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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법사 영축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절로절로
불기 2560년 삼월 열사흘(음력)
마산 출발 : 이른 아침 다섯 시
월정사 가람 배치
월정사 연혁
창건기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는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은 월정사는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산(聖山)으로, 산 전체가 불교성지가 되는 곳은 남한에서는 오대산이 유일하다. 월정사는 자장율사에 의해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창건된다.
자장은 중국으로 유학하여 산서성 오대산의 태화지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이때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사리와 가사를 전해준 뒤, 신라에서도 오대산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주게 된다. 이후 귀국하여 찾게 된 곳이 강원도 오대산이며, 이때 월정사를 창건하고 오대 중 중대에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조성하게 된다.
중창기
오대산신앙은 자장에 의한 문수신앙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에 이르면, 보천태자와 성덕왕에 의해서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하는 5만 보살신앙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정립되는 것이, 중앙의 1만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동쪽의 1만 관세음, 남쪽의 1만 지장, 서쪽의 1만 대세지, 북쪽의 1만 미륵보살의 5만 보살이다. 이때부터 월정사는 오대산의 다양한 신앙과 사찰들을 총괄하는 중심사찰의 위상을 확보하게 된다.
월정사는 이후 통일신라 말과 고려 초에는, 9산 선문 중 하나인 강릉 사굴산문의 영향권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는 나옹스님이 주석하게 되고, 조선 초에는 나옹문도들에 의한 불사와 정비가 이루어진다.
이후 조선 중기에 이르면 사명당이 주석하고, 또 조선왕실의 외사고(外史庫)가 오대산에 들어오게 되면서 숭유억불기에도 사세가 번성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이번에는 역으로 사굴산문의 본찰인 굴산사가 오대산의 영향권으로 편입되기에 이른다.
현대
월정사는 해방을 전후해서 종정(교정)을 4번이나 역임하신 한암스님께서 주석하시며, 승가오칙(僧伽五則) 통한 청정한 기상을 진작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월정사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의 위상을 확립하고, 동국대학교 건립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1.4후퇴 과정 중에, 아군에 의해 월정사를 비롯한 오대산의 암자들이 전소되면서, 오대산은 개산(開山) 이래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럼에도 화엄학의 대가이며, 불교경전은 물론 동양사상 전반을 아우른 탄허스님께서 주석하시며 월정사는 점차 추슬러진다. 이때 탄허스님의 제자 만화스님이 현 적광전을 중건하고, 이후 현해스님이 대법륜전을 건립한다. 그리고 현 주지인 정념스님에 의한 각고의 노력으로, 가람이 일신되면서 오대산의 성세가 재현되기에 이른다. 현재 월정사는 명상마을과 성보박물관 등을 전통사찰의 영역 밖에 새롭게 조성하면서, 2018평창 동계올림픽을 문화올림픽으로 전개하는 메카로 작용하고 있다.
탄허 스님의 친필 현판이 걸린 월정사 일주문
전나무 숲길
오대산에는 소나무가 자라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나옹 스님이 발우에 음식을 담아 가던 중 그 위로 소나무에 쌓인 눈이 떨어지자 산신령이 노해서 소나무를 쫓아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대산에는 칡도 자라지 않는데, 이 역시 나옹 스님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집니다. 하루는 북대 미륵암의 나한상을 상원사로 옮겨야 했는데, 이렇게 길이 머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스님들이 모두 꺼리자 나옹스님이 나한전에 가서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꼭 이 산승이 옮겨야겠습니까?' 했다는 겁니다. 그러자 나한상들이 벌떡 일어나 상원사까지 걸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상원사에서 헤아려 보니 한 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나한 중 한 분이 그만 칡넝쿨에 걸려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서 칡도 그만 오대산 밖으로 추방되었다고 하지요.
월정사 전나무숲길은 부안 내소사, 남양주 광릉수목원과 더불어 한국 3대 전나무 숲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곳입니다.
