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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16 - 크림 전쟁 이후 오스만은 1차 대전 독일편에 참전해 패하다!
1853년 러시아 제국과의 사이에서 발발한 크림 전쟁(나이팅게일 전쟁) 은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남진을 막으려는 영국과 프랑스에 사르디냐등...... 유럽 연합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승리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의 피폐화를 가속시켰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도움을 준 연합국의 요구에 따라 자국 내 기독교도들에 대한
보호 강화 및 권리 증진을 약속했고 갖가지 특혜를 주게 되지만
전투에서는 갖가지 추태를 보이며 옛날 오스만 제국이 아님을 재확인시켰습니다.
초반 시노페 해전에서 오스만 해군이 러시아에 완전히 박살난후 영국과 프랑스가 대신 싸워준
전쟁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이후 오스만 제국은 여러 차례의 개혁을 통해 나름대로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보는데 영국은 오스만 군대의 졸전에 분노합니다.
오스만군을 대신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러시아군과 싸운 것은, 임진왜란중인 1597년
정유재란에서 일본군 14만의 재침공에 대해 조선군은 병력이 3만 8천에 불과하니....
11만 7천인 명군이 "조선군을 대신해 전쟁을 떠맡았던 것" 과 비슷한 경우인가 합니다?
후대 영국 역사학자들은 영국군의 큰 피해는 같은 연합군이었던 오스만 제국군을 무시하고 무모한
전술을 구사한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했으니 결국 오스만 제국은 생각보다 잘 싸우고 활약했으나,
연합군은 이들이 밀리는 것만 보고 무시했다가 자기들 피해만 더 키웠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실제로 영프 연합군 없이 오스만과 러시아 군이 1대1로 맞선 다뉴브 전역에서 오스만 군은
5승 1무의 성적으로 러시아 군을 박살내며 왈라키아에서 축출했는데, 비록 대규모
전투는 아니었고 전장도 러시아에게 낯선 오스만 본토 코앞이고..... 러시아 군도
주력이 아니긴 했지만 유럽의 환자라 불리는 나라치고는 엄청난 저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물론 서구인들이 가졌던 문화적 편견에 비하면 생각보다 괜찮았다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오스만 제국이
건재하고 군사력이 쓸만했다는건 아니니 악조건을 버티는 오스만 제국 병사의 역량과 국가와 군대
의 역량은 엄연하게 다른 문제로 오스만 제국은 유럽의 환자였고 스스로 러시아를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러시아와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이집트 속주를 다스리던 메흐메트 알리가 독립하겠다고
오스만 제국 황제 마흐무트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내부의 위기 조차
러시아와 서방의 도움으로 넘어가는 판국이고 이 위기도 이집트를 후원한뒤 삼키려는
프랑스와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파워 게임으로 오스만이 서양 열강의 각축장이 된 것입니다.
개혁을 했지만 눈가리고 아웅인데다가 지방에는 여전히 비무슬림에 대한 차별이 만연해 다민족간
결속력이 제로였기 때문에, 강대국이 마음만 먹으면 종교나 인종 문제로 광범위한
반란을 선동해 전쟁 수행 능력을 깎아먹을 수도 있었고 오스만 제국 정부는 수입의 일부
를 관세에 의존했는데, 영국이 자유무역을 위해 관세를 내리도록 부추긴 바람에 타격을 받습니다.
돈이 없으면 상비군 유지에 타격이 가는건 당연하니 크림 전쟁만 해도 시노페 해전에서는 러시아
의 압승이었고, 육전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최후 통첩으로 후방이 불안해진 러시아가
전력을 투입하지 않았음에도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상륙 전까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압도했으니 서방 국가들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무난하게 승리했을 것입니다.
1855년 캄차카 반도 요새를 영국 해군에 점령당했던 러시아는 이후 극동해군을 보강을
해서 1905년 일본과 러일전쟁을 치루지만 또 대마도 해전에서 패배 하는데....
터키,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등 6국이 상대한 러시아를 혼자서 전쟁했다는게 놀라운데
오스만 제국은 이 때의 승리도 부질없이 20년 후 다시 쳐들어온 러시아에게 결국 참패합니다.
이렇게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잃어가던 오스만 제국은 범튀르크주의를 제창하고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일으키는등, 국내의 소수민족 및 불만 세력을 가혹하게 진압했는데,
범이슬람주의도 있었다고 하지만, 아르메니아 대학살 당시 아랍인이고 아르메니아인
무슬림 몇십여만명도 가차없이 학살했듯 되려 범튀르크주의가 범이슬람주의를 덮어버립니다.
