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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로운 향기 원문보기 글쓴이: 은혜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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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성경공부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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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Rev. Martin Rohlfing
미국 미쉬간주 디트로이트 출생.
1963-1968 A.C.E.F.(기독교교육재단) 이사.
1969 베델 코스 가르침(Swiggum 목사와 같이).
1971년부터 강사로 임명되어 여러 나라에서 강의.
1974년엔 주임강사로 임명되어 미국, 싱가폴, 호주, 독일, 등에서 강의.
한국에서는 1975년 제2회 때부터 강의(1회 때는 스위감이 강의).
가족은 부인 마지 엔젤 여사와 두 자녀가 있고 양자 22명을 양육.
센트루이스 컨클디아 신학교 졸업.
미쉬간 주립대학 졸업.
워싱턴 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수여.
미조리주 성 요한 루터교회 시무(1958-1962).
오레곤 포트랜드 부활 루터교회 시무(1962-1974).
이 교회 시무 당시 1963년부터 베델성경연구 교육을 실시, 교인60명에서 2000명 으로 부흥.
창시자: Rev. Dr. Harley A. Swiggum
미국 Wisconsin 주 Mt. Horeb 출생.
아이오아 주 루터대학 졸업.
미네소다 주 루터신학교 졸업.
위스컨신 주 메디슨 시 베델 루터교회 시무.
그는 1959년부터 이 과정을 연구, 1961년부터 베델루터교회에서 시작.
1961년 베델 성경연구원 설립, 베델 교재전편과 생활편 집필.
2년간 28명의 교사 양성(이들로 500명의 교인을 가르치게 하려고).
1965년 아이오아 주 루터대학에서 공로상 수상.
1965년 위스컨신 주 카다지 대학에서 박사학위 수여.
가족은 20년의 결혼생활에서 4자녀, 부인은 사별.
본부: 미국 위스컨신 주 매디슨에 있다(장년기독교교육재단-A.C.E.F가 주관).
현재 실시 범위: 번역 - 한국, 독일, 스페인, 라틴, 폴투갈, 중국, 일본 등.
실시국: 미국외 10여개국. 2500여교회, 16개 교파 가담.
한국에서의 베델성경 연구
1974년 1월 제 1회 베델 성경연구 강습회 실시 이래 어언 20년이 되었다. 근5000명의 목사가 참여하였으며, 생활편과 마스터 플랜 성경 프로그램을 합치면 6000여명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미 30여만의 회원들이 체계(體系)적으로 공부하였다. 금년(1995년)으로 22회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이단 방지에 기여.--- 사이비기독교는 물론, 믿으면서도 바른 신앙생활 못하는 신자들 많고, 거짓 목자도 많아 선량한 양떼를 현혹하였다. 그러나 성경공부 자체가 큰 뜻 있는 것 아니다. 신앙으로 사람들을 섬기도록, 무장시켜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섬기도록 해야한다. 대부분 이 공부를 통해 그렇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본다(나는 1977년부터 한10년간 가르침). 2000명 중 35명의 성경공부자가 있었다. 성경은 어린아이의 책은 아니다.
Rev. Harly A. Swiggum이 신학교에 있을 때, 평신도 성경공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40세에 기독교를 떠나 학문적인 세계에 몰입하게 되고, 사이판도에서 제2차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있을 때 포켙 성경을 탐독하고 마침내 루터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성서신학을 전공한 그는 목회를 시작한 후 곧 느낀 것은 대부분의 교인들이 성경에 무지하다는 사실과 교회는 그들을 가르칠 교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을 체계있는 하나의 교재로 구성 장년용 성경연구교재로 만들었다(구약 20과, 신약 20과- 그림 40매에 그 내용을 담아 암기케 한다).
1950년대 말부터 스위감 부목사, 2년간 28명의 교사 양성(이들로 500명 교인을 가르치기 위해), 인쇄업을 하던 스트라우스는 자기가 교재를 인쇄할 책임을 느꼈다. * 미국: 6만의 교사, 100만의 학생이 있다.
< 스위감 목사가 지적한 현 교회가 당면한 문제점>
1. 성경 자체에 대한 일반적인 경시(성경연구 부재)
그러나 성경은 교회 사명을 수행하는데 제 1의 무기이다. 성경은 어린아이의 책은 아니다. 연구하지 않으면 모른다.
2. 장년 기독교교육의 결여(아이들은 좀 가르친다고 하나)
시간이 넉넉한 할머니들이나, 주일 장년 성경공부 시간에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흔히 세례 입교하면 종교 졸업생으로 자처, 주일에 교회 가서 예배만 드리면 할 일 다한 줄로 여긴다. 자녀의 기독교교육은 부모의 절대적 영향에 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공부하는 본을 보여야 한다.
3. 성경의 적절한 생활화의 부재
성경 이야기는 많이 알고, 성경을 많이 읽으나, 그 멧시지는 모르고 있다. 그래서 생활에 적용을 못한다. 성경은 있어도 멧시지는 없다는 말이다. 수레는 있어도 화물은 없다.
<베델 시리스의 특색과 중요 목적>
1. 성경의 이해와 지식적 기반을 넓힌다.
일반적으로 장년들이라도 성경이해 정도는 13세 정도의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다. 만일 국방문제, 경제문제, 과학계의 문제라면 13세 정도의 인식을 가진 이에게 그것을 맡기겠는가? 그런데 신앙문제에 있어서는 그 근본이 되는 성경지식 없어도 교사로, 직분자로 모든 것을 맡기는 모순을 자행하고 있다. 성경은 간단한 책이 아니다.
639가지의 계시록 해석이 있을 정도다. 왜 이리도 다양한 성경 해석이 나오는가? 그것은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통털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모르는 이유는 (1)이해불능 (2)읽기 힘듬 (3)졸음 (4)논쟁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 만큼 행동한다. 아는 범위 안에서 행동하기 마련이다. 모르면 행동도 못한다.
□ 의학적 지식의 무지, 어리석은 행동을 자행.(예, 윤옥임씨)
2. 성경의 전반적인 관찰을 주려고 한다(Over view of Scripture).
베델성경연구는 자구 연구나 해석, 주석이 목적이 아니다. 성경의 전체(66권) 메시지를 연구한 후에 한 책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잘못은 성경의 단편적 연구가 일반화 되어있다는 것이다.
베델 시리스는 구약: 20과, 신약:20과--- 과마다 요점만, 관련된 주제로 되어 있다. 구약의 기둥에 신약의 지붕을 언져 하나의 집을 짓듯이 하려는 것이다.
□ 성별(Separation) = Be Blessing(축복)
3. 기억케 하는 장치(Retainer Tool)를 주려고 한다.
(1) 그림을 통해 성경의 내용을 기억케 한다.
(2) 개념카드를 이용하여 내용을 기억케 한다.
말로만 배우면 10% 기억하고, 시청각교육은 90%를 기억하게 한다.
4. 평신도들의 해석학적인 기반을 증진 시키려고 한다.
성경을 바로 이해함에 있어서 교파 특유의 견해(교리)나 해석학적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자기류의 해석)에 도달했다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성경이해의 과학적(보편타당성적)인 견해는 필요하다. 성경 자체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필요하다.
□ 신앙고백에서 성경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신앙고백보다 성경 자체의 입장이 먼저다. 성경 자체를 알아야 한다. 성경이 성경을 말하고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 (성서로 본 성서) 모든 교파마다 변화 가져와야 한다.
<평신도를 위한 해석학적 노력에 있어서 중요한 관점은>
1.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히브리적으로 생각하라(Think Hebrew)는 도전을 주라.
히브리식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히브리식으로 읽어야 한다.
헬라인은 귀로 이해한다. 그러나 히브리인은 눈으로 본다(욥42:1-6).
예) 하나님을 정의하라고 했을 때,
헬라적 견해 : 하나님은 전능하시다(Almighty).--- 추상적
히브리적 견해 :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다(Omnipressence).--- 구체적
구약의 거이 매 페이지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림을 그리듯이 눈으로 보게 한다. 이것이 히브리인의 생각이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함락한 것도 한 폭의 그림처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실제와 그 백성의 신앙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림처럼 말해준다. 헬라인들은 “How- 어떻게”란 질문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 히브리인들은 “Why- 왜”란 견해를 가지고 성경을 본다.
예) 요2:의 가나에서의 기적도 헬라적 사고를 가지고 질문하면 언제나 너머진다. 요나: “어떻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죽지 않을 수 있었나?” --- 헬라적 질문이고, “왜 하나님은 요나를 그렇게까지 하면서 니느웨로 보내셨나?” --- 히브리적 질문이다. 어떤 민족에게나 복음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을 가장 강하게 부각해야 한다.
□ 헬라인들은 수레(Vehicle)에 대해 관심하나, 히브리인들은 수레에 실린 짐(-cago,내용물)에 대해서 관심한다. 수레가 어떻게 생겼건 무관심한다.
□ 헬라인의 공헌은 과학이고, 히브리인의 공헌은 종교이다. 이들은 서로 대립하고, 또 보충한다. 그러나 종교가 말하는 하나님을 실험관 속에서 다룰 수는 없다. 예) 눈물의 분석
2. 성경의 역사를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의 역사를 알아야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알게 된다. 역사는 성경의 멧시지를 말해준다.
예) 여인이 머리에 쓰는 수건(고린도교회):
(고전11:10)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고전11:13) 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고전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여인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은 역사적으로보면 그가 창녀가 아님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예) 할례: 히브리인들은 생명은 피 가운데 있다고 믿었다. 할례 시 피를 흘렸다. 이는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표’요, 그 싸인을 몸에 남겨두는 것이었다. 할례는 자기 몸에 할례의 흔적을 보고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을 인식케 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예수의 십자가의 피흘림의 의의도 잘 이해했다(전적 희생제물). 예수의 십자가는 ‘생명의 대속’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 그 사람을 당신의 역사에 이용하셨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며 아름다운 일이다. 그 시대에 앞서 긍정되는 아이디아는 실패한다(An idea affirmed befor its time will fail).
<베델 성경연구의 특징>
1. 성경 전체(66권)의 철저한 연구
2. 성경의 부분적 연구가 아니다. 성경 전체의 큰 흐름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인 간의 구속사)을 서로 관련시켜 연구한다.
3. 성경을 전체적으로 한 눈에 보게 하고, 단편적으로 보거나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4. 성경 자체가 성경을 해석하도록 한다.
(벧후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5. 성경을 직접 읽으며 그 개념을 외우도록 한다(개념카드).
6. 개념 암기를 위해서 상징적인 그림을 사용(표지)
말로만 배우면, 10%, 시청각 교육은 90%를 기억.
7. 헬라식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고 히브리적인 사고방식을 따라서 성경을 보게 한다. *히 브리식으로 생각하라!
<베델성경 연구의 비결>
1. 시간을 엄수할 것.
2. 숙제는 철저히 할 것.
3. 성경을 줄치며 직접 읽을 것.
4. 개념카드를 외울 것. (꼭 가지고 다니며) *수영장에서
5. 쪼각시간을 이용할 것.
6. 노트 필기를 철저히 할 것.
7. 앞으로 끝날 때까지 매주 2시간씩 목사와 함께 즐겁게 공부할 것.
8. 매일 자습(숙제-28개)과 복습을 할 것.
9. 매주 약15개의 개념을 외울 것.
10. 시험을 치를 것.
11. 죽는 것 외엔 결석 말 것(알치도, 이사가지도, 낳지도).
12. 불평은 하라, 정상이니까. 그러나 불평의 노예는 되지 말라.
인간의 비참은 친구를 동반한다.
13. 규칙을 잘 지키라. 훈련이 없이 성경을 전부 이해할 수는 결코 없다.
14.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믿고 공부에 도전하라.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불신세계에 효율적 전도의 비결이다. 성경의 역사를 이해함에 따라서 전도의 효과가 나타난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논쟁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세상에 성경을 말해주기 위해서 부름받았다. 성경에 대하여 선포하는 것이지 논쟁하려는 것이 아니다.
●●구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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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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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창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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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의 주인이 되신다.
목표: 1. 창조신앙이 모든 신앙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게 한다.
2. 천지창조의 개념들을 히브리적 사고에 맞추어 이해시킨다.
3.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는지를
충분히 알게 한다.
1.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How의 문제는 믿음으로 수락하고, Why란 질문을 던져야 한다.
<히브리인의 우주관>
하늘
하늘 위의 물(구름, 비)
(창1: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시104: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시104:12)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베개와 같은 모양
땅
땅 아래 물(바다, 샘, 강, 시내, 이슬)
“스올-Sheol”
2. 선하게 창조하셨다.
‘선하다’= ‘작용한다-Worked’= ‘제 구실을 잘하다’란 뜻으로 쓰고 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Things= Evil이 아니고 악한 것은 Misuse of things이다. 물건의 사용방도, 그것이 물건을 악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창조는 선한 것이다. 사용을 잘해야 한다.
창조는 선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대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물은 저주가 되고, 선은 악이 되어 버린다.
질문:
1. 자기중심적인 것은 좋은 것인가?
2. 이성 간의 매력은 좋은 것인가?
3. 크리스찬은 세상을 경멸할 수 있는가?
불교에서는 생명은 경험의 연속으로 보고 있다. 불교의 구원은 윤회에서의 탈출로 본다. Stoic학파는 지식을 최고의 선으로 모든 즐거움보다 우위에 둔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는 데 있다고 본다. 영지주의(Gnostic)는 모든 물질은 악하고 자유는 물질에서 해방되는 데 있다고 본다.
3. 하나님은 지구를 선물로 인간에게 맡겨 주셨다.
히브리 개념은 ‘선물’이란 개념이다. 그러므로 ‘gave’한 것이지 ‘lent’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구를 선물로 인간에게 주어 인간이 주관하게 하셨다.
4. 하나님은 그 자신을 그의 피조물에게 연결시키신다.
세계나 거기 사는 인간은 하나님의 부단한 보호와 관심에서 격리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자신이 만드신 것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아기 엄마가 낳아주었다고 다 되었다. 너와 상관이 없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그의 피조물을 살피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보존하시고 사랑하시고 부양하신다.
(시121:3)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사랑으로 돌보시는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를 부단히 돌보시는 하나님이며, 인간의 역사 History= 하나님의 이야기, 곧 His-Story이다(하나님은 인간역사에 참여하시는 인격적 존재).
☞ 참고
理神論(deism): 계시종교와 정반대,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자로 인정하나 신을 세상일에 관 여, 계시하는 인격적 존재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시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성적 인 종교관이다. 17-18C Toland, Locke, Voltaire, Lessing 등이 제창.
自然神論(자연종교):= 理神論, =自然敎(자연종교)= 하나님의 은총에 의거하는 계시종교에 대하여 사람의 이성(本然知)에 의거하는 종교.
自然崇拜(天然崇拜)--多神敎(Polytheism): 많은 신 또는 精靈, 靈魂 등을 숭배하는 종 교의 한 형태, 곧 천지, 일월성신, 風雨火의 자연신과 직업, 기술, 祖神 등을 믿는데 최고신 의 관념이 없다(고대종교, 미개인들의 신앙형태). 一神敎(Monotheism)
5.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만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신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므로 인간에게 법적소유권은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 것이란 없다.
6. 인간 역시 하나님의 소유이다.
