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당당하게 살고 자신 있게 걸었는데, 다음의 희망해 모금 제안을 두드리는 못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1남 2녀를 둔 편부가정의 가장 입이다. 막내아들은 장애 2급으로 선천성 뇌형성장애(일명 간질)로 태어나 첫돌이 되기 전부터 서울삼성의료원에서 투병 생활을 해 왔다. 이병은 뇌에서 병변의 형태에 따라 깊고 낮음이 달라진다. 아들은 운이 없게도 전두엽 전체에 병변이 넓게 퍼져있다. 전두엽이라 함은 신경외과 박사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매우 수술이 힘들고 아주 위험한 부위라고 한다. 죽음 가까이에 이를 때까지 아들을 지켜보아야 했다. 하루 밤 거의 잠을 못잘 정도로 발작 증세는 나타났다. 처음 삼성의료원에서의 약물치료시에는 발작 증상이 잡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병은 나아지는 것이 아니고 약에 대한 면역인지 내성만 높아져 갔습니다. 아들의 치유불가능한 병과 중풍치매로 누워 계신 시아버지의 병수발, 그로인해 견디다 못한 아내는 우울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1999년 11월 15일 가출을 했다. 오랜 시간 연락이 두절되었다. 몇 년 전 연락은 되었으나 돌아올 기미가 없다. 왜냐하면 아들만 보면 우울증이 다시 도지기 때문이라 본다. 지금이야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피폐한 나의 가정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지가 않을 것이다.
엄마의 가출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없는 것을 알았다 3일이면 돌아올 줄 알았다 왜냐하면 엄마는 우리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나도 엄마의 소식은 감감하다 아빠의 얼굴에서 절망을 보았다 한 번도 아빠의 얼굴에서 못 보던 표정과 우수이다 3개월이 지나도 엄마의 종적은 알 수가 없다 아빠는 고통스러워했다 야간작업까지 나가며 우리와 아빠를 포함한 네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정신없이 뛰시는 아빠가 불상하다 피로에 지쳐 잠든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열 한해를 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절망을 보았다 생일이 3월이므로 7살에 입학해 5학년이지만 아픔을 안다 아빠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 아빠의 야식인 도시락을 싼다 눈물이 난다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는 우리를 버린 것일까 아빠의 괴로워하는 모습에 민지는 가슴이 아프다 우리처럼 아빠도 엄마가 그리운가 보다 우리의 아픔을 모른 채 엄마는 어디서 무엇을 할까 절망이 뭔지 모른 채 절망하는 우리를 알까 은실이도, 경애도, 민주도....... 엄마가, 아빠가 없다 어른들은 참 나쁘다 우리들의 가슴이 얼마나 망가지는지 신경도 안 쓰니까 우리의 아픔도 외면 한 채 엄마는 그렇게 소리도 없이 집을 나갔다 우리들의 아빠와 엄마들은 그렇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들을 버린다
지난해 10월 1일, 이젠 더 이상 매일 밤 발작증상에 여러 차례 시달리면 죽어가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서 서울 삼성의료원 주치의 신경외과 이문향 교수님의 도움으로 수술은 시작되었다. 수술 집도는 우리나라 신경외과 최고 권위자라는 홍승철교수님이 하였다. 1차 수술은 머리를 열고 뇌 속에 전극을 설치하는 작업이다. 장장 8시간에 걸친 대 수술이다. 메스 하나 단 영점 몇 미리라도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절박하고 무서운 시간이다.