하지만 이럼에도 오스만의 상황은 여전히 유럽과 러시아에게 뒤처져 있었으니.... 가뜩이나 인구가
1914년 1,852만에 불과하여 유럽, 러시아 보다 적은 데다가 경제 수준도 굉장히 떨어졌습니다.
사실 1830년대 부터 시작된 탄지마트 등 여러가지 개혁, 근대화 정책을 통해 의복, 제도 등은
수도 코스탄티니예를 중심으로 진작 서구화 되었으니, 지리적으로 서유럽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보수적 이슬람 세력들의 반대와 방해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과의 교류, 튤립 시대를 거치면서 근대 문물들과 서구 문화는 예전부터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이미 18세기 말에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 에서 오스만 제국 최초의 오페라 공연이 열렸으며,
멸망하기 직전 서구화에 올인했던 크림 칸국 보다는 시기가 다소 늦지만
탄지마트 자체가 양무운동(1860), 메이지 유신(1868) 보다 시작이 수십년 앞선 것입니다.
이외에도 철도 부설, 서구식 군제 개편과 서유럽산 무기 도입, 무장등 물질적인 근대화의 속도는
빨랐으니 서구 열강들 보다는 다소 느리긴 했지만 전근대적인 무장이었을거라는
일부의 편견과는 달리 19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군의 무장 자체는 충실히 근대화되고 있었습니다.
뒤에 나올 공군은 물론이고 당대에 극소수 국가들만 보유하고 있던 잠수함도 도입할
정도로 군 현대화에 열의를 보였으며..... 19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군의
문제는 무장의 전근대성 보다는 장교진의 전문성 부진, 전술 문제가 더 컸습니다.
그러나 산업화가 미진해 경제는 1차 산업 농업에 여전히 의존하다 보니 다른 산업은 굉장히 낙후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게다가 많은 비용이 드는 개혁을 무리할 정도로 강행하다 보니 재정 적자가
심할수밖에 없고 이를 메우려고 국민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 제국의 국민들은 높은 세금에 시달립니다.
압뒬하미트 2세는 미트하트 헌법을 폐지하고 전제군주제를 부활시켜 독재를
하고 있었는데, 1908년 청년 튀르크당 장교들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압뒬하미트 2세는 헌법과 입헌군주제 부활을 선언하고는 이듬해 퇴위합니다.
동생 메흐메트 5세가 즉위했으나..... 이미 실권은 쿠데타 세력들의 정당인
통일진보 위원회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혁명으로 혼란스러워진
오스만의 상황을 보고 오스만의 영토를 노리는 새로운 세력들이 나타납니다.
1908년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이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을 틈타 명목상 오스만 영토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정식으로 자국 영토로 합병했으며, 1911년 제국주의 열강 중
이탈리아 왕국이 오스만 제국령 리비아를 침공해 리비아와 도데카니사 제도를 빼앗아갑니다.
급기야 1912년에는 오스만 제국에게서 독립한 나라들인 세르비아 왕국과 불가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 몬테네그로 왕국이 발칸 동맹을 체결하여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를 노리고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들이 지배하던 나라
들 한테 패하는 추태를 보이며 에노스-미디아 선 서쪽의 유럽 영토를 토해내는
굴욕의 정점을 찍었는데, 그나마 발칸 동맹국들끼리 싸운 제2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의 뒤통수를 치며 에디르네를 위시로 한 동트라키아를 회복하는데는 성공합니다.
발칸전쟁에서 공을 쌓은 이스마일 엔베르라는 군인이 1913년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고
전쟁부 장관이 되어 술탄을 무력화하고 제국의 실권자로 군림하였으며 그후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 접근하고,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해 10월 29일 동맹국 측에 참전을 결정합니다.
전쟁이 발발할 당시 오스만 제국은 이탈리아 처럼 참전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여론이 친영파와 친독파로 나뉘어 싸우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근대식 해군 양성을
위해 영국에 드레드노트급 전함 및 다수의 군함을 발주해 인수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군함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대영제국의 해군상 처칠이 먹튀를 하는 바람에 여론이 들끓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중립을 지키고 있었으나 영국 지중해 함대에 쫓겨 코스탄티니예로 피난와 있던 독일 군함
2척을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오스만에게 무상 양도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하는데, 정작
오스만은 무상 양도에 대해 인정한 적도 없고 양도받은 군함도 장교와 수병 전부 독일인이었습니다.