인간도 하나님의 소유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과 그의 것을 소중히 할 것이다. 자기 멋대로 하지 않는다.
질문: 인간의 소유권 의식은 그에게 주어진 물건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어떤 영향을 주는 가?--- 책임을 느낀다.
7. 인간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유를 누린다.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행동할 자유가 없다(책임적 자아, 자유의 제약). 인간은 제약 속에 살도록 부름받았다. 왜 제약하시는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제약을 벗어난 삶은 자유가 아니라 도리어 속박이다. 제약은 타락과 부패에서 인간을 보호한다.
8.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
형상=Likeness(知 情 意 德)
인간은 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나 하나님은 아니다.
교육의 문제점: 인간을 단순히 고등한 동물(존재)로 교육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대로지음받은‘참사람’으로교육하느냐가문제이다.
9.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창조의 왕관이다.
관으로서의 인간창조: 인간은 창조과정의 왕관이다.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는 사랑의 대상, 부단한 관심의 대상, 창조적 활동을 계속할 일꾼이다.
지배한다= 관리한다(Management)
겸손이란:
(1)각자가 자기 직분에 충실하고 자기 분수 이상의 것이나 이하의 것을 생각지 않으며
(2)무의미한 열등감을 갖지 않는 것.
(3)자기를 인정하나 남을 더 낫게 여기는 것이다.
가) 인간은 땅에 충만하도록 부름받았다.
나) 인간은 땅을 정복하도록 부름받았다.
다) 인간은 땅을 입히고 갈고 보존하도록 부름받았다.
라) 인간은 땅을 다스리도록 부름받았다.
창1:과 2:은 위대한 창조의 기사다. 이 두 기사에 있어서 많은 혼동을 갖는다. 2개의 창조기사가 아니다. 하나의 창조이야기다.
창1:은 시적운율로 기록되어 있다. 후렴(반복) 부분도 있다. 히브리인이 창1:을 쓸 때 이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용했고, 종교의식에 사용했다. 읽는 자와 듣는 자와의 응답, 당시는 두루마리 성경이었다. 한 사람이 읽는 것을 들은 것뿐이고, 한 사람이 읽으면 다른 사람들은 더 듣기를 원했다. 종교적 지도자는 암기하여 시장 어귀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 주는 일이 많았고 화답을 요청했다. 이 운율은 창2:에 나오는 표현과 달랐다.
창2:4-9, :15-24
1:은 조직된 방법으로 유연하게 창조의 드라마로, 대중 가운데서 사용하게 되어 있다.
2:은 히브리족장들이 그들의 가족에게 말하려 할 때 사용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히브리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그림처럼 말하고 있다. 2:24의 결혼을 보면 가정적 배경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1:과 2:의 사용법을 안다면 큰 의미를 발견케 된다.
2:은 가정을 통해 부모가 자녀를 가르칠 때 거기서 하나님이 창조자이신 것과 부모의 사랑에 대한 교훈과 자녀들의 효성 등이 교훈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전체의 멧시지와 흐름을 알게 된다.
창2:은 의대 실험실교재는 아니다. 마음과 삶의 교과서, 가정에 대한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히브리어는 단어는 많지 않으나 마음의 표현 그대로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다. 1:이나 2:의 표현처럼 간단하게 대창조의 역사 나타내기 어렵다.
1:과 2:의 큰 주제는 하나님의 인류창조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를 위해서 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형상 따라 지으셨다. 개미와 하나님이 교제하기 원치 아니하시고 인간과 교제하기 원하셨다. 자기보다 조금 낮게 그러나 그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다(시8:4-5). 이는 교제키 위해서임이 분명하다.
3: 이하의 기사는 새로운 반복(Restatment)이다.
창조에서(creation에서)⇒ 구원으로(salvation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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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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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도(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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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과에서는 최초의 인간창조 시의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다.
<성경의 다양한 기록 방법>
1. 사건의 보도: 역사적인 보도 예) 눅2:1-7
역사적 보도는 사건 그대로의 기록이다. 눅 2:은 하나의 보도자료(資料)이다. 곧 사건 그대로의 보도이지 사건의 설명은 아니다.
보도원칙: 누가- 왜-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2. 시적 묘사(詩的 描寫) : 역사적 사건을 시적으로 묘사한 것. 예)삿5:15b-18
3. 의인화(擬人化)하는 표현: 사건이나 자연을 사람처럼 표현한 것.
Personification, 의인화된 성경의 표현을 보통 사람들은 문제시하나 역사적 기록만큼 중요한 것이다. 해석의 문제 따라.
4. 우화(寓話)로 표현하는 역사적 암시: 예) 삿9:8-15,“하루는 나무들이...”
여룹바알(=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세겜왕)의 사적(史蹟){왕이 필요하다는 자와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자가 있었는데 그 때 일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말씀을 이해하려면 역사적 배경이해가 필요하다.
寓話(Fable): 이는 인간생활의 사실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식물을 마치 사람처럼 의인화해서 이야기를 짠 것이다. 거기엔 반드시 윤리적, 종교적 교훈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5. 문학적 양식(文學的 樣式)인 비유(比喩): 읽는 자의 해석이 따라야 한다.
예) 시80:8-12 도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시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시80:9)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땅에 편만하며 (시80: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비유(παραβολη, parable)= 나란히 놓고 비교한다는 뜻이다. 비유란 사람의 일상생활 경험을 재료(材料)로 해서 윤리적, 영적생활을 각성시켜 주기 위해 만든 작은 이야기(단편소설처럼 완결된 이야기이다)이다. 공관복음서에 36개의 비유가 있다(누가복음에만 23개).
예화는 추상적 진리를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로 그림을 그리듯 보여주는 것이다.
예화는 이해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으나 비유는 듣이 이에게 거기에 응답하도록 요청한다. 듣는 이에게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할 것인가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예) 삼하12:14, 나단, 다윗의 격분, 뉘우침 / 막12;1-11, 유대인의 반항
비유에는 윤리적, 종교적 의미가 반드시 들어 있다. 한 마디 마다에 의미가 있는 것이라기보다 그 비유 전체에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다.
6. 직유(直喩)와 상징(象徵): 인생의 젊음과 늙음을 직유와 상징으로 묘사.
예) 전12:1-7
문자적 표현 그대로는 이해되지 않으나 상징적으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
풍유(諷喩,Allegory-직유, 상징): 이는 상징적(직유적) 이야기여서 그 이야기의 구구절절이 상징적 인 의미가 있다.
예) 천로역정 전도서12:1-7
모든 성경이 역사적 기록으로만 기록되어 있다면 따분한 것이 성경일 것이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읽도록 기록되어 있다. 단편적으로 볼 것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사실)을 모르고 성경을 읽으면 본래의 멧시지를 왜곡케 한다.
창2:과 3:을 한 묶음으로 읽으라. 3:없이 2:을 읽으면 본 뜻을 모른다. 2:은 하나님의 의도를 말하고, 3:은 인류가 하나님의 의도를 피괴하고 배반한 사실을 말한다.--- 곧 2:에서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이 낙원에서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데 3: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리고 스스로 사막에서 살게 된 것이 인간의 현실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 자신, 인간, 자연 등과의 조화 속에 살도록 하시는 것이다(2:). 그런데 3:에서 인간은 이 조화를 모두 파괴했다.
구원에 대한 개념은 2:을 알아야 알 수 있다.
구원= 생명을 얻는 것. 파괴된 조화를 회복하는 것.
히브리인들은 생명이란 4 가지 조화(4 fold harmony)라고 믿었다.
1) 하나님과의 조화
2) 자신과의 조화
3) 타인과의 조화
4) 자연과의 조화
만일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깨어진 타인과의 조화)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돼 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그 자신이 죽어 있다는 놀라운 사건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창3:17b-21>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 말씀은 인간의 형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불가피성의 선언(Pronouncement of an Inevitable)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에서 떠나면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가는 것이라는 불가피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죄를 범하면 벌이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죄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버린다!
삼상3:13(저주 자청)---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 홉니, 비느하스
(삼상3:13)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 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을 지옥의 창조자로 만들지 말라. 하나님은 그런 아버지가 아니시다.
모든 선한 것은 아버지에게서 온다(약1:17).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의 교훈은? --하지 말라는 것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하는 이유를 말해 주어야 한다. 그것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필연적인 결과에 대해서 말해주어야 한다.
복종함으로서만 조화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은 언제나 인간을 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종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명령하셨다. 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창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생명의 존속은 조화의 유지에 있다.
인간은 인간으로 머물도록 하나님이 원하시지 하나님 되기를 원하시지 않으셨다.
(Man was mean to be man. Not God!)
히브리인은 지식(Knowledge)= 경험(Experience)
지식을 경험과 동일시하며, 경험이 없으면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알고도 행치 않음이 죄다.
<3과에 들어가기 전에 하는 복습>
1.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 타인, 자연과의 조화 속에 살도록 하시려는 것.
2. 창2:과 3:은 어떻게 읽어야 하나?
한 묶음으로 읽어야 한다. 2:은 하나님의 의도를 말하고, 3:은 하나님의 의도를 배반하고 파괴한 것을 말하고 있다.
3. 히브리인들의 생명의 개념은?
4개의 조화이다. 만일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돼 있기보다 먼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4. 창3:17b-21은 하나님의 저주나 형벌인가?
아니다. 생명에서 떠나면 죽음으로 들어간다는 불가피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지옥의 창시자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5. 생명의 존속은 조화의 유지에 있다. 조화의 유지는 복종함으로써이루어 진다. 조화의 유지는 하나님의 요구가 아니라 명령이다.
6. 아담의 불복종은 실수인가? 아니면 만든 과오인가?
7.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은 의지의 자유를 어느만큼 다르게 사용했나?
불복종과 복종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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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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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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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
생명 인 죽음
류주
Universe(우주, 만물, 전인류, 전세계)
창2:과 3:은 언제나 연관시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개인적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우주적인 것, 전인류와 전세계와 연관되어 있다. 생명에 참여하면 그것은 전우주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며, 죽음에 참여하면 그것은 전우주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나 하나만의 것이거나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물론 개인적인 면이 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다). 나 개인의 신앙에는 전 우주적인 면이 있다. 나 개인의 신앙은 믿는 자 전체와 관계된 것이다. 기독교신앙은 나 개인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 개인의 신앙은 믿는 자 전체와 관계 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개인만을 위한 자녀는 없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공통성 있어야 한다!
아담의 타락은 전인류의 타락이요, 예수의 생명은 전인류, 우주의 생명이다.
그리스도인 한 개인은 Whole body of belivers이다. 전인류에 대한 책임이 있다.
롬5:17-19
(롬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 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의 정의>
“죄”는 인간의 반항, 인간의 고의적인 불복종이다.
인간 역사는 Drive or will for power의 큰 이야기이다. will to power가 죄를 가져온다고 본다.
죄는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자기 뜻대로 행사하는 것이다.
아담의 경험은 나의 이야기요, 온 인류의 이야기이다.
아담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려고 할 때부터 이미 참 인간이 아니라 죄인이었다.
권력의 자리에 선 인간이 죄인이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여전히 인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려는 죄의 결과>
(행12: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행12: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행12: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아담의 죄는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故意的)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나 복종치 아니한 것이었다.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롬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원죄는 인간이 하나님 노릇하려는 교만이다(Original sin= Pride이다). 뱀이 하나님의 명령을 파괴시켰다. 하나님을 이기적인 존재로 악평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와 사랑을 의심케 했다.
<죄의 결과>
1.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
2. 땅의 저주
3. 죄의 짐(죄과와 죄책감)을 줌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면 하나님과 분리된다.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야 가듯, 하나님께 복종해야 자유하다.
인간은 도덕적인 피조물이요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반역하면 죄의식이 나타난다. 그 죄의식은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과 분리시킨다. 이 분리는 스스로 숨어버리는 것(self-imposed)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숨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숨어버린 것이다.
예) 훔친자-- 죄책-- 불안-- 숨기 원한다.(상대방이 몰라도)
죄는 하나님의 길에서의 분리--- 후회스런 결과를 가져 온다.
죄의 결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기 도피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피하여 숨으시는 것이 아니다.
롬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죄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의 분리(separation)이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 1)하나님과 부조화
2)자신과의 부조화
3)다른 사람과의 부조화
4)자연과의 부조화
세상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창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3:에서 아담이나 하와 모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죄의 해결책>
1)하나님의 방법: 회개와 용서
죄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받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새끼를 친다. 용서받지 못한 인간은 위험한 인간이다.
2)인간의 방법: 책임전가
화해(Reconciliation)란? :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를 뜻한다.
제 2의 창조는 제 1의 창조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제 1의 창조는 무에서 유로의 창조요, 제 2의 창조는 그리스도를 통한 죄에서 새것으로의 창조다. 전체를 새롭게 하심이다.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고후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고후5:20)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생명---> 죄= 죽음이다.
설혹(設或) 걷고, 보고, 말한다 해도 죄 가운데 있어서 생명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
죄는 죽음이다. 죽이는 것이 죄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자신이 죽는 것이 죄다. 안팍,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죽는 것이 죄다.
2. 땅의 저주(땅이 저주받음)
3. 죄의 짐을 인간에게 줌
죄의 짐= 1. Guilt(죄과)
2. Sence of guilt(죄책감)
<창4:-11:에 대하여>
1. 가인과 아벨 사건(창4:)
인간의 전체성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한 개인은 개인이며 동시에 전인류를 표상한다(People are individuals also whole human race.).
모든 인간은 가인과 같이 될 가능성도 있고 또 아벨처럼 선하기만 할 수도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가인을 얼마나 철저하게 긍휼히 여기시며 따르고 계신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선인만을 사랑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가인도, 아벨도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가인이 범죄하였을 때 그에게 “왜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고 걱정하셨다.
하나님은 가인이 실망하고 살인하기 전에 그를 구원하기를 원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매사에 관심하고 계시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가인에게 “네형제가 어디 있느나?”고 물으셨다. 이에 대한 인간의 대답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반항적인 것이었다.
가인이 범죄 후에도 하나님은 그를 곧 죽이지 아니하시고 그의 어려움을 아시고 그를 보존하고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가인은 개인인 동시에 인류 전체요 또 우리는 그 일부이다.
창5:의 계보들:
아담- 셋(5:3)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창6:)
2. 홍수의 사건(창7:-)
(창7:11)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7:12)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고대인은 강가에 살고 있었다. 고대문화는 큰 강을 따라 이루어졌다. 물과 물 사이에 살고 있는 인간, 따라서 인류는 홍수에 대한 공포를 늘 가지고 있었다. 노아 홍수는 우주적 사건이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方舟)를 지었다. 비도 내리지 않는 마른 땅, 맑은 날에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노아는 믿음으로 순종했다. 큰 믿음이다. 120년 동안이나 변함없던 꾸준한 믿음이다. 노아의 믿음으로 인해 인간의 종족이 구원 받았다.
우리는 이를 통해 구원의 개념을 발견하게 된다.
1)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Noah= Faith
가령 홍수 이전에 하늘에서 1200만의 동물이 탈 수 있는 큰 배가 내려왔고 홍수가 나자 거기에 타라고 했다면 그 때는 아무도 신앙을 가지고 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함은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을 통해 나타난다.
