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 고모
원보숙
친정에 고모가 네 분이다. 할아버지가 고모들 취학 전에 돌아가셔서 큰 오빠인 나의 친정아버지를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자랐다. 곱고 얌전한 할머니와는 달리 세 분은 남자처럼 씩씩했고 셋째만 할머니 성품을 닮아 얌전하고 고왔다. ‘작은고모’의 줄임 말인지 우리는 어려서부터 지금껏‘쨍 고모’라고 부르고 주변에서도 그렇게 통한다. 유난히 그 고모를 좋아했다. 성격이 비슷한 나를 고모도 조카 중 가장 예뻐하였다. 어릴 때 항상 어디든 날 데리고 다녔다. 부모처럼 따뜻한 사랑을 주었다.
나는 내 조카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모든 가족과 주위 사람에게 친절함과 사랑이 많았다. 그 시절 누구에게나 호감 가는 착하고 얌전한 미인이었다. 친척 중 인맥 넓은 분 주선으로 20대 초반에 서울 좋은 집안 큰아들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안방에서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목화솜 신행 이불을 꿰매느라 분주했다. 그동안 함께 한 추억이 아쉬워 취학 전인 나는 이불 꿰매는 곳에 엎드려 서운해 펑펑 긴 시간을 울었다. 이불 꿰매던 이웃에 사는 용동 할머니가 내 등 짝을 때리며 ‘그만 울어 시끄러워’ 하고 호통을 쳤다. 옆에 있던 우리 할머니는 ‘어린애가 서운해 그러는 걸 그냥 둬’라며 나를 다독였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은 새하얀 겨울, 친정의 삶을 뒤로하고 시집가는 날이다. 고모와의 사이가 애틋했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버지가 나를 결혼식장에 데리고 갔다. 예식장에 간다고 새 옷도 사 주었다. 가면서도 어린 마음에 서운함이 가시지 않아 눈물이 났다. 그런데 결혼식 사진에는 아름다운 신부 옆에 눈이 동그랗고 반짝이는 내가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 그 표정은 울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평온하고 흡족한 표정이다. 태어나 처음 본 하얀 면사포와 눈부신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 모습은 화양연화였다. 고모의 행복한 모습에 어린 나도 좋아하는 모습이다.
시집가고 첫 성탄절에 나에게 생전 처음 보는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냈다. 트리와 루돌프 사슴 코에 반짝이가 붙어 있는 예쁜 카드였다. 카드 속에는 편지와 만져 보지도 못한 빳빳한 천원 권 지폐 세 장이 들어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라서 한글을 깨우쳐 편지를 읽으니 더 보고 싶고 그리웠다. 그 후로도 꽃무늬가 예쁜 원피스와 맛보지 못한 쿠키 등 귀한 선물을 종종 보내왔다. 결혼 후 별천지에서 살고 있었다. 부부 사이도 좋았고 시댁에서 착함을 인정받아 사랑받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다. 친정에 올 때는 자동차 구경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반짝이는 까만 자가용을 타고 온다. 대문을 ‘삐끄덕’ 열며 ‘엄니~, 오빠~’ 하고 크게 부르며 들어왔다. 그 소리를 들으면 식구들이 모두 뛰어나간다. 친정 나들이 꾸러미엔 귀한 물건, 먹을 것, 선물 등이 푸짐했다. 우리는 신세계였다.
결혼 후 행복하게 지내는 3년 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더구나 맏며느리라서 친정에서 어른들 걱정이 컸다. 3년이 지나고 어느 날 고모부가 고모를 친정으로 데려왔다. 폐결핵에 걸려 친정에서 치료하고 요양하러 온 것이다. 의술도 발달하지 않은 그 당시 읍내 의료원에서 폐 한쪽을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철없는 나는 영문도 모르고 함께 지내는 것만 좋아하였다. 커서 생각하니 왜 의술이 좋은 서울에서 치료하지 않고 지방인 친정으로 왔을까? 이해 안 되는 부분이다. 요즘은 결혼 후 병이 나면 당연히 남편이 책임 지지만 그 시절엔 친정에서 치료해 주었나 보다.
요양하고 있는 중 1년이 지난 어느 날 고모부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편지를 읽은 후 골방으로 들어가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보았다. 이유를 모르는 나도 따라 울었다. 편지는 다정했던 고모부가 이별을 통보한 내용이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아버지는 양복과 중절모를 챙겨 쓰고 굳은 표정으로 사돈과 고모부를 만나러 서울에 갔다. 귀가 때 아버지의 얼굴빛이 밝지가 않았다. 그 후 고모는 풀이 죽어 힘없이 슬픈 나날을 보냈다.
그 당시는 지금과 달리 이런 문제에 본인보다 어른이 나서서 일을 해결했던 거 같다. 가족 모두 우울했다. 곱고 착한 고모에게 왜 이런 불행이 왔을까? 몸도 아픈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절망이었다. 그렇게 부부 사이가 좋더니만……. 온 식구가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다. 어른들은 건강에 좋다는 약은 모두 구해서 먹게 하였다. 어린 우리도 곁에서 함께 하며 마음 편하게 지내도록 해 주었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고모부와 사돈을 만나러 여러 번 서울을 다녀왔다. 아버지도 착하고 얌전한 여동생을 유난히 아끼고 시련을 극복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딸처럼 애정을 가졌다. 가족이 한마음으로 신경 쓰고 사랑으로 함께 한 결과 서서히 건강을 찾았다.
1년 가까이 아버지의 끈질긴 노력인지 어느 날 고모부가 고모를 데리러 왔다. 하늘을 날 듯 기뻤다. 이제 행복이 다시 시작된다니 새 세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고모부가 할머니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였다. 자신의 의사보다 아기 못 낳는 문제와 폐결핵으로 주변에서 부추기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
서울로 간 후 8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그 뒤로 남매를 더 낳아 행복하게 지냈다. 그런 일 후 고모부도 처가에 더 잘했다. 고모는 친정에 대한 특히 큰오빠에 대한 정이 각별했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보다 더 많이 슬퍼하였다.
그 후, 부부가 뉴질랜드에 다녀오면서 장기 비행 후유증으로 고모부가 돌아가셨다. 80이 넘은 고모! 이제는 내가 만날 때마다 용돈을 준비해드린다. 어린 시절 내게 준 사랑을 잊을 수 없다. 곱던 모습도 노년에 접어들면서 낙엽처럼 희미해진다. 눈 감으면 내 눈에만 예전의 고운 모습이 살아있다. 곱고 착한 고모가 심어 준 사랑을 생각하면 행복감이 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