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 계룡면~ 논산 간 국도 23호선을 달리다가 공주에서 약8km쯤 떨어진 논산시 노성면의 노성초등학교 앞 왼편 길가에 ‘윤증 고택’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이곳에서 콘크리트로 포장된 농로를 약200m쯤 들어가면, 노성산 남쪽 기슭에 조선후기 유학자로 이름 높은 명재 윤증(明齋 尹拯 : 1629~1714) 고택이 있고, 그 왼편에는 노성향교(충남도기념물 제118호)가 있다.
이곳의 지명을 노성(魯城)이라고 한 것은 공자가 중국 노(魯)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기리며 공자에 버금가는 조선의 대학자 윤증을 추모하기 위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하니, 평생 관직에 오른 적이 없으나 백의정승으로 불린 명재의 인품을 엿볼 수 있다.
마을이름 교촌리(校村里)도 선생의 고택 바로 옆에 노성향교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지만, 노성향교는 본래 노성면 송당리 현재의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것을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700년 경 재축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은 것이다.
조선 숙종 때 건축된 주택으로서 거의 온전히 보존되고 있는 윤증 고택은 조선 중기 양반의 주거생활과 규모를 판단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 유형문화재인데(충남도유형문화재 제39호), 현재 후손들이 고택에서 생활하고 있어서 더욱 의미가 크다.
3,000평의 넓은 대지에 지은 50여 칸의 건물은 담장이 없이 외부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고, 마당에는 둥근 인공연못을 만들어 두었다. 또, 고택 오른쪽에 소나무를 심어서 가꾼 숲에는 병자호란 중에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자결한 선생의 어머니 정려각이 있다.
고택은 남향의 나지막한 산기슭을 배경으로 약간 높은 석축을 쌓아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매우 웅장해 보이는데, ㄷ자 모양의 안채와 손님을 맞는 사랑채 사이를 연결하는 l자 모양의 안 행랑채가 있어서 건물은 대체로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고택의 가장 뒤편 높은 곳에는 선생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 담장으로 구분되어 있다.
먼저, 마당 왼편에 있는 연못과 오른쪽에 있는 사랑채 사이를 지나서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왼편으로 안채가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 기와 건물인데, 뒤편 양쪽에 각각 곳간이 있다. 그러나 ㄷ자형 안채의 가운데 부분인 전면 5칸은 마루로 만든 대청이다.
이와 같이 대청을 넓게 만든 것은 이곳을 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한 선생은 그만큼 조상의 제사를 정성으로 모셨을 뿐만 아니라, 제사에 참여하는 가족과 친척도 무척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청에는 반자를 달지 않았으며, 또 대들보가 그대로 노출되어서 서까래가 보이는 것도 건물 안을 한층 깔끔하게 보이게 한다.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은 이런 선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성의 공간과 여성의 공간을 외관상 엄격하게 분리하면서도 동선 상으로는 서로 연결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성 공간과 여성 공간을 눈에 띄지 않게 연결했는데, 즉 남성의 영역인 사랑채의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여성의 영역인 안채를 안 행랑채라는 건물을 배치해서 구분했다.
또, 안채에서 음식을 차려내는 영역은 골방, 툇마루 등을 통해서 안 행랑채를 거쳐서 사랑채로 연결되도록 배치된 이외에 안채의 동쪽 뒤편에 며느리의 거처 공간인 건넌방과 연결되는 마당이 있다.
이곳은 시부모와 격리된 며느리만의 또 다른 내밀한 공간이 된다.
둘째, 안채에서 사랑채 사이에는 안채와 외부영역을 갈라주는 안 행랑채는 l자형인 건물이 ㄷ자인 안채와 조합되어서 ㅁ자라고 하는 건물 배치구조를 만들어서 안채를 안정적으로 보이게 했고, 또 안 행랑채가 사랑채로부터 안채를 보이지 않는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외부에서는 안 행랑채까지 돌계단을 딛고 올라서더라도 안채가 보이지 않게 배치되었다.
또,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간에는 ‘내외벽’이라고 하는 가벽을 만들었는데, 재미있게도 내외벽의 아랫부분이 뚫려있다. 주인은 안채에서 그 작은 구멍으로 방문객의 발을 확인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뒤에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셋째, 고택의 가장 꼭대기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구분된 사당을 만들었는데, 사당은 작은 쪽문을 두고 출입하도록 했다. 주자가례에 따르면 안채의 동측 후면에 사당을 두는 것이 원칙이어서 성리학자인 선생도 당연히도 그 배치를 따른 것이다.
넷째, 선생의 고택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물은 오른쪽에 2단 높이의 석축위에 팔작지붕으로 지은 사랑채인데, 본래 팔작지붕은 고위관직을 역임한 선비들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서 특히 지붕의 처마 곡선이 크게 휘어서 위로 올라간 것은 선생의 기개를 보여주는 것 같다.
사랑채는 전면에서 볼 때는 4칸이고,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인 사랑방, 그 양축 한 칸씩은 누마루와 대청인데, 사실 사랑채 중 앞면의 반 칸과 툇마루를 만든 사랑채는 나중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누마루란 높이 들어 올린 마루로서 격식을 갖춘 한옥의 중요한 구성요소이기도 한데, 이곳에서 마당의 연못이나 멀리 남쪽의 경치를 감상하기에 알맞다.
금산에서 파평 윤씨 윤황의 손자이자 윤선거의 아들로 태어난 윤증은 자를 자인(子仁), 호를 명재(明齋)라고 하는데, 지금의 논산시 노성면의 유봉 아래에서 살았다고 해서 유봉(酉峰)노인이라고도 했다.
그는 일찍부터 기호학파의 계승자인 김집과 서인의 우두머리인 우암 송시열로부터 학문을 배워서 성리학과 예학에 능통했는데(2011.12. 01. 논산 돈암서원 참조), 숙종 7년(1681) 김장생의 사계가례와 송시열의 우암가례의 대립이 생겼을 때 스승인 우암의 설을 따르지 않음으로서 우암과 갈라졌다.
이후 윤증의 학설을 추종하는 서인 일파를 소론이라 하여 그 대표가 되었는데, 윤증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절교했다고도 전한다.
아무튼 그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현종 4년(1662)때 음서로 천거된 것을 시작으로 숙종 때까지 이조참판․ 대사성․ 공조판서․ 이조판서․ 좌우참판․ 찬성․ 우의정 등 20차례 이상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한 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세상에서는 그를 백의정승이라고도 불렀다.
평생 청렴결백한 선생의 일생을 적은 ‘명재언행록’과 함께 실제 선생의 삶을 함께한 고택은 선생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과 품격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선생의 후손들은 2009년 7월 보물 제1495호인 ‘윤증 초상’ 6점 등 유물과 유품 1만여 점을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에 영구 기탁했다.
사실 후손들이 조상의 유물을 지역문화재 연구기관에 맡긴 것은 담장도 없이 허술한 고택에서의 보존관리가 어려웠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200자×18.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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