애의 동반자와 보호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오직 한 하느님과 그 권능만을 드립니다. 이 하느님께서는 삼위가 한 분으로 존재하시며, 서로 구별되는 방식으로 삼위를 포함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실체나 본성의 차별도 없고, 올려 주는 우월함도, 낮추는 열등함도 없는 하느님이십니다.……세 무한한 위격이 하나의 무한한 동질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각 위를 그 자체로 볼 때에도 온전한 하느님이시고……삼위를 함께 생각할 때에도 하느님이십니다.……삼위의 광채가 나를 감싸지 않으면 그 단일성을 생각할 수조차 없고, 그 단일성이 나를 사로잡지 않으면 나는 삼위를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73)
IV. 하느님의 업적과 삼위의 사명
257 “오 빛이여! 복되신 삼위, 본래의 일치여!”74)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행복이시며, 불사의 생명이시고 불멸의 빛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이 당신 복된 생명의 영광을 나누어 주시고자 하신다. 이것이 세상 창조 이전에 사랑하시는 당신 성자를 통하여 미리 세워 놓으신 ‘자비로운 계획’(에페 1,9)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에페 1,5) 것이다. 곧,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로마 8,15) 성령을 통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로마 8,29) 계획하신 것이다. 이 계획은 “천지 창조 이전에 우리에게 주신 은총”(2디모 1,9)이며 삼위일체의 사랑에서 직접 나왔다. 이 계획은 창조의 업적과, 인류의 범죄 이래 구원의 역사 전체와, 교회의 사명으로 이어지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 안에 전개된다.75)
258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하느님 세 위격의 공동 작업이다. 삼위가 오직 하나의 동일한 본성을 지니셨듯이, 그 활동도 유일하고 동일하다.76)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피조물의 세 근원이 아니라 하나의 근원이시다.”77) 한편 각 위격은 자신의 개별적인 위격의 특성에 따라 공동 활동을 하신다. 신약성서에 따라 교회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78) “한 분 하느님 성부에게서 만물이 비롯되었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하며, 한 분 성령 안에 만물이 존재한다.”79) 각 위격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신적 파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259 공동 활동이자 동시에 개별 활동인 하느님의 모든 계획은, 삼위 하나하나의 특성과 그 유일한 본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이 삼위를 결코 분리하지 않으면서 각 위격과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성부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은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고,80) 성령께서 움직여 주시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81)
260 하느님의 모든 계획의 궁극 목적은 모든 사람이 복되신 삼위일체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82) 그러나 이미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를 우리 안에 모시도록 부름을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오, 흠숭하올 삼위일체의 하느님, 제 자신을 완전히 잊고 마치 제 영혼이 이미 영원 안에 있듯이,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당신 안에 머물도록 도와 주소서. 그리하여 그 무엇도 저의 평화를 뒤흔들거나, 제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시고, 오히려 순간마다 당신의 심오한 신비로 더 깊이 데려가 주소서. 오, 나의 변치 않는 분이시여! 제 영혼을 평화롭게 하소서. 제 영혼을 당신의 천국으로 삼으시고 당신의 사랑하시는 거처, 당신의 휴식처로 삼으소서. 제가 결코 당신을 그 곳에 홀로 두지 않고, 온전히 그 곳에 머물러 온전히 깨어 있는 신앙으로 당신을 온전히 경배하며, 당신의 창조 활동에 저 자신을 온전히 맡기게 하소서.83)
간추림
261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당신을 계시해 주심으로써 이 신비를 깨닫게 해 주실 수 있다.
262 성자의 강생은, 하느님께서 영원한 성부이시며 성자와 성부가 한 본체이시라는 것, 곧 성자께서는 성부 안에서 성부와 더불어 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해 준다.
263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서 보내 주시며,84) 성자께서 “성부께로부터”(요한 15,26) 보내 주시는 성령의 파견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나이다.”85)
264 “성령께서는 첫 근원이신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시는 영원한 증여를 통하여, 친교를 이루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86)
265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받는 세례의 은총으로 우리는, 이 세상의 불완전한 신앙 안에서 그리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빛 안에서, 복되신 삼위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87)
266 “가톨릭 신앙은 이러하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로, 삼위를 한 분의 하느님으로 흠숭하되 각 위격을 혼동하지 않으며, 그 실체를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천주성은 하나이고, 그 영광은 동일하고, 그 위엄은 다 같이 영원하다.”88)
267 그 실체가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의 세 위격은 하시는 일에서도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단일한 활동에서, 특히 성자의 강생과 성령의 강림이라는 신적 파견에서 각 위격은 삼위 안에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
제3단락 전능하신 하느님
268 하느님의 모든 속성 가운데 하느님의 전능만이 신경에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고백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이 우주적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89)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기90) 때문에 그 전능은 곧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이라고 믿는다. 이 전능이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날”(2고린 12,9)91) 때 신앙만이 이를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신비로운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뜻대로 모든 것을 만드셨나이다”(시편 113[115],3)
269 성서는 하느님의 우주적 전능에 대해서 여러 번 고백한다. 하느님을 “야곱의 강하신 이”(창세 49,24; 이사 1,24 등), “만군의 주님”, “굳세고 능하신 주님”(시편 23[24],8-10)이라고 일컫는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므로 그분은 “하늘과 땅”(시편 134[135],6)에서 전능을 떨치신다. 그러므로 그분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고,92) 그분께서 만드신 것은 그분의 처분에 맡겨져 있다.93) 하느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님이시고,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셨으며, 이 우주는 그분께 완전히 복종하고, 그분의 처분에 달려 있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마음과 사건을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신다.94) “주님은 원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 큰 힘을 발휘하실 수 있다. 주님의 팔 힘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지혜 11,21)
“주님은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만인에게 자비로우시다”(지혜 11,23)
270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그분의 부성애와 전능은 서로를 밝혀 준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95)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써(“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2고린 6,18), 그리고 무한한 자비를 통하여 아버지로서 전능을 보여 주신다. 당신 자비로 죄인들을 자유로이 용서하심으로써 그 권능의 극치를 드러내신다.
271 하느님의 전능은 결코 독단적이지 않다. “하느님 안에서 능력과 본질, 의지와 이해, 지혜와 정의는 하나이며 동일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그분의 정의로운 의지와 지혜로운 이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96)
무능하게 보이는 하느님의 신비
272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악이나 고통의 체험을 통해서 시련에 놓일 수도 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께서 악을 막을 수 없으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들의 자기 낮춤과 부활 안에서 당신의 전능을 신비하게 드러내시고, 그 낮춤과 부활을 통해 악을 이기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이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5).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광을 통해 “우리 믿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당신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에페 1,19`) 알게 하셨다.
273 오직 신앙으로만 전능하신 하느님의 신비한 길을 따를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르게 하려고 그 약함을 영광스럽게 여긴다.97) 동정 마리아께서는 이와 같은 신앙의 가장 뛰어난 모범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믿었으며(루가 1,37),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루가 1,49) 하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274 “그러므로 주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우리 영혼에 깊이 새겨진 이 확신보다 우리의 신앙과 희망을 더 굳게 해 주는 것은 없다. 신경이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믿도록 제시하는 모든 것, 가장 위대하고 가장 불가해하며 자연의 일반적 법칙을 초월하는 가장 높은 것까지도, 하느님의 전능이라는 개념만 가진다면 주저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98)
간추림
275 우리는 의로운 욥과 함께 고백한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욥 42,2).
276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루가 1,37)고99) 확고하게 믿는 교회는, 성서의 증언에 따라 충실하게,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자주 기도드린다.
27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돌아서게 하시고 은총을 통하여 당신과 맺은 우정을 회복하심으로써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신다. “주 하느님, 용서와 자비로 전능을 크게 드러내시니,…….”100)
278 하느님의 사랑이 전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성부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
제4단락 창조주
279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세 1,1). 이러한 장엄한 말로 성서는 시작된다. 신경은 이 말을 인용하여 “천지의 창조주”,101)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102)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고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창조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피조물을, 끝으로 죄에 떨어짐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러 오셨다.
280 창조는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모든 계획’의 기초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는 “구원 역사의 시작”103)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신비는 창조의 신비를 비추는 결정적인 빛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신”(창세 1,1) 창조의 목적을 밝혀 준다. 한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창조의 영광을 의중에 두셨던 것이다.104)
281 이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창조를 기리는 부활 성야의 독서는 창조 이야기로 시작된다. 비잔틴 전례에서 창조 이야기는 항상 주님의 대축일 전야의 첫 번째 독서가 된다. 옛 증언에 따르면, 세례를 위한 예비신자들의 교육도 이와 같은 방법을 취했었다.105)
I. 창조에 관한 교리교육
282 창조에 관한 교리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이 교리는 인간과 그리스도인 삶의 근본 그 자체와 관련된다. 왜냐하면 창조 교리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모든 시대에 걸친 인간들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답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기원과 목적에 대한 두 질문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이 둘은 우리의 삶과 행동 방식의 의미와 방향을 결정짓는다.
283 세계와 인간의 기원 문제는 많은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러한 연구는 우주의 생성 시기와 크기, 생명체의 등장, 인간의 출현 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발견으로 우리는 더욱더 창조주의 위대함을 찬미하고, 그분의 모든 업적과, 학자들과 연구자들에게 주신 지능과 지혜에 대해 감사한다. 그들은 솔로몬처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나에게 만물에 대한 어김없는 지식을 주셔서 세계의 구조와 구성 요소의 힘을 알게 해 주셨다.……만물을 만드신 하느님의 지혜의 가르침을 받아서……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지혜 7,17-21).
284 이러한 연구에 큰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자연 과학 고유의 영역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질문들로 강렬한 자극을 받게 된다. 이 질문은 단순히 언제 어떻게 우주가 물질적으로 생겨났는가, 또는 인간은 언제 발생했는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기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 기원이 우연이나, 맹목적인 운명이나, 이름 모를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지, 또는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지성을 지닌 선한 초월적 존재의 지배를 받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만일 세계가 하느님의 선과 지혜에서 연유하는 것이라면, 왜 악이 존재하는가?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악은 누구의 책임인가? 악에서 해방될 수는 있는가? 하는 것들을 묻는 것이다.