믿음으로 큰 비극이 하나님의 큰 섭리로 변화된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 이전에 그의 불행을 막아주시거나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스스로 불행에서 구원해 주시지 아니하시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믿을으로 순종할 때 인간의 큰 비극이 하나님의 큰 섭리로 변화된다는 신앙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불신앙적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늘 조롱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언제나 당신을 계시하신다.
예)창19:의 소돔의 멸망시에도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리시기 전에 “너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고 명하셨다. 이때 불신앙적인 롯의 사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농담으로 여겼다 :14
그러나 하나님은 불신앙적 인간에 대해서도 가엽게 여기셨다(창8:21). 홍수 끝에 보면 인간에게 새 생활, 새 기회가 주어졌다. 인간은 이번에는 성공할 것인가? 라고 자문자답했다.
3. 셈 함 야벳(창5:32, 10:1-32 노아 자손들의 족보들)
사람에 따라서 어떤 이는 육적인 면이 더 발달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영적인 면이 더 발달되기도 한다. 어떤 인간은 영적으로 더 발달되어 자기 축복과 숙명을 이끄는데 필요한 잠언을 말하였을 것이다.
a) Physical person
b) Spiritual person
가인의 경우는 육적인 면이, 노아의 경우는 영적인 면이 더 강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노아의 자손을 보면 노아 아버지처럼 영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예) 아브라함도 거짓의 약점이 있었고, 야곱의 약점은 급한 성미였으며, 모세도 살인까지 했고, 다윗도 살인과 간음을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가 어떠한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순간에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은 사람들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전하기 때문에 쓰시는 것이 아니다.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써 주시니 그 은혜가 놀라운 것이다. 할렐루야!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는 것 같이 인간을 보는 능력을 상실했다. 육적으로만 판단하고 내면적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 하니님이 언제나, 그리고 누구나 구하실 수 있도록 해야 된다. 내가 하나님이나 된 것처럼 남을 단죄하지 말라!
4. 바벨탑 사건(창11:)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의 도전, 그 결과로 오는 자기 소원과 반대 상황!
하나님과 사귀어 살지 아니하는 데서는 인류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읽도록 하라.
구원은 개인적인 것보다 전체적, 우주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
지금까지의 복습(중요한 요점들) :
서론:
1. 성경을 히브리적(식)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2. 성경의 역사를 인식(파악)하라는 것이다.
3. 우리는 성경에 대해서 논쟁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성경을 말해주기 위해서 부름받았다.
제 1 과 천지창조
1.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성경은 창조신앙-자연발생설, 진화론을 배격한다).
하나님은 창조자. 고로, 그의 형상대로, 창조의 왕관으로 창조된 인간도, 그 밖에 모든 만물도 그의 소유이다(소유권 주장).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만드심은 그와 교제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유하다.
2. 만물을 선하게 창조하셨다. 악은 오용에서 온것이다.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3. 창조된 지구(만물을)를 선물로 주셨다.-- 고로, 주신 분(하나님)의 뜻대로 써야한다!
4. 하나님은 피조물에 자신을 연결시키신다.
5. 인간의 사명은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 보존, 관리하는 것이다.
제 2 과 하나님의 의도(뜻)
1. 성경의 문학적 서술법:(1)보도 (2)시적 묘사 (3)의인화 (4)우화 (5)비유
(6)직유와 상징
2. 조화 속에 살도록 하신다.
생명(살았다는 것)은: 4가지 조화다.
4가지 조화(하나님과의, 자신과의, 타인과의, 자연과의)
인간으로 머물도록(하나님과의 조화) 한다.
특히 자신과의 조화:
생명의 존속은 조화의 유지에 있고, 조화의 유지는 복종함에 있다(부탁이 아니라 명령).
3. 창3:17-21은 저주인가? 아니다. 죄의 결과-불가피성-를 말한 것이다.
아담의 불복종은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인 과오였다.
제 3 과 부조화
1. 인간(인생)은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우주적, 전인류적인 것(Universe)이다.
첫째 아담의 타락은 전인류의 타락, 둘째 아담(예수)의 생명은 전인류의 생명이다.
2. 죄는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반항, 고의적인 불복종이다.
죄인은 권력의 자리에 선 인간이 죄인이다.
원죄는 하나님이 되려는 교만(Pride)이다.
3. 죄의 결과는 분리(Separation)이다.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 결과 자신, 타인, 자연과도 분리된다.
화해는 제 2의 창조이다. 형벌(죽음)의 면제가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이다.
땅의 저주
죄의 짐(罪果)을 인간에게 줌-- Guilt(罪果), Sence of guilt(罪責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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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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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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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작가는 우웨던인 상업미술가 Walter Ohlson, 스위함 박사는 노르웨이인.
주제: 하나님의 약속, 이것은 신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와 같은 것이다.
목표: 1.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하나님 자신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도록.
2.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을 향해서 복을 주시겠다는 내용이며
하나님의 약속은 특별히 뽑아 세우신 하나님의 일꾼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하나님의 약속은 마침내 온 세상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질문 1)구원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2)하나님은 왜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간을 구원하시는가?--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뜻이 무엇인가? 창12:1-3>
1. 창12:1-3(Covenant)
계약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방적인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오기를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 가셨다. 그리스도도 먼저 우리에게 오셨다(롬5:5-11). 구원은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일이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계약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신앙을 각자가 직접 관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내가 직접 관계 맺어야 한다.
계약:
하나님이 시작하신 계약에는 동의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요구된다.
1)약속의 조건: ‘너는 본토 친척... 떠나...가라’
2)약속: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3)책임: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4)예언: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I will bless you so that you will be a blessing."
“네게 복을 주겠다. 너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고.”
그런데 사람들은 이 약속의 전반부는 좋아하면서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고’라는 후반부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왜 일까? 그것은 ‘복의 근원이 되라’는 책임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죄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신약은 죄사함 받는다는 개념에 중점을 많이 둔다. 그러나 죄사함 받은 자가 할 책임에 대해서는 외면하려 한다.
용서함 받음에는---> 타인을 용서한다는 대 전제가 있다.
창12:1-3의 선언에는 두 개의 선언이 들어 있다.
1)축복의 선언과--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
2)책임의 선언이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는 용서받은 축복을 너도 남을 용서함으로써 나누어 주라는 선언과 같다. 하나님께로 받은 것은 반드시 타인에게 증거하고 또 나눠주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도리임을 여기서 배운다.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은 처음에는 아브라함과 그 후예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임을 명심할 것이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옛날 히브리인들처럼 복의 근원으로 선택된 사람들이다.
질문: 복이란 무엇인가?
복의 정의는 시편 1편이다. 복이란 하나님 자신이다.
‘복있는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이다.
시23:에서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이같이 복을 깨달은 사람은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그의 뜻대로 사는 삶을 살려고 한다.
2. 홍수 후의 큰 사건은 시내산 사건, 곧 모세의 사건이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모세를 신앙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신앙의 아버지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시내산 사건보다 오래전에 이미 아브라함과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사건 없이 시내산 사건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선택”만이(선민이 되는 것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도덕 위에 세운 종교요 신앙이 될 뿐이다.
그러나 신앙의 근거는 도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한 개인이 선택되거나 한 민족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를 먼저 선택하시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려고 너를 먼저 선택하고 복을 주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창12:(아브라함 사건)을 출20:(모세 사건)과 비교하면
계약과 ----------- 십계명
심리적으로 볼 때 10계명에 집착하는 자는 개인적 움직이는 방향이 내향적이다. 율법은 자기 내면을 보게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약 앞에 선 사람은 외향적 초점을 가지고 살게 된다. 외부를 향해 관심하게 된다.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을 관심케 된다.
계명 계약
--->自己<--- <--- 自己 --->
예) 예수님은 간음자, 안식일 범한 자, 강자, 약자 모두를 자기 중심적 인간으로부터 이타적 인간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아런 예수님께 대하여 노한 자들은 언제나 내향적 관심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브리인들은 율법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하고 있다. 예컨데 자기 것, 다 내주고 자기 돌볼 능력을 잃는다면 그것은 ‘주라’고 하는 법의 왜곡이다.
창세기식 신앙생활과 출애굽식 신앙생활
3. 영적 분별력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완전한 사람이란 없다. 아브라함이나 야곱,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들이었음은 분명하나 완전무결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비겁하고, 욕심 많고, 살인자나 간음자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쓰임받을 기준이 되었으며 그들에게 있던 특별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분명히 어떤 도덕적인 기준에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영적 분별력(Spiritual discernmemt)”이었다. 이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을 말한다.
영적분별력에 민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증진시켰다. 그들도 죄로 따진다면 모두 낙제생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산을 위하여 죄된 약점을 가진자라도 영적분별력이 있을 때 그를 쓰셨다. 그도 그 시점에 필요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세상의 권력은 영적지도력이 없는 자에게도 주어질 수 있으나, 영적지도력은 반드시 영적분별력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갖고 있는 복은 히브리인들이 한 일의 결과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준 사람들이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복이긴 하지만 그들의 공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의 역할을 한 자들은 히브리인들, 오늘 이 시대에 아브라함의 역할과 히브리인들의 역할을 할 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다(세상의 소금과 빛).
4.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
영적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빛이 비취이게 한다. 그들은 모두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들을 가지고 복의 근원의 역할을 감당한다. 각가지 재능으로, 각기 다른 환경에서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며 산다. 세상은 이들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기적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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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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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축복에 대한 간절한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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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에 대해서 배우는 과목이다.
꿈같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꿈은 가치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릴 수도 있고, 반대로 이룰 수 있는 희망으로 삼을 수도 있다.
예)갈치 장사하는 어머니의 꿈, 아들은 그 꿈을 저버리지 못하고 열심히 공부, 판사가 되다.
좋은 꿈을 가진 사람은 그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까지도 큰 힘과 용기를 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하나님의 꿈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다.
그러나 왜 하필(何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되었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신비이다.
약속된 축복(계약)에 대한 간절한 꿈(Hope), 이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Vision이었다. 하나님은 그 꿈을 넓히셨다. 아브라함 한 사람에서 이스라엘 한 민족으로 확대시키셨다.
하나님의 꿈은 또한 이스라엘 자신의 꿈이 되었다.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으라!
1. 성별된 백성들(이스라엘)에게는 꿈이 있었다.
성별(Separation)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성별하겠다. 왜냐하면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되도록!” 다시말하면, 하나님은 만민이 복되게 하시려는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수단으로 이스라엘을 성별하셨다.
성별,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꿈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런 성별의 개념은 이스라엘을 당대에 위대한 민족이 되게 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보면 성별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큰 무거운 짐이요 저주꺼리가 되었다.
하나님의 소명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부르신 것은 만민 앞에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에서다.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쉽게 ‘저주’되게 한다. 성별은 ‘축복’인데 인간은 짐(저주)으로 바꿔버렸다.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은 성별의 문제를 노여움으로 다루셨다. 그래서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다루게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기 쉽다.
예)
(눅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3: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눅13: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눅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구약에서 성별개념은 복과 생명에 관련된 개념이었는데, 신약에서 성별개념은 저주와 죽음에 연결된 것이 되었다.
‘거룩-Holy(카도쉬)’= 히브리인들은 ‘성별’, ‘구별’, ‘Set Apart’로 이해.
예)이 사람, 이 장소, 이 물건은 거룩하다= 다른 사람, 다른 장소, 다른 물건과 구별, 떼어 놓았다는 뜻이다.
교회는 거룩하다= 체육관, 극장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곧 그 사용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란 뜻에서 거룩한 것이다. 한 개인이 거룩하게 되듯이 한 가정, 한 민족이 거룩할 수 있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나 돈도 거룩한 것이 될 수 있는데 그 사용목적이 구별되면 돈도, 재산도 거룩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돈이나 어떤 물건, 어떤 인물도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면 거룩할 수 있다.
헬라식 개념으로는 거룩은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 ...보다 낫다는 식으로.
히브리인의 거룩의 개념은 ‘선(善)’의 개념이 아니다. ‘구별(區別)’의 개념이다.
예)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다른 신과 비교할 수 없이 구별되신 분이다.
‘거룩한 사람’=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그런데 신약시대의 이스라엘은 헬라인의 개념을 도입하여 거룩에다 곡해된 해석을 붙여 우월감, 독선적 선민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예) 이방인은 범죄하였을 때 심판되나 이스라엘은 용서된다(참고: 눅13:2-5).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해서 거룩케(구별)하셨고 그들에게 먼저 복을 주셨을 뿐이다.
2. 두 가지 꿈
이스라엘은 두 가지 꿈을 가졌는데
1) 소유할 땅:
땅은 국가적 입장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땅은 살아갈 터전이 되기 때문이다. 모세가 그 민족을 인도할 수 있었던 것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하는 목표를 그 백성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땅에 대한 꿈이요 희망이었다.
모든 전쟁의 원인이 ‘땅’의 문제였다. 1, 2차 전쟁에 대한 독일의 영토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이 왜 땅이 없는 남태평양으로 갔을까? 하는 문제는 역사적 신비요 불가사이다.
구약의 언약에도 땅에 대한 문제 많다.
창12:1,“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창13: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13: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13: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주리라 (수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수14: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2) 큰 민족, 셀 수 없이 많은 후손들:
국토와 민족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12:1-2) 사막민이요 유목민인 이스라엘에겐 국토와 많은 국민이 생긴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예)배부른 사람에겐 한 개의 빵은 의미 없다. 그러나 5일을 굶은 사람에겐 그 의미는 다르다.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은 국토, 민족이 형성되기 전이었다. 더구나 100살이 되도록 자식도, 소유한 땅도 없었던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 큰 민족과 거할 땅이 생길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약속을 믿는 데는 큰 신앙이 필요했다.
정령숭배를 하던 아브라함은 전혀 다른 신분의 사람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놀라운 축복이었다. 왜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셨을까? 영적 분별력 때문일 것이다. ---- 예화) 우상 장사하던 아버지 데라, 그 우상 모두 파괴!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나타난 세 가지 성별의 사건(구별):
1) 종족의 성별(다른 종족과의 구별)
이스라엘 민족의 종족적 성별을 유지하도록 하여 이방인과의 혼인도 금하였던 것은 그 민족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민족에게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불신자와의 결혼에서, 부부끼리만 지낼 때는 문제 없다. 그러나 자녀가 생기면 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교육이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부관계는 지옥 같은 삶이나 다름 없다.
성별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야 한다. 성별은 축복이 성취되게 하는 수단이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 하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 종족 안에서의 성별
동족 안에서도 영적 지각이 없는 자가 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될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구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종족 안에서도 구별이 있어야 한다.
같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롯이나 에서처럼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자신의 삶에 어떤 사명이 있는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데서 제외 될 수 밖에 없다. 예)게하시, 아간
3) 지리적 구별
하나님의 선민으로 훈련받고 살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장소가 필요했다. 고센 땅과 가나안 땅을 생각하라. 요셉은 자기 민족이 애굽인들과 섞여서 사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온전히 그들만의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가나안에 대한 그들의 열망도 우연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성별해 주신 땅이었다. 놀랍게도 가나안은 지정학적인 의미에서 세계의 중심이다. 동서의 중심이며, 남북의 중심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세계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을 성별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이곳을 통해서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기 위해서 성별된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축복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축복받은 민족이었다.