월정사 전나무 숲은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1km 남짓한 길 양쪽에 있습니다. 평균 수령 80년이 넘는 전나무가 자그마치 1700여 그루나 된다고 합니다.
사찰로 들어가는 세 개의 문 중 첫 번째 문인 일주문 안쪽으로 숲이 조성돼 있기 때문에 전나무 숲은 월정사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정사는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고 온 자장율사가 643년 지금의 오대산에 초막을 짓고 수행을 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금강교
월정사 전나무 숲 끝 무렵에 월정사에 들어오는 다리가 한 폭의 그림처럼 환상적인 모습이다. 직선과 곡선의 아름다운 조합이다. 아름다운 다리 밑의 맑은 물이 세속의 찌든 마음을 시원하게 씻어줄 것만 같다
천왕문
금강루(金剛樓)
월정사의 금강루는 사천왕문을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월정사는 불이문의 자리에 금강문을 두고 있다. 금강문의 오른쪽에는 아형 금강역사상이라고도 하는 나라연금강이, 왼쪽에는 훔형 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 우는 밀적금강이 있으며 특히 밀적금강역사는 지혜의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한다. 이는 일체만물의 생성에서부터 소멸까지를 표현한 것으로 금강역사의 강한 힘과 지혜로 불법을 호지(護持)하고 사찰을 수호하며 불교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 2층 누각으로 1997년 12월 현해스님이 착공하여 1999년 10월에 낙성했다.
적광전
월정사의 큰 법당으로 주존으로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이나 석굴암의 본존불 형태를 그대로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정면 다섯칸, 측면 세칸의 매우 큰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양식의 전각이다. 적광전의 현판과 주련의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적광전의 위용과 걸맞게 힘차게 써내려간 주연의 눈길이 멈췄다. 탄허(呑虛)스님의 친필이다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畿千秋
眞身舍利金猶在
普使群生禮不休
적광전의 쭉쭉 뻗은 서까래는 어쩌면 그리움이다. 천년을 기다리고 또 천년을 기다리는 그리운 님의 아름다운 마음 같다고나 할까...
적광전의 추녀와 아름다운 단청은 하늘을 날아갈 듯 수려하다. 마치 한복을 입은 여인의 화려한 치마폭이 바람에 날리는 듯 미의 극치이다.
적광전 본존 석가모니불
석조보살좌상(좌상의 전체 높이는 1.8미터이며 보물 제139호)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탑을 향하여 오른쪽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공양을 드리는 모습을 한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입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부처님을 바라보고 있는 이 보살상을 일명 약왕보살(藥王菩薩)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일대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된 이 보살상은 턱이 약간 길고 눈두덩이 두껍고 뺨은 도톰하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어 복스럽게 느껴진다. 머리위에 높다란 원통형 관을 쓰고 있는데 관 옆에 작은 구멍이 얕게 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 장식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보발(寶髮)은 양 어깨의 앞과 뒤로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고, 두 귀는 보발 등으로 살짝 감추어져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기고 앞가슴은 영락으로 장엄한 채 두 손은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을 잡고 있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금 아래로 내려놓은 오른쪽 팔꿈치는 아래에 받침을 괴었는데, 재미있게도 이 받침은 동자상(童子像)이다. 대좌는 둥글며 커다란 중판연화문(重辦蓮花文)을 조각했다.