285 처음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원에 대한 교회의 대답과는 다른 많은 대답에 직면하였다. 예컨대 고대의 종교와 문화에는 기원을 다룬 많은 신화가 있다. 어떤 철학자들은 만물이 신이고, 세계는 신이라고, 또는 세계의 변화는 신의 변화라고 하였다(汎神論). 다른 철학자들은 세계가 신의 필연적인 유출이며, 세계는 그 근원에서 흘러 나왔다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영원히 투쟁하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의 두 근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二元論, 마니교). 이러한 개념들 가운데 하나에 따르면, 세계는(적어도 물질적인 세계는) 타락의 산물이므로 악하며, 따라서 이는 버리거나 초월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靈智主義). 다른 이들은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신은 세계를 마치 시계처럼 움직이도록 창조했고, 일단 창조한 뒤에는 나름대로 움직이도록 방치한다고 한다(理神論). 그리고 끝으로 어떤 이들은 세계의 어떠한 초월적 기원도 인정하지 않으며, 이 세계에서 항상 존재하는 단순한 물질의 작용만을 볼 뿐이다(唯物論). 이러한 시도들은 기원에 관한 질문이 언제 어디서나 제기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러한 탐구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다.
286 인간의 지성이 이미 기원에 대한 답을 찾아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실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는, 비록 종종 모호하거나 오류로 왜곡될 수도 있지만, 인간 이성의 빛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업적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다.106) 그러므로 신앙은 이러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성을 비추어 주고 견고하게 한다.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곧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다”(히브 11,3).
287 창조의 진리는 모든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하므로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이, 이 주제에 대해 깨닫는 데 유익한 모든 것을 당신 백성에게 계시하고자 하셨다. 모든 인간이 창조주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자연적인 지식을 넘어서서,10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창조의 신비를 점진적으로 계시하셨다. 성조들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들을 선택하시어 당신 백성으로 만드신108) 그분께서, 땅의 모든 백성과 온 땅이 당신에게 속해 있으며, 당신 홀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시편 113[115],15; 123[124],8; 133[134],3) 분이심을 알려 주신다.
288 이처럼 창조 계시는, 유일하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맺으시는 계약에 대한 계시나 그 계시의 실현과 분리될 수 없다. 창조는 이 계약을 향한 첫걸음으로서, 또 하느님의 전능하신 사랑에 대한 첫 번째 보편적 증거로서 계시되었다.109) 따라서 창조의 진리는 예언자들의 메시지와,110) 시편의 기도와111) 전례, 그리고 선택된 백성의 지혜로운 성찰 안에서112) 점점 더 힘차게 표현된다.
289 창조를 다룬 성서의 모든 말씀 가운데 창세기의 처음 세 장(章)은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본문들은 다양한 원천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감도를 받은 성서 저자는 이 본문들을 성서의 시작 부분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그 장엄한 말로 창조의 진리, 하느님 안에 있는 창조의 기원과 목적, 그 질서와 선(善), 인간의 운명, 그리고 끝으로 죄의 비극과 구원의 희망까지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빛으로, 성서의 단일성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살아 있는 성전 안에서 읽을 때, ‘창조’, ‘타락’, ‘구원의 약속’ 등의 말들은 ‘한처음’의 신비에 대한 교리교육의 주요 원천이 된다.
II. 창조 -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업적
290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창세 1,1). 성서의 이 첫 말씀은 세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외의 모든 것을 비로소 존재하게 하셨다. 당신 홀로 창조주이시다(‘창조하다’ - 히브리어로 ‘bara’ - 라는 말은 언제나 하느님만을 주체로 한다). 존재하는 것 전체(‘하늘과 땅’이라는 말로 표현되는)는 그것들에게 존재를 주시는 하느님께 달려 있다.
291 “한처음……말씀이 계셨다. 말씀은……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1-3). 신약성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곧 영원한 말씀을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계시한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은……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속합니다”(골로 1,13-17). 교회의 신앙은 또한 성령의 창조적 활동도 언명한다. 그분께서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113) “창조주 성령”(“오소서 성령이여 창조주시여” - 성무일도 찬미가), “모든 선의 원천”114)이시다.
292 구약성서 안에 암시되고115) 새로운 계약 안에 계시된, 성부의 창조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성자와 성령의 창조 활동은 교회의 신앙 규범으로 분명하게 확언된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그분은 아버지이시고,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주인이시며, 그분은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 자신, 곧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지혜’를 통해서”,116) “당신의 두 손”이신 “성자와 성령을 통해서”117) 만물을 지으셨다. 창조는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공동 업적이다.
III.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293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118) 이것은 성서와 성전이 끊임없이 가르치고 찬미하는 진리이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영광을 드러내고 나누시기 위해서이다.”119) 하느님께는 당신의 사랑과 선하심 이외에 창조를 위한 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열쇠가 만물을 창조할 손을 열었다.”120) 그리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신의 선하심으로, 그리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유일하신 참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행복을 더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당신의 완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들에게 부여하신 선을 통하여 당신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장 자유로운 계획 안에서, 모든 것을 한 번에, 한처음에, 유형 무형의 피조물 하나하나를 무에서 창조하셨다.121)
294 이렇게 당신 선하심을 드러내고 나누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며, 이를 위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에페 1,5-6). “하느님의 영광은 바로 살아 있는 인간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뵙는 것입니다. 창조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가 벌써 지상의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생명을 주시는데, 하물며 ‘말씀’을 통한 성부의 드러나심이야 하느님을 뵙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생명을 주는 일이 되겠습니까.”122) 창조의 궁극적인 목적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성부께서 마침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1고린 15,28)이 되시어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을 드러내시고 동시에 돌보시는 것이다.”123)
IV. 창조의 신비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신다
295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124) 그러므로 세계는 어떤 필연성이나, 맹목적 운명이나,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피조물들을 당신의 존재와 지혜와 선에 참여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세계가 생겨났음을 우리는 믿는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이 주님의 뜻에 의해서 생겨났고 또 존재합니다”(묵시 4,11). “주님께서 하신 일이 많고도 많건마는, 그 모든 것을 지혜로써 이룩하시었나이다”(시편 103[104],24). “주님께서는 온갖 것을 선으로 대하시고, 일체의 조물들을 어여삐 여기시나이다”(시편 144[145],9).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창조하신다
296 하느님께서는 창조를 위하여 이미 존재하는 아무것도 아무런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125) 창조가 신적 실체의 필연적인 유출은 더욱 아니다.126) 하느님께서는 자유로이 ‘무에서’ 창조하셨다.127)
하느님께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로 세계를 만드셨다면 특별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 장인(匠人)도 재료를 주면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듭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전능은 바로 무로부터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만드신다는 데서 드러납니다.128)
297 성서는 ‘무에서’ 창조하신다는 신앙을 가능성과 희망이 넘치는 진리로서 증언한다. 이를테면 일곱 아들의 어머니는 그 아들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이렇게 북돋아 준다.
너희들이 어떻게 내 뱃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도 모른다. 너희들에게 목숨을 주어 살게 한 것은 내가 아니며, 또 너희들의 신체의 각 부분을 제자리에 붙여 준 것도 내가 아니다.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 자신보다도 하느님의 율법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사람이 출생할 때에 그 모양을 만들어 주시고 만물을 형성하신 창조주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하늘과 땅을 바라보아라.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살펴라. 하느님께서 무엇인가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고 생각하지 마라. 인류가 생겨난 것도 마찬가지다(2마카 7,22-23.28).
298 하느님께서는 무에서 창조하실 수 있으시므로, 성령을 통해서 죄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심으로써129) 그들에게 영혼 생명을 주실 수도 있으며,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로마 4,17)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에게 부활을 통해서 육신 생명을 주실 수도 있다. 또,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어둠에서 빛이 생기게 하실 수 있으므로130) 당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빛을 주실 수 있다.131)
하느님께서는 질서 있고 선한 세상을 창조하신다
299 하느님께서는 지혜로 세상을 창조하시기 때문에 만물에는 질서가 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잘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하셨다”(지혜 11,20).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골로 1,15)이신 영원한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 창조는, 하느님과 맺는 인격적인 관계로 부름을 받은, “하느님의 모습”을132) 닮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향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느님 지성의 빛을 나누어 받은 우리의 지성은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133)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겸손의 정신과, 창조주와 그분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134) 하느님의 선에서 태어난 피조물은 이러한 선을 나누어 받는다(“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참 좋았다.”, 창세 1,4.10.12.18.21.31).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이를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고, 인간을 위하여 인간에게 맡기실 유산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물질 세계를 포함한 창조계가 선하다는 것을 수없이 반복해서 변호해야만 하였다.135)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초월하시며, 또 그 안에 현존하신다
300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업적보다 무한히 위대하시다.136) “주님께서는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시편 8,2[8,1]), “그 위대함은 측량할 길 없나이다”(시편 144[145],3). 그러나 그분께서는 지고하고 자유로우신 창조주이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첫 원인이시므로, 당신의 피조물들 안에 가장 깊숙이 현존하신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 17,28).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 머리보다 높이 계시고 내 깊은 속보다 더 깊이 계십니다.”137)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지탱하고 이끌어 가신다
301 창조하신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그대로 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존재와 실존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피조물을 매 순간 존재하도록 지탱해 주시고, 행동할 수 있게 하시며, 완성으로 이끌어 가신다. 창조주께 대한 이러한 완전한 의존성을 깨닫는 것은, 지혜와 자유, 기쁨과 신뢰의 원천이 된다.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주님께서 만드신 그 어느 것도 싫어하시지 않는다.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만드셨을 리가 없다. 만일 주님께서 원하지 않으셨으면 무엇이 스스로 부지할 수 있겠으며, 그분께서 불러 주시지 않은 것이 어떻게 스스로 연명할 수 있겠는가?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그분 것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지혜 11,24-26).
