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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탄 청옥산과 평창아라리의 관계는??]
후세백작 2013, 10, 19 00;01
< 옥산에 울리는 아라리>
후세백작
님 떠날 청옥산은
긴긴 겨울 장철 동면하면 될 테지만..
님 그리워 부르는 아리랑은
청옥에 울리는 아라리요 아라리이다.
봄 되면 오실려나 우수.경칩에 개구리소리
개굴 개굴 님 오시는 아라리인가요
청옥산은 그대의 情 변치안코
긴 긴 겨울 폭풍한설의 아라리를 부르며 기다리리요
( 긴 겨울동안엔 미탄생활을 정리하고 다시금 일상의 도시로 돌아간단
손경옥남의 블로그의 글에 후세의 답 아라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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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뜻이란??
"님 그리워" 불러보던 아라리요 아리랑,
이것이 바로 아리랑의 뜻입니다.
그 님은 사랑하는 님이 아니라 군신으로서 임금님을 그리는,,,
임금님이 만수무강, 무사평안 하시어 나라가 평화로워야 백생이 행복해질 수 있는 논리입니다.
아마 단군시대나 고대 아리랑이 존재 했다면 아리랑의 해석으론 님 그리는 뜻을 주장 하면서,,,
이 주장의 이해는 다음으로 미루면서,,
아리랑은 여기서부터 여러시대와 여러 환경에 삶을 표출하는 가사들이 더불어 나는 것이지 어디
정선 아라리가 원조라 하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노릇이라...
그렇게 주창하는 자들은 고생은 하였으나 헛 고생만 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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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아라리중 아래의 가사 한 수에 대한 나의 생각>
<눈아 올라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먹구름 다 모여든다>
아리랑의 뜻은 무엇인가 에 대한 해석들이 제 각각이지만 그것은 모두 무용지물이다.
그 이유는 그 이외의 범위에는 맞지 않기에 부분집합 밖에 않 되는 것으로 그것이 아리랑의 기원이라 주장은 억지이기
때문이다.
평창, 정선 아리랑의 천오백여수의 가사를 통털어 이해해 보면 시대성을 알 수 있는 단어는 "만수산"이란 단어이다. 이
단어는 600여년전 고려말 충신들이 개성 만월대 아래의 임금님을 사모하는 충절의 가사의 일부인데 현존 아리랑 천오
백 여수의 가사중 그 시대의 상한선을 잡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단어이다.
그러나 아리랑이란 그런 고유명사보다는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그리는 일반명사들로 그 이전의 시대들도 포함할수 있
는 범위들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분들은 아랑설이니 임영설이니 아리랑에 각각의 해석이 많은데 그 모든 해석들은 그 시대 그곳의 아리랑의 해석
이란 점 입니다.
그러면 후세백작도 아리랑의 설을 하나 주장한다면 단군시대의 아리랑입니다.
.
그럼 그 먼 옛날 단군시대엔 즐거움 또는 그리움의 표현의 노래는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나의 가설로 아리랑을 이해해 보면,,,
맨 위의 위의 예문의 詩에서 아리랑이란 님을 향한 , 님의 그리움의 표현에,,,
이 님은 고조선 시대엔 임금에 대한, 어찌보면 임금님이 평안하시면 국가 안녕이 무사하다는 ...
당시에 마치 파라오같은 절대왕권이란 표현보다 신격화 될 임금님은 모든 것으로 통하는 당시의 절대자 님이란 뜻으로,,
님(임금)에 대한 그리움,,
그것이 아리랑이고 아라리요란 단어로 아리랑은 고개를 넘어가는 뜻의 단어이고, 아라리요는 산을 넘어간다는 뜻이라면
우르이 지형에 산 너머 게시는 님( 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애뜻한 정이 아리랑이란 뜻의 표현이란 점 입니다.
( 아리랑과 아라리오에 대한 뜻으로 이 단어들은 지금도 몽고에서 고개(재)를 넘다. 산을 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후세의 주관적인 생각이라 합시다.
(故) 양주동 박사께서는 숙종때 규원사화의 복제본인 영인본을 소장했으며 그는 단군은 산 위에 사는 사람들이란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아리랑의 밑면에 흐르는 공통점은 임 그리워 부르는 노래 입니다.
그 임의,.. 단군의(단군은 일반명사란 주장을 아래에 참조)
사랑하는 님은 ....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임금(단군)이 아니라 남,녀의 정을 다뤘슬까요??
그 옛날엔 임금을 그리워 (임금님이 잘 계시면 나라가 편안하난 생각의,,,)부르던 노래의 단어가 아리랑이란 생각이죠.
