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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른 감이 있지만 올해 한국 영화계를 정리해본다면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한국영화가 전반적으로 놀라운 흥행을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두편의 1천만짜리 영화다. 7월 개봉한 <도둑들>이 현재까지 1290만명의 관객을 동원해(모든 통계는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른 것이며, 올해 1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의 통계를 기준으로 한다)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작인 <괴물>의 1300만명 기록에 육박했고, 9월 개봉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1131만명을 기록했다.
2003년 12월24일 개봉한 <실미도>와 2004년 2월5일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가 연이어 1천만 관객을 기록했던 적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한 해에 1천만 관객 영화 두편이 나온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어차피 이런 식의 기록이란 통계 놀음인 탓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지만, 다른 성적들을 보면 올해 한국영화가 다른 해와 확연히 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천만 관객 영화 두편을 빼더라도 올해 400만명 이상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모두 6편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내 아내의 모든 것> <연가시> <건축학 개론> <댄싱퀸>이 그들. 한국영화계에서 전통적으로 흥행작과 비 흥행작을 나누는 기준인 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무려 25편이다.
물론 개중에는 <R2B: 리턴투베이스>처럼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인 탓에 100만 관객이 넘었음에도 수익면에서는 쪽박 난 영화도 존재하지만. 아무튼 이같은 흥행작의 홍수 속에서 10월말까지 한국영화를 본 관객은 9174만명으로 이미 지난해를 통틀어 한국영화가 동원한 8286만명을 넘어선지 오래다. 영화계는 올해 말까지 한국영화가 1억 관객이라는 ‘넘사벽’을 무난히 돌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한국영화의 ‘이상 흥행 과열’의 징후는 연초부터 감지됐다. 1월에 나란히 개봉한 <댄싱퀸>과 <부러진 화살>이 나란히 400만과 300만 관객을 동원하더니 2월 초에 개봉한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가 460만명을 끌어들였고, 전통적인 비수기로 분류되는 3월에는 <건축학 개론>이 4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 와중에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로 취급됐던 영화들도 선전했다. <러브픽션> <화차> <은교> 등이 그것이다. 또 한동안 흥행전선의 일선에서 물러났던 성인 취향 영화 <간기남>이나 가족영화 또는 어린이 영화인 <점박이: 한반도의 공룡 3D> 같은 영화조차 100만 관객을 돌파하기도 했다. 올해처럼 초특급 흥행작과 고만고만한 흥행작이, 업계 용어로 대박과 중박이 고루 기록된 해는 근래 들어 존재하지 않았다.
흥행대폭발 원인에 대한 분석들
이같은 한국영화의 성공의 요인은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되고 있다. 첫번째 견해는 오랜 기간 숙성된 작품들이 때를 맞아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병목 이후 효과’라고 부르고 싶다. 이 견해는 2007년의 한국영화 대몰락 이후 투자받지 못한 채 개 발에 개 발만 거듭하던 영화들이 시장 상황의 호조 덕분에 마침내 투자를 받으면서 꽃을 피웠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투자가 안 되다 보니 시나리오를 거듭 고치고 다듬었고 이런저런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하다 보니 마침내 투자를 받았을 때 탄탄하고 긴장감 있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견해는 한국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안정화됐다는 것이다. ‘30대 주류론’이라 할만한 이 견해는 1990년대 청소년 시절 한국영화를 보며 성장한 세대들이 주 관객층으로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영화를 선호하게 됐다는 것이다. 한국영화의 신르네상스가 1992년의 <결혼이야기>부터 태동하기 시작해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임상수,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처럼 놀라운 신인감독이 쏟아져 나오는 1998년을 기점으로 발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30대를 맞이한 90년대 중후반 학번이 한국영화 소비의 중심이 된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X세대의 첫 성장담’이라는 <건축학 개론>의 대성공은 이 같은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대표적 사례다.
세번째 견해는 앞선 두번째 견해와 살짝 맞물리지만 약간 다른 차원의 조망으로, 성인 관객들이 꾸준히 확대된 결과라는 주장이다. ‘성인 관객 확장론’은 앞에 언급한 <간기남> 뿐 아니라 올해는 유독 19금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한 데 주목한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후궁: 제왕의 첩> <이웃사람> <공모자들><은교> <돈의 맛> 등이 그것이다.