V.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신다 - 하느님의 섭리
302 만물은 고유의 선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창조주의 손에서 완결된 상태로 나온 것은 아니다. 만물은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아직도 다다라야 할 궁극적인 완성을 향한 ‘진행의 상태’로 창조되었다. 당신의 피조물을 이러한 완전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배려를,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당신의 섭리로 보호하시고 다스리신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펼치시며, 모든 것을 훌륭하게 다스리신다”(지혜 8,1 참조). 피조물의 자유로운 행동에 의해서 발생하게 될 것까지도 “하느님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다 벌거숭이로 드러나게 마련이기”(히브 4,13) 때문이다.138)
303 성서의 증언은 한결같다. 하느님의 섭리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어서 미소한 것에서부터 세계와 역사의 큰 사건들까지 모두 보살핀다. 성서는 사건들의 흐름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힘주어 말한다. “저희의 하느님께서는 하늘에 계시옵고, 뜻대로 모든 것을 만드셨나이다”(시편 113[115],3). 그리고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여시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시면 열 자가 없는 분”(묵시 3,7)이라고 한다. “사람이 많은 계획을 세워도 성사는 주님의 뜻에 달렸다”(잠언 19,21).
304 이처럼 성서의 참 저자이신 성령께서는 자주 어떤 행위들의 부차적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그 행위를 하느님의 행위로 돌리신다. 그것은 하나의 옛날 ‘어투’가 아니라 역사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우선권과 절대적인 주권을 환기시키고,139)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가르치는 심오한 방법이다. 시편의 기도들은 이러한 신뢰를 가르치는 위대한 학교이다.140)
30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의 사소한 필요도 돌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섭리에 자녀답게 의탁할 것을 요구하신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141)
섭리와 이차적 원인들
306 하느님께서는 당신 계획의 ‘주인’이시다. 그러나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인간의 협력도 이용하신다. 이는 무능력의 표징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느님의 위대함과 선함의 표징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단순히 거기 있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동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근원이 되며, 이로써 하느님 계획의 실현에 협력하는 품위도 주셨기 때문이다.
307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온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책임을 맡기시어142) 자유로이 당신의 섭리에 참여할 권한도 주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창조 활동을 완성하고, 자신과 이웃의 선익을 위하여 조화를 완성시키는 지성적이고 자유로운 원인이 되게 하신다. 때때로 무의식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기도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의 행동, 기도, 그리고 고통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계획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143) 이 때 인간은 “하느님의 일꾼”(1고린 3,9)이144) 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협력자가 된다.145)
308 하느님께서 당신 피조물들의 모든 활동에 작용하신다는 사실은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분리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분은 이차적 원인들 안에서, 그것들을 통해서 작용하시는 첫 번째 원인이시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146) 이 진리는 피조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여 준다. “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147)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와 선함으로 무에서 존재하게 된 피조물은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단절되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은총의 도움 없이 자신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148)
섭리 그리고 악의 문제
309 만일 질서 있고 선한 세계의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돌보고 계시다면 어째서 악이 존재하는가? 절박하고도 피할 수 없으며, 고통스럽고도 신비한 이 질문에 그 어떤 성급한 대답도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 전체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창조의 선성(善性), 죄의 비극,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의 계약, 구원을 위한 당신 아드님의 강생, 성령의 파견, 교회의 형성, 성사의 효력으로써, 그리고 자유로이 응할 수 있는 인간을 행복한 삶에 초대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그 답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두려운 신비 때문에 이 초대를 회피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메시지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어느 모로든 악에 대한 대답 아닌 것이 없다.
310 하느님께서는 왜 악이 존재할 수 없는 완전한 세상을 창조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항상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창조하실 수 있다.149) 그러나 무한히 지혜롭고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궁극적 완성을 향해 가는 ‘진행의 상태’로서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기로 하셨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이러한 변화는 어떤 존재들의 출현과 더불어 다른 존재들의 소멸을, 더 완전한 것과 더불어 덜 완전한 것을, 자연의 건설과 더불어 파괴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조물이 그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는, 물리적 선은 물리적 악과 공존한다.150)
311 지성과 자유를 지닌 피조물인 천사와 인간은 자유로운 선택과, 더 나은 것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들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들은 그릇된 길을 갈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은 죄를 지었다. 그리하여 물리적 악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중대한 윤리적 악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윤리적 악의 원인일 수 없다.151)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자유를 존중하여 악을 허락하시는 것이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악에서 선을 끌어 내신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최상의 선이시므로, 만일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실 충분한 능력과 선을 가지고 계시지 않다면, 당신의 피조물들 안에 어떠한 악도 존재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실 것이다.152)
312 이리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능하신 섭리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서 야기된 악의 결과에서, 물론 윤리적 악의 결과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창세 45,8; 50,20)153) 이제까지 저지른 가장 큰 윤리악은 모든 인간의 죄로 일어난 하느님 아들의 배척과 살해였다. 이 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풍성한 은총으로154) 그리스도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을 끌어 내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313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성인들도 이것이 사실임을 계속 증언해 왔다.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자신들에게 닥치는 일들에 대해 문제를 삼고 반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사랑에서 나오며, 모든 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목적이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십니다.”155)
성 토마스 모어는 순교를 앞두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딸을 위로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은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 비록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이 우리 눈에 매우 나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이다.”156)
또 노리치의 줄리언 여사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신앙을 굳게 지켜야 하며,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다 선하리라는 사실도 굳게 믿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당신도 모든 일이 선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157)
314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그 섭리의 길을 알 수가 없다. 종말에, 우리의 부분적인 인식이 끝나고 하느님의 “얼굴을 맞대고”(1고린 13,12) 보게 될 때, 비로소 이러한 길을 완전히 깨닫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길을 통해서, 심지어 악과 죄의 비극을 통해서까지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결정적인 안식(Sabbath)으로158) 이끄신다. 이 결정적인 안식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간추림
315 하느님께서는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그 안에 당신의 전능하신 사랑과 지혜에 대한 첫 번째이며 보편적인 증거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목표로 하는 당신의 ‘자비로운 계획’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안배해 두셨다.
316 창조의 업적을 성부께 돌리기는 하지만 성부, 성자, 성령께서 창조의 유일하고 분리될 수 없는 근원이시라는 것 역시 신앙의 진리이다.
317 하느님 홀로 자유로이, 직접적으로, 어떤 도움도 없이 세계를 창조하셨다.
318 어떤 피조물도 말 그대로 ‘창조’에 필수적인 무한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곧,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존재를 부여하고 만들어 내는 능력(‘무에서’ 존재를 불러낼 능력)이 피조물에게는 없다.159)
319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함께 나누시려고 세계를 창조하셨다. 당신의 진선미에 참여하는 바로 이 영광을 위하여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것이다.
320 세계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히브 1,3)이신 당신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생명을 주시는 창조주”이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이 세계를 계속 존재하게 하신다.
321 하느님의 섭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와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그들의 궁극 목적에까지 이끌어 가시는 배려이다.
322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섭리에 우리를 자녀답게 맡기도록 권고하시며,160) 성 베드로 사도는 이를 다시 반복한다.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1베드 5,7).161)
323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의 활동을 통해서도 섭리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자유롭게 당신의 계획에 협력하게 하신다.
324 하느님께서 물리적 악과 윤리적 악을 허락하시는 것은 신비이다. 이 신비는 악을 물리치려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밝혀진다. 만일 영원한 생명 안에서만 완전히 깨닫게 될 그러한 길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악에서조차 선을 끌어 내지 않으신다면 악을 허락하실 리 없다는 것을 우리는 신앙으로 확신한다.
제5단락 하늘과 땅
325 사도신경은 하느님께서 “천지의 창조주”162)이심을 고백하며,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163)이심을 천명한다.
326 성서의 ‘하늘과 땅’이라는 표현은 존재하는 모든 것, 피조물 전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을 결합시키거나 구분하는 만물의 유대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땅’은 인간의 세계이다.164) ‘하늘’ 또는 ‘하늘들’은 창공을 가리킬 수도 있고,165) 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 5,16)라는166) 표현에서처럼 하느님께서 계시는 ‘장소’를 가리킬 수도 있다. 따라서 종말론적 영광인 ‘하늘’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은 영적인 피조물들 ─ 천사들 ─ 이 하느님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한다.
327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의 신앙 고백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단번에 무에서 영신계와 물질계, 곧 천사들과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나서 정신과 육체로 이루어져 두 요소를 다 지닌 인간을 창조하셨다.”167)고 언명한다.
I. 천 사
천사의 존재 - 신앙의 진리
328 성서가 보통으로 천사라고 부르는, 육체를 가지지 않은 영적인 것들의 존재는 신앙의 진리이다. 성전 전체의 증언이 일치하듯이, 성서의 증언도 명백하다.
그들은 누구인가?
32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사’는 본성이 아니라 직무를 가리킨다. 그 본성은 무엇인가? 영(靈)이다. 그 직무는 무엇인가? 천사다. 존재로서는 영이고, 활동으로는 천사다.”168) 천사는 그 존재 전체가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며 전령이다. 그들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보고 있기”(마태 18,10) 때문에, “하느님 말씀 순히 들어 그 영을 시행하는 능한 자들”(시편 102[103],20)이다.
