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무신’, 영주 사람 풍운아 김준(金俊)의 일대기 다뤄
- 김태환/ 월간 소백춘추 편집국장
현재 MBC에서 매주 토,일 저녁 20시 40분에(2012.02.11부터 시작) 방영되고 있는 ‘무신’ 〔김진민(연출), 이환경(극본)〕의 주인공인 김준은 우리 영주사람으로 ‘영주(榮州)’라는 지명을 있게한 인물이다. 드라마 무신은 강력한 무신 정권이 존재하던 시기의 고려를 배경으로 약 60여 년간 황제를 대신해 통치해오던 막부를 뒤엎고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노예 출신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드라마 무신의 기획의도는「야망과 권력과 사랑을 쟁취하는 꿈은 사내들의 공통된 욕망이자 소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고 나면 남은 일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다. 사나이로서... 일본의 쇼군막부 보다도 무려 오백여 년 전에. 고려에도 강력한 무신정권이 무려 백 년 간이나 존재해 있었다. 그 중 최씨 무신정권은 황제를 대신하여 60년간이나 대를 이어 국가를 통치했다. 그리고 그 정권을 엎고 최후의 주인자리에 오른 자는 최씨가의 충성스런 노예이자 가신이었던 김준이었다.
역사상 노예가 벼슬을 얻고 정권의 주인 자리에, 그것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정승 자리에까지 이른 일은 일찍이 없었다. 그 노예는 소원하던 주군의 여인을 취하였고 결국은 고려 조정 최고의 자리인 문하시중에까지 올라 국권을 통째로 거뭐쥐었다. 허구가 아닌 실록에 나와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인가.
김준이 살아가는 삶에는 온 강토가 다 찢어지고 부서져 나가는 힘겨운 민족의 수난기가 함께한다. 이른바 30년간 끈질기게 지속된 대몽항쟁사이다.
전 유럽을 휩쓸며 세계를 정복하고 거대한 대륙 중국을 먹어 치운 몽고가 고려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무인과 민초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민족자존과 생존을 위해 필사항전을 택한다. 고려인들은 아무리 짓밟혀도 끝없이 다시 일어나 무기를 들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무인들이 있었다. 아니, 정권을 움직이는 무인들의 자주정신이 그 뿌리였다. 그 중 하나가 오랜 전쟁의 힘겨운 와중에서도 팔만대장정을 조성해 낸 일이다.
오늘날도 이 일은 불가사의한 기적으로 남는다. 전시에 일으킨 이 거대한 국책사업은 민족의 영혼과 정기를 지켜내려는 온 백성들과 관민들의 합일된 염원과 기도였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과 의의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김준은 영주출신으로 태어난 연대는 알수없고 몰한 연대는 1268년(원종 9)이다.
그는 천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씨 무인정권의 마지막 계승자인 최의(崔竩)를 무너뜨리고 왕권을 회복시켜 주었던 인물이다. 처음 이름이 인준(仁俊)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같은 사적에는 바로 이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버지는 최충헌(崔忠獻)의 가내노비인 윤성(允成)이며, 활을 잘 쏘고 성품이 호탕한 호걸이었다.
박송비(朴松庇), 송길유(宋吉儒)의 추천으로 최우(崔瑀)에게 발탁된 뒤 최우의 신임을 얻어 전전승지(殿前承旨)가 되었으며, 최항(崔沆)이 정권을 세습하는 데 공을 세워 별장(別將)에 올랐다. 그러나 다시 권력을 세습한 최의는 최양백(崔良伯), 유능(柳能) 등을 신임하면서 그를 멀리 하였다. 그러나 당시 최씨정권은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흉년이 계속되어 민심이 동요하는 등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때를 틈타 최의에게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그는 유경(柳璥), 박송비(朴松庇), 최온(崔昷) 등과 최의를 제거할 것을 모의하고, 급기야 1258년(고종 45) 삼별초를 이끌고 최의의 집을 습격하여 제거함으로써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왕권을 회복시켜주었다.
이후 그는 위사공신(衛社功臣) 2등에 오르고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었다. 그러나 실권이 유경에게로 돌아가자 동생 충(沖)과 함께 다시 유경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1260년 원종이 즉위하자 1등공신에 오르고 추밀원부사 어사대부 주국 태자빈객 익양군 개국백(樞密院副史御使大夫柱國太子賓客翼陽郡開國伯)에 봉해졌으며, 1263년 수태위 참지정사 판어사대사 태자소사(守太尉參知政事判御使臺事太子少師)가 되었다.
1264년 원종이 몽골에 갈 당시에는 교정별감(敎政別監)에 임명되어 왕의 부재시에 국정을 관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이후 원종이 귀국한 뒤에는 다시 해양후(海陽候)에 책봉되어 최고권력자로서 절정의 권세를 누렸다. 이때 그의 고향이었던 순안현(順安縣; 영주의 옛이름)을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전횡이 극심하여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김준의 대몽정책은 최씨정권과 맥락이 같았다. 1264년 몽골이 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자 이를 묵살했으며, 1268년 몽골에서 사신을 보내어 김준 부자와 아우 충을 입조하라고 했을 때 장군 차송우(車松佑)와 의논하여 몽골사신을 살해하고 원종을 제거할 것을 모의했다. 그러나 아우 충이 도병마녹사 엄수안(嚴守安)의 의견에 따라 반대했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했다. 왕권강화를 위해 대몽관계의 강화를 꾀하고 있던 원종은 김준의 계획을 알게되자 김준을 없애기로 결심, 그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임연(林衍)과 강윤소(康允紹), 환관 최은(崔壄f;)·김경(金鏡)을 시켜 김준을 살해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10년간에 걸친 김준의 집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준은 주(柱), 석재(碩材), 대재(大材), 개(暟), 기(棋), 정(靖) 등 여러 아들을 두었는데, 석재와 대재는 일찍 죽고, 주는 동지추밀원사를 지냈다. 그리고 개는 문과에 급제하여 우부승선에 올랐으며, 기와 정은 장군(將軍)이었다.
김준은 그 자신의 영욕과는 별도로 ‘영주(榮州)’라는 지역의 이름 때문에 지역사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인물이다. 그가 원종으로부터 해양후에 책봉되면서 당시 순안(順安)으로 불렸던 영주도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되면서 그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이름은 그가 피살된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어 조선 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413년(태종 13) 군현의 등급 재조정이 이루어져 주(州)로서 읍세가 약한 지역은 ‘주(州)’ 대신 ‘산(山)’ 또는 ‘천(川)’으로 대체하게 함으로써 ‘영천(榮川)’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 소지역주의가 체택되면서 다시 영주라는 이름을 회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준은 『고려사』〈열전〉에 반역자의 이름으로 올라있을 만큼 권력전횡이 심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신정권의 몰락과 왕권의 회복이라는 고려 말 일대전환기의 주역을 담당했던 인물로서 상당한 역사적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것은 그의 집권행위와는 상관없이 그의 등장으로 인해 고려의 역사와 사회적 양상의 변화가 크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김준이 어떤 인물이었는가를 떠나 그로 인해 영주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분명 지역이 한 차원 높은 번영을 약속 받는 영광의 이름인 것이다. 때문에 지역사의 입장에서는 영주라는 이름에 대해 굳이 권력자 김준을 대응시키기보다는 영웅적인 한 인물이 지역에 안겨 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첫댓글 몰랐던 공부를 하고 갑니다~~~
잘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