사실상 선적만 오스만으로 옮겼던 셈인데.... 이 말만 오스만 소속이지 사실상
독일 제국 소속이던 괴벤등 두 척의 배가 크림 반도의 러시아
함대를 독단적으로 공격하면서 결국 강제로 참전할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괴벤은 훗날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어서도 현역으로 남아 제2차 세계 대전때는
소련 해군이 튀르키예 영해로 오지 못하게 하는 견제역할로 운항했고
튀르키예가 NATO에 가입한뒤 프랑스에서 근대화 개장을 해서 1960년대
까지 현역으로 활동햇으니 최장수 드레드노트급 순양전함으로 역사에 남게 됩니다.
메흐메트 5세는 이스마일 엔베르의 협박을 받았는지 칼리프로서 지하드를 선포했는데....
칼리프가 선포한 최후의 지하드로, 들고 일어나길 기도했던 영국령 인도 제국의
무슬림들은 영국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오히려 이슬람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아랍인들이 오스만의 지하드 선언을 거부하며 영국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킵니다.
참전 이전엔 주변 열강들 평가로나, 자체적인 평가로나 유럽의 환자 취급을 벗어나지
못한 것 치곤 막상 1차대전에 참여하니 오스만 제국은 옛날의 군사대국
시절의 기상을 완전히 잃어버린건 아닌지 의외로 분전하며 영국등 협상국을 쳐부수니다.
열강들 중에서 독일에 결국에는 짐이 되어 버린 오스트리아에 비하면 기대치보다 잘 싸운 셈
이니 영국군을 대파한 유명한 갈리폴리 전투야 말할 것도 없고, 메소포타미아 침공
당시 쿠트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영국군 중동 원정군을 무려 4개 사단이나
박살내 버려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로 오스만군이 오는게 아닌가 전전긍긍하게 만듭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동맹국 (영국과 호주) 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갈등이
있었으니, 1914년 캠페인은 쿠제스탄과 쇼트 알- 아랍의 앵글로-페르시아 유전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결국 바그다드를 포착하고 다른 전선의 오스만 세력을 전환시키는 더 넓은 목표로
확대했으니 1918 년 Mudros 군대로 마무리되어 이라크의 중단과 오스만 제국의 추가 분할로 이어집니다.
이 분쟁은 Al-Faw 에 Anglo- Indian Division 의 수륙 양용 착륙으로 시작되어 Basra 와
페르시아의 인근 영국 유전 (현재 이란) 을 사수하는 것인데, 연합군은 샤이바
전투에서 바스라 방어를 포함하여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여러번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쿠트 알 아마라 공성전은 1915년 12월 7일부터 1916년 4월 29일 까지
메소포타미아의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160km 떨어진 쿠트
마을에 있는 수만명의 영국군 수비대를 오스만군이 포위한 전투 입니다.
찰스 타운센드 소장이 이끄는 인도군 제6 푸나 사단은 크테시폰에서 퇴각한후
쿠트 마을로 후퇴했으니.... 대영제국군은 1915년 12월
3일경에 Kut 에 도착했는데 1915년에 쿠트의 인구는 약 6,500명이었습니다.
11,000명의 병사(기병 포함)를 잃었을 정도로 큰 손실을 입은 타운센드 장군은 바스라를 향해
하류쪽으로 행군을 계속하는 대신 쿠트에 주둔하는 것을 선택했는데, 긴 강 고리 안에
있는 도시 쿠트는 멀리 있는 바스라에서 보급선이 연장되어 있었으며 방어하기에 좋았습니다.
할릴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는 1915년 12월 7일 도착했으니 오스만군이
쿠트를 포위할 충분한 병력을 가졌단느게 분명해지자, 타운센드
장군은 제라드 리치먼 대령의 기병들에게 남쪽으로 도망치라고 명령합니다.
오스만군은 11,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지원군이 계속 도착하면서 증가했으며
오스만군은 독일 장군 폰 데르 골츠 남작이 지휘했는데, 골츠는 1883년부터
1895년까지 오스만 군대를 현대화하는데 12년을 바쳤으니 오스만 군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2월에 세 번의 공격이 있은 후, 골츠는 쿠트와 마주한 포위 요새 건설을 지휘했으니
그는 티그리스강을 이용해 강 하류에 방어 진지를 건설하여
강으로 운반되는 구호물을 차단함으로써 바스라 방면에서 원군 공격에 대비합니다.
