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타비(我是他非)와 내로남불…나만 옳다고 강요해서는 안 돼
해마다 중앙일보에서는 전국의 교수들에게 의뢰하여 한 해의 삶을 포괄하여 규정할 만한 고사성어를 선정하여 발표한다. 그때마다 장안의 화제가 되곤 하는데, 지난해 교수들이 뽑은 고사성어는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한다. “나는 옳고 남들은 그르다”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생소하여 여기저기 찾아보았더니, 딱히 그 말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출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만 옳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그르다고 여기는 병폐를 꼬집어서 ‘나 아(我)’, ‘옳을 시(是)’, ‘다를 타(他)’, ‘아닐 비(非)’ 4글자를 조합해서 새롭게 만든 글귀이다.
이제껏 우리 사회에서 나는 옳고 다른 사람들은 그르다는 의미에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으로 흔히 쓰는 ‘내로남불’이 아시타비와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는데, 내로남불이 정상적인 한자어가 조합된 것이 아니다 보니, 대학의 교수들이 선정하는 고사성어로는 적절하지 않아서 아시타비라는 말을 새로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옳고 다른 이는 그르다는 뜻의 4글자 가운데 시(是)자의 쓰임이 좀 독특하다. 그 뜻을 옥편에서 찾아보면 표제의 풀이에서 ‘이 시’라고 되어 있고, 그밖에 ‘옳다’라는 뜻도 있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이’는 지시대명사 ‘이것’이라는 뜻이고, ‘시’는 글자의 발음인데, ‘이것’이라는 대명사가 뜻이 확대되어서 ‘옳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是(시)’자는 본래 ‘날 일(日)’자와 발바닥의 모양을 그린 ‘머무를 지(止)’자가 결합한 것으로 ‘해를 따라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라는 뜻이다. 즉 ‘시(是)’자는 태양이 일정한 주기로 뜨고 지는 것을 잘 따라야 ‘올바르다’라는 의미로 풀 수 있다.
한자 풀이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시(是)는 바르다는 뜻이다.(是, 直也.)”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해석은 농사가 주요 생업이었던 중국과 같은 농경사회에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삶의 기준이 되었고 그것을 잘 따라 농사짓는 것이 삶의 올바른 길이라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옥편에서 ‘시(是)’자가 ‘이것’과 ‘옳다’는 뜻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전통적으로 중국 사람들은 나에게서 가까이에 있는 이것은 옳고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저것은 그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의 중심이 되는 나라라는 의미의 ‘중국(中國)’이라는 나라 이름만 보더라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으로서 바로 세상 가운데 여기에 있으며, 자신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들은 비문명국인 오랑캐라고 여겨왔다.
이러한 인식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으로부터 우리나라나 중국이 자기를 중심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과 그 밖의 사람을 차별하는 지연이나 학연에 대한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제국주의 시절 근대화에 성공하였다는 자부심이 충만하였던 일본에서는 중국을 멸시하는 뜻에서 지나(支那)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중국이 세상의 본류가 아니라 ‘가지’일 뿐이며, 세상의 중심으로서 여기 이곳이 아닌 ‘저곳’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가지 지(支)’자와 ‘저것 나(那)’자가 결합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1793년 영국의 매카트니 사절단이 청나라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당시 건륭제(乾隆帝)는 “중국에는 없는 것이 없다.”라고 하여 서양 오랑캐들과는 거래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세상을 향한 문을 걸어 잠갔다. 결국 중국이 당시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자신들만이 옳다는 고집에 빠져 있다가 세계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근대 산업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 역시 오랜 역사 동안 중국 자신은 항상 세상의 중심이었고 늘 옳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정황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조선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 스스로 옳지 않다고 여기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려는 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때때로 자신이 처해있는 진영의 논리만을 대변하기 위해서 또는 자신의 기득권력이나 이익만을 지키기 위해서 오로지 자기만 무조건 옳고 다른 이의 의견은 그르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아예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우리 사회가 다양한 성향이 있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고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더라도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안 되지만, 자기와 다른 주장을 하는 이에게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더욱 위험한 지경으로 빠뜨릴 수도 있다.
공자가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서 “군자는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룰 줄 알되 같아지려 하지 않으며, 소인은 같아지려고는 하되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고 말했던 것처럼,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같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로울 수 있어야 바람직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조화롭다는 뜻의 ‘화(和)’자가 벼 화(禾)자와 입 구(口)자로 결합되어 있어서 언뜻 보기에 함께 밥을 나누어 먹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뜻인 것처럼 보이지만, 본래는 ‘피리 약(籥)’자와 ‘입 구(口)’자가 결합된 글자였다. 마치 피리의 구멍들이 길고 짧게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처럼,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것들이 잘 어우러져야 조화로운 사회로 나아간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는 점을 잘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