330 순수한 영적 피조물인 천사들은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격적인 피조물들이며,169) 죽지 않는 피조물들이다.170) 그들은 보이는 모든 피조물보다 훨씬 더 완전하다. 그들 영광의 광채가 이를 증명한다.171)
“당신의 모든 천사들과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
331 그리스도께서는 천사 세계의 중심이시다. 천사들은 그분께 속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것이다”(마태 25,31). 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 곧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여러 천신들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모두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로 1,16). 그분께서 천사들을 당신의 구원 계획을 알리는 전령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그분께 속한 존재들이다.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로서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이 아닙니까?”(히브 1,14)
332 그들은 창조 때부터172) 구원 역사의 흐름을 따라, 줄곧 이 구원을 멀리서 또는 가까이에서 알리고, 이 구원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다. 몇 가지 예만 들어 보면, 그들은 지상 낙원의 문을 닫으며,173) 롯을 보호하고,174) 하갈과 그녀의 아들을 구하며,175)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하고,176) 율법을 전해 주는 직무를 수행하며,177)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하고,178) 탄생과179) 소명들을180) 알리고 예언자들을 돕는다.181) 마침내 선구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것은 바로 천사 가브리엘이다.182)
333 사람이 되신 ‘말씀’의 생애는 강생부터 승천까지 천사들의 경배와 봉사에 싸여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맏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에,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예배를 드려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6). 그리스도의 탄생 때 “……하느님께 영광!”(루가 2,14)이라고 천사들이 부른 찬미의 노래는 교회의 찬미 안에서 끊임없이 메아리친다. 그들은 어린 예수님을 보호하고,183) 광야에서 예수님께 봉사하며,184) 번민 중에 계실 때 용기를 북돋아 드린다.185) 그러므로 천사들은 그 옛날 이스라엘처럼186) 예수님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187)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생과188) 부활의189) ‘기쁜 소식’을 전함으로써 “복음을 선포하는”190) 것도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191) 재림 때에도 그분 곁에서 그분의 심판을 도와 드리게 될 것이다.192)
교회 생활과 천사
334 그리하여 교회는 삶의 모든 면에서 천사들의 신비하고 능력 있는 도움을 받는다.193)
335 전례 안에서 교회는 천사들과 하나 되어, 하느님을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194) 하고 찬미한다. (장례 예식의 기도문 “천사들이여, 이 교우를 천상 낙원으로 데려가시어…….”195)나, 또 비잔틴 전례의 ‘케루빔 찬미가’196)처럼) 교회는 천사의 도움을 청하며, 특별히 몇몇 천사(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과 수호 천사)를 기념하며 그 축일을 지낸다.
336 사람은 일생 동안, 생명의 시작부터197) 죽음에 이르기까지,198) 천사들의 보호와199) 전구로200) 도움을 받는다. “모든 신자의 곁에는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보호자이자 목자인 천사가 있다.”201) 이 지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으로, 하느님 안에 결합되는 천사들과 인간들의 복된 공동체에 참여한다.
II. 유형의 세계
337 하느님께서는 이 유형의 세계를 풍요롭고, 다양하며, 질서 있게 창조하셨다. 성서는 이러한 창조주의 활동을 상징적으로 6일 동안 계속된 하느님의 ‘일’로 표현하며, 이 일은 일곱째 날의 휴식으로 끝을 맺는다.202) 성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창조에 대해 계시하신 진리들을 가르치는데,203) 이 진리들은 “피조물 전체의 깊은 본성과 그 가치, 그리고 하느님 찬미를 위한 그 목적을 깨닫게 한다.”204)
338 창조주 하느님께 존재를 받지 않은 것은 없다. 세상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무에서 생겨남으로써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 자연계 전체, 인간의 모든 역사는 이 원초적 사건에 근거한다. 이 기원(起源)에서 세계가 형성되고 시간이 시작되었다.205)
339 피조물은 저마다 고유한 선과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6일 동안’ 하신 일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한다. “만물은 창조의 조건 자체에서 고유의 안정성과 진리와 선, 또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갖추고 있다.”206) 저마다 고유한 존재를 지니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신 다양한 피조물들은, 저마다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의 빛을 반영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각 피조물의 고유한 선을 존중하여, 창조주를 무시하는 일이나 인간과 인간의 환경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 사물의 무질서한 이용을 피해야 한다.
340 하느님께서는 피조물들이 서로 의존하기를 바라신다. 해와 달, 전나무와 작은 꽃 한 송이, 독수리와 참새, 이들의 무수한 다양성과 차별성의 장관은 어떠한 피조물도 스스로는 불충분함을 의미한다. 이들은 다른 피조물에 의존하여 서로 보완하며, 서로에게 봉사하면서 살아간다.
341 우주의 아름다움. 창조된 세계의 질서와 조화는 존재들의 다양성과,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다양성의 결과이다. 인간은 이러한 질서와 조화를 자연의 법칙으로서 점차 발견해 간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감탄한다. 피조물의 아름다움은 창조주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반영한다. 이 아름다움은 당연히 지능과 의지를 가진 인간의 존경과 순종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342 피조물의 위계 질서는 덜 완전한 것에서 더 완전한 것으로 진행하는 ‘6일 동안’의 창조 순서에 표현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207) 그 하나하나를 참새까지도 돌보신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 흔한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루가 12,6-7) 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마태 12,12)
343 인간은 창조 업적의 절정이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창조를 다른 피조물들의 창조와 분명하게 구별함으로써 이 사실을 드러낸다.208)
344 모든 피조물의 연대성. 모두 동일한 창조주께 창조되었다는 점과, 모두 다 창조주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피조물은 서로 필요로 한다.
내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해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쓰임 많고 겸손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님, 찬미를 받으시옵소서.……내 주님,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내 주님을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 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분을 섬길지어다.209)
345 안식일 - ‘6일 동안’ 하신 일을 마침.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으며”, “이렛날에는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여 복을 주셨다.”고 성서는 말한다(창세 2,1-3). 이러한 영감을 받은 말마디들은 구원에 유익한 많은 가르침을 담고 있다.
346 하느님께서는 만물에 기초를 놓으시고 변하지 않는 법칙을 심어 놓으셨다.210) 신앙인은 이것들을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이는 신앙인에게 하느님 계약의 흔들리지 않는 성실성의 표시와 보증이 된다.211) 인간으로서는 충실하게 이 기초에 머물러야 하며, 그 기초에 창조주께서 새겨 놓으신 법칙을 존중해야 한다.
347 창조는 안식일을 위한 것이다. 곧 하느님께 대한 경배와 흠숭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경배는 피조물의 질서 안에 새겨져 있다.212) 성 베네딕토의 규칙서는213) “어떠한 일도 하느님의 일에 앞설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관심사의 올바른 순서를 말하는 것이다.
348 안식일은 이스라엘 율법의 핵심이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창조의 업적에 표현된 하느님의 지혜와 뜻에 부합하는 것이다.
349 제8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 날이 밝았다. 그 날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제7일에는 첫 번째 창조가 완성되었고 제8일에는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이처럼 창조 업적은 구원이라고 하는, 더욱 큰 업적에서 절정에 이른다. 첫 번째 창조는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창조에서 그 의미가 발견되며, 정점에 도달한다. 이 새로운 창조의 찬란함은 첫 번째 창조를 능가한다.214)
간추림
350 천사들은 하느님께 끊임없이 영광을 드리며, 다른 피조물들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에 봉사하는 영적인 피조물들이다. “천사들은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선에 협력한다.”215)
351 천사들은 그들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호위하고 있다. 그들은 특히 인간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명에 봉사한다.
352 교회는 지상 순례길에 있는 자신을 도와 주고, 모든 인간을 보호하는 천사들을 공경한다.
353 하느님께서는 당신 피조물의 다양성, 고유한 선, 그들의 상호 의존과 질서를 원하셨다. 모든 물질적인 피조물은 인류의 선익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인간은, 그리고 인간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354 피조물 안에 새겨진 법칙과, 사물들의 본성에서 나오는 관계들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모든 지혜의 근원이며 도덕의 기초이다.
제6단락 인 간
355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다”(창세 1,27). 인간은 피조물들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고(I), 인간의 고유한 본성 안에는 영신계와 물질계가 결합되어 있으며(II),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고(III),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과의 친교에 참여하게 하셨다(IV).
I. “하느님의 모습대로”
356 보이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오직 인간만이 “창조주를 알아 사랑할 수 있으며”,216) 인간만이 “이 지상에서 그 자체를 위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신 유일한 피조물”217)이고, 오직 인간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인간은 바로 이 목적 때문에 창조되었으며, 이것이 인간 존엄성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어떤 이유로 당신께서는 인간에게 이처럼 위대한 존엄성을 주셨습니까?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안에서, 비길 데 없는 당신의 사랑을 통해 피조물을 바라보시고, 당신 피조물에 반하셨던 그 사랑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그 사랑 때문에 그를 창조하셨으며, 그 사랑 때문에 그를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당신의 영원한 ‘선’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218)
357 인간 하나하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녔으므로, 존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이다.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체가 되며,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다른 인격들과 친교를 이룰 수 있다. 은총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의 창조주와 계약을 맺고,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신앙과 사랑의 응답을 드리도록 부름을 받았다.
358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셨다.219)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모든 피조물을 봉헌하도록 창조되었다.
도대체 이런 배려를 받아 창조되는 존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위대하고 경이로운 동물, 하느님 보시기에 피조물 전체를 능가하는 인간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하늘과 땅, 바다와 모든 창조계가 마련되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의 구원을 너무도 중히 여기시어 당신의 외아들마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높이 올리시어, 당신 오른편에 앉게 하시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하셨습니다.220)
359 “사실,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진다.”221)
인간의 기원은 아담과 그리스도 두 사람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첫 사람 아담은 생명 있는 존재가 되었고,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나중 아담을 통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분에게서 생명을 주는 영혼을 받았습니다.……두 번째 아담은 첫 번째 아담을 지을 때 그에게 당신의 모습을 새겨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당신의 모습으로 만드신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하여 나중 아담은 첫 번째 아담의 본성과 이름을 취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 전자는 시작이 있고 후자는 끝이 없습니다. 맨 나중 ‘사람’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듯이, 참으로 첫 ‘사람’이십니다. “나는 시작이요 마침이다.”222)
360 그 공통 기원으로 인류는 하나의 단일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셨기”(사도 17,26)223) 때문이다.
창조주에게서 비롯되는 우리 기원의 단일성 안에서……, 물질적인 육체와 영적인 영혼으로 이루어진 본성의 단일성 안에서, 모두가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목적의 단일성 안에서, 이 세상 삶에서 이룩할 사명의 단일성 안에서, 모든 사람이 천부의 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는 대지, 곧 주거의 단일성 안에서, 하느님 자신, 곧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초자연적 목적의 단일성 안에서, 이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의 단일성 안에서……, 모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단일성 안에서, 이 모든 것 안에서 인류를 바라본다는 것은 놀라운 장관입니다.224)
361 개인과 문화와 민족의 풍부한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 “인간의 유대와 사랑의”225) 이 법은 우리에게 모든 인간이 진정한 형제라는 것을 확신하게 한다.
II.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
362 하느님의 모습대로 지어진 ‘인간’은 육체적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창세 2,7)는 성서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상징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전체적인 인간을 원하신 것이다.