이 보살은 탑을 향하여 한가운데가 아닌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쳐 앉아 있고, 상체가 하체에 견주어 큰데 이것은 우리 눈의 착시현상을 감안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것은 고대 인도의 관습에 따라 자신을 낮추고 스승에게 최상의 존경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보살상이 약왕보살임은 법화경에 잘 나와 있다. 법화경 약왕보살 본사품에는 과거 일월정명덕(日月淨明德)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희견보살(喜見菩薩)이 부처님으로부터 법화경 설법을 듣고 현일체 색신삼매(炫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환희심에 가득한 보살은 여러 가지 공양을 올렸고, 마침내 천이백 년 동안 향을 먹고 몸에 바른 후 자신의 몸을 태우며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몸을 받아 일월정명덕국(日月淨明德國)의 왕자로 태어났을 때 일월정명덕여래는 그가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 희견보살은 부처님의 사리를 수습하여 팔만사천의 사리탑을 세우고 탑마다 보배로 만든 깃발과 풍경을 매달아서 장엄하게 꾸몄다. 그러고도 모자라 탑 앞에서 자신을 두 팔을 태우며 칠만 이천 세 동안 사리탑을 공양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약왕보살이다.
팔각구층탑(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경의 작품이며 국보 제 48호)
월정사의 본당인 적광전의 앞뜰 중앙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팔각 구층 석탑이 서 있다. 팔각구층 석탑은 연꽃무늬로 치장한 이층 기단과 균등하고 우아한 조형미를 갖춘 탑신 그리고 완벽한 형태의 금동장식으로 장엄한 상륜부 등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뛰어난 석탑이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하나, 그 무렵의 탑들은 평면 정방형에 삼층 또는 오층의 탑으로 이루어진 것에 견주어, 이 탑은 평면이 팔각형이며 탑의 층수도 구층에 이르는 늘씬한 자태를 이루어 고려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탑은 전체를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상륜부에 일부 금동장식을 더하였는데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손상을 입은 부분이 더러 있으나 오늘날 까지도 본래의 형태를 그대로 간직해 오고 있다. 기단은 아래층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연꽃 장식을 베풀었다. 그 위로는 굄돌을 놓아 위층 기단을 정성스레 받들어 기단 전체가 마치 부처님의 연꽃 대좌처럼 장식 되었다. 그 위에 탑신을 받았으니 탑신은 곧 부처님이다. 탑신 안에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으니 불사리는 부처님의 진신이나 다를 바 없고 그러한 진신의 부처님이 연꽃 대좌 모양의 기단위에 계신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기단 위에는 부처님을 앉히기 위한 방석과 같은 석재를 별도로 끼웠으며 탑 앞의 석조보살 좌상도 부처님과 같은 탑 앞에서 공양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탑신은 각 층마다 줄어듦이 적고 층수는 구층을 헤아려 탑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팔각은 불교의 실천수행에 기본이 되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지고 일층의 사면에는 네모난 감실이 하나씩 있는데, 남면의 감실이 가장 크며 문틀을 단 흔적도 있다.
몸돌은 모서리마다 귀기둥이 새겨지고 끝은 밑면이 수평이고 위는 곡면으로 처리하여 추녀 끝이 살짝 위로 솟아 가뜬해 보이며 추녀 끝마다 풍탁이 달려 탑은 언제나 바람의 향기를 음미한다. 흐트러짐이 없는 정연한 상륜은 보탑의 격조를 한층 더하여 주며, 여기에 금동장식을 더하여 탑 위에 보관을 얹은 듯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하여 보탑의 절정부는 세련된 조형미를 유감없이 발휘 하였다.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 1970년 해체보수를 통하여 1층 2층 6층 9층을 새 돌로 갈았으며 그 당시에 1층과 5층에서 총 12점의 사리구가 발견이 되었다. 은제의 불상 1구와 4점의 청동 거울, 금동 향합과 향주머니, 진신사리경 등의 총 12점의 유물들은 2003년 6월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또한 2000년 8월 월정사석조보살좌상 보수공사 시에 지하 1m아래에서 탑의 기단부로 보이는 또 하나의 유구가 발견이 되어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팔각구층석탑은 높이 15.2미터로 우리나라의 팔각석탑으로는 가장 크다. 그뿐만 아니라 그 아름다움에서도 단연 으뜸이며 고려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주목받고 있다.