이스라엘은 실로 악조건 아래서 태어났다. 아기처럼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아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북방과 남방으로 갈리었다. 유다가 이스라엘보다 더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중간의 산 때문이었다.
성별은 축복이 성취되기 위한 수단이었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목적 자체가 되었다는 것을 연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성을 생각하라. 우리가 크리스쳔이 된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탄생이다. 그러나 크리스쳔이 되었다고 단번에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애기처럼 태어났으니 자라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베델성서 연구를 통하여 많은 성경의 진리를 공부하였다.
< 각과의 요점들 >
1과 천지창조 :
(1)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주인이 되신다는 것.
(2)천지창조의 개념들을 히브리적 사고에 맞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것.
(3)창조된 처음 세계가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하는 것.
2과 하나님의 의도(뜻) :
(1)성경의 여섯 가지 문학적 서술방법
(2)하나님은 인간을 조화 속에 살도록 뜻하셨다는 것.
(3)히브리인들의 ‘생명’에 대한 개념은 네 가지 조화에 있다고 믿었다는 것.
3과 부조화 :
(1)인간은 개인만이 아니라 우주적이요 전인류적이라는 것.
(2)근본적인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며 인간의 고의적인 불복종이라는 것.
(3)불복종이라는 죄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며 그로 인하여
자신과 타인과 자연과의 부좌화를 가져온다는 것.
4과 축복의 선언 :
(1)하나님의 구원계획이 하나님 자신의 약속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것.
(2)하나님의 약속은 온 세상이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
(3)약속에는 동의가 아니라 순종이 요구된다는 것.
(4)약속은 영적분별력을 가진 선택된 사람들에 의해서 진행되고 유지되야
한다는 것.
5과 약속된 축복에 대한 간절한 꿈 :
(1)하나님의 약속은 성별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꿈이 되었다는 것.
(2)그 꿈은 소유할 땅과 번성할 후손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
(3)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수단이 되는 세 가지 성별-종족의 성별,
동족 안에서의 성별, 지리적 성별-이 필요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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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과∙창 12장 - 출 20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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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축복을 위한 통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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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허술한 부족으로부터 계약의 공동체로, 또 거기에다 큰 민족으로 발전케 한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자신들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인식에 있었다. 곧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는 인식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을 갖기까지 특별한 경험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그런 경험들을 갖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민족으로 통일되었다.
이 과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자신과 맺은 약속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몇 가지 특별한 경험을 가지도록 하셨음을 연구하려고 한다. 약속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을 택하신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특별한 경험을 가지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특별한 사명을 깨우치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택하시고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역사에 나타난 구체적 통일의 요소들>
1.할례 2.성별 3.소망(꿈) 4.고난 5.율법
1. 할례: 통일적 요소로서의 할례
그림--- 약방에서 쓰는 유발(乳鉢) --- 갈아서 혼합되고 합일 되게 하는 그릇.
이스라엘을 하나로 하는 데는 우선 창17:에 나타나는 할례의식이 있다. 할례의식은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는 특별한 의식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의학적인 수술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하는 신앙적 의식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약의 백성이라는 것을 그 백성들의 살에 새기는 표식이었다(창17:13).
말하자면 백성의 살에 쓰여진 계약의 표식(하나님의 백성이라는)이었다. 또한 할례는 피흘림이었다. 피는 생명이므로 할례를 행한다 함은 그 생명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성별한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친다고 하는것은 이방인들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의미가 달랐다. 이방인들은 신의 호의나 가호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여 제물을 드린다. 신의 노여움을 풀려는 목적에서나 또는 자기의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제물을 바친다. 그러나 히브리인에게는 이런 개념은 없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은 항상 호의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것은 이미 받은 호의에 감사하여 드리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계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뜻으로 드리는 것이다. 무엇을 받고자 하여 드리는 잘못을 고쳐야 한다.
히브리인들은 피를 흘리면 죽는 것이라 알고 피를 생명으로 인식했다(피=생명).
히브리인들은 할례를 생명으로 인식했다(할례=생명). 그러나 애굽, 에디오피아, 페니기아, 아라비아 등 타 민족들은 할례를 행했으나 생명으로 생각하지 못했다.(불레셋인은 할례 없음/ (삼상17: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어린아이에게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한 것은 이제부터 어린아이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성별하겠다는 뜻이었다.
‘피’를 먹지 말라거나 ‘피’를 흘리지 말라는 말은 곧 생명을 해하지 말라는 생명의 경외사상(畏敬思想)이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다(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수혈 거부는 잘못--- 피를 생명으로 봐야지 혈액으로 보면 헬라식 사고, 순대나 선지국을 먹지 말라?).
히브리인들은 육적생명이나 영적생명을 둘 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므로 할례도 매우 귀하게 여겼다. 남자의 할례로 여자에게도 영향된다고 생각했다. 여자를 제외한 것은 아니다. 여자도 아버지나 아들의 할례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
할례는 성령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행위가 할례로 대신케 됨. 성령이 오심이 곧 할례의 표식과 같이 되었다(성령의 인치심=할례). 할례는 오늘의 세례의 개념으로 변천되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명확한 자각은 할례의식을 통하여 수호되고 지속되면서 하나의 민족으로 통일시키는 데 기여했다.
2. 성별(종족의 성별): 통일적 요소로서의 성별
통일적 요소로서의 성별, 신4:33하-40, 렘29:11하
구별은 특별한 공동체로서의 결속력을 갖게 해 준다. 다신교적인 우르를 떠나 계몽된 환경에서 사는 이스라엘은
1)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복종적인 선민이 되었고
2) 다른 민족이 가지지 못하는 고상한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고
3) 사물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규범을 가지게 되었고
4)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남달리 지나고 있는 것들이 이스라엘을 하나의 민족으로 통일시키는 데 기여했고 또 이러한 남다른 것들은 먼저 성별에 관한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들의 것이 된 것이다.
3. 소망(꿈): 꿈에 의한 통일
같은 꿈을 갖는다는 것은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이 된다.
이스라엘은 때로 그들의 배교와 불복종 때문에 과연 하나님이 우르에서의 약속을 지키실까?하는 의아심이 생겼다. 그러나 우르에서 맺어진 계약에 의한 소망만은 버리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꿈과 셀 수 없이 많은 후손을 가져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꿈을 갖게 됨으로써 강하게 결속될 수 있었다.
4. 고난: 고난에 의한 통일
같은 고난을 겪는다는 것은 공동체 의식을 더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종종 그의 선민에게 고난을 통하여 복되게 하신다. 애굽 노예생활에서의 고난은 반역적인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귀한 요소가 되었다. 출애굽을 가능케 한 것도 노예생활이라고 하는 모진 고난 때문이었다. 고난은 약속된 축복을 잊지 않게 한 요소가 되었다. 억압 당함이 오히려 통일을 가져오게 할 수가 있다. 때로는 억압에서 해방됨이 복이 아닐 수 있다.
고난을 받을 때 그것을 피하려고 기도만 하지 말고 왜 그 고난이 자기에게 있는가? 하는 그 고난의 의미를 깊히 생각하라!
5. 율법:
율법은 약속의 성취를 위한 실천강령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할」 한 가지 문서를 시내산에서 주셨다. 이스라엘이 이 독특하고 존엄하고 권위 있는 율법을 소유했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통일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율법은 이스라엘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기 위한 통을의 요소이다. 시내산의 율법은 모세와 그들 첫 조상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무거운 멍에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가졌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이렇게 시내산에서 율법은 복의 그릇이었는 데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율법은 죽음의 심볼이었다. 하나의 감옥이었다. 율법주의자들은 복을 속박으로 바꾸어 버렸다. 시내산에서는 10개의 율법이었는데 예수 당시에는 10개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수도 없이 많아졌다. 마침내 율법은 억압하는 힘이 되고 말았다. 율법은 먹을 수도, 갈 수도 없게 했다.
히브리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새로운 율법을 주시리라고 믿었는데 이는 큰 잘못이었다.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지 율법을 주시려고 오시지 않았다. 율법, 할례, 꿈, 성별 등은 모두 생명을 위한 종인 것이지 생명 그 자체는 아니다.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도 아니다.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이다. 생명보다 먼저 그 어떤 것도 가져서는 안 된다.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생명일 뿐이다. 생명이 목적이다. 그 외의 것들이 목적일 수 없다.
6. 통일된 이스라엘은 ‘복의 근원이 될’ 자신의 미래를 실현하기 위해서 전진하였다.
이상에서 말한 여러가지 경험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별한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데 좋은 수단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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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과∙출 12장 - 신 34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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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민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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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 사건은 상상할 수 없는 규모였다.
출애굽의 인원을 60만, 여자와 아이들, 잡족(출12:37-38)을 합하면 150만 정도는 되리라고 한다. 한편, 어떤 이는 6만, 6천, 또는 60으로까지 보는 이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과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성서의 기록대로 60만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여하튼 많은 수가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닥친 문제들>
1. 출애굽의 역사에서 제일 먼저 당면한 것은 위기였다.
1) 음식의 문제
2) 주려 죽는 공포
3) 사로잡힐 걱정(대적자의 위협)
그러나 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단련시키는 좋은 기회였다. 출애굽이라는 대이동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기사 이적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기적을 보고서도 언제나 곧 불만을 말하였고 더 좋은 것만을 요구하였다(물, 만나, 메추라기). 언제나 똑같은 메뉴에 그들은 만족치 않았다.
2. 조직의 확대
모세를 보좌할 조직의 필요(천, 백, 오십, 십 마다 지도자 임명).
종교상의 의무는 레위인들에게,
지파마다 지도자 세움,
지파마다 특정한 지역에 천막을 침.
진영배치(민2:1-2, 3-30)--- 지성소-성소-성막 뜰-제사장-레위인-백성
동(민2:3-10): 제1대, 유다(청) 잇사갈(흑) 스불론, 우편: 사자(창49:9)
남(민2:10-15): 제2대, 르우벤(적색) 갓 시므온(녹), 앞: 사람얼굴
서(민2:18-23): 제3대, 에브라임 베냐민 므낫세, 좌편: 소
북(민2:25-30): 제4대, 단 아셀 납달리, 뒤: 독수리
중앙: 북:레위족 서:레위족 남:레위족 동:제사장
기호: 각 지파의 표지로 12개
천막을 거두고 행진하는 순서도 일정,
진행위치(민10:14-28)--유대(1대)--르우벤(2대)레위인(성막)--에브라임(3대)--단(4대) 민1:49,50,51
통신망도 질서정연(은나팔),
이러한 일들은 생명을 존속하는데(외적침입 방지, 종족의 유지 등)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3. 율법과 법률의 제정
1) 그들이 처한 환경적 형편(밀집생활, 가축과 같이 사는 형편 등)이 고려되었고
2) 미숙한 그들의 입장이 고려되었다.
완전한 율법은 단번에 주어지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은 성숙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어구(語句)나 문자(文字) 자체보다도 그 정신을 더 중시하셨다.
하나님이 애초부터 이상적인 위치에서 가르치지 않고 그들의 위치에서 가르치려 한 것은 그들을 사랑하신 까닭이다(장성한 사람이 되기 전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주어야 한다).
4. 엄격한 훈련이 가해졌다.
많은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은 보면서도 그 백성을 단련시키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한다.
<참된 사랑과 감상주의의 차이>
사랑(Love)과 감상주의(Sentimentality)는 다르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감상주의자는 훈련하지 않으나 사랑하는 자는 훈련시킨다.
▶탐스런 사과와 귀여운 사과 벌레: 벌레가 귀엽게 생겼다고 잡지 않으면, 사과를 버린다.
훈련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이다.
<징계, 훈계, 초달, 진노>
히12:8-13,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잠10:17,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가느니라”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자는 근실히 징계 하느니라”
고라의 징계(민16:30-17:) 레위지파 이스할의 아들(출6:21) 모세와 아론의 從弟, 모세 배반, 하나님의 진노.
고라 자손들: 성전 문지기
제물 구해드리는 일
성전 합창대(시4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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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과∙출 1장 - 수 5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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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축복에 대한 보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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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약속된 축복(계약)이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확신을 굳게 유지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런 확신 없는 인간의 실패가 하나님의 계획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시고 거기에 몇가지 대응책을 쓰신다.
▶이 과의 주제는 「갓난 아기 - Infancy」라는 것이다.
<약속된 축복의 성취를 위한 보증(대응책)>
<내용> 1) 신적 개입(확신의 증진)
2) 도덕법과 민법의 제정(혼란과 파멸의 방지)
3) 시각교육(복종의 강화)
4) 기념축제(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상기)
5) 장막(하나님의 임재의 회상)
6) 지도자들
7) 영토에 대한 명령
1. 신적인 개입(기사, 이적)
기적의 의미: 기적은 신적인 개입이다. 헬라인들은 기적을 볼 때 과학적 분석을 하려 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라고 묻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기적을 볼 때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하고 그 이유를 깊이 물어야 한다.
기적은 ‘어린아이’(유아기)를 위한 것이다.
예) 어린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만으로 어린아이에게는 이해가 안된다. 그에게 따뜻한 어머니의 손을 대야 한다. 직접적인 접촉이 필요하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만나시고 손을 대실 필요가 있는 어린 시기에 처하여 있었다. 신약시대에도 초대교회 시대에는 손을 대시는(신적개입)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어린아이에게는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 신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그러나 장성한 교회에는 기적보다 「씌어진 말씀」이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도 새신자에게는 「손을 대는 일」이 필요하다.(그는 영적으로는 어린아이와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말로만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서로의 touch가 있어야 한다. 친구와도 그렇다. 그리고 때로는 신앙이 장성한 사람에게도 새신자와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touch」가 필요할 때가 있다. 신앙 생활에 기적이 없다면 몸에 심장은 없고 뼈만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손길만 바라는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만 해도 안 된다. 무거운 짐도 질 수 있는 장성한 자로 속히 자라야만 한다(엡4:15-16).
요단강이 갈라졌을 때,(헬라식 사고라면, 왜 거기에 다리를 놓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만나시고 만지신 것이었다. 지도자가 바뀔 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도 기적이 필요할 때가 있다(모세에게서 여호수아에게로).
2. 민법과 도덕법의 제정
대이동 자체만으로도 모세 혼자 감당하기에는 무거운 짐이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을 치리한다고 할 때 그것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민법과 도덕법의 제정이 있어야 했다. 히브리인의 중요 개념은 율법은 ‘어린아이와 같은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어린아이에게는 ‘무엇을 하라고-to do somthing' 또는 ’무엇이 되라고-to be somthong'이라고 일일히 말해 줄 것이다. 아직 철없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이 있으나 만일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없었더라면 파멸과 타락이 급속히 그들에게 이르렀을 것이다. 엄격한 율법은 어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장성하게 되면 말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하게 된다. 이미 부모의 지도 없이도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장성했기 때문이다.
목회도 일일이 일러 주어야 하는 율법적 목회는 정말 하기 힘드는 일이 된다. 알아서 해주는 장성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율법이 있어야만 행한다면 그것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말이 된다.
민법을 어김도 도덕법을 어김과 같은 것이었다.
3. 시각교육
1) 나실인의 위치와 목적
‘거룩’= ..으로부터의 구별(separating)이란 뜻이지 성스러움(Holy)이란 뜻이 아니다.