한달간의 공성전 끝에 타운센드는 남쪽으로 탈출하기를 원했지만, 사령관 존 닉슨 경은 공성전에서 오스만
군을 묶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닉슨은 런던에서 수송트럭을 주문했지만 도착하지
않았으니 육군본부는 군 지휘부를 재편성하는 과정에 있었고 총독과 인도 사무소에서 명령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타운센드가 한달분 식량밖에 남지 않았다고 보고하자 구조대가 급히 소집됐고 타운센드가
4개월분 식량을 공급받앗지만, 적대적인 부족의 땅을 통해 무방비 상태로 퇴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닉슨은 그의 아들이 지휘하는 증원군을 불렀지만 12월까지 여전히 수에즈 운하에 있었습니다.
아일머 중장의 1차 구원군은 1916년 1월 알리 가르비에서 티그리스강을 거슬러 올라갔는데,
쿠트를 구하려는 첫 번째 시도는 1월 6일 조지 영후스반드 소장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아일머는 다음날 2개 여단과 함께 영국군에 합류했고 지휘권을 넘겨받습니다.
구원군은 알리 알 가르비에서 티그리스강 양쪽 둑을 따라 셰이크 사드로 나아갔으니,
영후스밴드의 부대는 1월 6일 아침에 셰이크 사드 동쪽 5.6km 지점에서
오스만군과 조우했지만 오스만군을 물리치려는 영국군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다음날 1월 7일, 아일머는 주력 부대와 함께 도착하여 총공격을 명령하니.... 셰이크 사드
전투로 영후스밴드는 왼쪽 둑에 대한 공격을 지휘했고 켐볼 소장은 오른쪽을
맡았으며 하루 종일 격전 끝에, 켐볼의 군대는 오스만 참호를 점령해 포로를 잡고
두 개의 총을 빼앗았지만 오스만 좌안은 굳건히 버티고 북쪽에서 지원 작전을 수행합니다.
1월 9일 영국군의 공격이 재개되면서 오스만군은 셰이크 사드로 부터
퇴각했으며 이후 이틀간 오스만군은 아일머의 군대에 쫓겼지만
폭우로 인해 도로가 사실상 통행할수 없게 되었습니다. - 와디 전투
오스만군은 셰이크 사드로 부터 16km 떨어진 왼쪽 강둑의 티그리스 지류
까지 후퇴했고 , 아랍어 지명으로는 단순히 와디(강 계곡)로 알려져
있는데.... 오스만군 와디 강 건너편과 티그리스 강 건너편에 진을 칩니다.
1월 13일, 아일머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왼쪽 강둑에 있는 오스만 와디
진지를 공격했는데 강력한 저항을 한후, 오스만 제국은 서쪽으로
8킬로미터 후퇴했고, 아일머의 군대가 그 뒤를 추격합니다. - 한나 전투
그후 오스만군은 와디 강 상류로 티그리스와 스와이키야 습지 사이에 있는
한나강에 캠프를 만들었으니...... 이 한나 전투에서 영국군은
2,7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이는 쿠트의 수비대에게는 참담한 일이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칼릴 파샤(전 지역의 오스만 사령관)는 20,000명에서 30,000명의
증원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는데, 아일머의 구원이
실패한후, 최고 사령관 닉슨 장군은 1월 19일 퍼시 레이크로 교체되었습니다.
새 사령관은 아일머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더 많은 군대를 파견 했는데,
아일머는 3월 8일 두자일라 요새를 공격햇으나 실패했고, 무려 4천명의
병사를 희생하자...... 그는 3월 12일 해임되고 조지 고링 장군이 대신합니다.
4월, 쿠트에 있는 영국군 주둔지 내에는 기아로 인해서 인도군들은 그들의 종교의 채식주의
식단을 포기하고 말고기를 먹어야만 했고 고링에 의한 구원 시도는 첫 번째 쿠트( Kut)
전투라고 불리니 인도군이 대부분인 대영제국의 병력은 30,000명으로 오스만군과 비슷했습니다.
.전투는 4월 5일에 시작되었고 영국군은 곧 팔라히예를 점령했지만, 큰 손실을 입고 4월 17일에
베이트 아시아를 점령했으며 마지막 노력은 4월 22일 산나이얏과의
경기였으니, 연합군은 산나이야트를 점령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1,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합니다.
1916년 4월 영국 왕립비행단 30번대는 역사상 최초의 공중공급 작전을 수행했으니, 식량과 탄약은
쿠트 수비대에 투하됐지만, "그들의 소포가 티그리스 강이나 터키 참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는 식이라 4월 11일 부터 29일까지 제공된 식량 배급은 첫 3일 동안만 충분했습니다.
모든 구원작전은 실패했고, 3만명의 연합군이 죽거나 다쳤으며 오스군의
사상자는 10,000명으로 추정되는데...... 폰 데어 골츠 남작은
1916년 4월 29일 영국군이 항복하기 1주일 전에 장티푸스로 사망했습니다.
