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한국 소공동체의 역사를 필자의 관점에서 간략히 일별하는 가운데, 가능성과 한계를 확인해 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공동체의 필요성에 대한 원론적인 담론은 피할 것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앞의 두 단계 성찰을 토대로 발전적 제언을 꾀할 것이다.
소공동체 역기능
필자는 소공동체에 대한 회의적 내지 부정적 견해를 다양한 일선 사목자들로부터 직접·간접적으로 접해왔다. 그 가운데 가장 강도 높은 것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이제민 신부가 2007년 10월 21일 자신의 홈페이지 자료실과 10월 29일 ‘지금여기’ 독자투고란에 올린 글이다. 그는 첫머리부터 이렇게 한방에 단언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소공동체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한국형 소공동체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국형 소공동체는 그 주도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율적이지 않고, 공의회의 정신을 외치는데도 불구하고 공의회 이전의 성직자 중심 교회로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간단하다. 바로 “한국형 소공동체에서는 소공동체 운동을 무리하게 반·구역에 접목시키다보니 소공동체가 본래 지향한 정신이 빛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연한다. “한국형 소공동체를 주도하는 자들은 본당이 소공동체 중심 체제로 변환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소공동체를 종전의 반모임과 차별화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소공동체 중심으로 운영되는 본당은 거의 없다. 그들이 성공 사례로 내세우는 본당의 소공동체 모임도 종전의 반모임과 거의 다르지 않고, 소공동체장의 역할도 종전 반장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신부는 한국천주교회 소공동체 운동이 역기능을 하고 있는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소치라고 지적한다. 이 신부는 사목현장의 현실을 비판의 근거로 제시한다.
“내가 사목하는 반송본당의 경우 모든 활동을 소공동체 중심으로 하다 보니 여성 연합회의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있다. 성서반은 운영할 수 없다. 소공동체가 이들 작은 공동체들이 할 일까지 다 맡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본당이 의무적으로 요구하는 한국형 소공동체에 몸을 싣게 된다.”
글 말미에서 이 신부는 사제 연수회 그룹토의에서 나온 의견들을 액면 그대로 밝혔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부정적 측면들이 있다.
▲ 한국형 소공동체는 초기 교회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근거한 공동체라 보기 어렵다.
▲ 명칭 때문에 신자들이 혼란스럽다.
▲ 한국형 소공동체는 본당신부에게 피곤하다.
▲ 교우들도 힘들어 한다.
▲ 자발적이지 않다.
▲ 20평 아파트에 사는 신자와 60평 아파트에 사는 신자들의 공감대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
▲ 관심사와 생활 양상이 다른 이들이 매주 또는 매월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복음 나누기 등
생활 나누기를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 복음 나누기도 7 단계 말고 다른 방식이 요구된다.
▲ 사제의 관심사에 따라 소공동체 모임이 잘 되기도 하고 잘 안되기도 한다.
▲ 다른 신심단체도 나름대로의 조직이다. 본당은 그들의 발전을 도와야 한다.
이렇듯 이제민 신부 주장의 요지는 한국형 소공동체의 전면적 재고 내지 폐지다.
한국 소공동체 역사 일별
흔히 한국 소공동체의 본격적인 출범을 1992년으로 여긴다. 필자는 한국 소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이 관점을 폐기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소공동체는 어느 한 시기에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적 사목현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잉태하고 탄생시킨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 박사학위 논문 전반부에 한국 소공동체 역사를 기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수집한 1차 자료들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계자들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종합한 결과, 한국 소공동체 역사가 크게 3단계로 발전해 왔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제1기는 1960년대 말부터 1984년까지로, 본당내 ‘구역’ 설정기다. 60년대 말부터 주로 도시에서, 부분적으로는 시골에서 교통 사정이 점차 개선되면서 기존의 공소가 폐쇄되고 본당으로 흡수되어 본당 관할 구역이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더불어 본당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이제 본당은 종래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구역’을 설정하여 본당 관할구역을 분할 관리하는 본당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생긴 구역 조직은 40~60세대를 한 구역단위로 하여 편성되었다. 처음에는 구역만 조직하였으나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의 변화에 따라 ‘반’으로 세분하는 본당도 생겼다.