불사당시 조중훈 회장의 집 정원에 있던 석등을 이곳에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월정사는 1950년 한국전쟁을 맞아 목욕탕 1동을 제외하고 칠불보전을 비롯한 21동의 건물과 성보문화재가 모두 잿더미가 됐다. 남과 북이 대치하는 지점에 위치한 오대산은 전쟁 전부터 격렬한 전투장이었다. 북대 미륵암과 사찰 위 회사거리 사찰 아래 동산 2구 등에는 각 1개 중 소대가 주둔할 정도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오대산이 곧바로 북한군 점령지역으로 떨어져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다 유엔군의 1차 북진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밀려 남으로 후퇴하는 과정에 결국 피해를 입게 된다. 조계종 총무원이 펴낸〈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강원도 편에 따르면 ‘1951년 1월 2~3일 경 오대산중은 여기저기 소각되는 산내 사암와 민가들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피난민들로 아비귀환이었지만 월정사는 소각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소각을 면하고자 하는 월정사 대중들의 눈물겨운 노력과 월정사가 가진 역사직 지역적 위치 때문에 국군이 주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이 책은 하지만 “국군의 명령을 받은 민간인 3명에 의해 결국 22동의 전각이 불탔다”고 한다. 당시 이 지역의 소각을 명령한 책임자는 미8군 사령관 워커와 이를 하달 받아 예하 부대에 지시한 동부전선의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이라고 이 책은 지적하고 있다. 두 사람 중 워커는 초토화 명령을 하달한 다음날 서부전선 시찰도중 자동차 사고로 숨지고, 김장군은 경비행기로 이동하다 대관령 인근 발왕산에 추락사 했다고 한다. 그 후 사찰 전소시킨 업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고인의 아들이 월정사에 와 참회하고 위패를 월정사 수광전(지장전)에 모셔 놓은 상태다.
한진그룹 전조중훈 회장 송덕비
월정사는 절실한 불교신자인 한진그룹의 창업자인 故조중훈회장의 수십 년 전부터 5억 10억씩의 큰 시주로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먼저 가장 돋보이게 큰 불사를 이루었던 절이라고 합니다.
보통 33 관음성지에 가면 관음전에 현판이 붙어 있으나 이곳 월정사는 탬플 스테이를 진행하는 이곳에 관음성지 현판이 붙어 있어 쉽사리 찾을 수가 없다.
상원사 관대걸이
상원사는 세조와 관련된 재미난 일화가 많이 전한다. 그 중에 하나가 세조가 자신의 어의를 놓았던 관대걸이이다. 관대걸이는 상원사 초입에 있는데, 문수보살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월정사에 들른 세조는 상원사에 오르기 전 계곡물에 몸을 씻으려고 하는데, 신하들을 모두 물러나게 하고 때마침 지나던 동자승에게 몸을 맡겼다. 왕인 자신의 몸을 들어내는 게 껄끄러웠던지 세조는 동자승에게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자 동자승은 세조에게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며 사라져버렸다. 그 후 세조 몸에 났던 종기는 씻은 듯이 나았다. 자장율사도 만나지 못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는 이 이야기는 승려 못지않은 세조의 불심을 보여준다.