그 옛 조상들이 그들의 생활에서 희노애락의 표출로 님 그리는 아리랑이란 노래를 부르지 않았슬까 하는 생각과 이후로 아
리랑은 각 지역적인 특유의 가사와 시대적 변천 속에서도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그린 정서로 각기 제 나름대로의 아리랑이
발생들 하는 것 입니다.
위에서 말 하였듯이 그래서 아리랑은 님 그리워 부르던 노래입니다.
아리랑은 우리 엣 조상들이 님( 임금) 그리워 부르던 노래입니다.
그리고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란 점에 관해서는 다음으로 미룹니다.
이러한 뜻이 아리랑 단어에 대한 저의 주관적인 생각 입니다.
2013,10,21 21;59
아리랑과 청옥산을 써 볼까요.
정선 아리랑엔 거칠현동의 전오륜외 6인의 고려말 선비가 정선읍내서 7Km 떨어진 전오륜의 고향으로 가면서 부른 "눈이 올
라 비가 올라 만수산 검은구름 막 몰려든다"
평창, 정선 아리랑에 역사성이나 시사성의 낱말은 이 "만수산" 하나이며 "북망산천"이란 단어뿐.
여기서 "만수산"이란 단어는 역사적 단어이며 산간일대 민초들이 먼저 부른 단어는 전혀 아닌 것 입니다.
그것은 전오륜등 거칠현동이 먼저 불렀던 가사인 것입니다.
왜냐면, 만약 민초들이 역사성있는 단어의 가사를 불렀다면 평창, 정선 아라리엔 최소한 영월로 귀양온 단종에 대하여 모를
리는 없었고 이 단종애사의 충절의 아라리 가사는 있어서 전하여져야 하지 않냐는 의문이다.
이렇듯 아라리는 민초들의 생활속의 삶의 희망과 그에 한스러움을 표현하였지 어떤 역사성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만수산이란 가락에선 전오륜등 거칠현동 72인은 이성계의 반대세력으로 전오륜의 사부인 이초가 명나라 황제에게 아
뢰어 이성계 일파 타도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이초는 중국으로 귀양가서 자결 합니다.
이로서 이초의 문하생들이 야인으로 돌아 가는데...
전오륜의 고향 정선은 요즘같으면 서울서 세시간 거리이지만 그들은 가장 지름길은 원주-신림-주천-마차-미탄-정선으로
갔다면.. 또한 중주, 제천의 박달재를 넘어도 마차-미탄으로 넘어야 합니다. 어떠한 경로든 당시 도망가는 그들이 바로 고
향으로 가지는 못 했슬 것입니다.
그래서 숨을만한 장소는 깊고 깊은 청옥산이 아니었던가 하며 이후 정종, 방원,을 지나 세종때 쯤이라야 해금되고 고향 앞
으로가지 않았슬까 하는 추정 입니다.
왜냐면 이방원은 조선의 안위가 평화로워서 만 백성의 평안을 바랐기에 반 세력은 가차 없었던 것입니다.
정종도 3년만에 왕위에서 하야할때 동생 방원으로 하여금 목숨이 보장않 되었기 때문이고 아버지 이성계가 그렇게 죽이지
말라던 정몽주도 새로운 사상의 역성혁명에 위배되는 사상 탓으로 또한 삼봉 정도전도 죽이는데 이들 죽림7현을 편안하게
놔 둘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반 세력 7인이 함께 행동하는데 이것은 후일을 도모하는 반 행위집단으로 몰릴 수
있는 명분을 그 자신들도 몰랐겠는가?? 또한 정도전을 귀양보내고 하는 방원의 행위를 깊이 생각 못 했슬까??
그래서 그들은 절대로 개성에서 정선으로 곧 바로 가지는 않았슬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조선의 중앙 집권화를 이루
며 혁명의 동기가 희석되어갈때 그들은 정선 전오륜의 고향에 갔으리란 생각 입니다. 그 시기는 세종이나 예종때 아면 안전
한 시기는 성종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때까지 그들이 숨을만한 곳으로 아마 전오륜이 잘 알고있슬 지형의 미탄 청옥산 깊이 들어가 참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슬
듯 합니다.
다만 북망산천은 조선때 북쪽이 명이 아니라 청의 오랑캐 땅이 되고 여기에 만리장성(만리장성은 명나라보다 청나라때 더
많이 쌓았기에) 청나라 만리장성에 군역으로 간 민초들의 와이프들이 밤을 지새며 부르던 가사에 한의 뜻을...
이렇게 아라리는 생활의 전부를 묘사하는데 "만수산" 이란 이 거칠현동이 600년 전에 부르던 가사가 구전되며 이 가사의 본
고장은 미탄 일대이고 육백마지기에 화전민이 살수있는 산간오지 청옥산쯤 아닌가?? 주관적이지만 그 아라리의 해석을 해
봅니다.