363 영혼이라는 말은 성서에서 종종 인간의 생명이나226) 인격 전체를 의미한다.227) 그러나 이 말은 또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것,228) 가장 가치 있는 것을229) 가리킨다. 그리고 특히 인간은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영혼’은 인간의 영적 근원을 가리킨다.
364 인간의 육체는 ‘하느님 모습’의 존엄성에 참여한다. 그것이 인간의 육체인 것은 정확히 말해서 영혼을 통하여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령의 성전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 전체이다.230)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는 인간은 그 육체적 차원에서도 이미 물질 세계의 요소들을 그 안에 집약하고 있다. 그러므로 물질 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그 정점에 도달하며, 인간을 통해서 자유로이 자신들의 창조주를 찬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육체적 생명을 천시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셨고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될 그 육체를 선한 것으로 여기고 존중해야 한다.231)
365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은 영혼을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해야 할 만큼 심오하다.232) 말하자면 물질로 구성된 육체가 인간 육체로서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영혼 때문이다. 인간 안의 정신과 물질은 결합된 두 개의 본성이 아니라, 그 둘의 결합으로 하나의 단일한 본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366 교회는 각 사람의 영혼이 ─ 부모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고,233) 불멸한다고 가르친다.234) 죽음으로 육체와 분리되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며, 부활 때 육체와 다시 결합될 것이다.
367 때때로 영혼은 ‘영’과 구별되어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심)령과 영혼과 육체가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흠 없이”(1데살 5,23) 지켜지기를 기도한다. 교회는 이러한 구분이 영혼을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235) ‘영’이란 인간이 그 창조 때부터 자신의 초자연적인 목표를 향하고 있음을 의미하며,236) ‘영혼’은 은총으로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수 있음을 의미한다.237)
368 교회의 영적인 전통은 또한 성서에서 ‘존재의 심연’(“그들의 가슴 속에”, 예레 31,33)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는 마음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이 마음 속에서 인간은 하느님을 선택하거나 포기할 것을 결정한다.238)
III.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평등과 차이
369 하느님께서 원하신 대로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 곧 인격에서는 완전히 동등하지만, 그 존재의 특성에서는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를 하느님께서는 바라셨다. ‘남자됨’ 또는 ‘여자됨’은 하나의 선이고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직접 받은, 빼앗길 수 없는 존엄을 지니고 있다.239)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 그들은 ‘남자됨’과 ‘여자됨’으로 창조주의 지혜와 선을 반영한다.
370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모습이 아니시다. 그분께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시다. 하느님께서는 성을 구별할 여지가 없는 순수한 영(靈)이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의 ‘완전성’은 하느님의 무한하신 어떠한 완전성, 곧 어머니의 완전성,240) 아버지와 남편의 완전성을 반영한다.241)
‘서로를 위한 존재’, ‘두 존재의 결합’
371 남자와 여자를 함께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둘이 서로를 위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다. 다양한 성서 구절에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점을 깨우쳐 준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의 일을 거들 짝을 만들어 주리라”(창세 2,18). 어떤 짐승도 그의 ‘거들 짝’이 되지 못하였다.242) 하느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를 뽑아서 ‘만드신’ 여자를 그에게 데려다 주셨을 때, 남자는 감탄의 외침과, 사랑과 일치의 탄성을 지른다.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남자는 여자가 자신과 동등한 인간성을 지닌 또 다른 ‘나’임을 발견한다.
372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위한 존재’로서 창조되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반쪽’으로나 ‘불완전’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서로 인격적으로 일치하도록 만드셨으며, 이 일치 안에서 각자는 상대를 위한 ‘도움’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격적으로는 동등하면서(“내 뼈에서 나온 뼈요…….”) 동시에 남성과 여성으로서 서로를 보완하기 때문이다.243) 하느님께서는 혼인을 통해 그들을 “한 몸”(창세 2,24)이 되게 하심으로써 인간 생명을 전달할 수 있게 하신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라”(창세 1,28). 후손들에게 인간 생명을 전달함으로써 배우자와 부모로서의 남녀는 각각 창조주의 일에 협력한다.244)
373 하느님의 계획에서 남녀는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땅을 “지배할”245) 소명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지배는 독단적이고 파괴적인 정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지혜 11,24) 창조주의 모습을 닮은 남자와 여자는, 다른 피조물들을 위한 하느님의 섭리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
IV. 낙원의 인간
374 첫 번째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고, 자기 자신과 주변의 피조물들과 조화를 이루게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될 새로운 창조의 영광만이 이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이었다.
375 교회는 신약성서와 성전의 빛에 비추어, 성서의 상징적 표현을 권위 있게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는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가르친다.246) 이 원초적인 거룩함의 은총이란 바로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247)
376 이 은총의 빛으로 인생의 모든 차원은 견고해진다. 인간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동안에는 죽지도 않고248) 고통도 당하지 않았다.249) 인간의 내적인 조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조화,250) 그리고 첫 부부와 다른 피조물들 사이의 조화, 우리는 이 모두를 한 마디로 ‘원초적인 의로움’[原義]이라 부른다.
377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 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251)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
378 하느님께서 사람을 낙원에 살게 하셨다는 말은 하느님과 사람이 얼마나 친근했는지를 나타낸다.252) 사람은 그 곳에서 “동산을 돌보며”(창세 2,15) 사는데, 그 노동은 고역이 아니다.253) 오히려 보이는 피조물을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남자와 여자가 하느님께 협력하는 것이다.
379 우리 첫 조상들은 하느님의 계획이 인간을 위하여 마련한 원초적 의로움의 이 모든 조화를 죄로 잃게 된다.
간추림
380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사람을 아버지 모습대로 지으시어 우주 만물을 돌보게 하시고 창조주이신 아버지만을 섬기며 모든 조물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254)
381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 ─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형상”(골로 1,15) ─ 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다. 이는 성자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아들이 되시게 하기 위해서이다.255)
382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256)를 이룬다. 신앙 교리는 영적이며 불멸하는 영혼을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383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외롭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시초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셨다’(창세 1,27). 그들의 공동 생활은 인간들이 서로 나누는 친교의 최초 형태이다.”257)
384 계시는 범죄 이전 남자와 여자가 누리던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의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곧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에서 낙원 생활의 행복이 흘러 나오는 것이다.
제7단락 타 락
385 하느님께서는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모든 업적도 선하다. 그러나 아무도 고통의 경험과, 자연계의 ─ 피조물 고유의 한계성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 악을 피할 수 없으며, 특히 윤리악의 문제는 피할 수 없다.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악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찾았으나 해답을 찾지 못하였다.”258)고 말하였으며, 마침내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섬으로써 그의 고통스러운 탐구는 실마리를 찾게 된다. “악의 신비”(2데살 2,7)는 “경외의 신비”259)로써만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사랑의 계시는 만연되어 있는 악과 동시에 넘쳐흐르는 은총을 보여 준다.260) 그러므로 우리가 악의 기원 문제를 숙고할 때, 악을 홀로 정복하신 그분께 우리 신앙의 눈길을 고정시켜야 한다.261)
I.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넘쳐 흐른다
죄의 실재
386 죄는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한다. 이를 무시하거나 또는 이 모호한 실재에 다른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죄가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먼저 인간과 하느님의 심오한 관계를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관계를 떠나서는, 계속 인간의 삶과 역사를 짓누르면서 하느님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죄악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387 죄의 실재, 특히 원죄의 실재는 오로지 하느님 계시의 빛으로 밝혀진다. 하느님께 대한 계시가 없다면 우리는 죄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단지 죄를 성장의 결함, 심리적 나약함, 어떤 잘못, 또는 부적합한 사회 구조에서 나오는 필연적 결과 등으로 설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앎으로써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주신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죄임을 이해하게 된다.
원죄 - 신앙의 본질적인 진리
388 계시가 진행됨에 따라 죄의 실재도 밝혀진다. 구약의 하느님 백성 역시 인간 조건의 고통을 창세기에 나오는 타락의 이야기에 비추어 보기는 했지만, 그들은 이러한 이야기의 궁극적 의미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이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빛에서만 명백해진다.262) 죄의 원천인 아담을 알기 위해서는 은총의 원천으로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세상의 구원자를 드러내 보이시어 “죄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시는”(요한 16,8) 분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파라클리토 성령이시다.
389 원죄 교리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시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이면’(裏面)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진 교회는263) 그리스도의 신비가 손상되면 원죄의 계시 역시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타락 이야기를 읽으려면
390 인류의 타락 이야기(창세 3장)는 상징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인간 역사의 시초에 일어났던 사실, 곧 원초적인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264) 계시는 우리의 첫 조상들이 자유로이 범한 원죄가 온 인류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신앙의 확신을 우리에게 준다.265)
II. 천사들의 타락
391 우리의 첫 조상들이 불순명을 선택하게 된 배후에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유혹의 목소리가 있었다.266) 그 목소리는 질투심 때문에 그들을 죽음에 빠지게 하였다.267) 성서와 교회의 성전(聖傳)은 그 목소리에서 사탄 또는 악마라 불리는 타락한 천사를 본다.268) 교회는 그가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천사였다고 가르친다. “악마와 모든 마귀들은 하느님께서 본래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그들 스스로 악하게 되었다.”269)
392 성서는 이 천사들의 죄에 대해 말한다.270) 이 ‘타락’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철저하게 그리고 결정적으로 거부한 이 영적 피조물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생겨난 것이다. 우리 첫 조상들에게 “너희가 하느님처럼 될 것이다.”(창세 3,5)고 한 유혹자의 말에 바로 이 반역을 엿볼 수 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고”(1요한 3,8), “거짓말쟁이이며 거짓말의 아비”(요한 8,44)이다.
393 천사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참회가 없는 것처럼, 그들도 타락한 뒤에는 참회가 없다.”271)
394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살인자”(요한 8,44)라고 부르셨던 자,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포기하도록 예수님까지도 유혹한 악마의 해로운 영향을 성서는 증언한다.272) 그러나 “악마가 저질러 놓은 일을 파멸시키려고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셨던 것이다”(1요한 3,8). 악마가 저지른 일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은 바로 인간을 하느님께 불순명하도록 거짓말로 유혹한 것이었다.