이후 1970년대 말부터 한국교회는 남미 기초 공동체와 개신교 구역반 조직 활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활성화 방안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부 앞선 본당신부들의 주도 하에 적극적인 구역반 모임이 추진되었고, 1기의 말기인 80년대 초에는 구역반 모임의 중요성을 인식한 서울교구(1980), 부산교구(1981), 대구교구(1982) 등이 매달 각 본당에 구역반 모임지를 교구 차원에서 발간?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구역 조직이 공동체 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2기는 1984년부터 1990년대 전후까지로 보는데, 이 시기는 다양한 쇄신 운동이 전개되는 등 전환기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천주교회는 1984년 창립 200주년을 기해 한국교회의 현실 진단과 미래의 사목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사목회의’를 개최 추진하였다. 그 결과로 첫째, 평신도 사도직 강화, 둘째, 지역 공동체 활성화, 셋째, 토착화 등의 과제가 한국교회가 해결할 당면 사안으로 뚜렷이 부각되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15개 교구 중 9개 교구가 구역반 모임을 교구 사안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제3기는 1992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로서, 소공동체 사목의 적극적 추진 단계다. 한국에서 소공동체를 본격적인 사목비전으로 삼는데 기폭제가 된 것은 반둥에서 ‘공동체들의 친교’를 ‘아시아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규정한 1990년 제5차 아시아주교회의(FABC)였다. 이후 서울대교구는 1992년 주교 사목교서에서 ‘2000년대 복음화 계획’의 일환으로 소공동체 운동을 제시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3년 주교 사목 교서에서 1992년 발표된 내용을 거듭 촉구하면서, 소공동체 운동 추진에 모두가 적극 동참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또 소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은 교구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한 예로 1992년 3월 21일 본당 사목 회장단 모임에서 복음화의 문제점과 그 원인 분석을 하였는데 그때 소공동체 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이후 소공동체가 전국 교구 사안으로 확산된 과정은 적어도 소공동체 관심자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으니, 해마다 있는 소공동체 전국모임, ASIPA 모임, 주교회의 산하 소공동체위원회 활동 등을 통하여 소공동체 대세론이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언급해 두면서, 상세한 기술은 생략하기로 한다.
한계와 가능성
필자는 일부러 소공동체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비판의 소리에 귀 기울여 소공동체의 한계와 가능성을 가늠해 보기 위함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이제민 신부가 여러 신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제시한 비판 가운데 다음의 세 가지를 진지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성직자 중심의 하향식 소공동체가 아닌 평신도 중심의 상향식 소공동체 운동이 되어야 한다. 소공동체가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사제들 및 신자들과 아무런 공유 비전의 형성도 없이 주교들의 주도하에 교구 사안으로 책정되고 공문에 의해 하향식으로 추진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기획 및 실행 방식은 그대로 본당 사목자에게 전이되어 똑같은 현상이 본당 소공동체 결성 과정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다. 결정은 사목자들이 하고, ‘자율적 참여’는 신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하는 모순을 범했던 것이다. 이는 소공동체 사목에서 치명적인 과실이다. 반드시 시인하고 개선할 일이다.
둘째, 기존의 신심단체들을 소공동체로 인정해야 한다. 소공동체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본당의 운영이 소공동체 일변도로 경직되고 획일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레지오 마리애를 대표로하여 도태당한 신심단체들이 속출하였다. 그리고 소공동체를 부각시키려고 소공동체와 단체를 굳이 구분하려는 무리한 개념정의 시도들도 다반사로 있었다. 필자의 견해로 신심단체들을 굳이 소공동체와 차별화하려는 신학적 접근은 ‘오버’한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되 그렇게 본질적인 다름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성령에 원천을 둔 다양한 은사 발휘의 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점도 보다 넓은 지평에서 재고해야 할 것이다.
셋째,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는 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바르게 말해서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공의회 정신을 충분히 연구하지도 이해하지도 실행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공부하고 교육해야 하며, 그에 머물지 말고 언젠가 있을 3차 공의회 현안, 예를 들면 포스트모던 세대의 신앙생활 양식 등에 대해 미리 고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민 신부의 모든 비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가 대변한 사제들의 견해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제들의 숫자도 결코 적지 않다. 매년 개최되는 전국소공동체 모임에 자발적으로 참석하는 사제들과 평신도들만 해도 그렇다. 또한 월간 「사목정보」지를 통해서 매월 집중 취재·보도된 사례들(「사목정보」1,2,3,4,7,20,42호 참조)만 보아도 소공동체를 온통 문제 덩어리로만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잘 되는 소공동체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이유로 필자는 지난 소공동체 역사에서 대표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가능성을 본다.
첫째, 기존의 구역반은 소공동체를 위한 ‘한국적’ 가능성이다.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이미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은 지혜다. 새로 만든다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다. 이미 있는 단체를 소공동체로 인정하는 관점이 필요하듯이 이미 있었던 구역반조직을 소공동체 퀄리티로 끌어올리는 것도 지혜인 것이다.
둘째, 소공동체에 대한 사목자의 사목적 관심도 한국적 가능성이다.
사목자의 사목적 행위를 무조건 신자들의 자율권 침해로 보는 시각도 지양되어야 한다. 물론,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사목 직무 수행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사제의 사목적 행위를 모두 성직자중심주의로 싸잡아 말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사제가 보조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신자들을 돌보는 한에서, 사제의 사목적 개입은 권장사항이지 금기사항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사목자가 소공동체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목적 자산이며 가능성 아니겠는가.