나실, 히, 「나아실」= 분리한다, 구별한다.(삼손 삿13:7, 사무엘 사상1:11, 세례요한 눅1:15)
나실인은 구별된 사람이었지 도덕적 성인은 아니었다(삼손도 시장할 때 꿀을 따 먹었는데 이는 凡人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하는 일에 불과했다).「나실인, Nazarite」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구별된 사람임을 보이는 시각적 표본이었다. 다시 말하면, 나실인의 이상한 모습은 ‘이스라엘이 성별된 백성’이라는 생명의 시각적 교재였다. 그러므로 삼손이 머리를 깍기워서 나실인으로서 구별된 모습을 잃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같은 것이다.
▶교인은 세상 사람들과 전적으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다른 것을 부끄러워 말라.
서원-Vow = ‘맹세’ 에 관하여.
<나실인으로서 맹세 할 때 꼭 필요한 것>
1) Voluntary, 자발적이라는 것.
2) 스스로 원하면 할 수도 있고, 또 언제고 그만 둘 수도 있는 것이었다.
3) 삭발 금지(긴 머리칼)
4) 금주(포도주나 독주)
5) 죽은 것(시체)은 어느 것에도 손을 댈 수 없다 는 것.
“나실인은 ‘생명’의 시각적 존재(life figure)였다.
▶배델성경 연구는 성인되기 위한 것이다.
2) 옷 술(민15:37-40)
옷술은 그것을 보고 만질 때마다 이스라엘이 계약의 백성임을 잊지 않게 하는 표식이었다. 오늘의 정통 유대인들은 지금도 보기에도 좋은 옷술을 달고 있다. 수 천년의 전통이다.
4. 기념축제(잔치): 출13:6-10
이는 이스라엘의 과거를 기억케 하는 가정에서의 축제이다.
5. 장막(성막, 회막, Tabernacle)
회막(會幕)은 언제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관계를 기억케 하는 보증이다.
성막은 가나안 이동을 목적한 것이다. 정착 후에는 성전(Temple)을 지었고, 사람들이 그것으로 찾아 갔다.
성전은 가나안 정착 이후의 것이다. 그 이전에는 성막, 회막이었다.
신약에서는 사람(교회가)이 하나님의 성막을 대신했다.
6. 지도자들
신약에서는 사람(people=church of God)이 성막이나 성전을 대신했다.
7. 영토에 대한 명령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성별된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라는 특별한 명령이다. 그리하면 약속된 복이 보증될 것이다.
<이스라엘 율법의 특징>
1) 모든 사람의 율법: 지도자나 백성이나 모두 율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
2) 돌봄: 가난한 자나 약자를 돌보라는 것
3) 들으심: 하나님은 눌린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는 것
4) 노예: 노예를 가질 수는 있으나 매 7년마다 반드시 놓아주라는 것
5) 불로소득: 이자노름은 절대 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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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과∙레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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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축복을 감당할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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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는 구원론에 관한 것인데 내용은 길지 않으나 깊이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에는 희랍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속죄(Atonement)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야 한다. 속죄를 통한 구원이란 개념은 우리가 말하는 개념에 잘 통하지 않는다.
「속죄」는 축복을 감당하는데 큰 힘을 주는 것이다. 속죄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행위(God's act of forgiveness)이다. 주님이 「약속된 축복의 실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도와 주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죄의 제도였다.
<악(惡)의 실재에 대해서> 욥1:6-7 엡6:12
사람이 원수를 모를 때 거기에 저버리고 만다.
히브리인들은 악을 한 「개념」(idea)으로가 아니라 실재하는 존재라고도 생각한다. 악이 하나의 개념이라면 문제가 아니지만 악은 생명을 거두어 갈 실재적 능력으로 본다. 그리고 세상은 이 악이 활보하는 무대이며 악은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실재하시는 분이신 것처럼 악도 실재한다. 악의 나라, 악의 왕국이 있는데 그 나라를 주관하는 자가 없다고 보지 않는다. 어느 나라이건 악의 왕국이 될 수 있는 위험은 있는 것이다(예: 핵실험, 미사일 개발등).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능력 있는 존재는 없다. 성경은 악마가 하나님보다 더 능력 있는 존재라고 말한 적은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전능자며 지존자이시다. 악마의 힘은 때가 되면 언젠가는 하나님의 힘에 좌절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의 존전에 있을 때 악마는 무력하다. 벧전 5:8-9에 ‘사단은 언제나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 굶주린 사자와 같이 삼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악은 실재한다. 두려워 해야 할 세력으로, 생명을 파멸하려는 강한 자로, 하나님의 계획을 손상케 하려는 하나님의 대적자로 실재한다.
속죄는 죄의 결과(하나님과의 분리, 반항, 불복종, 4개의 부조화, 죄책감, 죄짐 등)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스라엘을 본래의 부름 받은 대로의 자격자로 회복케 하는 길은 하나님의 사죄의 길 밖에는 없다. 인간 자신에게는 그럴 방법도 힘도 없다. 속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임무(축복의 근원이 되라는)를 수행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속죄의 중심은 바로 이 「죄의 용서에 대한 선언」에 있다.
< 아사셀에 대하여(레16:8-10,21,22,26) >
·아사셀: 「내어 놓음」, 「하나님에 대한 불손자」
속죄일에 두 마리의 염소(산양) 중에서 여호와를 위한 염소는 속죄 제물로 드리고 아사셀(광야에 사는 귀신의 이름인 듯, 초자연적 존재)을 위한 염소는 백성들이 운집한 가운데 그들의 죄를 씌워서 산 채로 광야로 몰아 내었다. 이는 죄를 씻기 위하여 죄의 근원인 귀신에게 죄를 돌려 보내는 원시적 신앙을 새로운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행한 실례이다.
하나님은 전 인류의 속죄를 위하여 독생자로 하여금 온 인류의 죄를 담당케 하심을 위해, 곧 아들의 오심의 준비로 이같은 일을 이스라엘에게 행하게 하신 것이다.
<죄와 용서에 대하여>
속죄는 하나님의 용서의 행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믿고, 받아 들이기는 참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이 진정 내 죄를 용서하시고 전 세계의 죄를 용서하심을 믿기는 어렵다. 모든 사람은 죄책감(sence of guilt)을 가지고 산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독생자로 말미암아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것이다.
진정 속죄를 받는가? 그렇다면 주일마다 드리는 예배는 축제가 될 것이다. 주일예배는 죽음의 권세를 이긴 부활의 축제이다. 이것을 동네와 세상 사람들에게 알게 해야 한다. 그들이 분명히 속죄의 은혜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믿지 않을 사람은 없다. 이런 기쁨에 참예하기를 주저할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람의 용서>
사람은 용서하고서도 실제로 그 죄의 행위를 잊기까지는 오래 걸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그 죄를 기억도 아니 하신다. 죄를 아주 옮겨 버리신다. 아사셀 재물은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교리와 의식의 큰 모자익이다. 많은 교파가 있다. 그런데 참된 의미에 있어서 기독교의 분리는 정통과 급진의 갈림이 아니다. 그 틈은 한 교파와 다른 교파와의 교리나 의식의 차이가 아니다. 그 틈은 그들의 신앙이 짐이 되고 있는 자와 기쁨이 되고 있는 자의 차이이다.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 주어야 할 신앙이 도리어 짐이 되고 있다면 이는 큰 모순이 아닌가?
<질문>
7.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 자신이 피를 하나님에게 바쳤는가? 혹은 제사장들이 이 일을 담당했는가?(참고,레1:5,11, 3:1-2, 6-8, 12-13, 4:3-5, 22-25)
답) 자기가 하나님께 드린다는 교만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에는 신앙만이 필요했다.
9. 레16:15-22에 기록되어 있는 의식은 실제로 무엇을 성취하였겠는가?
문) 제단, 천막, 제물, 제사장 등은 제물을 드리기 전에 왜 먼저 거룩하게 해야 했나?
답) 모든 것을 성별한 뒤에 제물을 데리고 온 것은 사람들이 제사장이 용서해 주는 것으로 오해할까봐서 하나님만이 용서(속죄)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어떤 물건, 어떤 사람도 속죄할 수 없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대해서 지은 것이요(시51:4) 또 그 속죄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속죄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는 방편이다.
주일예배는 장례식이 끝난 부활의 축제이다. “축제의 예배”임을 동네 사람들이 알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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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과∙민 13장 - 수 24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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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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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에 관한 문제점을 바로 이해 할 것>
‘정복’이라는 문제에 있어서도 헬라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히브리식으로 생각하라는 원리는 적용된다. 왜냐하면 헬라식으로 생각한다면 ‘가나안 정복’은 불의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정복」이란 곧 하나님의 심판이 이방민족에게 임하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들은 가나안 정복을 ‘빼앗는 불의’로가 아니라 엄위한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성전(聖戰)’이라고 믿었고, 또 그것은 이스라엘이나 온 인류의 축복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거나 정직해서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6). 오직 그 들을 쫓아 내신 이유는 그들이 ‘악함을 인’함이었고, 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었다(신9:5).
“(신9: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신9:5)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9: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훌륭한 선생은 의문이 될 문제를 묻기 전에 먼저 꺼내어 곡해의 위험을 방지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행동할 때가 되었다. 약속의 땅을 점령할 때가 온 것이다. 당시 그 땅에는 가나안 7족이 살고 있었다.
“(신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이스라엘은 이미 40년 전에 바로 이 자리에 선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는 오랜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당시 그들의 상태>
갈렙의 주장: 민13:30
민중들의 주장: 민14:3-4
여호수아의 주장: 민14:7-9
민중들의 주장: 민14:10
주 하나님의 말씀: 민14:11
점령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마치 패배자와 같은 상태에 있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한 이스라엘은 동요했고, 그래서 약속된 땅을 소유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반신 반의 하는 사람은 결코 정복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가지 길을 택하실 수 밖에 없으셨다. 그것은 그 백성을 한 동안 광야로 몰아내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훈련시키는 일이었다(민14:26-38; 신1:26-40).
<광야에서의 변화>
40년간의 광야의 훈련이 끝났다. 엄격한 훈련을 받은 이스라엘의 새 세대는 달라져 있었다. 불신하던 이스라엘은 어린애처럼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다(수2:1, 2:23-24). 이제 잘 훈련된 백성은 그 운명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아무 때라도 맡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 과연 잘 훈련되어 있는가?
<이스라엘이 남쪽에서 진입하다>
상용도로인 에돔과 모압 영토를 지나 북상하는 통상도로를 택하여 진입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나?
1) 그 땅은 에서와 룻의 후손들이 거하고 있었으므로(신2:1-9).
하나님은 형제간의 다툼을 원치 않으신다.
2) 강대국들이 그 도로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모한 행동을 좋게 보시지 않으신다.
<첫째 큰 싸움>
이 최초의 싸움은 요단강 건너편에 넓은 전초기지를 확보하는 싸움이었다.
1)신2:26-36, 민21:21-26---아모리족의 왕 시혼(신2:24=헤스본왕 아모리인 시혼)과의 싸움.
2)신3:1-10, 민21:33-35--- 바산왕 옥과의 싸움.
신4장-34장은 ‘준비’가 ‘전략’ 이상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모세의 죽음>
모세는 언제 죽었는가?
이스라엘이 군사적, 정신적, 영적 준비가 되었을 때였다.
신 34:1-8, 7-8에 의하면 모세는 쇠약해진 노인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안경도 필요 없는 건전한 사람으로 죽었다(:7). 그는 하나님 자신이 묻어 준 자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은 그의 생존시에도 같이 하여 주셨고, 그가 죽을 때에도 함께 하여 주셨다.
유1:9, 모세의 시체, 천사장 미가엘과 마귀가 다툼.
사람은 때가 되기 전에는 결코 죽지 않는다. 죽을 때 병들 수는 있어도, 병 때문에 죽는 법은 없다.
<여리고에서의 두번째 싸움>
요단강을 건너다: 법궤가 먼저 거너 갔고(수4:7), 기념 돌비를 세우고(4:7,20) 할례를 행하고(5:2,3,5), 길갈(=굴러가다--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으로 명명?)에 진쳤고(5:10), 유월절을 지켰고(5:10), 그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음(5:11). 그 땅의 곡식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는 그쳤다(5:12). 그래서 지도자는 ‘법궤’나 기념비 등으로 백성에게 보일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라는 특별한 지점을 공격지점으로 먼저 택한 이유:
1)중앙고원지대의 동정을 관장하는 출입구가 되는 도시였기 때문.
2)국제적 분쟁을 피하려는 의도.
곧 이집트, 메소포다미아 등은 서해안 연도나 남부의 상업도로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남부나 서남부에서 진입했다면 이 상업통로가 위협을 받았을 것이며 따라서 국제 분쟁에 말려 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강대국들은 여리고 도시의 흥망에는 무관심했다.
<아이성에서의 세번째 큰 싸움>
1)아간의 반역: 아간의 반역행위는 하나님의 gears에 막대기를 꽂아 움직이지 않게 한 격이었다.
2)아간에 대한 극렬한 진노를 내리신 이유: 역사의 수레바퀴에 인간의 교만과 불신, 불순종, 탐욕의 막대기를 꽂지 말라는 교훈이었다(수7:25-26).
아골 골짜기= 괴로움의 골짜기.
아이성, 두번째 공격으로 점령됨(수8:)
<이스라엘에 대한 공포가 확대되다>
<기브온의 전략> 수9:3-27
기브온 계략에 넘어 간 이유는?
수 9: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단행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기도와 행동! 이 둘은 성공의 비결이다. 그러므로 둘 다 시행해야 한다. 행동은 있으나 기도가 없고, 기도가 있으나 행동이 없으면 성공치 못한다. 만사에 기도보다 앞서지 말라. 히브리인의 기도자세 본받아야 했다(그림10).
<남부 연합체의 형성>
다른 가나안 도시국가들은 이러한 기브온의 배역 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연합체를 형성하여 위기에 대처했다. 다섯 왕들이 군세를 규합하여 기브온을 쳐부수려고 진군했다(수10:1-5).
기브온과 동맹한 이스라엘의 반격.
<북부 연합체의 형성>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지배자가 되었다>
<여호수아의 권고>
이는 계속적인 승리의 비결이다.
여호수아의 말: ‘하나님은 나와 너의 하나님이시며, 해방자이시다. 그러므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는 제일 계명과 같은 것이다.
이 권면은 강압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의 주인공은 하나님이 아니라 백성들이었다.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한 권면이었다. 우리 생활의 전체 문제가 다 여기에 달려 있다. 이 계명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 힌두교도처럼 수억의 신을 섬기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할 God blank, hole이 있다. 거기에는 무엇으로든지 채워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이 ‘홀’은 하나님으로가 아니면 영영 채워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무신론자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 신이 아니라 다른 것이 참신의 자리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소유함에는 그를 전적으로 소유하든지 아니면 전혀 아니든지이다. 부분적일 수 없다. 하나님 가운데서 그의 100원 어치만이 아니고 하나님 전부를 소유해야 한다.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거듭나야만 한다. 우리의 필요만큼만 하나님을 소유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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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과∙사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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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에 대처하는 사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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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이스라엘이 군주국가가 되기 이전, 무정부 상태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지를 배움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에 눈뜨게 한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징계가 있었다.