395 그러나 사탄의 힘은 무한하지 못하다. 그는 다만 하나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는 순수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강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막지 못한다. 사탄은 하느님을 거슬러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 나라를 증오하면서 세상에서 활동한다. 인간과 사회에 영적으로 또 간접적으로는 물질적인 것에까지 막대한 피해를 끼칠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이러한 활동은 인간과 세계의 역사를 힘차고도 부드럽게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허락하신 일이다. 이러한 악마의 활동에 대한 하느님의 허락은 하나의 커다란 신비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로마 8,28).
III. 원 죄
자유에 대한 시험
396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고 당신과 친교를 이루게 하셨다. 영적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께 자유롭게 순명함으로써만 이 친교를 누리며 살 수 있다. 인간에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는 금지령은 이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 2,17).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세 2,17)는 피조물인 인간이 자유로이 인정하고 신뢰로써 지켜야 할, 넘어서는 안 되는 한계를 상징적으로 환기시킨다. 창조주께 속해 있는 인간은 창조 질서와 자유의 사용을 규제하는 윤리적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의 첫 범죄
397 악마에게 유혹을 받은 인간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창조주를 향한 신뢰가 죽게 버려 두었으며,273) 자신의 자유를 남용함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첫 범죄가 성립하는 것이다.274) 그 후의 모든 죄는 하느님께 대한 하나의 불순종이 되고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의 결핍이 될 것이다.
398 이 죄로 인간은 하느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좋아함과 동시에 하느님을 무시하였다. 곧, 인간은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거슬렀고, 피조물로서 자신의 처지가 요구하는 것을 거슬렀으며, 결국은 자신의 선익을 거슬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275) “하느님처럼 되기를”276) 원하였다.
399 성서는 이러한 첫 불순종의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 준다. 아담과 하와는 곧 원초적 거룩함의 은총을 잃는다.277) 그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특권에 집착하시는 분이라고 잘못 생각하고278)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279)
400 그들이 원초적 의로움으로 누리던 조화는 파괴되었으며, 육체에 대한 영혼의 영적 지배력이 손상을 입게 되고,280)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갈등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281) 그들의 관계는 탐욕과 지배욕으로 얼룩지게 되었다.282) 피조물들과 이루는 조화는 깨졌다. 보이는 피조물은 인간에게 낯설고 적대적인 것이 되었다.283) 인간 때문에 피조물은 “멸망의 사슬에”(로마 8,21) 매이게 되었다.284) 이 불순종의 사건을 두고 인간은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고285) 분명히 예고한 결과가286)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죽음이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287)
401 이러한 첫 범죄 이후로 이 세상에는 죄가 범람하게 된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형제 살해를288) 비롯하여, 죄로 인한 전반적인 타락이289)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도 죄는 자주 등장하는데, 특히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대한 불충실과 모세 율법의 위반이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이후에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죄는 무수히 나타난다.290) 성서와 교회의 성전은 끊임없이 인간 역사 안에 존재하는 죄와 그 보편성을 환기시킨다.
하느님의 계시로 우리에게 알려진 이 사실은 우리 경험과 일치한다. 과연 인간은 제 마음을 살펴볼 때, 자신이 악에 기울어져 있고 선하신 창조주에게서는 올 수 없는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가끔 하느님을 자신의 근원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궁극 목적을 향한 당연한 질서마저 파괴하고, 그와 동시에 자신과 이웃과 모든 피조물과 이루는 조화도 깨뜨렸다.291)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미치는 결과
402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에 연관된다.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로마 5,19)고 말한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죄와 죽음의 보편성에 대비시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보편성을 내세운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로마 5,19).
403 바오로 사도의 뒤를 이어 교회는, 인간을 짓누르는 엄청난 비참이나 죄와 죽음으로 기울어지는 인간의 경향을 아담의 범죄 사실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영혼의 죽음’인 죄에 물들어, 죄가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과도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항상 가르쳐 왔다.292) 신앙의 이 확신으로 교회는, 인격적으로 아직 죄를 범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죄의 사함을 위한 세례를 주는 것이다.293)
404 어떻게 아담의 죄가 그 후손들의 죄가 될 수 있는가? 모든 인류는 “마치 한 사람의 한 몸과 같이”294) 아담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단일성’으로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연관되듯이 아담의 죄와 연관된다. 그러나 원죄의 전달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 아담이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을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하여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계시를 통하여 알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지은 죄는 개인의 죄이지만, 그 죄가 타락한 상태로 전달될 인간 본성에 영향을 미쳤다.295) 이 죄는 인간 번식을 통하여, 곧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인간 본성의 전달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전해질 것이다. 이 때문에 원죄를 유비적으로 ‘죄’라고 부르는 것이다. 원죄는 ‘범한’ 죄가 아니라 ‘짊어진’ 죄이며, 행위가 아니라 상태이다.
405 원죄는 비록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기는 하지만,296) 어떤 아담의 후손에게도 개인의 잘못이라는 성격을 가지지는 않는다. 원초적 거룩함과 의로움은 잃었지만, 인간 본성이 온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 인간 본성이 그 본연의 힘에 손상을 입고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세력에 휘둘리며 죄에 기우는 것이다(악으로 기우는 이 경향을 ‘탐욕’이라고 부른다). 세례는 그리스도 은총의 생명을 줌으로써 원죄를 없애고 인간을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지만, 약해지고 악으로 기우는 인간 본성에 미친 결과는 인간 안에 집요하게 남아서 영적인 싸움을 치르게 한다.
406 원죄의 전달에 관한 교회의 교리는 5세기 펠라지우스 이단에 반대하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사색으로부터 특히 자극을 받았고, 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개혁에 대항하여 세부적으로 확정되었다. 펠라지우스는 인간이 하느님 은총의 필연적인 도움 없이 자신의 자유 의지의 자연적 힘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담의 죄의 영향을 단순히 나쁜 표양 정도로 축소시켰다. 이와는 반대로 프로테스탄트의 초기 개혁자들은, 인간은 원조의 죄로 근본적으로 타락했으며 그의 자유는 소멸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인간이 저마다 물려받은 죄와 악으로 기우는 경향(탐욕)을 동일시하여, 이 경향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는 529년 제2차 오랑주 공의회와297)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298) 특히 원죄에 관하여 계시된 내용의 의미를 밝혔다.
힘든 싸움
407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교리와 관련된 원죄 교리는 세상에서 인간의 상황과 행위를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비록 인간이 자유롭다 해도 원조들의 죄로 악마는 인간에게 어떤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원죄는 “죽음의 지배력을 지닌 존재, 곧 ‘악마’의 권세에 예속하게 만들었다.”299) 인간 본성이 손상되어 악으로 기울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교육, 정치, 사회,300) 그리고 도덕 분야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408 원죄와 인간의 모든 개인적인 죄의 결과들은, 요한 사도가 “세상의 죄”(요한 1,29)라고 표현하듯이 세상 전체를 죄스러운 처지에 빠지게 한다. 이 표현은 또한 인간들의 죄로 생겨난 공동체적 상황과 사회 구조들이 개개인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의미한다.301)
409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온 세상”(1요한 5,19)의302) 비극적 상황에서 인간의 삶은 일종의 싸움이다.
세계 인류 역사는 암흑의 세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악전 고투로 점철되어 있으며, 이 투쟁은 태초부터 시작되어 주님의 말씀대로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싸움에 말려든 인간은 선에 머물기 위하여 끝없이 싸워야 하고, 하느님의 도움과 비상한 노력 없이는 자신의 온전성을 획득할 수 없다.303)
IV. “인간을 죽음의 세력 아래 버려 두지 않으셨다”
(감사기도 제4양식)
410 인간이 타락한 뒤에도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버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를 부르시어304) 악을 이기고, 타락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는 것을 신비로운 방법으로 말씀하신다.305) 창세기의 이 구절은 ‘구속자 메시아’에 대한 첫 예고, 곧 뱀과 여인 사이의 싸움과 이 싸움에서 마침내 이 여인의 후손이 승리하리라는 것을 처음 알리는 것이어서 ‘원복음’(原福音)이라고 부른다.
411 그리스도교 전승은 이 대목을 “새로운 아담”의306) 예고라고 본다. 그분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필립 2,8) 아담의 불순종을 넘치게 보상한다.307) 한편 많은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은 이 ‘원복음’에서 예고된 ‘여인’을 “새로운 하와”인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로 생각한다. 마리아는 최초로 그리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거두신 죄에 대한 승리의 은혜를 입은 분이다. 그분은 원죄에 전혀 물들지 않았고,308) 지상 생애 동안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다.309)
412 그렇다면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첫 인간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막지 않으셨던가? 대 레오 성인은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은 마귀가 질투로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을 우리에게 주었다.”310) 그리고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도 이렇게 말한다.“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에도 더 높은 목적을 향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더 큰 선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악을 허락하신다. 이 때문에 바오로 사도는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말했으며, 부활 찬송(Exultet)은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하고 노래한다.”311)
간추림
413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다”(지혜 1,13;2,24).
414 사탄 또는 악마와 모든 마귀들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획에 봉사하기를 거부하여 타락한 천사들이다. 하느님을 거스르는 그들의 선택은 결정적인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께 대한 자신들의 반역에 인간을 끌어들이고자 애쓴다.
415 “하느님께서 의롭게 창조하신 인간은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제 자유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을 떠나서 제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312)
416 첫 인간으로서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께 받은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렸다.
417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첫 범죄로 후손들에게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한 손상된 인간 본성을 전해 주었다. 이 상실을 ‘원죄’라 한다.
418 원죄의 결과로 인간 본성은 그 힘이 약해져서,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죄로 기울게 되었다(이러한 경향을 ‘탐욕’이라 한다).
419 “그러므로 우리는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라, 원죄는 ‘모방이 아닌 번식으로’ 인간 본성과 함께 전달되며,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13)
420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죄에 대한 승리는, 죄가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준다. “죄가 많아진 곳에 은총은 더욱더 넘쳐흘렀습니다”(로마 5,20).