영국군 지휘관들은 오스만군을 매수하려고 시도했으니 오브리 허버트와 로렌스는 오스만군과
비밀 거래를 협상하기 위해 파견됐으니 영국은 2백만 파운드를 제시했고,
타운젠드군이 다시는 오스만군과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하니 엔버 파샤는 처음에는
선의의 협상을 하는 척하다가, 영국인들에게 마지막 굴욕으로 그 제안을 공표하고 거절합니다.
영국군은 또한 러시아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니 바라토프 장군은 20,000명
의 대규모 코사크군을 거느리고 페르시아에 있었으니.... 요청에 따라
1916년 4월 바그다드로 진격했으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발길을 돌립니다.
타운센드 장군은 협상이 실패한후 147일간의 포위전 끝에 1916년 4월 29일 항복했으니
13,000명의 연합군이 포로가 되었는데, 역사학자 일베르
오르타일리는 "할릴 파샤는 항복하는 영국 장교들에게 신사처럼 행동했다" 고 말합니다.
그리고 "근처 영국 기지에서 연료가 공급될 경우 포로들을 보트로 북쪽으로 데려가겠다" 고
제안했지만 영국군에 의해 거절당했다는데, 역사학자 마크 페로는 항복한 영국인
과 인도군은 바그다드 시내를 돌면서 행진을 감독하는 오스만군에 학대를 당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캐터우드는 이번 공성전을 "1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최악의 패배"라고
칭했으며 10개월 후에거의 전적으로 서인도에서 새로 징집된 군대로 구성된 영국
인디언 군대는 바그다드 폭포에서 쿠트와 바그다드 그리고 그 사이의 다른 지역을 점령하게 됩니다.
1916년 12 월 바그다드 남쪽의 쿠트 (Kut) 에서 연합군은 열세에 놓여 그후 쿠트의 포위
공격으로 패했는데 영국(인도군 포함) 은 군을 재정비한후 동맹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하기 위해 새로운 공격을 시작했으니, 강력한 오스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바그다드는 1917 년 3 월에 함락됐고, Mudros 휴전이 될 때까지 오스만은 패배를 거급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말과 1918 년 오스만 제국의 패배는 중동의 급진적인 재구성으로 이어졌으니 1920 년에
세베르 조약과 1923 년에 로잔 조약은 오스만 제국을 해체했으며, 이라크에서는 영국이
위임통치를 하게 됐고, 위임 기간중에 이라크 국가의 설립을 보았으며, 영국인이 국경을 수비했습니다.
영국의 위임통치에 대해 1920 년에 이라크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1921 년 카이로 컨퍼런스로
이어졌는데, 이 지역은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파이살 하에서 하스 헤이트 왕국을 설립하기로 결정됩니다.
그러나 막상 오스만 제국 지도부가 주전선으로 생각하고 가장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선 러시아와의
캅카스 전선에서는 극한의 자연환경과 혹한, 그리고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참패를
거듭해 반과 에르주룸, 트라브존 등을 빼앗기며 아나톨리아 본토로 쭉쭉 밀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1914년 12월부터 1915년 1월 사이에 있었던 사리카미스 전투 (Sarıkamış Muharebesi)
에서 험준한 캅카스의 지형과 혹한의 겨울철 날씨, 거의 없다시피한 오스만군의
보급과 부대 간의 연락 불통, 그리고 엔베르의 무작정 닥돌 전술 고집이라는 환장할
상황이 더해져서 오스만은 단 4일만에 10만명에 달하는 병력의 80% 를 잃는 대패를 당합니다.
오스만 지도부는 좌절과 분노를 자국 내 소수민족에게 돌리며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아시리아인
대학살을 비롯한 악명높은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를 대거 저지르게 되며 겔리볼루,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보여준 감투정신도 무색하게 막상
그나마 남아 있던 국력의 태반은 캅카스 산맥 오지의 엄동설한에 수십만 단위로 희생자를 냅니다.
오스만 제국은 망하는 과정에서 과거 관용적인 국정 기조에 비교하면 등골이 서늘할 만큼의 대량
학살을 저지르며 현대까지도 중동의 평화를 가로막는 살벌한 종파주의적
분열의 씨앗이 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전범국이란 오명과 함께 세브르 조약에서 실질적인
열강의 식민지 상태로 전락하며 그리스와 아르메니아등 복수심에 불타는 세력들에게 둘러싸입니다.
*** 88년 세월이 흐르고 이라크는 영국군 대신에 미군이 침공했고 23년후 오늘 미군은 인근 이란을 폭격중 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