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매일신문 2024년 12월 30일 월요일자
유진의 詩가 있는 풍경
백합 향
이병률
살짝 열린 작업실 문틈으로 누가 빼꼼 고개를 들였다
손가락 끝은 화병의 백합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몇 마디를 내뱉었으나 충분히 외국인이었다
그녀가 그 꽃을 어디서 샀냐고 물었다
백합 향기에 가던 길을 돌아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새벽에 들여놓은 백합의 반을 덜어 안겨주었다
누군가의 목소리만으로
그 사람 뒤를 따라간 적이 있다
누가 쓴 글씨인지를 묻고 물어
한사코 그 사람을 알고 싶어 한 적이 있다
누가 햇볕에 널어놓은 허름할 대로 허름한 빨래를 한없이 올려다보다
그만 마음이 젖고 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 ㅡㅡㅡㅡㅡ 냄새와 향기는 후각이나 마음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기운이다. 냄새 중에는 구린 냄새, 역겨운 냄새. 향기로운 냄새도 있다. 백합향기를 따라 온 낯선 얼굴에게 백합의 반을 덜어주게 되는 것처럼, 향기는 아름다움과 신뢰와 공유가 포함된 냄새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보이지는 않아도 눈치나 낌새를 알아차리게 되는 냄새다. 좋은 목소리에도, 멋진 글씨에도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신뢰감이 포함 되어 있다. 겉모습보다 속이 아름다운 사람, 가식이 없는 진솔한 사람, 공익에 정의로운 사람, 사람이 향기로운 사람이다.
‘누가 햇볕에 널어놓은 허름할 대로 허름한 빨래를 한없이 올려다보다
그만 마음이 젖고 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늘 씻고 씻어 몸과 마음이 너널해진대도 향기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생이라면, 언젠가는 순백의 청아함을 대표하는 백합의 향기만큼 티끌 없는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을까?
ㅡ 유진 시인 (첼리스트. 선린대학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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