421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된다고 믿는다. 죄의 노예 상태에 떨어졌으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악의 권세를 쳐부수시고 해방시키신 이 세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변혁되고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314)
1. 로마 10,9; 1고린 15,3-5 등 참조.
2.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예비신자 교리교육」, 5, 12: Opera, 1권, G.C. Reischl 편(모나코 1848), 150면(PG 33, 521-524).
3. 「로마 교리서」, 1, 1, 4: P. Rodriguez 편(바티칸-팜플로나 1989), 20면.
4. 성 이레네오, 「사도들의 설교에 관한 논증」, 100: SC 62, 170.
5. 「로마 교리서」, 1, 1, 4: P. Rodriguez 편(바티칸-팜플로나 1989), 20면.
6. 성 암브로시오, 「신경 해설」, 8: CSEL 73, 10-11(PL 17, 1196) 참조.
07. 「옛 교회의 신경」: DS 1-64 참조.
08. DS 75-76 참조.
09. 제11차 톨레도 공의회: DS 525-541.
10.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DS 800-802.
11. 제2차 리옹 공의회: DS 851-861.
12. 트리엔트 신앙 고백: DS 1862-1870.
13. DS 71-72 참조.
14.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 AAS 60(1968), 433-445면.
15. 성 암브로시오, 「신경 해설」, 7: CSEL 73, 10(PL 17, 1196).
16. 성 암브로시오, 「신경 해설」, 1: CSEL 73, 3(PL 17, 1193).
1. 「로마 교리서」, 1, 2, 6: P. Rodriguez 편(바티칸-팜플로나 1989), 23면.
2. 「로마 교리서」, 1, 2, 8: P. Rodriguez 편(바티칸-팜플로나 1989), 26면.
3. 필립 2,10-11 참조.
4. 마르 12,29-30 참조.
5. 마르 12,35-37 참조.
6.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제1장,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DS 800.
7. 판관 13,18 참조.
8. 출애 3,5-6 참조.
19. 출애 32장 참조.
10. 출애 33,12-17 참조.
11. 출애 34,9 참조.
12. 이사 44,6 참조.
13. 시편 84,12(85,11) 참조.
14. 신명 7,9 참조.
15. 지혜 13,1-9 참조.
16. 시편 113(115),15 참조.
17. 지혜 7,17-21 참조.
18. 요한 17,3 참조.
19. 신명 4,37; 7,8; 10,15 참조.
20. 이사 43,1-7 참조.
21. 호세 2장 참조.
22. 호세 11,1 참조.
23. 이사 49,14-15 참조.
24. 이사 62,4-5 참조.
25. 에제 16장; 호세 11장 참조.
26. 1고린 2,7-16; 에페 3,9-12 참조.
27. 성녀 잔 다르크, 「판결문」: Proces de condamnation, P. Tisset-Y. Lanhers 편, 1권(파리 1960), 280면, 288면.
28. 마태 5,29-30; 16,24; 19,23-24 참조.
29. 성 니콜라스 폰 플뤼에, Bruder-Klausen-Gebet, apud R. Amschwand, Bruder Klaus. Erganzungsband zum Quellenwerk von R. Durrer(사르넨 1987), 215면.
30. 예수의 성녀 데레사, 「시집」 9: Biblioteca Mistica Carmelitana, 6권(부르고스 1919), 90면.
31. 테르툴리아누스, 「마르키온 논박」, 1, 3, 5: CCL 1, 444(PL 2, 274).
32. 성 아우구스티노, 「설교집」, 52, 6, 16: P. Verbraken 편: Revue Benedictine 74(1964), 27(PL 38, 360).
33. 아를르의 성 체사리우스, 「신경 해설」(강론 9): CCL 103, 47.
34. 비질리오, 「신앙 고백」(552): DS 415 참조.
35. 성직자성, 「교리교육 일반 지침」, 43: AAS 64(1972), 123면.
36. 성직자성, 「교리교육 일반 지침」, 47: AAS 64(1972), 125면.
37.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4: DS 3015.
38. 신명 32,6; 말라 2,10 참조.
39. 2사무 7,14 참조.
40. 시편 67,6(68,5) 참조.
41. 이사 66,13; 시편 130(131),2 참조.
42. 에페 3,14-15; 이사 49,15 참조.
43. 시편 26(27),10 참조.
44. 니케아 신경: DS 125.
45.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46. 창세 1,2 참조.
47.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48. 요한 14,17 참조.
49. 요한 14,26 참조.
50. 요한 14,26; 15,26; 16,14 참조.
51. 요한 7,39 참조.
52.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53. 제6차 톨레도 공의회(638), 「삼위일체와 강생하신 구세주 성자에 대하여」: DS 490.
54. 제11차 톨레도 공의회(675), 신경: DS 527.
55.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56. 피렌체 공의회, 「그리스 교회에 대한 교령」: DS 1300-1301.
57. 성 대 레오, 교서 Quam Laudabiliter: DS 284 참조.
58. 선교 교령, 2항 참조.
59. 피렌체 공의회, 「그리스 교회에 대한 교령」(1439): DS 1302.
60. 피렌체 공의회, 「야고보파에 대한 교령」(1442): DS 1331.
61. 제2차 리옹 공의회, 「삼위일체와 가톨릭 신앙에 대한 헌장」(1274): DS 850.
62. 1고린 12,4-6; 에페 4,4-6 참조.
63. 바오로 6세,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 9: AAS 60(1968), 437면.
64.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 「세 민족에 대한 파문서」, c. 1: DS 421.
65. 제11차 톨레도 공의회(675), 신경: DS 530.
66.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 제2장, 「요아킴 아빠스의 오류에 대하여」: DS 804.
67. 다마소 신앙 고백: DS 71.
68. 제11차 톨레도 공의회(675), 신경: DS 530.
69.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 제2장, 「요아킴 아빠스의 오류에 대하여」: DS 804.
70. 제11차 톨레도 공의회(675), 신경: DS 528.
71. 피렌체 공의회, 「야고보파에 대한 교령」(1442): DS 1330.
72. 피렌체 공의회, 「야고보파에 대한 교령」(1442): DS 1331.
73.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강론집」, 40, 41: SC 358, 292-294(PG 36, 417).
74. 「성무일도」, 제2·4주간 주일 제2저녁기도 찬미가, 표준판, 3권(바티칸 1973), 684면. 931면; 4권(바티칸 1974), 632면과 879면.
75. 선교 교령, 2-9항 참조.
76.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 「세 민족에 대한 파문서」, c. 1: DS 421 참조.
77. 피렌체 공의회, 「야고보파에 대한 교령」(1442): DS 1331.
78. 1고린 8,6 참조.
79.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553), 「세 민족에 대한 파문서」, c. 1: DS 421.
80. 요한 6,44 참조.
81. 로마 8,14 참조.
82. 요한 17,21-23 참조.
83. 성삼의 복자 엘리사벳, 「삼위일체에 오름」: Ecrits spirituels, 50, M.M. Philipon 편(파리 1949), 80면.
84. 요한 14,26 참조.
85.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86. 성 아우구스티노, 「삼위일체론」, 15, 26, 47: CCL 50A, 529(PL 42, 1095).
87. 바오로 6세,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 9: AAS 60(1968), 436면 참조.
88. “퀴쿰퀘” 신경: DS 75.
89. 창세 1,1; 요한 1,3 참조.
90. 마태 6,9 참조.
91. 1고린 1,18 참조.
92. 예레 32,17; 루가 1,37 참조.
93. 예레 27,5 참조.
94. 에스 13,9; 잠언 21,1; 토비 13,2 참조.
95. 마태 6,32 참조.
96.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1, q. 25, a. 5, ad 1: Ed. Leon. 4, 297.
97. 2고린 12,9; 필립 4,13 참조.
98. 「로마 교리서」, 1, 2, 13: P. Rodriguez 편(바티칸-팜플로나), 31면.
99. 창세 18,14; 마태 19,26 참조.
100. 「로마 미사 전례서」, 연중 제26주일 본기도, 표준판(바티칸 1970), 365면.
101. 사도신경: DS 30.
102.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103. 성직자성, 「교리교육 일반 지침」, 51: AAS 64(1972), 128면.
104. 로마 8,18-23 참조.
105. 에게리아, 「성지 순례기」, 46, 2: SC 296, 308; PLS 1, 1089-1090; 성 아우구스티노, 「입문자 교리교육」, 3, 5: CCL 46, 124(PL 40, 313) 참조.
106.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계시에 대하여」, c. 1: DS 3026 참조.
107. 사도 17,24-29; 로마 1,19-20 참조.
108. 이사 43,1 참조.
109. 창세 15,5; 예레 33,19-26 참조.
110. 이사 44,24 참조.
111. 시편 103(104) 참조.
112. 잠언 8,22-31 참조.
113.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114. 비잔틴 전례, 성령 강림 대축일 저녁기도의 마침기도: Penthkostarion (로마 1883), 408면.
115. 시편 32(33),6; 103(104),30; 창세 1,2-3 참조.
116.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2, 30, 9: SC 294, 318-320(PG 7, 822).
117.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4, 20, 1: SC 100, 626(PG 7, 1032).
118.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에 대하여」, c. 5: DS 3025.
119. 성 보나벤투라, 「제2명제집」, dist. 1, p. 2, a. 2, q. 1, concl: Opera omnia, 2권(클라라 아쿠아 1885), 44면.
12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명제집 주해」, 서문: Opera omnia, 8권(파리 1873), 2면.
121.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1: DS 3002.
122. 성 이레네오, 「이단 반론」, 4, 20, 7: SC 100, 648(PG 7, 1037).
123. 선교 교령, 2항.
124. 지혜 9,9 참조.
125.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1: DS 3002 참조.
126.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에 대하여, cc. 1-4: DS 3023-3024 참조.
127.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제2장, 「가톨릭 신앙에 관하여」: DS 800; 제1차 바티칸 공의회, Dei Filius,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에 대하여, c. 5: DS 3025.
128. 안티오키아의 성 테오필루스, 「아우톨리쿠스에게」, 2, 4: SC 20, 102 (PG 6, 1052).
129. 시편 50(51),12 참조.
