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챙기기 백성호의 붓다뎐
공자도 붓다도 ‘결핍’ 있었다…인류 채워준 깨달음의 길
카드 발행 일시2024.02.14
에디터
백성호
백성호의 붓다뎐
관심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삶은 자유의 바다”라고 역설하는 붓다의 생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붓다뎐’을 연재합니다.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다룹니다.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지지고 볶는 일상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돼라”고 말합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돼라”고 합니다. 어떡하면 사자가 될 수 있을까. ‘붓다뎐’은 그 길을 담고자 합니다.
20년 가까이 종교 분야를 파고든 백성호 종교전문기자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예수를 만나다』『결국, 잘 흘러갈 겁니다』등 10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붓다는 왜 마음의 혁명가일까, 그 이유를 만나보시죠.
⑤공자ㆍ붓다ㆍ예수ㆍ무함마드도…유년기 존재의 결핍
#왕은 아내를 잃고, 왕자는 엄마를 잃다
꼭 1주일 만이었다. 왕자를 낳고서 마야 부인은 세상을 떠났다. 왕은 아내를 잃었고, 왕자는 엄마를 잃었다. 2500년 전이었으니 요즘처럼 사진도 없었다. 싯다르타 왕자는 엄마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진을 통해서도 말이다. 그러니 왕자가 갖는 그리움이 얼마나 컸을까. ‘엄마’라는 두 글자가 싯다르타에게는 커다란 삶의 결핍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인도의 국립 델리박물관에 있는 불상.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이다. 백성호 기자
불교에는 “번뇌가 곧 보리”라는 말이 있다. 삶의 고뇌와 깨달음의 지혜가 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번뇌와 지혜, 서로 다른 그 둘을 하나로 뚫을 때 깨달음이 온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다르다. 번뇌는 피하고 싶고, 깨달음만 얻고 싶다. 이런 사람은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세상을 이미 번뇌와 깨달음, 두 쪽으로 갈라놓고 한쪽만 편식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만 통하는 건 진리가 아니다. 번뇌에도 통하고, 깨달음에도 통해야 진리가 된다. 진리는 모든 걸 관통하기 때문이다.
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싯다르타의 결핍감은 커다란 번뇌였을 터다. 자신의 출생과 동시에 세상의 절반이 꺼져버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 번뇌가 깨달음의 언덕을 넘어서게 하는 가장 큰 엔진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팔리어 경전에 기록된 붓다의 유년기는 눈길을 끈다. 여느 아이들과 달리 싯다르타는 어려서부터 생각이 깊고, 사유하는 성향이 강했다. 나는 그러한 성향의 뿌리에 ‘엄마의 결핍’이 적잖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공자도, 예수도, 무함마드도…존재의 결핍
‘축의 시대’에는 인류사의 스승이 여럿 출현했다. 그중 한 명인 공자도 그랬다. 공자의 부친인 공흘과 어머니인 안징재의 나이 차는 무려 54세였다. 공흘이 70세 때 16세의 안징재를 맞아들였다. 공흘에게는 이미 본처와 아홉 명의 딸이 있었다. 전쟁이 난무하고, 사람의 목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춘추전국시대였다. 대(代)가 끊길까 봐 걱정하던 공흘은 칠순의 나이에 공자를 낳았다.
3년 후에 공흘은 세상을 떠났다. 싯다르타는 출생 1주일 만에 엄마를 잃었다. 공자는 3세 때 아버지를 잃었다. 24세 때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공자의 유년기와 청년기에도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있었다. 더구나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아버지를 하늘, 어머니를 땅에 비유한다. 공자는 어린 나이에 하늘을, 젊은 나이에 땅을 상실한 셈이었다. 그러한 결핍의 바닥에서 공자는 성장했다.
룸비니 근처에 있는 농사의 모습. 아직도 초가 움막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2500년 전의 생활 양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 싶다. 백성호 기자
따지고 보면 예수도 그랬다.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동정녀 잉태를 인정하고, 유대교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어쨌든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돼, 어머니인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마리아의 남편이자 예수를 키운 요셉은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그 사실은 요셉도 알고, 마리아도 알고, 예수도 알았다. 2000년 전 유대 사회는 보수적이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으면 돌에 맞아 죽기도 했다. 그러니 ‘친아버지의 부재’는 예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물론 여기에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에게는 오로지 신성(神性)만 있다. 그런 예수가 어떻게 결핍을 느끼며 살았겠나.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느님과 동급이지 않나.” 이렇게 받아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반박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예수는 100% 신이자, 100% 인간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춘기에 우리가 겪는 온갖 신체적ㆍ정서적 변화를 예수도 똑같이 겪었을 터다. 그런 예수에게 어떻게 결핍감이 없었을까. 그런 결핍이 없었다면 예수는 100% 인간일 수도 없지 않을까.
그리스도교뿐 아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도 유복자로 태어났다.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6세 때는 엄마도 세상을 떠났다. 무함마드 역시 뿌리에 대한 결핍을 안고서 자랐다.
인도의 겨울 들판에서 유채가 노랗게 자라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유채의 기름을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한다. 백성호 기자
물론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고 모두 영성가가 되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는 그 고통이 독이 되고, 또 누구에게는 그 고통이 약이 된다. 그런데 인간의 삶에서 존재의 뿌리에 대한 결핍만큼 강력한 엔진도 별로 없지 싶다.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에 대해 스스로 되묻게 하는 추동력 말이다.