사사들은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
<여호수아가 경고하다>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이 갑자기 농경문화에 적응하는 일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비판정신이 결여된 상태에서 새로운 문화에 돌입하게 되자 커다란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문제가 곧 신앙적인 혼란이었다.
인간은 위약한 존재이다
(1)영적으로 위약하고(Spiritually Weak)
(2)육체적으로 위약하다(Physically Weak)
그러므로 무엇인가 의지하려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택된 민족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사명이 주어져 있었다. 농경문화에 익숙치 못한 그들에게는 가나안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주목하게 되었고, 그들의 충고를 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원주민들은 씨를 뿌리는 때와 거름주는 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수확을 축복하는 이상한 신을 섬기고 있었다. 이른바 ‘마르둑’이라는 신이었다. 그 신을 섬기는 것이 그들이 농사짓는 한 방법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넉넉한 추수를 얻기 위해서는 이방신을 섬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예)우리나라에서 고사지내는 것이 농사짓는 한 방법처럼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온통 우상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진실된 신앙인은 항상 생활속에서 생기는 수많은 갈등을 경험하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러했듯이 언제나 주어진 환경에 비판없이 순응하는 것, 이것이 신앙상 큰 위기가 되는 것이다. 이런 위기에 대처케 하기 위하여 여호수아는 미리 경고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생산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이스라엘에게 잡혼과 이방인과의 타협과 혼합을 금한 것은 그들이 사신 우상숭배에 빠져서 여호와를 배반하게 될 것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경고한 것이다(수23:11-13).
“(수23:11)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수23:12)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수23:13)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
십계명을 각기 다른 10가지 계명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십계명은 단 하나도 독립된 내용이 아니다. 모두가 하나의 고리에 연결되어 있다. 만일 제1계명을 어기면 다른 모든 계명을 차례로 어기게 되고 만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실 문제가 아니었다. 참되신 하나님은 다른 우상들처럼 대접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며, 또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상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 주실만큼 관대하실 수가 없으시다. 우상숭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신앙을 흔들어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잠자던 거인 깨다>
인접한 약소국가들, 곧
1) 이전에 점령을 당했던 가나안 부족들,
2) 요단 동편의 신생국가들,
3) 가나안의 지배권을 가진 도시국가들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을 때에 기회만 있으면 이스라엘을 다시 광야로 몰아 내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늪에 빠져 있을 때에 잠자고 있던 이스라엘의 정적들을 깨워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삼으셨다.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나님께로 돌아와 복의 근원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편 위기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의 도구로써 사사들을 일으키시기도 하셨다. 오늘날도 짧게 지나가는 것 뿐,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다만 사사시대는 시기적으로 길었을 뿐이다.
<구원은 사사를 통하여 오다--13 사사들>
왕좌는 아직 비어 있었다(그림 참조).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위기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었다.
옷니엘,에훗,삼갈,드보라,기드온,아비멜렉,돌라,야일,입다,입산,엘론,압돈,삼손(13명)
아비멜렉: 기드온의 첩의 아들(삿8:30-31).
신정정치: 초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 외에 다른 지도자가 필요 없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으로 언제나 만족할 수 있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었다. 사사들은 이같은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보내주신 하나님의 일꾼들이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대표자를 통하여 그의 백성을 다스리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 그것이 사사시대라고 하는 신정정치시대였다.
Charisma=영적 은사를 뜻한다. 사사를 통한 원시적 신정정치
<활동한 사사들>
‘사사’란: 판단자(判官) 또는 재판관이란 뜻을 가졌다. 사사들의 신분은 각양 각색이었다. 농부, 목동도 있었다. 사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무대에 잠간 섰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옛 생활로 되돌아 갔다. 사사는 세습적인 직위가 아니라 임시직이었다. 미디안을 이긴 사사 기드온의 말을 참고하면 알 수 있다.
“(삿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사사 개개인에 대해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출신배경, 성격, 업적, 장단점 등).
대 사사: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에훗이 에글론 왕을 죽였을 때 칼이 모자랄 정도로 뚱뚱했다고(히브리적 유모어의 표현) 한다.
입다의 서약과 딸의 죽음(삿11:30-40). 말한 것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것이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말의 위력은 크게 생각했다.
예)저주의 말을 들었을 때, 수백리라도 찾아가서 저주의 말을 취소해 달라고 청한다고 한다.
“말의 힘”
말--을 생각할 때 큰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다.
이스라엘은 이때 연합정부요, 국가의 초기 형태였다(왕이 없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전쟁에 임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전쟁에서 지배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진영(陣營)을 깨끗케 해야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도덕력은 곧 군사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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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 과∙삼상 4:1 - 1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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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의 위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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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대국 불레셋의 위협
이 과의 중심 인물은 사무엘, 그는 가장 위대한 사사요 예언자였다. 사무엘이 사사로 있던 시절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심각한 위기였다. 불레셋이라는 강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2. 불레셋의 승승장구
불레셋은 잘 훈련된 군사와 우수한 철병거로 백전백승의 기세를 올렸다.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압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본과의 주제:이스라엘이 불레셋에 참패하게 된 이유는 신앙적 문제였다는 것이다.
불레셋은 언제나 이스라엘 앞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힘은 강력한 군사력 뿐이었다. 그런데 한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은 병들어 있으면서도, 법궤만 있으면 승리할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예, 성경책을 부적처럼 여기지 말라).
위기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언제나 그 난국에서 벗어날 방법론만 궁리 할 것이 아니라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하는 신앙적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이전보다 더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는 유익한 대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불레셋은 이스라엘 앞에 서 있는 태산같은 문제덩어리였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의 위대한 민족으로 성숙케 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법궤를 빼앗긴 이스라엘
이스라엘에 대해서 블레셋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했던 것은 법궤였다. 그런데 불레셋은 싸움에서 법궤를 빼앗을 수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법궤만 모시고 있으면 언제나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이스라엘은 낙담했고, 불레셋은 기세가 당당해졌다.
예) 낙하산 없이 뛰어내리고 나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지 말라(무정부 상태의 위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만 했다. 이때 패배한 이스라엘의 경험은 매우 중요한 문제 곧 종교와 정치적 조류가 나뉘는 결정적 갈림길이 되었다.
4. 군주국가에 대한 간절한 꿈(소원)
사무엘 당시의 이스라엘은 나라가 안정된 시대는 아니었다. 왕을 세우자는 주장과 여호와가 왕이시니 따로 왕이 필요 없다는 주장이 맞서 있었고 이에 대한 사전 준비는 전혀 없던 때였다. 이런 문제를 사무엘 같은 이에게 가지고 온 것은 예언자를 한 정치적 지도자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며 예언자들이 어려운 시기에 지도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예)우리나라 해방 직후 목사가 정계에서 봉사한 경우가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과 강력한 정부조직을 가진 불레셋에게 패배의 고배를 마시기만 했던 이스라엘은 그들도 강력한 군주국가(강력한 정부, 강력한 지도자, 강력한 군사력 등을 가진)를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신앙 밖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하는 잘못된 것이었다.
예) 다윗이 백성의 수를 계수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함보다 군사력을 의지하려 했던 것이 죄가 되었다.
(대상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대상21:7) 하나님이 이 일을 괘씸히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대상21: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대상21:11) 갓이 다윗에게 나아가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마음대로 택하라(대상21:12) 혹 삼년 기근일지 혹 네가 석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쫓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사흘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온 지경을 멸할 일일지 하셨나니 내가 무슨 말로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할 것을 결정하소서(대상21:13)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심히 크시니 내가 그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대상21:14)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역을 내리시매 이스라엘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이었더라 (대상21:16) 다윗이 눈을 들어보매 여호와의 사자가 천지 사이에 섰고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예루살렘 편을 가리켰는지라 다윗이 장로들로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대상21:17) 하나님께 아뢰되 명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내니이다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정교분리(政敎分離, 종교와 정치의 분리)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과 하나님을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것. 왕 중의 왕이 하나님이시지 왕이 하나님은 아니었다.
보수주의자들의 주장: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자는 주장을 했고,
진보주의자들의 주장: 왕을 세워서 조직을 가지고 대적하자고 했다.
문제는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사무엘이 왕을 세웠다는 것이다. 처음에 사무엘은 왕 세우기를 반대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통치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왕만을 따르게 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국가안보와 신앙문제를 분리시키기 위해서 결국 왕을 세운 것이다. 여기에 주의해야 한다. 성경에서 소위 「정권」에 대한 제일 큰 논의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거나, 갈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이다’. 다만 인간의 통치가 하나님의 통치 위에 설 때가 문제된다.
예) 독일 교회의 북은 루터교, 남은 카톨릭인데 히틀러가 권세를 가졌을 때 초기에는 그에 대해서 교회는 잠잠했다. 그만한 힘이 교회에 없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와서 교회는 유대인들의 학살을 보고 발언하기 시작했다. 대개 당시의 교회는 정부를 반대하다가 순교한 이가 많았다. (폴 틸릭, 본 훼퍼 등)
본 훼퍼의 경우 ‘목사가 어찌 암살 음모에 가담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누구도 당사자로 현장에 있었다면 본 훼퍼의 입장을 이해할 것이다. 세상의 정부는 국민을 위한 하나님의 손의 역할을 해야만 온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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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 과∙삼상 11장 - 왕상 9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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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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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과의 복습>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이 얻은 값진 교훈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처음에는 왕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통치에 대해서가 아니라 왕을 세운 뒤에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버리고 왕만을 따르게 될 것을 염려해서다. 사무엘의 불만은 왕의 탈선이지 왕권 자체는 아니었다.(삼상:6-7).
인간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가 반드시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경우는 인간의 통치가 하나님의 통치 위에 군림하려는 때이다. 세상의 정부는 국민을 위한 하나님의 손길의 역할을 해야 한다.
<제13과: 통일왕국>
1.왕정시대가 되다.
이스라엘의 체제의 변화. 이스라엘은 연합체에서 군주국가로 체제가 변하게 되었다. 통일왕국 시기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황금의 시기(Golden age of Israel)였다. 오늘날에 와서도 모든 시온주의자들은 이 때와 같은 회복을 바라고 있다.
미국에 사는 유태인이 이스라엘에 사는 수보다 많다(흩어져 사는 유대인).
2. 최초의 인간적 주권자 사울왕의 왕권이 약화되다.
사울은 마지막 사사이자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다. 선지자 사무엘은 그의 준수한 인품을 칭찬하였다. 그는 왕이 되기에 적당한 인물이었다. 힘이 장사였고, 용모가 단정했으며, 키는 다른 사람의 어깨 위나 더하였다. 거기다가 겸손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영적 분별력이 부족하였다.
그는 하나님 아래 있는 왕으로서 제사장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제사장의 임무를 왕권을 가지고 침해하였다. 왕은 왕일 뿐이지 제사장일 수는 없다. 그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고, 그리하여 제사장 사무엘은 새 왕이 그를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삼상 13:14). 그 예언대로 사울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상31:1-6).
3. 다윗이 왕이 통치자가 되다.
이 때는 세습적 계통으로가 아니라 제사장이 왕을 세웠다. 사울은 몸으로는 남보다 어깨 위나 더할 정도로 건장하고 준수했으나 영적으로는 미숙아였다.
죄는 누구에게나 멸망의 원인이 된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이니 죄된 인간이다. 다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므로 그 죄가 무력해지는 것 뿐이다. 사울왕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들도 사울왕의 형편을 면치 못할 것이다.
4. 다윗의 위대한 점 (통일의 비결)
p86-(ㄱ)~(ㅁ)
다윗은 정치적 천재였다. 모든 위기, 갈등의 사건보다 다윗은 더 큰 사람이었다. “사건(위기)보다 큰 사람”이 되라. 사울은 그렇지 못했다.
5. 다윗의 3대 업적
1) 예루살렘을 정치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곧, 도시국가(싱가폴도 도시국가이다)에서 정치적 왕국으로.
전에는 예루살렘이 여부스인들의 도시국가였는데 이제는 남북왕조의 수도가 되게 했다.
2) 블레셋을 공격했고, 승리하여 불레셋의 위협을 제거했다.
3) 예루살렘을 종교적인 중심지로 삼았다.
다윗의 성공은 하나님께 복종했기 때문에 온 것이었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다. 다윗 자신도 그렇게 인식했고 백성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삼하 23:1-7). 다윗 시대에 와서 나라는 통일되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성취되었다. 이는 정치적, 종교적으로 성공한 것이었다. 다윗은 예언자, 카리스마적 지도자, 군략가, 정의와 자비를 겸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완전한 인간은 아니었다. 정욕에 매인 죄인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영광의 때는 영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때에도 다윗은 위기보다 큰 인물이었다.
6. 솔로몬의 정치와 실패
<실패의 원인>
1) 만년에 많은 이방신들을 섬겼다. 신앙상 시작과 끝이 다르면 비극이 온다.
2) 유물주의자가 되었다(무거운 세금정책, 건설계획 수행을 위한 강제노동 강요, 왕궁 건설 을 위하여 성읍들의 매도 등).
솔로몬의 과중한 세금부과: 전쟁시에는 감당하지만 평화시에는 감당하려 하지 않는다.
예) 미국: 전시에는 GNP의 85%, 평화시에는 20%의 세금을 부과한다.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닉슨의 워터게이트, 코리아 게이트). 영적 분변력 없이 가진 권력은 비극을 낳는다.
“Hope"란 개념은 명사가 아니다. 동적인 것이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 희망은 동사로 이해했다. 희망이 없는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예언자들의 임무였다. 암흑시대에 있어 희망을 가짐은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인식이 점진적으로 달라졌는데 처음에 계약공동체일 때는 민족적 특수성이 있었으나 후에 국가공동체가 되었을 때는 타민족과 다를바 없는 민족이 되었다. 예언자들은 계약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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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 과∙대예언서 및 소예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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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축복의 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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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가 일어난 것은 북왕국의 멸망과 남왕국의 포로 사이의 200년 간이다. 곧 솔로몬 치하의 군주시대부터 B.C586년 포로(Exile)까지이다.
북왕조의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남왕조의 예언자: 예레미야, 이사야
포로시기 예언자: 에스겔과 제2 이사야
‘예언’의 사전적 의미:
1)예연(豫言):미래를 예측해서 하는 말, 또는 말하는 행위-- 선지자(先知者)
2)예언(預言):하나님께 받은 계시나 명령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 전하는 행위
예언자는 시대의 해석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을 하나님께 오게하는 자였다.
(암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전기예언서(6):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성문선지자(成文先知者)가 아님.
후기예언서(16): 이사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성문선지자(成文先知者).
히브리 성경: 토라 네비임 우케투빔(다니엘서는 성문서에 포함).
예언서:(1)3개의 대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12소예언서: 12소예언서는 한 권의 책으로 간주.
호세아, 아모스, 미가, 요나 사1-10, 사28-30, 렘5:-9:
예언자는 시대의 해석자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자였다. 따라서 백성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선포하지 아니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렘20:8) 대저 내가 말할때 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렘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언자의 특별한 자격>
①예언자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였다. 어느 누가 왕이 되든 그의 충성은 정부에게가 아니다. 하나님께였다.-- 교인도 그래야 한다. 어느 누가 담임자가 되든 하나님께 충성할 것이요, 목사에게가 아니다. 마음에 맞는 목사가 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
②예언자는 하나님께 접견되어지는 자였다.