상영등급으로는 12세 이상 관람가이거나 15세 이상 관람가이지만, 실제로는 성인 취향 영화라 할 수 있는 <댄싱퀸> <내 아내의 모든 것> <부러진 화살> 같은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다. 두번째와 세번째의 견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여성이 중심을 이뤘던 영화 관람 시장이 보다 다변화됐다는 입장을 취한다.
네번째는 올해 날씨가 유독 더웠던 탓에 비교적 값싸게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극장에 사람들이 몰렸다는 견해다. 실제로 올해 8월 한국영화 관객수는 1700만명을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한달 관객으로는 최고치에 해당한다. ‘혹서 효과’의 최대 수혜자는 이 기간동안 890만명의 관객을 맞이한 <도둑들>일 것이며, 같은 기간동안 435만명을 끌어들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그 다음일 것이다.
마지막은 한국영화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는 대기업의 제작 관리 시스템이 안정화됐다는 견해다. CJ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등 대기업 계열 투자배급사들이 각각의 영화의 생산에 깊숙이 개입하면서 수익성에서 안정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 같은 견해는 ‘슈퍼갑 효과’라 부를 수 있겠다. 이들은 그동안 투자배급 형식을 변화시켜 왔다.
애초 제작사가 만드는 영화에 투자하고 이를 배급하던 단순한 활동에서 점차 자본의 힘을 바탕으로 제작 관련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게 됐다는 이야기다. 그 결과 상업적으로 잠재력을 가진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게 됐다는 것이 이 견해의 요체다.
이 다섯가지 견해는 나름의 신빙성을 갖고 있으며, 결정적인 허점 또한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 다섯가지의 요소가 한 데 어우러져 2012년의 대호황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요소들이 어떤 배합률로 뒤섞였기에 이런 현상이 만들어진 것인지는 아직 단정짓기 힘들다. 하지만 올해의 좋은 분위기를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올해 흥행 대폭발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흥행의 지속을 위한 조건은?
이를테면 첫번째 요소, 그러니까 숙성된 시나리오와 충분한 준비 기간이 올해 한국영화 빅뱅의 주된 동인이었다고 한다면, 앞으로 몇년을 기다려야 또 다시 좋은 시나리오가 쏟아져 나온다는 결론이 내려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시나리오 개발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현재 많은 제작사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는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비용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 대기업 투자배급사들이 시나리오 개발비를 투자 형식으로 제공하던 관행이 2007년 대몰락을 기점으로 거의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외상’으로 글을 씌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대흐름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그런 조건으로 글을 써줄 작가, 특히 유능한 작가는 없다. 결국 제작자로서는 사비를 털어, 그러니까 집을 담보로 맡기고 작가료를 지불해 기약도 없는 시나리오 개발 작업에 돌입할 것인가, 아니면 대기업에게 시나리오를 넘기고 수수료 정도만 받을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렇다면 시나리오 개발에 대한 공적인 지원은 존재할 수 없는지, 대기업과 함께 일하더라도 일방적으로 휘둘리는 게 아니라 대등하게 ‘상생’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같은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영화진흥위원회에 시나리오 개발 지원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대기업에게 진정한 상생의 도리를 주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견해, 즉 대기업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데에 동조한다면 결론은 180도 달라진다. 현재 투자배급사가 하는대로 시나리오부터 감독 선임, 배우 캐스팅까지 모두 개입하고 제작에도 공동 제작 형식으로 참여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제작사의 볼멘 소리에 더 이상 귀기울 필요가 없어진다.
물론 그런 결론이 내려진다면 한국영화계가 무척 불행해질 것이라는 게 개인적인 견해다. 확실한 것은 대기업은 대기업 나름대로, 소규모 제작사는 그들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고 이에 합당한 지위가 보장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영화계의 경제민주화에 관한 이야기인 셈인데,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른 기회를 통해 하게 될 것이다.
분배의 문제, 한국영화계의 그늘 영화노동자
한국영화가 이처럼 화려한 흥행의 불꽃놀이를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뭔가 불편함을 느낀다. 그것은 한국영화 대흥행에 관한 원인 분석과 실천적 결론과는 또 다른 무엇 때문이다.