상원사
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선원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일찍부터 월정사 산내 암자에 그치지 않는 명성을 누려 오고 있다. 특히 사람이 자주 다니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데도 깊은 산사의 숙연한 분위기가 매우 뛰어나, 참선수행으로써 본래의 참 면목을 깨우치려는 눈 푸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쫓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색(李穡)의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 에는 고려 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英露庵) 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고 적혀있다.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 에 젖게 하라' 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근세에는 방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온 뒤로 상원사에서 이십칠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수도 정진하였으며 수련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오늘날에도 전국에서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불교 성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상원사 고양이 석상
조선 제7대왕 세조는 고양이와 인연이 깊은 임금이다. 온몸에 생긴 종기로 고생하던 세조가 상원사에 몸을 치료하고 이듬해 다시 찾았을 때의 일이다. 세조가 법당으로 들어서서 예불을 올리려는 순간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이상한 생각이 든 세조는 즉시 병사를 풀어 법당을 뒤지게 했고, 그 결과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숨어 있던 자객 셋을 발견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자객의 칼에 의해 세조 목숨이 위태로웠음이 분명했다. 하여 세조는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찾았지만 고양이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세조는 그 고양이에게 직접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차선책으로 논 5백 섬지기를 절에 내리면서 해마다 고양이를 위해 제사 지내도록 명했다. 이로 인해 이때부터 절해는 묘전(猫田 : 고양이 논), 묘답(猫畓)이란 명칭이 생겼으며 절에 바치는 쌀을 ‘고양이를 위한 쌀’이라는 뜻에서 ‘고양미’로 불렀다. 일설에 따르면 그 후 ‘고양미’가 ‘공양미’로 발음이 변했고,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이 모셔진 상원사 청량선원 입구 계단 좌우에 있는 고양이 석상은 그 사건을 기린 조각이라고 한다. 또 세조는 궁궐로 돌아와서 서울 근교 사찰에 같은 지시를 내렸고, 왕명으로 전국에서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나라에서 고양이를 죽이는 일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 데 없는 이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다.
조선 태종 때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다시 옮겨진 것으로,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 범종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용뉴(龍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종신(鐘身)에 있는 상대, 하대, 4유곽(乳廓)의 문양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2 ~ 4인의 작은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卷紋)이 새겨졌고, 종복(鐘復)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연화문(八瓣蓮花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箜篌)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 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채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 년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종 끝부분이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鐘身形), 상대와 하대 및 4유곽 등의 주조적인 특징은 한국 종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어 이후의 모든 종이 계승되었다. 이 종의 소재 사명(寺名)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경북 안동 본부(本府) 문류(門樓)에 걸려 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종은 안동 근처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가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 때 안동 문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음으로 사람들이 종 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 곳의 유곽 안에 1곽(廓)의 종유가 하나 없다. 이러한 고사는 대종 운반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지만 민속신앙의 한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문수동자좌상(크기는 98센티미터이며, 국보 221호)
나무로 조성된 불상이며, 보관이 없는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가렸으며 얼굴은 양 볼을 도톰하게 하여 천진해 보인다. 이목구비는 온화하고 적당히 가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인다.
가슴에는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치고 오른편 가슴 쪽으로 치우쳐 드러난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가슴 밑으로 띠를 매었는데 옷 주름이 명확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약지를 맞댈 듯한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이 불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1984년 7월 문수동자상에서 조성발원문 등 23점의 복장(腹藏)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불상이 조선 세조 12년(1466)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불상에서 조선 전기 불상으로 전개되는 불상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 발원문과 함께 나온 조선시대 초기의 의상과 다수의 불경은 조선 복식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수동자상은 조선 세조 대왕이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렸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등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병이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낫기를 발원하였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가 목욕하고 있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승(童僧)에게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승이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등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조가 당시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렸으나 잘 그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했다. 세조가 이러저러한 모습을 설명해 주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 그리겠다고 설명도 듣지 않았다. 이윽고 그려온 문수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고 기쁜 마음에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하자 노스님은 "나는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 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결국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 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23점의 복장유물은 불상에도 사리를 보장하고 복장을 만들어 넣는 매우 드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유물로는 의숙공주발원문, 문수상등중수발원문, 백지묵서진언집(白紙墨書眞言集) 두루마리 대방광불 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대방강원 각수다라요의경, 육경합부, 명주적삼, 생명주적삼, 금동제 사리함, 사리, 수정구슬, 백색수정 사리병, 세조의 어의(御衣)를 싼 노랑색 명주 보자기 등이 있으며 전시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하고 있다.
