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5. 주일예배설교
시편 119편 121~128절
지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구나!
(나를 구원하시는 말씀, 시편 119편-ע편)
■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있습니다. 프로는 나설 때와 가만히 있을 때를 정확히 아는데, 아마추어는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마추어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인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이 그때인가? 혹시 이미 지나간 것은 아닌가?’ 이런 불안감 때문에 삶에 평안과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프로는 나설 때와 가만히 있을 때를 정확히 알기에 늘 평화롭습니다. 단지 아마추어의 좌불안석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십니다. 나설 때와 가만히 있을 때를 몰라서 우왕좌왕(右往左往), 좌불안석하는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십니다. 그래서 응원가를 불러주십니다. 어떤 응원가일까요? ‘아자~’ 이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못 믿어? 가만히 있어!’ 이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응원가인가요? 오늘 본문입니다.
■ 오늘 본문인 121절부터 128절을 살펴볼 때, 시편 기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 반복해서 보일 것입니다. ‘기도’입니다. 모든 절의 끝부분입니다. “마옵소서.” “하소서.” “피곤하니이다.” “가르치소서.” “하소서.” “때니이다.” “사랑하나이다.” “미워하나이다.”
물론 ‘고백’이기도 하고, ‘탄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간구’, ‘간청’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입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를 응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응원가는 “기도하거라!”이십니다. “아자~” “믿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응원가는 “기도하거라!”이십니다.
그런데 응원가라고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기도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응원가이실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무엇인지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은혜의 길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길인 기도를 하라고 하실 때는 우리의 기도 상황, 즉 기도할 수밖에 없는 그 상황, 기도해야 하는 그 상황, 그리고 기도라는 그 상황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상황 종료의 버튼에 손을 얹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기도하라고 하시는 때는 모든 상황 파악을 끝내셨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거라!’는 하나님의 응원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도 응원가가 들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이 잘 안내하고 있습니다.
첫째, 상황을 그대로 보고 드리는 것입니다. 어쩌면 고발일 수도 있는 보고입니다. 믿음의 삶, 정의의 삶을 방해받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격받는 상황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121~122절입니다.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박해하는 자들” 그리고 “교만한 자들”을 주님께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만행(蠻行)이 효력이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강력한 조치 하나를 부탁드리는데,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Take good care of me, your servant.)입니다. 이것은 교만한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달라는 부탁입니다. 시편 23편 5절이 연상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처럼 주님의 챙겨주시고 보호하심을 보는 순간, 박해하는 자들과 교만한 자들은 정신이 아뜩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둘째, 말씀을 주시고 그 의미를 깨닫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123~125절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우리가 바른 삶의 길을 놓치거나 옳은 선택의 기회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오역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잘하는 것이지만, 오역하고 오해하면 다 소용없는 일이 됩니다. 아무리 열심히 배웠다고 해도, 바르게 깨우쳐야 의미가 있습니다. 바르게 해석해야 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깨달음이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126절이 이것의 중요한 예입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그들이 주님의 법을 짓밟아 버렸으니, 지금은 주님께서 일어나실 때입니다.”(새번역) “야훼여, 당신의 법을 사람들이 짓밟았사오니 나서실 때가 되었사옵니다.”(공동번역개정판)
시편 기자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의 시간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지금 일하시는구나!” 그리고 “지금도 일하시는구나!”였습니다.
아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가 시편 기자의 청원으로 읽힐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청원의 형식일 뿐, 속내는 확신입니다. 속내는 메시지를 깨달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지금 일하실 때입니다.”가 아니라, “와~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시는구나!”라는 확신입니다.
참으로 시편 기자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타이밍, 적시(適時)였습니다. “바로 지금”이라는 하나님의 타이밍을 깨달았기에 “하나님이 지금 일하십니다!”를 “하나님, 지금 일하시옵소서!”라고 에두른 표현을 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가 하자고 한다고 하시고, 하지 말라고 한다고 안 하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의 에두른 표현에 꽂히지 마시고,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도 일하고 계심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이 긴 설명에도 수긍이 안 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127절과 128절을 보시죠. 둘 다,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것을 눈여겨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어는 앞의 내용이나 이야기를 전제로 이어지는 일종의 결론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다’는 의미가 “그러므로”입니다.
그렇다면 126절을 잇는 결론으로서의 127절과 128절을 정리하면 어떤 의미가 될까요? ‘하나님, 지금 일하실 때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합니다.’일까요? 아니면, ‘주님이 지금(도) 일하시는구나. 제가 신이 나서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합니다.’일까요?
후자입니다. ‘주님이 지금(도) 일하시는구나. 제가 신이 나서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합니다.’입니다.
우리의 간구를 요구하시고,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지만,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의 여부와 타이밍을 정하십니다. 그러나 매우 적확한 시간에 일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일하십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않는 것이 바른 해석이고 옳은 이해입니다.
그런데 하나 더 분명히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금”은 ‘now’라는 의미와 함께 ‘always’(항상, 늘, 언제나)라는 의미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정해놓고 일하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없으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일하신다는 사실도 변함없으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시편 121편을 통해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어떻습니까? 분명하죠?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금”은 ‘현재’이자 ‘언제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늘 바로 지금’이십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와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지금도’ 우리와 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한 날이 있지만,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에 빠지는 날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회의감을 갖는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입니다. 이것이 정직한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정직한 인정이 지금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지름길이 됩니다. 125절처럼 겸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I serve you, so let me understand your teachings.)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회의감도 아니고, 자신감도 아닌, 확신과 맡김입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일하시는 하나님께, 그리고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나게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이 모습을 여러분에게서 매일 보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죠?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