#바다가 시인을 키우듯이
가끔 새로운 시집을 읽을 때 나는 책날개에서 시인의 고향을 찾아본다. 웬일인지 전남 해남이나 경남 통영 등 바닷가가 고향인 시인이 많았다. 나는 그게 우연만은 아니지 싶다. 짙푸른 바다와 탁 트인 하늘, 그 아래서 소년(소녀)은 시인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 바다가 시인을 키우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어릴 적부터 안게 된 남다른 존재의 결핍이 ‘뿌리’를 찾게 하지 않았을까. 나의 뿌리, 사람의 뿌리, 존재의 뿌리 말이다. 그래서 사유하고, 또 사유하고, 자꾸 사유하는 가운데 눈이 깊어지지 않았을까. 그런 눈으로 진리를 찾기 위해 걸음을 떼지 않았을까.
싯다르타 왕자는 어린 나이에 ‘죽음’을 사유했을 터다. 엄마의 죽음을 통해 사람의 죽음을 궁리했을 터다. 그런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도 내다보지 않았을까. 결국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그 너머의 무언가를 찾으려 하지 않았을까.
룸비니 동산은 붓다가 태어난 곳이자, 아기 왕자가 엄마를 잃은 곳이기도 하다. 백성호 기자
룸비니 동산에는 이중주의 선율이 흘렀다. 붓다의 탄생과 엄마의 죽음, 기쁨과 슬픔의 선율이 동시에 흘렀다. 내 삶에 생겨난 가장 큰 구멍이, 내가 지나야 할 가장 큰 언덕을 뛰어넘게 한다. 그런 동력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룸비니에서 느끼는 감회는 무척 남달랐다.
싯다르타 왕자가 성장한 카필라바스투 왕궁이 있던 자리다. 지금도 벽돌로 된 유적이 남아 있다. 백성호 기자
나는 룸비니 동산을 떠나 카필라 성으로 갔다. 싯다르타 왕자가 자라난 궁이 있던 곳이다. 룸비니에서 버스로 40분 정도 거리였다. 2500년 전의 성이니까, 남아 있는 번듯한 건축물도 없었다. 대신 카필라 성이 있었던 벽돌 유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건물이 있었던 터의 흔적이었다. ‘아, 이곳이구나. 바로 여기서 어린 붓다가 자라났구나.’ 그런 가슴 뭉클함이 올라왔다.
짧은 생각
룸비니 동산에는
마야 데비 사원이 있습니다.
사원 바로 옆에
높다란 돌기둥이
하나 서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소카 석주입니다.
룸비니의 마야 데비 사원 앞에는 아소카 석주가 서 있다. 석주 위에 있던 말 조각은 부러져 유실됐다. 백성호 기자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소카 왕이
붓다의 고향에다 세운
돌기둥입니다.
인도 북부의
불교 성지들에도
아소카 석주는 있습니다.
그런데
룸비니의 아소카 석주는
아주 각별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소카 왕이
돌기둥에다
문자를 새겨놓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붓다 샤카무니가
태어난 장소’라고
명확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사실
붓다가 실존 인물인가,
아닌가에 대한
오랜 논란이 있었습니다.
역사적 기록도 없고,
붓다의 유적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필라 왕국이
멸망하고,
붓다 입멸 후에
인도의 불교 유적은
폐허가 됐습니다.
이슬람 제국이
인도를 침략했을 때,
불교 유적은
더욱 처참하게
파괴됐습니다.
그래서
기록이 없었습니다.
붓다가
실존 인물이었음을 입증할
역사적 증거물이 없었지요.
룸비니 동산도
오랫동안 숲과 흙더미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아소카 석주도 부러진 채
윗부분은 유실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7.2m의 돌기둥에서
아래쪽의 3m는
흙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룸비니의 아소카 석주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붓다의 실존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지 않을까. 백성호 기자
서구의 고고학적
기준에서 보면
붓다의 실존 여부는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
서구의 불교학자
에밀 세나르(1847~1928)는
고타마 붓다를
“문학적으로 의인화한
신화적 인물”이라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인도 사회에 내려오는
여러 신화 중
태양 신화의 한 유형이란
주장도 있었습니다.
실제 사카족은
‘태양의 후예’를
자처했으니까요.
이런 논란은
그리 오래된 논란이
아닙니다.
불과 100년 전의
논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1896년 12월
독일의 고고학자
휘러가
언덕을 돌아다니다가
돌기둥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돌기둥에는
고대 브라흐마어로
이렇게 적혀 있었지요.
‘많은 신의 사랑을
받고 있는
파야다시(아소카 왕의 다른 이름) 왕은
즉위 20년이 지나
친히 이곳을 찾았다.
여기서 붓다 샤카무니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돌로 말(馬) 모양을 만들고
석주를 세웠다.
이곳에서
위대한 분이 태어났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룸비니 마을 주민들에게
토지의 세금을 면제하고,
오직 생산물의 8분의1만을
징수한다.’
아소카 왕은
붓다 입멸 후
250년쯤의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250년 전쯤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소카 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습니다.
룸비니의 석주가
발견되고 나서야
서양의 고고학계에서는
붓다를
실존 인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소카 석주 위에는 주로 사자의 형상이 조각돼 있었다. 이 사자의 형상은 인도의 국가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성호 기자
그걸 생각하며
룸비니의
아소카 석주 앞에 서면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룸비니의 석주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붓다의 실존 여부를 놓고
여기저기서
논란의 세미나가 열리고
있을 테니까요.
백성호의 붓다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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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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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28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