중대 사자암
적멸보궁의 수호 암자인 중대 사자암은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하여 일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상원사에서 적멸보궁 가는 길을 이십 여분 올라가다보면 만나게 된다. 조선 태종 1400년 11월 중창되었으며 이후 왕실의 내원당(內願堂)으로 명종 대에 승영(僧營)사찰로 보호되기 시작하였고 1644년부터 1646년 사이에 중수되었다. 이후에는 왕실보호로 사세(寺勢)를 유지하고 건물을 보수해 나갔으며, 1878(고종 15년)년 재건되어 요사채로 사용되던 향각(香閣)이 낡고 헐어 1999년 퇴우 정념스님께서 제불 보살님께 발원하고 오대(五臺)를 상징하는 오층으로 향각을 신축하여 2006년 8월에 완공하였다. 중대 사자암의 법당인 비로전(毘盧殿)은 화엄경의 주불이신 비로자나부처님을 모셨으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로 조성했다. 비로전 내 벽체 사방의 8면에 각각 다섯 사자좌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상계(上界)에 500문수보살상과 하계(下界)에 500문수동자상 세계가 펼쳐져 있다. 세계최초로 조성된 양각으로 새긴 극락보수 삼존불상 후불탱화의 장엄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외경심을 느끼게 한다.
서대 수정암 가는 길
신라 보천태자와 우통수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태자는 누구인가?
보천(보질도)은 신문왕(=정신왕)의 둘째 아들이며 효명태자의 형으로, 후에 왕위를 사양하고 중국 구화산(울진국 장천굴)에서 입적(원적)하였다.
효명은 보천의 동생으로 31대 신문왕(=정신왕 : 681-692)의 셋째 아들이며 32대 효소왕(692-701, 첫째 아들)에 이어 33대 성덕왕(702-737)이 되었다. <삼국유사> '보즐도 태자 전기'에 '이에 사람들은 오대산에 이르러 두 태자를 모시고 서울(경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보즐도(효명)태자는 울면서 돌아 가려하지 않으므로 효명태자를 모시고 돌아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왕위에 20여 년 있었다. 신룡(神龍) 원년(705) 3월 8일에 처음 진여원을 세웠다고 한다.'고 기록되었으며 같은 책 '대산 오만진신'조에도 '신룡(神龍) 원년(성덕왕 4년ㆍ705) 을사 3월 초나흘에 비로소 진여원을 고쳐 세웠다. 이때 왕은 백관을 친히 데리고 산에 와서 전당(殿堂)을 세우고 또한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당에 모셨다. 이곳에 지식(知識), 영변(靈卞) 등 다섯 명으로 하여금 화엄경을 오래 전독(轉讀)하게 하고 화엄사(華嚴社)를 조직하여 오랫동안 비용을 대었다. 해마다 춘추로 창조(倉租) 1백 석과 정유(淨油)한섬을 바치도록 규칙(인근 주현)을 정했고 주변의 땅을 하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동생 효명은 성덕왕으로, 자기 형 보천태자를 위하여 오대산을 찾았고 전당을 세우고 주변의 전답을 하사했음을 알 수 있다.
보천은 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지장왕보살이 되었다.
중국의 <구화산 화성사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 문헌에는 '지장왕보살 김교각(※보천태자)은 713년 24세의 나이로 홀연히 당나라로 건너가니 이때가 성덕왕 12년이다. 99세(794년, 정원 10)로 열반하자 제자湧?남대 지장암에 '육신보전'을 세우고 육신불을 안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김교각은 '스스로 왕자'라 하였고 다른 문헌에는 '왕의 근속'이라 기록되었는데 이는 '신문왕의 왕자이며 성덕왕의 형이므로 근속'이라 호칭, 문제가 해결된다. 그리고 출생년도는 689년이며 오대산에 입산 할 때의 나이는 14세로 산출되어 보천태자가 곧 지장왕보살 김교각임이 입증된다.