③예언자는 공적인 선언자(Publicly Speaks)였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고 선언하고 말하는 자.
④예언자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였다. 그의 말은 “여호와가 이르시기를…”로 표현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예언자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상기시키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이스라엘은 제도, 전통, 율법, 조직 등에 더 치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축복만 생각하고 그들이 축복의 근원이 되야 할 책임은 별로 관심하지 않았고 생각하지 않았다.(p925)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현재의 잘못된 삶에서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도록 권고하고 책망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서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곡해된 신앙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는지를 살펴야 한다.
오늘날도 하나님보다는 그가 만드신 것들에 더 관심을 갖는다든가, 인간이 만든 제도나 조직이나 전통이나 교파를 더 관심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리들도 과거의 이스라엘을 비판할 만 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였다.
4개의 손가락: 우리가 남에게 손가락질 할 때 한 손가락 외에는 모두 나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약속만 믿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위에서 말한대로 선민으로서의 책임의식이 없었다. 사명감을 상실했던 것이다. 당시의 예언자들이 여러가지 인간의 수단들을 정죄한 것은 그것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수단들이 이스라엘에게 목적 자체가 되어 버렸었기 때문이다. p92-93
교회의 역사를 볼 때, 교회가 타락하고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는 때는, 예외없이 조직이 잘 되고 제도가 완벽해지며 교회생활이 복잡해질 때였다. 그런 형식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 정작 힘써야 할 근본문제, 생명을 소중히 하고, 생명을 살려내려는 일은 소홀히 여기기 십상이다.
(1)윤리성에서 분리된 종교! 그것이 문제이다.
성전이 귀하나 보다 귀한 것은 그 안에 있는 신앙! 그것이 더 귀한 것! 이것을 되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성전 때문에 멸망시키지 아니하시리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눅13:1-5,(눅13:1)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눅13: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눅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음악예배:음악에만 치중,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헛된 일이다.
하나님을 잃은 채 겉으로만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이는 것이 문제이다.
종교형식이 그릇이라면, 그릇에 필요한 것은 내용이다. 신앙없는 형식은 헛되다.
(2)율법이 생명에 영향을 주지 못할 때 도리어 율법은 짐이 되고 말 뿐이다.
우리는 왜 예언자들이 그렇게 말해야만 했는가 하는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가 하는 멧시지의 핵심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유머: 코끼리가 자살, 그러나 그것은 자살이 아니었다. 파리가 뒤에서 밀었기 때문이다.
<수단이 목적이 된 것들>
1) 성전(그릇된 안정감의 원인)-- 성전에 계신 하나님 예배, 뒤에는 성전만 중요시.
교회가 가진 모든 제도와 형식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아래서만 거룩한 것이다.
삶의 생명력은 윤리로 생활화된 종교(신앙)에 있다.
2) 율법(율법은 정의의 거침돌이 되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사람답게 살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율법이 귀한 것은 그것에 의해 바르게 살 때 귀한 것이다. 율법이 생명에 영향을 주지 못할 때 그것은 도리어 짐이 되고 만다.
3) 성별(성별을 저주로 이끌었다)
이스라엘의 독선, 교만한 분리주의, 그릇된 선민의식등은 성별의 그릇된 인식에서 온 결과이다. 성별은 특권이며 동시에 의무였다. 의무를 망각한 성별의식은 배타주의적 독선과 오만을 낳는다. 성별의 목적은 성별된 사람들이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다.
4) 할례(할례는 미신의 대상이 되었다)
할례는 언약을 가시화한 의식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의 백성된 사명을 망각하면 할례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5) 거룩한 땅(거룩한 땅이 거룩하지 못하게 사용되었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에게 안식처가 아니었다. 선민의 훈련장이요, 구원을 위한 전진기지였다. 만백성의 구원을 위해 주신 거룩한 땅의 의미상실이 문제였다.
예언자들의 이스라엘을 향한 공박은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다시금 사명을 다하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약속된 축복’을 다시 회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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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과∙왕상12:1 - 왕하17:41, 사 7장 | |
붕괴되는 북왕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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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된 일들을 전부 외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베델시리스에서 이 과는 가치 있는 것이다.
북왕국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학정을 빌미로 나라를 분열시켜 세운 나라로, 민심을 묶어 두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과 버금가는 벧엘(남방)과 단(북방)에 성전을 건축하였으나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들어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멸망해갔다. 그러나 붕괴는 북왕국만의 것은 아니었다. 다음 과에서는 남왕국의 멸망에 대하여 공부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왕국의 분렬은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치였다. 이는 이미 아히야 선지자에 의해 예고되어있었다(왕상11:30-36).
(왕상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왕상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왕상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왕상11:33)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왕상11:34)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왕상11:35)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 이요(왕상11:36)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북왕국은 이스라엘을 말하고, 남왕국은 유다를 말한다. 열왕기상․하와 역대상․하는 남북왕조의 붕괴를 모르고는 이해하기 어렵다.
15과는 열왕기상․하에서 나온 것이고, 16과는 역대상․하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 중첩되는 것이 있으나 15과는 북왕국, 16과는 남왕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르호보암(‘백성들의 수가 많다’): 솔로몬과 암몬 여인 나아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이름은 마1:의 예수님의 족보에도 나온다.
(마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그는 41세에 솔로몬의 뒤를 이어 유다 왕국의 초대 왕으로 즉위(왕상14:21),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그를 따랐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더불어 처음 3년 동안은 하나님을 섬겼으나, 그 뒤로는 모든 백성들과 함께 우상숭배에 빠져버렸다(대하11:13-17). 하나님은 이런 르호보암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애굽왕 시삭이 유다를 침공하도록 허락하셨으며, 또한 여로보암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있게 하셨다(대하12:2-4). 그러나 백성들이 스미야 선지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에 애굽에게 완전히 멸망되지는 않게 되었다(대하12:5-8,12).
그는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을 두었으며, 28명의 아들과 60명의 딸을 낳았다. 그 아들들에게 유다 성읍들을 분배하여 다스리게 했으며, 특히 미아가의 몸에서 낳은 아비야(아비얌)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대하11:22-23).
르호보암은 남방에서 왕이 되었으나(B.C922-915) 그의 강경책과 공포정치는 실패하였고, 백성들의 반란을 샀다. 북방에서는 그를 그대로 왕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 북방에서 남방왕을 배격하는 것은 당연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왕상12:16)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그렇다고해서 당시의 예언자들이 여로보암 편에 선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들은 언제나 국민들 편에 섰다. 어떤 점에서 예언자는 직업적 정치가와는 달리 진정한 애국자요 진정한 정치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역자가 정치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도 같은 맥락(脈絡)의 것이다.
(재판법: 장정197단, 제4조 5항 “정당에 가입하거나 또는 직접 정치활동을 할 때”)
<이스라엘 역사의 3시기>
1) 내란기(북쪽의 검은 색): 각 왕은 땅의 일부씩을 소유하고 있었다.
여로보암 1세 ~ 아합
2) 번영기(중간의 황색): 평화의 시기
아하시아 ~ 여로보암 2세
3) 몰락기(남쪽의 붉은 색): 급격한 몰락기
스가랴 ~ 호세아
1. 내란의 시기
내란은 외부에서의 어려운 일이 없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평온이 가져오는 문제점이다. 외부로부터의 어려움이 닥칠 때는 오히려 단결할 수 있는 기회이다. 북왕국의 역사는 내란의 연속이었다. 한 가문에서 4대를 지속할 수가 없었고, 8번이나 국왕의 암살극이 자행되었으며, 6개월(스가랴)이나 1개월(살룸), 심지어 1주일(시므리) 간 통치한 왕도 있었다.
동족간의 상잔(相殘): 바아사는 남왕국이 힘없음을 알고 자주 괴롭혔다. 그때 남왕국은 앗수르의 힘을 빌어 북왕국을 침공했다. 동족간의 싸움에 외부의 세력을 끌어드렸다. 오므리왕 때는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결혼동맹을 맺기도 했다.
이교도와의 화친: 이방국과의 화친은 신앙적으로는 엄청난 희생을 가져왔다. 우상숭배가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이세벨은 가나안의 신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왕궁으로 가져왔고 마침내 백성에게 강요하여 섬기게 했고 윤리적으로 타락케 했다. 저급한 종교일 수록 비윤리적이다.
예)네팔의 왕궁이나 신전에 새겨진 성적 퇴폐적인 형상들.
예언자들의 등장: 상황이 예언자들을 낳는다(엘리야, 엘리사의 출현 같은). 당시의 시대상은 예언자들을 필요로 했다. 예언자들은 절망하는 이들에게는 소망의 소식을, 교만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경고를 했다. 예언자는 멸망을 예언할 뿐 아니라 소망도 예언했다. 회개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멸망한다고 했다.
잠잠한 소리 왕상19:9-18 *바람- 지진- 불- 세미한 소리('still small voice')
2. 평화와 번영의 시기: (아모스 호세아의 출현)
물질적 육체적 풍요와 安易는 신앙적으로 오히려 위기가 될 수 있다.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눅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여로보안 2세가 다스리던 시대는 국경이 확대되고, 정치적인 안정을 얻었고, 천연자원이 개발되던 풍요로운 시대였다. 사람들은 예언자의 음성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부정직과 불의, 거짓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활동하던 아모스나 호세아는 더욱 큰 어려움을 겪었다.
호세아서는 역사의 배경을 모르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역사와 맞추어 인용해야 한다.
예) 호 6:1-3은 예수의 부활과는 무관하다.
(호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6: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암 4:1~, 아모스서는 평안과 번영 중에 있을 때에 주신 말씀이다. 바산은 목축지이며, 암소들은 살쪄 있었다. ‘살찐 암소’= 게으른 이스라엘의 여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갈고리, 낚시’=원수의 침범을 의미한다.
암 3:3이하는 4:의 무대 장치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경고로 주신 것(백성들을 사랑했고, 그들이 여호와게로 돌아오기를 바랐기에)이다.
이 당시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에게 말한 것이 지금 우리에게 메시지가 된다.
이스라엘이 망했을 때 삼지사방으로 흐터졌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해 없어졌고, 당시의 세계 각처로 ‘흐터져 사는 유대인(diaspora)’으로써 분산되었다. 유다의 유대인들은 흐터지지 않았다.
3. 급격한 몰락의 시기: 스가랴 ~ 호세아왕(이사야의 출현 (삿7:1-12))
두 곳에 세운 성전과 그 안에 만들어 놓은 금송아지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바알 신전에서 본 신상과 유사점이 있었다. 이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바알신을 같은 존재로 곡해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토착화 과정에서 야기되는 위험성이 있다.
예)막걸리 애찬식, 무당이나 점장이와 유사한 형식의 종교적 행위.
여로보암은 2개의 금송아지를 세움(벧엘과 단에).--- 애굽 피난시에 배운듯?
(왕상11:40)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의 치세>
스가랴: 6개월 치세, 왕하15:8
살 롬: 1개월 치세, 왕하15:14
므나헴: 이 때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불) 침략이 있었고 므나햄은 공물을 바치고 왕위를 유지했다.
베가히아: 2년 치세
베 가: 무정부주의자인 베가는 시리아왕 레신과 군사동맹을 맺어 앗수르에 대항하려 하였고 당시의 유다왕 요담에게 이 동맹에 가담키를 종용했으나 거절당하자 베가와 시리아(레신)의 연합군은 유다를 동맹에 가담케 하려고 유다를 공략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처사였다. 유다왕 요담의 후계자 아하스가 유다왕으로 있을 때에도 싸움은 계속되었고 이스라엘과 시리아 동맹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시리아인을 유다의 왕으로 세우겠다고 위협하였고 그들을 두려워 말라는 선지자 이사야의 충고가 있었으나 여호와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어리석게도 앗수르 왕 다글랏 빌레셀에게 원병을 청하는 치명적인 동맹을 하고 말았다. 이 결과 앗수르는 유다의 방해 없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뒤이어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많은 백성을 추방하고 유다는 속국으로 삼고 말았다.
호세아: 이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으로서 본래 앗수르의 손아귀에 있던 졸도였으나 애굽과동맹을 맺고 앗수르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다가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강금당하고 다시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군대에게 포위를 당하였다가 결국 살만에셀의 후계자인 살곤 때에 이스라엘은 굴복하고 말았다. (이 때 27,290명 1/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포로되었고 나머지는 광활한 살곤제국의 도처에 흩어지고 말았다.
그 외 13왕
이스라엘은 멸망 후 사방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되었으나 유다는 멸망 후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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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과∙왕상12:1, 왕하25:29, 대하10:1 - 36:1 | |
붕괴되는 남왕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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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과와 16과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북왕국은 참회하지 않았으나 남왕국은 참회하
였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대하 12:6-8)
포로: 1차 포로(597B.C.)
2차 포로(587B.C.)
가난한 자는 내놓고, 가진 자와 지도자들을 사로잡아 갔다.
70년 후 돌아올 때 쯤 되어서는 남아 있던 사람들은 가난을 다소 면하게 된 뒤여서,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에 대해서 텃세를 부렸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사상은 남아 있었다. 반대로 포로당했던 이들은 자기들이야 말로 선민의 자리를 고수한 자리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 우리나라 해방 후 신사참배를 한자와 하지 아니한 자와 사이의 갈등)
오늘의 본문은 주로 역대기를 중심하고 있다(북왕국 이스라엘은 열왕기).
열왕기와 역대기는 비교적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관련된 사건들이나 또는 중복되는 사건들이 있다. 게다가 두 기사 가운데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도 있는데 이는 기록자의 시대해석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1. 남왕국 역사의 6시기와 왕들
1) 내란의 시기: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여호사밧
남북 간의 내란의 원인은 사상적인 문제에 있었다기보다 왕들의 학정에 대한 원한에 있었다. 왕들은 주로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외세를 업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이런 동족간의 싸움을 끝내게 하기 위해서 결혼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더 무서운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2) 바알 숭배의 시기: 여호람, 아하시야, 아달랴
북왕국 아합이 이세벨을 맞아들인 것은,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숭배를 맞아들인 결과를 낳았다. 남왕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세벨의 딸 아다랴를 며느리로 삼은 결과로 유다는 왕실부터가 바알 숭배를 묵인하게 만들었다. 아다랴는 아하시야를 충동질했을 뿐 아니라 끝내는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려고 왕족들을 살해하는 장본인이 되었다. 결국 아다랴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 곁에서 개들에게 찟기어 밥이 되고 말았다.
3) 황금의 시기: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아사랴), 요담
물질적인 풍요는 영적인 면에서는 위기를 맞게 한다.
4) 몰락의 시기: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아몬
실패하는 자의 특징은 대체로 충고를 무시하는 점이다. 남왕국에도 훌륭한 예언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나라와 민족의 살길에 대해서 외쳤다. 그 길은 하나님 신앙의 회복에 있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외침보다는 군략가나 경제전문가들이 더 환영을 받았다. 마침내 남왕국은 북왕국으로부터 모욕과 앗수르로부터의 침공 등에 대항하려는 방책으로 애굽을 용병으로 끌어들이는 어리식음을 범하게 되었다. 국제전을 일으킨 것이다.