이러한 아라리의 유추적인 생각들을 언제 총 집합하여 쓸 것입니다.
아라리란 단어적 뜻은 무엇일까요??
테뱃엔 청옥산보다 더 높은 3-5천미터의 분지의 산이 있는데 이 분지 산을 "아리"라 합니다.
그리고 "라"는 고개란 뜻입니다.
분명 아라리는 양주동 박사님의 단군은 산위에,,,
아라리는 님(임금)을 향한 무강,안녕의 노래가사이며
이로서 우리민족 정서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리랑이며. 이 아리랑의 뜻은 민초들의 삶의 애환
의 표출이며 그 기조는 恨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디에도 없는 후세의 주장이다.
저의 아라리 생각들을 어쩌다 여기서 (손경옥님의 블로그 글의 댓글에서)먼저 씁니다.
그런데 그냥 제 블럭에 쓰기엔 모티브가 없습니다.
후세는 어떤 액트가 있어야 굴러가는 수동형이기에 잠깐의 멘트지면에 많은 실례를 합니다.
2013,10,23 23;55
한줄로 써 내려가고 다시 읽어 보지도 않았지만 빠진 부분이 있네요.
담에 완성된 자료를 위해선...
<거칠현동에 대하여,,,>
우선 원주에서 주천=제천-마차-미탄으로 가지만 주천-평창도돈-마차,미탄으로 가는 길도 있는데 그 길 하나는 주천에서 미탄
으로 가자면 하나의 길은 좌로 돌고 또 하나는 우로 돕니다
그 사이 주천에서 마차의 직선길이 있다면 서강과 원동제로 올라가는 첩경이 있는데 뺄치라는 동네를 거쳐 가는 옛길을 찾아
볼수도 있습니다. 아마 걸어간다면 이 뺄치에서 강을 건너 원동재를 오르는 이 길이 첩경이란 점 입니다.
정선 가는 길은 강릉에서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 임계를 넘어 아우라지로 접어드는 길은 있지만 정선은 미탄을 꼭 거쳐야 들어
가는 오지 입니다.
거칠햔동의 7인이 어느 길을 택하든 미탄 한치로 접어들어 정선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오륜외 6인이 이성계 개국이후 야인으로 전오륜의 고향인 정선으로 갔단 이야기는...
이성계 개국의 역사에 방원은 아버지가 죽이지 말라는 정몽주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2차 왕자의 난도,,,그리고 방원의 형인 2대 정종은 왕위 계승 3년만에 방원에게 물려주고 개성으로 돌아 갑니다.
그렇다고 방원인 사욕이 아닙니다.
조선개국에 그들의(이성계와 이방원)의 생각엔....고려로서는 국권을 바로 잡기 힘들고 도탄에 빠지고 실의에 찬 백성을 구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래서 조선이란 역성혁명의 개국이 다시 붕괴되고 도탄에 빠지고 궁핍해질 백성을 걱정하여 어떤 반란도 가차
없었던 것입니다.
세조를 지니 예종때 할아버지(세종)의 묘가 나쁘다고 장안에 소문이 꼬리를 무니 지관들을 뿌려서 명당을 찾는데 지금의 세종의
묘 영릉이 당시로선 둔촌공 3세손의 묘인데 지관이 예종에게 고 하길,, 이곳이 명당자리이고 지금 팔판동의 8형제가 모두 당상관
인지라 그들에게서 왕이 나온다는 소문이 자자 합니다...
이 말이 후일 붙인 말일수도 있으나 분명한건 역사에선 그들의 묘를 이장하고 세종의 묘를 그곳으로 천장 하였습니다.
당시 이씨 조선의 개국초기에 중앙 집권의 국가를 성종때에 이르러서 마무리 하였다면 그 이전엔 쿠데타 소문만 일면 충신 김종
서 가문처럼 난타 당합니다.
그런데 전요륜 일행 죽림칠현의 이씨조선 개국을 반하던 일곱명이 전오륜의 고향 정선으로 곧바로 내려갔다면 어느 임금이든
이들이 후일을 도모하는 집단행동으로 바로 처단 될 것이며 이를 아뢰올 인접 부사들은 특진으로 이어지겠지만 태종은 평창의
방림, 대화. 진보(지금의 진부)와 횡성등 강유역을 강무장으로 묶어 가을철로 궁중의 군사 약 5천명 정도가 닷세쯤 사냥을 하고
야영을 하는 군사 훈련을 하였는데 태종은 세종을 이끌고 평창을 두번 다녀간 기록이 있습니다.
평창에서 이런 강무(기동훈련)행사를 한 방원이 정선 소식쯤이야...몰랐겠슬까 하는 생각이며...