▷ 보천태자를 지장왕보살로 추정하는 까닭 10가지
① 역사적 시대가 정확히 일치(신문왕부터 성덕왕 때까지)한다.
② 울진국(울릉도) 장천굴은 해외를 지칭하며 중국 구화산으로 추정할 수 있다.
③ 보천이나 김교각은 왕자(신문왕)로 동일인물이다.
④ 또 지장왕보살은 왕(성덕왕)의 근속이었다.
⑤ 두 사람 모두 차(茶)를 알고 사랑했으며 마시고 헌다하였다.
⑥ 구화산에서 백토를 먹었는데 강원도에 백토를 먹는 풍속이 있다.
⑦ 두 사람 모두 신통력을 부렸다. 보천이 하늘을 난다하였고 지장이 가사로 산을 덥었다고 하였다.
⑧ 말년에 두 사람 모두 주변 사람들이나 천인들(정거천)에게 지극한 존경을 받았다.
⑨ 두 사람 모두 깊이 생각하는 선(禪)에 조예가 깊었다.
⑩ 두 사람 모두 부처님(문수-지장보살 등)을 지극 정성으로 모신 종교인이었다.
위와 같이 오대산 우통수는 신라 때는 우리나라 최초 문헌에 기록된 차샘(茶泉)이었고 조선 때는 한강의 시원(始源-역사적인 발원지)이었으며 우리나라 명수(名水-1. 달천, 2. 우통수. 3, 삼타수)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전망이 일품인 명당터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강(漢水)의 명칭이 유래된 역사 깊은 차유적지이기도 하다.
오대산에는 5개의 암자가있다고 한다.
한 암자에 부처님이 1만명씩 상주하신다는 전설이 있다.
동쪽의 동대산 밑에 동대 관음암이있어 1만 관세음보살이 상주하시고 남대 지장암에는 1만 지장보살이 상주하시며 지옥의 중생을 구제해주시고 서대 염불암에는 1만 대세지보살이 상주하시며 서방정토로 인도해 주시고 북대 미륵암에는 미래의 부처이신 미륵불께서 상주하신다 한다. 그리고 중대 사자암에는 적멸보궁에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중생을 부처로 인도하시고 계신다.
이곳 염불암은 스님 혼자서 수행하고 계시며 철저히 외로움을 떠나버리고 세상을 떠나버리고 중생의 세계를 떠나버린 인간의 근본을 얻고자 공부하는 수행처이다.
세상에서 가장 인간의 내면을 찾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듯 가장 자연과 잘 어울리는 너와 집 한채에 1평정도의 법당에는 모든 군더더기를 다 털어낸 모습으로 조그마한 부처님 불상 딱 하나뿐이다.
서대 수정암
상원사에서 중대 사자암으로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자그마한 길이 하나 있다. 이 길을 따라 40여 분쯤 올라가면 조그마한 우물이 있는데 이것이 한강의 발원인 우통수(于筒水)이다. 빛깔과 맛이 특이하며 무게도 보통 물보다 무겁다. 사람들은 우통수의 빛과 맛이 변하지 않음이 마치 중국 양자강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뜻에서 중냉(中冷) 이라 부른다.
여러 줄기의 냇물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에 이르지만 중냉의 물맛은 다른 물들과 어울리지 않고 그 찬 맛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고사가 있다. 그 옆에 자그마한 너와지붕의 서대 염불암이 있다. 암자라 하기에는 너무 초라한데 지금은 참선 수도하는 스님들의 토굴처로 이용되고 있다.
장령산(長嶺山) 아래 자리 잡은 이 암자는 옛날에는 수정암(水精菴)이라 했는데, 월정사(月精寺)의 정(精)이 이 암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라의 보천, 효명 태자가 이곳에서 수도하며 날마다 우통수의 물을 길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고 하며, 무량수불을 주불로 하여 일만의 대세지보살님이 계신다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