5) 개혁의 시기: 요시야
몰락의 시기에도 요시야 같은 현군(賢君)도 있었다. 그는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비록 어린 나이에 등극(登極)했으나 다윗왕을 흠모하였고, 다윗의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적극적인 일을 전개했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나라 안에 만연했던 우상을 타파하고, 이교들을 배척했다. 그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거기서 잃었던 율법서를 찾아냈다. 그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온 백성들을 예루살렘 성문으로 모이게 하고 율법책을 읽어 듣게 했다. 요시야는 계약을 갱신하는 의식을 거행하였고, 중단되었던 유월절 행사를 다시 시작하였다. 온 나라 안의 우상을 다 철폐하였다. 그러나 개혁자가 일찌기 전사하자 개혁은 중단되고 말았다.
6) 멸망의 시기: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요시야 왕이 무깃도 전투에서 전사하자, 유다는 애굽에 속국이 되었다. 그 뒤 애굽이 바벨론과의 싸움에서 지게 되자, 유다는 자연스럽게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왕들은 바벨론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을 쳤는데, 이것이 바벨론을 노엽게 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유다는 마침내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2. 왕들(20명)의 통치 중의 사건들
1) 르호보암: 혁명가들에 대한 공세 실패(대하11:1-5), 유다 방위 강화, 군사도시를 전국에 세우고 집안 사람들 배치하여 나라를 안정시킴, 율법을 저버림으로 심판이 뒤따름.
주전 918년, 애굽왕 시삭(세숑크1세) 이 유다의 도시국가들을 파괴.
2) 아비야: 내란을 종식시키려 했으나 북왕국의 배신자들이 들어주지 않음.
(대하13:5-12,학살계속:13-20)
3) 아사: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한 훌륭한 왕(10년간 평온), 영적인 일에 조직적인 운동을 폄(대하 14:1).
4) 여호사밧: 부왕을 따라 선정, 적에게도 존경을 받았고 유다는 번영. 북왕국에 대비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기는 했으나 평화를 사랑함. 남북왕조의 평화동맹을 맺고 전쟁을 종식시킴(대하18:1).
5) 여호람: 아달랴와의 결혼으로 유다에도 바알 숭배를 도입. 악녀의 영향은 유다에 몰락기를 불러옴.
6) 아하시야: 부왕 여호람과 아달랴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통치, 이스라엘의 요람을 방문했다가 예후의 숙청 때 살해 당함(대하 22:7-9).
7) 아달랴: 아들 아하시야가 예후에게 숙청되었다고 전해지자 재빠르게 왕위에 올랐고 요아스 외엔 모든 왕족이 그에게 살해 당함. 6년간 다스림.
8) 요아스: 제사장 여호야다의 지도로 의로운 사람으로 성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주의 집을 재건하는 등 선정,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뒤 그는 배교, 시리아의 심판을 받고(대하 24:23-24) 반역자의 손에 죽음.
9) 아마샤: 악과 선 사이를 맴돈 정치를 하다가 반역자의 손에 살해 됨.
10) 웃시야(아사랴, 왕하15:1, 대하26:1): 유다의 황금기를 마련한 왕, 유명한 무사로 주변의 나라들을 점령하고 조공을 받음. 처음에 그는 정치를 잘 했으나 후에 변절(왕으로서 분향하려다가 문둥병 발생, 대하 26:20-21).
11) 요담: 부왕의 전통을 계승하여 번영의 시기가 계속되었으나 도덕적인 퇴폐는 여전함.
12) 아하스: 하나님 이탈, 영적인 무능, 특권만을 누리려 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일에는 무책임, 감사를 모름, 영적 윤리적 상태는 퇴폐적 임(직권의 남용, 고위층의 도덕적인 퇴락, 부정거래, 무의미한 종교의식, 사회불의, 낭비, 회의, 괴변, 그릇된 확신 등). 이사야와 미가의 책망을 받음.
그는 도덕적 성결과 의의 힘보다 군사동맹의 힘을 더 구함. 병든 이 시대의 유다는 주변 나라들의 약탈 목표가 되어 시리아, 이스라엘, 에돔, 블레셋에게 공격과 모독을 받았고 정치적 백치인 왕은 앗수르를 소란 중에 불러들여 작은 자유마저 잃고 앗수르의 속국이 됨.
13) 히스기야: 급격한 몰락을 방지, 백성들에게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촉구(하나님의 계약에 연결시킴). 바벨론의 등장으로 앗수르가 유다에서 잠시 눈을 돌렸고 이 틈에 애굽이나 바벨론과 또는 두 나라와 함께 군사동맹을 맺으려 생각함.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께 충성하고 그의 구원에 의지하라고 충고하였는데 왕은 이를 받아들여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의 일부 도시를 약탈하기는 했으나 수도는 구출됨.
14,15) 므낫세와 아몬(왕하21:1-25):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와 손자 아몬은 악한 성격을 가지고 부도덕하고 온갖 가증한 일을 행하여서 백성들은 아몬을 죽이고 요시야를 왕으로 삼음.
16) 요시야: 두 선왕로 인해 상처 난 왕국을 다시 통일시키기 위하여 종교개혁을 일으켜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려 함. 이때 앗수르는 바벨론에 멸망되고 바벨론이 새 강대국으로 등장. 유다의 율법 개혁은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하자 중단됨.
17) 여호아하스: 3개월간 치정하고 애굽 왕에 의하여 폐위 당함.
18) 여호야김: 허수아비 왕, 애굽의 속국화되었다가 B.C.605년 칼그미스 전쟁에서 애굽은 바벨론에 멸망되고, 유다의 주인도 바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조공을 바쳐 오다가 지쳐 반란을 일으켰다가 바벨론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죽음
19) 여호야긴: 미약한 힘으로 바벨론에 저항하다가 곧 항복, 왕의 가족과 귀족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감.(B.C. 597)
20) 시드기야: 바벨론이 왕으로 임명, 그의 완고한 처사에 노한 느브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약탈, 성을 헐고 성전을 불태우고 남은 백성을 사로잡아 감.(2차 포로, B.C.586 or B.C.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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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과∙대예언서 및 소예언서의 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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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바라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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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Crisis)는 국민적 신학(神學)을 낳는다.
북왕국 이스라엘이나 남왕국 유다는 그들이 망하기 전에는 예언자들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고, 믿지 않았다. 이상한 것은 앞으로 닥아올 예언은 그 때가 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위기가 닥치고서야 당황하게 된다.
위기는 국민적 신학을 낳는다. 특히 유다의 멸망기에 그러했다. 예레미야는 이 시기에 기초를 닦는다. 거룩하다는 것은 모두 예루살렘에 있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없이 살 것이란 것은 생각도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는 망하였고 예루살렘이 망하게 되자 그것은 하나님보다 바벨론의 신이 강한 까닭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생겨나게 되었다. 예언자 에레미야는 이런 시기에 예언자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마다 다른 입장에서 사역하게 하신다. 말하자면,
예레미야에게는 심판을 예언케 하셨고, -시대가 예언자를 낳는다-
에스겔에게는 새 시대와 새 마음을 창조해 내는 일을 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이전까지는 문제가 생기면 가정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문제를 들고 갈 예루사렘이 없어졌다.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을 때에 「회당」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뿌려졌고 그 싹이 트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에게 포로생활이 없었던들 ‘회당’은 그들에게 없었을 것이다. 회당의 발전은 포로생활에서 이루어졌다. 문제가 생기면 성전 대신 회당으로 가지고 갔다.
‘회당-Synagogue, συναγώγη’: 회당은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하는 것이기보다는 제사장 또는 레위인이 아닌 지식층(識者層)으로 구성된 자(서기관)들에 의해 주도된, 함께 기도하고 율법을 가르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는 율법연구가 회당에서 있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사는 사회에서 유대인들의 구심점이 되었고, 율법을 위반한 유대인에게 내리는 형벌을 포함한 사법적 기능을 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회당장은 회당 업무를 감독하고, 예배의 사회를 맡고, 선지서를 읽고, 기도를 하고, 설교 할 사람을 택하는 일 등을 하였다. 또 회당장은 사회의 유력한 인사였고 이방인 성읍에 사는 유대인 집단의 가시적 대표자였다.
예) 야이로(막5:22), 그리스보(행18:8), 소스테네(행18:17) 등
예수님 당시 회당에서는 안식일 예배는 없었다.
율법과 예언(성경) 곧 성경을 읽었다.
설교도 회당에서 발전되었다. (성경을 읽으면 해석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시편을 노래하였다. 이런 일들은 성전에서는 별로 하지 않던 일이었다.
예언서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 그 역사적 상황을 이해해야 하겠고,
눈 앞의 일을 당장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년 뒤에 회고하기는 쉽다. 세월이 지나면 역사적 상황을 깨닫게 되는 일이 많다.
2) 장차 올 일을 알아야 한다.
곧 소망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메시야의 오심, 새 시대의 도래, 시온산이 높임을 받을 일, 낙원의 회복, 남은 자의 귀환, 고난의 종 등)
▶예언자는 누구인가?
1)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일을 잘 기억하고 있는 헌신적 하나님의 사람이다.
2) 하나님께서 현재 행하시고 계신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3) 하나님께서 미래에 행하시리라고 약속하신 일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豫知(신뢰)하는 것이 예언자의 특색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예언자의 정의(定義):
(신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신18: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신18: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곧 예언자란 하나님의 명령을 그 백성에게 직고하는 자를 예언자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언에는 과거의 기억, 현재의 이해, 미래의 예고 등이 포함된다.
교회의 사명=이스라엘 백성의 사명.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을 위하여 있다.
교회 보이는 교회, Vissible Ch.= 개개의 지역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Invisible Ch.= 우주적 교회, 신앙 가운데 있는 신자만이 속하는 우주적 존재로서의 교회, 한 하나님 한 믿음,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결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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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과∙에스겔,예레미야,애가,다니엘서일부,왕하24:18-25:22,대하36:11-21 | |
포로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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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의 포로생활은 여러번 예언된 것이었다(미가4:9-10, 렘1:13-14, 21:4-7, 25:8-11,
사39:1-8, 왕하20:16-18).
2) 바벨론 1차 포로: 주전 597 (귀족, 왕자, 관원, 용사, 공예가, 대장장이 등)
3) 바벨론 2차 포로: 주전 586 (15,000-18,000명)
<포로민들의 마음으로부터의 질문>
1.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셨는가?
교회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런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심리학에서는 절망에 빠진 히브리인들의 상황에서는 당연한 질문임을 인정한다.
2. 바벨론의 신들이 하나님보다 강한 것은 아닌가?
이사야서의 3대 메시지
1) 제 1이사야 1:~39: (주전 8세기경의 메시지)
2) 제 2이사야 40:~55: (540년경 바벨론에서의 메시지)
3) 제 3이사야 56:~66: (6세기 포로 귀환 후 예루살렘에서의 메시지)
예언자에게 있어서 청중을 위한 원칙의 하나는 「예언자는 그의 청중의 요구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청중과 교중의 마음을 요구를 파악하라.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라.
3. 조상들의 죄의 형벌을 자손에게 돌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닌가?
히브리인들은 부모의 죄가 자손에게 미친다는 불가피성을 늘 생각했다(출34:7). 그러나 포로의 고난이 조상의 탓이라고는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에스겔 이전에는 하나님의 계약은 국가적 계약이라 믿었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의 계약은 개인적 계약이라고 믿었다. 죄 짓는 영혼 그가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축복도 개인적인 것이요, 저주도 개인적인 것이라 인식했다.
<예언자들의 포로생활 해석>
1.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
2. 하나님이 이방신보다 약하셨기 때문에 유다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심판하셨다.
3.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이다.
「남은 자」의 사상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큰 사상적 변화이다. 이스라엘은 「큰 민족」을 생각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제 그 소수를 생각케 된 것이다. 여기서 에스겔은 「새 예루살렘」이라는 개념을 가져 온다.
겔 3:17-21 악인을 깨우치도록 하라는 휴머니즘을 발견한다.
2차대전 때 독일과 일본은 미국의 적국이었으나 종전 후 미국은 그들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재기하도록 도왔다. 이제 그들은 강력한 동맹국이 되었다. 용서는 참략자의 행위와는 다르다. 이는 그리스도의 정신이다. 결코 쉽거나 값싼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이나 독일은 영영 망했거나 적대국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그러나 사람을 꼭두각시 취급을 하셔서 역사를 직접 주관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를 이용하신다.
4. 네가 있는 곳에서 축복이 되라.
5. 바벨론의 포로생활은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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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과∙창세기 ~ 말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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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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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주의: 그림에 나타난 연대는 단지 「God works in history」를 표시하는 것이지 그 숫자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히브리인들은 본래 둥근(원형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 왕조가 멸망한 후 역사관은 변했는데 산의 계곡처럼 높고 낮은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황금기와 쇠퇴기로가 있다고). 그들은 어느 날엔가 역사의 최절정에 이르는 때가 있다고 소망하였다. 그 때가 「주의 날」이라 소망하게 되었다(Climax=“Day of the Lord”). 그러므로 그들은 절망적인 시기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절망의 때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담은 청사진(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심판은 언제 어떻게 오는가?>
1. 최종적 심판은 무덤 저편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현재에서도 행해진다. 심판의 Climax는 죽은 후에 있을 것이나, 현재에도 심판은 행해진다.
(작은 망치: 부정적 면; 큰 망치: 사랑하시기에 심판하는 긍정적 면)
우리의 행동은 먼 장래에서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우리를 심판한다.
2.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성경은 이런 의미에서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한다.
3. 심판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이며 동시에 긍정적이다.
고전 5:5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심판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였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심판하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죄 짓는 영혼은 죽으리라”는 것은 심판의 부정적 면이다. 에스겔서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만일 그렇게 아니하면 하나님은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신다. 성경은 바리새적 태도로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예언자들은 심판의 개인화를 말한다. 남을 비판하지 말고 자기를 살펴 보라. 그러나 죄된 개인이나 죄된 국가는 역사적 교훈을 배우기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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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과∙에스라,느헤미야,학개,스가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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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 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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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왕 고레스>
B.C.549 바사와 메대 합병
539 바벨론 점령
538 포로 석방령 포고
537 제 1차 귀환
536 제 2성전의 기초를 놓다. 기공520년, 준공516(515) 학개와 스가랴의 행동
510 로마 공화국 시작
490 다리오 1세의 헬라 침공과 마라톤에서의 패전
480 아하수에로(구셀크세스 1세)의 헬라 원정과 패전
445 아닥사스다 1세 재 20년, 유다 총독 느헤미야 예루살렘 부임, 성벽 수리 완성
1. 포로의 어두운 밤은 지나 유다는 해방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B.C 538).
2. 돌아와서 한 일은 무엇인가?
①성전 재건의 시작 (예수아와 스룹바벨)
②예루살렘성의 재건 (느헤미야)
③율법개혁(에스라)
<예언자들의 증언>
3가지 요구(이를 이행하지 않아서 포로가 되는 심판을 받았다)
1) 우상이 가득한 세상이므로 우상숭배를 버리고,
2) 진리와 순결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3) 율법을 지키라.
사마리아인들은 성전건축 공사는 방해하였으나 성전건축을 위한 납세는 담당하였다. 율법은 그 법을 주신 정신과 떼어 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