바로 분배의 문제 말이다. 올해 한국영화 대흥행의 결과물은 아마도 상당 부분이 투자배급사로 돌아갈 것이다. 수익에 따라 지분을 인정받는 일부 배우와 감독에게도 적지 않은 부분이 떨어질 것이고, 제작사로도 얼마간 들어갈 것이다. 그럼에도 그늘은 존재한다. 영화를 위해 온 몸을 던져가며 뛰고 있는 현장 스탭, 즉 ‘영화노동자’가 그들이다.
2007년 한국영화계 대몰락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봤던 스탭들의 여건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다. 2005년과 2006년 우회상장과 통신사 자본 유입 등으로 충무로가 돈잔치를 벌이며 흥청거리다 마침내 거품이 터졌을 때 스탭들은 첫번째 희생양이 됐다.
스탭들은 참여하던 영화들의 제작이 중단되면서 임금을 받지 못했고, 기껏 만든 영화가 개봉되지 않으면서 잔금을 회수하지 못했으며, 제작 편수가 줄고 제작비 규모가 쪼그라들면서 생활 수준은 뚝 떨어졌다. 스탭들이 가장 만만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영화노동자라는 자각을 통해 인건비 현실화, 기본적인 사회 보장, 근로 조건 개선 등 당연한 요구를 내걸고 2005년 한국영화산업노조가 출범했지만 뿌리를 채 내리기 전에 시련을 맞으면서 활동력이 약해진 탓이다. 그때까지 진행되던 표준계약서 채택 등의 논의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일부 스탭들이 방송 등 다른 분야로 자리를 옮겼지만 남은 스탭들은 영화 현장이라는 일터를 성실하게 지키려 애썼다. 2007년 이후 지지부진한 투자 속에서 저예산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도 터무니 없는 임금을 감수했던 스탭들 덕분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투자 상황과 수익이 조금씩 호전되기 시작했지만 스탭들의 여건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2007년 이후 자본이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투자배급사의 제작비 삭감 압력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제작비 배분 우선순위에서 스탭들은 항상 가장 마지막 순번이었다. 그 말은 스탭 인건비를 묶어둔 채 제작 예산을 구성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가 됐다는 뜻이다. 종편이 생기면서 개별 배우들의 몸값이 뛰었고 여러 명의 조연을 묶어서 캐스팅하는 게 트렌드가 되면서 제작비 안에서 배우 개런티 비중이 올라가면서 스탭들의 여건은 더욱 나빠졌다.
한국영화가 2012년 대호황을 맞이하기까지 힘든 조건을 견디며 묵묵히 현장을 지켰던 스탭들의 공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동안 수익성이 나쁘다는 이유로, 산업이 정상화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억누르고 있었던 스탭들의 기본 요구에 귀기울 때가 드디어 왔다는 말이다. 영화 현장에서는 일 잘하는 스탭들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말이 들려온다.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고 하나 둘씩 영화계를 떠나고 있는 탓이다. 과연 숙련된 스탭 없이 한국영화의 미래가 존재할 수 있을까? 만약 지금 같은 호황 국면에서도 스탭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있을까? 누군가 샴페인을 터뜨리고 환호하는데 스탭들은 여전히 소주에 라면 국물을 마시고 있다면 그들이 계속 영화 현장에 애정을 갖게 될까? 그것이 지금 당장 영화계 전체가 책임감 있는 자세로 스탭들의 삶의 조건 개선에 나서야 하는 이유다.
1억 관객이라는 한국영화의 화려한 외형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신기루처럼 보이는 것은 한 꺼풀만 뒤집어도 구멍이 숭숭 뚫린 내부구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올해 한국영화가 거둔 성과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다. 거기에는 영화계 각 분야에서 잠 못자고 몸 상해가며 이 악물고 일한 이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지만 올 한 해 농사를 잘 지었다고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적 불안정성까지 해소되지는 않는 법 아닌가. 스탭들의 일방적 희생이라는 지반과 제작사들의 취약한 경쟁력이라는 골조, 소통 없는 제작시스템이라는 내장재로 이뤄진 한국 영화산업이란 구조물은 미풍에도 휘청거리기 십상이다. 그것이 1억, 1천만 같은 한국영화의 숫자놀음을 더 이상 즐거워만 할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