130. 창세 1,3 참조.
131. 2고린 4,6 참조.
132. 창세 1,26 참조.
133. 시편 18,3-6(19,2-5) 참조.
134. 욥 42,3 참조.
135. 성 대 레오, 교서 Quam Laudabiliter: DS 286; 제1차 브라가 공의회, 「프리칠리아누스에 대한 특별 파문서」, 5-13: DS 455-463;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제2장,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DS 800; 피렌체 공의회, 「야고보파에 대한 교령」: DS 1333;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1: DS 3002 참조.
136. 집회 43,30 참조.
137.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3, 6, 11: CCL 27, 33(PL 32, 688).
138.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1: DS 3003.
139. 이사 10,5-15; 45,5-7; 신명 32,39; 집회 11,14 참조.
140. 시편 21(22); 31(32); 34(35); 102(103); 137(138) 등 참조.
141. 마태 10,29-31 참조.
142. 창세 1,26-28 참조.
143. 골로 1,24 참조.
144. 1고린 3,9; 1데살 3,2 참조.
145. 골로 4,11 참조.
146. 1고린 12,6 참조.
147. 사목 헌장, 36항.
148. 마태 19,26; 요한 15,5; 필립 4,13 참조.
149.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1, q. 25, a. 6: Ed Leon. 4, 298-299 참조.
150.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이교도 논박」, 3, 71: Ed Leon. 14, 209-211 참조.
151. 성 아우구스티노, 「자유 의지론」, 1, 1, 1: CCL 29, 211(PL 32, 1221-1223);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1-2, q. 79, a. 1: Ed. Leon. 7, 76-77 참조.
152. 성 아우구스티노, 「교리 요강, 신앙과 희망과 사랑」, 3, 11: CCL 46, 53(PL 40, 236).
153. 토비 2,12-18(대중라틴말성서) 참조.
154. 로마 5,20 참조.
155.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대화」, 138: G. Cavallini 편(로마 1995), 441면.
156. 마르가리타 로퍼, 「알링톤의 알리치아에게 보낸 편지」(1534.8.): 「토마스 모어 경의 서신」, E.F. Rogers 편(프린스턴 1947), 531-532면.
157. 노리치의 줄리언, 「하느님 사랑의 계시」 13, 32: 「노리치의 줄리언에게 바치는 책」, E. Colledge-J. Walsh 편, 2권(토론토 1978), 426면과 422면.
158. 창세 2,2 참조.
159. 교육성, 교령(1914.7.27.): DS 3624 참조.
160. 마태 6,26-34 참조.
161. 시편 54,24(55,23) 참조.
162. 사도신경: DS 30.
163.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DS 150.
164. 시편 113(115),16 참조.
165. 시편 18,2(19,1) 참조.
166. 시편 113(115),16 참조.
167.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제1장,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DS 800.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1: DS 3002; 바오로 6세,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 8: AAS 60(1968), 436면 참조.
168. 성 아우구스티노, 「시편 해설」, 103, 1, 15: CCL 40, 1488(PL 37, 1348-1349).
169. 비오 12세, 회칙 Humani generis: DS 3891 참조.
170. 루가 20,36 참조.
171. 다니 10,9-12 참조.
172. 욥 38,7 참조. 여기에서 천사들은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
173. 창세 3,24 참조.
174. 창세 19장 참조.
175. 창세 21,17 참조.
176. 창세 22,11 참조.
177. 사도 7,53 참조.
178. 출애 23,20-23 참조.
179. 판관 13장 참조.
180. 판관 6,11-24; 이사 6,6 참조.
181. 1열왕 19,5 참조.
182. 루가 1,11.26 참조.
183. 마태 1,20; 2,13.19 참조.
184. 마르 1,13; 마태 4,11 참조.
185. 루가 22,43 참조.
186. 2마카 10,29-30; 11,8 참조.
187. 마태 26,53 참조.
188. 루가 2,8-14 참조.
189. 마르 16,5-7 참조.
190. 루가 2,10 참조.
191. 사도 1,10-11 참조.
192. 마태 13,41; 24,31; 루가 12,8-9 참조.
193. 사도 5,18-20; 8,26-29; 10,3-8; 12,6-11; 27,23-25 참조.
194. 「로마 미사 전례서」, 27, “거룩하시도다”, 표준판(바티칸 1970), 392면.
195. 「장례 예식서」, 50, 표준판(바티칸 1969), 23면.
196. 비잔틴 전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천사 찬미가”: 「동방과 서방의 전례」, F.E. Brightman 편(옥스퍼드 1896), 377면.
197. 마태 18,10 참조.
198. 루가 16,22 참조.
199. 시편 33,8(34,7); 90(91),10-13 참조.
200. 욥 33,23-24; 즈가 1,12; 토비 12,12 참조.
201. 성 대 바실리오, 「에우노미우스 논박」, 3, 1: SC 305, 148(PG 29, 656).
202. 창세 1,1-2,4 참조.
203. 계시 헌장, 11항 참조.
204. 교회 헌장, 36항.
205. 성 아우구스티노, 「마니교도를 논박하는 창세기론」, 1, 2, 4: PL 36, 175 참조.
206. 사목 헌장, 36항.
207. 시편 144(145),9 참조.
208. 창세 1,26 참조.
209.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태양의 노래”, 최민순 역: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글라라의 글」, 프란치스코회 한국 관구 편, 분도출판사(1985), 186-189면.
210. 히브 4,3-4 참조.
211. 예레 31,35-37; 33,19-26 참조.
212. 창세 1,14 참조.
213. 성 베네딕토, 「규칙서」, 43,3: CSEL 75, 106(PL 66, 675).
214. 「로마 미사 전례서」, 부활 성야 미사, 제1독서 후 기도, 표준판(바티칸 1970), 276면 참조.
215.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1, 114, 3, ad 3: Ed. Leon. 5, 535.
216. 사목 헌장, 12항.
217. 사목 헌장, 24항.
218.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대화」, 13: G. Cavallini 편(로마 1995), 43면.
219. 사목 헌장, 12항, 24항, 39항 참조.
220.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창세기 강론」, 2, 1: PG 54, 587-588.
221. 사목 헌장, 22항.
222.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설교집」, 117, 1-2: CCL 24A, 709(PL 52, 520).
223. 토비 8,6 참조.
224. 비오 12세, 회칙 Summi pontificatus: AAS 31(1939), 427면. 비그리스도교 선언, 1항 참조.
225. 비오 12세, 회칙 Summi pontificatus: AAS 31(1939), 426면.
226. 마태 16,25-26; 요한 15,13 참조.
227. 사도 2,41 참조.
228. 마태 26,38; 요한 12,27 참조.
229. 마태 10,28; 2마카 6,30 참조.
230. 1고린 6,19-20; 15,44-45 참조.
231. 사목 헌장, 14항.
232. 비엔 공의회(1312), 헌장 Fidei catholicae: DS 902 참조.
233. 비오 12세, 회칙 Humani generis(1950): DS 3896; 바오로 6세,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 8: AAS 60(1968), 436면 참조.
234.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1513), 칙서 Apostolici regiminus: DS 1440 참조.
235.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870), c. 11: DS 657.
236.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Dei Filius, c. 2: DS 3005; 사목 헌장, 22항 참조.
237. 비오 12세, 회칙 Humani generis(1950): DS 3891 참조.
238. 예레 31,33; 신명 6,5; 29,3; 이사 29,13; 에제 36,26; 마태 6,21; 루가 8,15; 로마 5,5 참조.
239. 창세 2,7.22 참조.
240. 이사 49,14-15; 66,13; 시편 130(131),2-3 참조.
241. 호세 11,1-4; 예레 3,4-19 참조.
242. 창세 2,19-20 참조.
243.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여성의 존엄」, 7항: AAS 80(1988), 1664-1665면 참조.
244. 사목 헌장, 50항 참조.
245. 창세 1,28 참조.
246. 트리엔트 공의회, 제5회기, 「원죄에 대한 교령」, c. 1: DS 1511 참조.
247. 교회 헌장, 2항 참조.
248. 창세 2,17; 3,19 참조.
249. 창세 3,16 참조.
250. 창세 2,25 참조.
251. 1요한 2,16 참조.
252. 창세 2,8 참조.
253. 창세 3,17-19 참조.
254. 「로마 미사 전례서」, 감사기도 제4양식, 118, 표준판(바티칸 1970), 467면.
255. 에페 1,3-6; 로마 8,29 참조.
256. 사목 헌장, 14항.
257. 사목 헌장, 12항.
258. 성 아우구스티노, 「고백록」, 7, 7, 11: CCL 27, 99(PL 32, 739).
259. 1디모 3,16 참조.
260. 로마 5,20 참조.
261. 루가 11,21-22; 요한 16,11; 1요한 3,8 참조.
262. 로마 5,12-21 참조.
263. 1고린 2,16 참조.
264. 사목 헌장, 13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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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창세 3,1-5 참조.
267. 지혜 2,24 참조.
268. 요한 8,44; 묵시 12,9 참조.
269.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 제1장, 「가톨릭 신앙에 대하여」: DS 800.
270. 2베드 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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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마태 4,1-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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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창세 3,5 참조.
277. 로마 3,23 참조.
278. 창세 3,5 참조.
279. 창세 3,9-10 참조.
280. 창세 3,7 참조.
281. 창세 3,11-13 참조.
282. 창세 3,16 참조.
283. 창세 3,17.19 참조.
284. 창세 3,19 참조.
285. 창세 3,19 참조.
286. 창세 2,17 참조.
287. 로마 5,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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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1고린 1-6장; 묵시 2-3장 참조.
291. 사목 헌장, 1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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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 제2차 오랑주 공의회, cc. 1-2: DS 371-37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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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백주년」, 25항: AAS 83(1991), 823-824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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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1베드 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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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성 대 레오, 「설교집」, 73, 4: CCL 88A, 453(PL 54,151).
311.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3, q. 1, a. 3, ad 3: Ed. Leon. 11, 14.
312. 사목 헌장, 13항.
313. 바오로 6세,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 16: AAS 60(1968), 439면.
314. 사목 헌장, 2항: AAS 58(1966), 10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