그래서 일곱 선비가 야인으로 함께 있다면 이건 의심의 대상으로 어떤 처벌이 따를테죠...
그래서 그들은 서울- 정선 루트중에 미탄 한치 뒷산 청옥산에서 얼마 동안이라도 운둔하다 예종이나 성종조 시기쯤 평화로운
시기이기에 그때쯤에 해금되고 (해금의 명령상이나 문헌상이 아닌 사회풍조상,,,)정선 고향땅을 밟지 않았슬까 하는 생각 입
니다. 그때까지 운둔의 장소로는 미탄의 청옥산이란 생각입니다.
물론 반론으로 정선으로 향한 전오륜등 죽림칠현은 임금님이 게신 개성의 방향으로 예를 지냈다고들 하여 바로 개성의 임금이
하야하여 게실때라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정확한 기록이 없고 600년전의 이야기가 그것만 구체적이라면 미화적일수도
있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청옥산일대의 미탄의 민초들이 정선보단 시기적으로 1-20년 빠르게 한치 아라리를 부르지 않았슬까 하는 이
후세의 추정의 가설입니다
*************************************** 끝,,,,,
* 註... 단군아란 용어는...
우리의 역사는 고조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명시하고 개천절이니 홍익인간이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우리의 역사는 역사시대 이전의 문자가 없는 선사시대의 역사를 지니기에 분명하게 단언하는 자세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모순은 단군이 이나라를 열으시고라는 설명은 단군은 한 분이고 고유명사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고서들엔 고조선은 1대 단군왕검에서 47대 고열가 단군까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왕검, 고열가는 고유명사이고 단군은 존칭으로 임금이란 뜻 아닌가 합니다.
당시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서 임금으로 단군은 제사장으로 절대자의 임금이란 뜻으로 이집트의 파라오 같은 왕으로 이해하여 볼
수있는 것이다.
아마 몇천년간의 단군시대에 님이란 단군(임금)을 그리는 것으로 아리랑이란 저만치 산위에 게시는, 아리라요는 저 산들 넘어 계
실 임금님을 향하여 부르던 가사란 뜻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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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군시대의 문화재나 기록을 알수 없으마 바로 내가쓰는 이 한글은 세종께서 기록하시길 엣날 문자(단군시대의 기림토 문자)
의 철자에 음을 달아 한글을 창제하셨다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 역사서들은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시 1925년 싸이토 총독의 분서갱유때 단군서들은 모조리 불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의 의식이 미약해 정체성이 없는 민족이라야 일본에 동화되기 쉬울 거란 생각에서 분서갱유. 그리고
명당끊기등의 갖은 만행을 자행했던 것 입니다.
그런데 항간엔 일본 고궁 도서관에 이 분서갱유한 책들이 한권씩 있다는 추정입니다.
그에 논리는 고궁도서관에 심부름 하며 드나들던 조선인의 글에 우리의 알지 못하는 역사들의 이야기는 필히 그가 그 고궁박물관 3층의
밀폐된 공간까지 드나들어서 그 책들을 읽었단 추정이지요.
아마 그 분은 일인들에 목숨이 위태로워 아니면 자기의 글들이 살아남기위해 간접적 시사일듯 하지요.
엣다.. 쪽발세끼들...
훈돗시 중앙에다 화살들을 꼽아 전부 죽였으면 원또라 선생의 말처럼 작년 그러께 추석때 먹은 송편이 쑥 내려가고 시원해질건데...
나의 글은 뚜여사. 용추이, 황빠 아마 이 세사람만 읽어 볼텐데..
쓰는 나보다 읽고 이해하는데 원래 시간이 더 걸리는거라...
분명 여기 끝까지 읽었다면 이 글을 볼수있으리라
"읽느라 수고들 했데이""
평창중,고등학교 22,25기 동창회
00:06
그리고 딸래미와 데이또로 자주 가는 서점엘 갔다.
아리랑책이 큼지막한게 딱 한권 눈에띄길래..얼릉...
한 삼만 오천원 부피쯤 책인데 읽어줄 거라곤 딱 하나 정선 아리랑에도 원래는 후렴이 없엇는데 흥을 돋구기 위해
후렴을 도입했고 아직도 어떨때는 후렴없이 부르다 다음곡 가사가 생각안 나면 후렴을 부른단,, 아마도 그러다
후렴이 발전되고 가락의 리듬이
평창아라리와 같은 원음에서 이탈되어 변절되는...
그런데 난 가금 경제책들,,, 프리드먼의 시장경제학이나 커렌스 워( 끝나지 않는 전쟁)등
삼만냥 짜리 책들은 서너권 사서 단 한 귀절이라도 이해가는 부분이 있어 무식함을 채우지만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