셋째, 평신도들의 자발적 사명감도 한국적 가능성이다.
천주교를 한국에 도입시킨 주역들인 평신도들은 초기 교회 창립 과정에서부터 주체적 사명감을 잃지 않았다. 얼핏 유럽교회와 미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하여 평신도 주체성을 많이 고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들은 2000년 교회사에서 사목의 대상으로 길들여진 타성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애초부터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생활을 해 왔다. 핏속을 흐르는 주인의식은 빼앗으려고 해도 빼앗기지 않는다.
제언
일반적인 소공동체 담론을 피하였다. 그것은 이 글의 전제다. 이제 비판적 관점과 가능성의 관점을 종합하며, 결론을 대신하여 총론적 제언을 해본다.
1) 세 가지 우선적 선택
앞의 고찰을 전제로 하여 한국 소공동체의 발전적 미래를 위한 제언으로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 우선적 선택을 권하고 싶다.
첫째, 보조성의 원리를 살리는 소공동체 운용이 되어야 한다.
기존의 소공동체 운용이 성직자 중심주의니 위로부터의 운동이니 의무적 색채가 농후하니 하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유는 한마디로 ‘보조성의 원리’가 전혀 작동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교회법에 명시된 교회 운용 원리는 교계 원리, 협의체 원리, 그리고 보조성의 원리다. 소공동체에 대한 비판의 요지는 소공동체가 ‘교계 원리’ 일색으로 운영될 뿐 ‘협의체 원리’는 전혀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소공동체 운동이 잘 된다고 하는 본당들을 보면 이 보조성의 원리가 이상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본다.
둘째, 다양성을 살리는 소공동체 추진이 되어야 한다.
거듭 언급하지만 한때 ‘단체’와 ‘소공동체’의 차이를 굳이 강조해서 구별했던 적이 있다. 필자는 이것이 소공동체의 확산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본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신심단체가 소공동체가 되지 못하는 이유를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은 경직된 접근법이라고 본다. 한 걸음 양보해서 만일 어떤 특정 단체가 ‘소공동체’의 필요 요건을 결여하고 있다면 필요한 것만 보충하면 되는 것이다.
요지는 이미 있는 교회 자산을 백분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양성의 시대를 넘어 융합의 시대에 살고 있다. 기존의 구역반, 기존의 신심단체, 액션단체 등의 역사적 기원을 존중하면서 그들을 소공동체 사목의 터로 활용할 줄 아는 융통성과 포용성이 필요하다.
나아가 사목의 사각지대와 소외층까지 커버하는 다양한 소공동체를 발생시키는 것도 생략할 수 없는 과제다. 본당 내에서도 가능하다.
셋째, 신자 은사 계발 및 발휘를 촉진하는 소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복음나누기 7단계나 통합성이 결여된 프로그램만 반복적으로 돌리는 것은 신자들을 우민화하거나 은사 발휘를 저해할 소지가 높다. 참여자들이 참여해서 얻는 인센티브가 보장되지 않으면 금세 싫증을 내거나 불참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단계적 성장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은사계발 및 발휘를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천교구의 경우 9단계 단계적 성장 교육을 도입하고, 매월 구반장 교육에 각 지구의 사제들이 강사로 봉사한 결과, 양적·질적 성과를 올리고 있다.
2) 주님이 세우신다
교회의 역사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경륜이 작동하고 있다. 역사를 통하여 성령의 감도가 흐르고 있다. 교회와 교회 비전은 사람이 ‘임의로’ 건설할 수도 폐기할 수도 없는 것이다. 본회퍼(D. Bonhoffer)는 ‘베드로’ 곧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마태오 복음 16장 13~18절의 말씀을 이렇게 묵상했다.
“어떤 사람도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혼자서 세웁니다. 누구든지 교회를 세우고자 한다면, 확신컨데 그는 이미 파괴를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도 원하지 않고 자신도 알지 못한 가운데 우상의 신전을 세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그분이 세우는 것이라고. / 우리는 선포해야 합니다. 그분이 세우신다고. / 사람의 눈에는 허물어지는 시대로 보이겠지만 / 그분의 눈에는 건설의 위대한 시대인 경우가 때때로 있을 수 있습니다. / 사람의 눈에는 위대한 교회의 시대로 보여도 / 그분의 눈에는 파괴의 시대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그의 교회에 선사하는 커다란 위로입니다.”
이는 소공동체 예찬론자에게도 비판자에게도 똑같은 경종이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하여 교회를 세우도록 해야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당신의 교회를 손수 세우고 계신다. 박해와 실패, 침체와 쇠퇴 속에서도 여전히 당신 방식으로 교회를 세우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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