죽음의 나락에서 숨을 멈춘 채 한나절을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어찌 할 수 없는 운명 앞에 긴 밤을 새울 수밖에 없는 가여움 근원을 찾고자 침대에 누워 사각진 하얀 방으로 가는 아들을 보며 천정이 무너질 때까지 고개를 든 채 서 있었다 그렇게 긴 시간 세월의 절반이 흘러 간 그곳에 아직 멈춘 채 서성이고 있다 확신도 없는 미로에서 또 그렇게 시작되고 칠흑 같은 고통은 이어진다
뇌 속에 깔아 논 전극을 통해 발작파가 일어나는 부위를 체크하여 그 부위의 절제수술을 하는 것이다. 일주일간 전극 깐 상태에서 증상을 체크해야 한다. 19층 특수치료실에서 여러 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24시간 지켜보는 상태로 무겁고 어두운 시간은 흘러갔다. 발작 증세가 심해 도저히 아들이 견딜 수가 없자 4일 만에 수술에 들어갔다. 8시간, 아주 세월이 멈추어진 긴 시간 나는 숨을 멈춘 채 천정만을 보고 있다. 수술은 성공리에 끝났다. 그래도 확신은 없으므로 약은 새롭게 보강된 처방으로 많은 약을 먹는다. 알코올 클리닉에 다녔던 옛 친구가 아들의 약을 보더니 기절초풍을 하는 것이다. 그 약은 일반인이 한 알만 먹어도 머리가 빙빙 돈다는 거였다. 그런데 아들은 그런 약을 한 움큼씩 먹는다. 17년 동안 내성으로 신체의 리듬이 변했으리라 본다. 수술 후 6개월 정도 지나 증상 또 나타난다. 물론 한 달에 서너 번 정도이다. 수술 전에는 매일 밤 일7,8회 이상 잠을 못잘 정도로 했다. 그 모든 원인은 병의 깊이에도 있지만 엄마가 없이 아비 혼자 민생고를 해결하며 아들의 병 수발을 완벽하게 하기가 어려워 관리 소홀로 병의 증상은 더 악화되었으리라 본다. 수술 후도 마찬가지이다. 두 딸은 있지만 큰 딸은 따로 나가 살며 연락을 두절한 상태이다. 둘째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병원을 다닌다. 그 원인이야 동생의 병에서 가장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모든 병은 가족의 선조에서 병역은 이어진다. 모든 인간의 체질은 부모의 유전인자를 갖고 태어나므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유와 또 자신의 온 몸에 돋아난 건선의 피부병도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 문학, 글을 쓴답시고 세상을 유랑하며 체험과 관념의 유희에 빠져 젊은 시절 보냈던 세월 그 유랑의 세월 속에 한 여자를 만나 살림을 시작했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모든 것은 운명이었다. 아들은 약 복용과 정기적 치료는 계속하고 있다. 관리 소홀과 약물의 영향으로 인해 치아가 매우 많이 상했다. 삼성의료원에서 치아를 치료한 결과 9개의 충치를 제거했다. 제가 보기에는 아직도 몇 개의 치아는 부실하여 또 빼야 될 것 같다. 앞으로 뼈의 성장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틀니로 있다가 임플란트로 해야 된다. 그 금액이 삼성의료원에서는 2,3천만원이 된다고 한다. 물론 충치 치료 역시 몇 백이 포함되어서다. 의료보험이 안 되는 것이라 매우 금액이 높을 수밖에 없다. 보건복지부에 민원을 넣어 보았지만 안 된다는 회신만 받았다. 민생고에 시달리다 보니 아들의 이빨은 엄두도 못 낸다. 최근 퇴행성 발목관절로 힘든 일은 못하게 되어 버스 운전을 하다 뒷바퀴 부분에 모닝 소형차가 부딪치는 것을 모르고 갔다가 뺑소니로 되었다. 2011년 4월 4일 밤 9시 경 안양 평촌 신한은행사거리, 매우 혼잡한 거리이다. 그로인해 판결도 안 난 교통사고를 지방경찰청에서는 동년 6월13일 면허를 취소하였다. 회사에서 해고되고, 법정에 서서 싸워야 되는 고단한 일만 남았다. 저의 이름 편희문을 다음에 검색하면 억울한 사정을 올린 글이 보입니다. 다음 카페 외침119에 가도 보입니다. 필명 편문으로 낸 장편소설 유화물감은 저의 아픈 현실을 쓴 책입니다. 보시고자 하신다면 착불로 보내드리 겠습니다. 메일로 주소를 넣어 주세요.(vusans5716@hanmail.net) 뒤에 받친 것을 들이 받았다는 공소사실로 사고의 전말을 왜곡시킨 안양지청 이경선검사 이름만 다음에서 검색해도 억울한 사정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경선 검사의 공소사실만을 위주로 2차 공판 시 증인들의 증언에서 충분이 모르고 갔음이 증명되었는데도 안양지원 이영욱 판사는 법관 고유 영역인 심판에 양심적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초등생이 보아도 알 수 있는 잘못된 공소사실과 공판을 양심이라 운운하며 유죄를 내린 것은 이 무슨 해괴한 짓인지 묻고 싶은데 법관의 고유 영역이라 개입금지라며 국민 신문고를 통해 진정을 냈더니 잎 다물라는 것입니다. 법으로 제정된 청원불수리, 기득권자의 보호로 이루어진 법망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항소를 바로 하여 수원지방법원 부장 판사 이은희, 2012년 1월 3일 11시20분 410호 법정에서 공판일이 잡혀 있습니다. 더욱 힘든 것은 인터넷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많은 글이 올라가서 그런지 경비밖에 할 수 없는 저의 처지에 이력서를 여러군데 내었는데 모두 연락이 없습니다. 취직자리도 막힌 듯하다. 또한 언제 나타날런지 모르는 발작증상이 매우 위험해 늘 누군가는 있어야 약도 제대로 먹이고 보호가 됩니다. 일을 가도 아들로 인해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 날 방에 죽치다 희망해에 글을 올립니다. 희망해 모금 제안 이유는 아들의 치아 비용과 생활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