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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 이어
한낮, 다방안에서 중학친구를 만나는 심호규였는데..
그앞엔 안경쓰고 멀쑥한 정장을 입은 미남형의 장석현이 앉아있었다.
"그래..?"
"글타니까. 해물은 이제 한물가고 위험부담이 많지만 민물고기 양식은 그야말로 땅짚고 헤염치기라고"
"글쎄..."
"뭐가 글쎄야! 다른 애도 많지만 너기에 특별히 권하는거다. 우정이란 게 뭐냐. 이제서야 드디어 동업하는겨"
샤프한 안경도 썼지만 타고난 모사꾼 체질이었다.
"내가 그쪽에 기술도 없고 너도 알다시피 사업엔 전혀 소질이 없잖냐"
"그, 그런 거야 하다보면 저절로 배우게 되는 거지. 첨엔 내가 대부분 할 거니까 넌 그냥 출근만 하면 돼"
"고맙긴 하다만 나..난 당장 생활이 문제라서..."
"...생활이라니? 그동안 가수해서 돈 모아놓은 것도 없단 말야?"
"어..없어.."
"단돈 천만원도?"
"그래.."
"정말?"
"응"
"나도 벌써 수천 투자중이다만..양어장 부지 확보한 것은 제켜두더라도 최소 반년간은 여유를 둬야 결과가 나올 건데..정말이라면 진짜 힘들겠다"
"미안하다"
"저기...집이나 친척에게서 융통받을 수는..?"
"일이백이람 모를까..그럴 재력있는 사람도 없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그래, 아직 운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잊어부러라. 애들 기다리겠다. 가자"
열댓명의 남녀들이 삼겹살집에서 회식하는 풍경
동창회 모습인데 장석현이와 이우태가 섞여 여자들과 한껏 마시고 대화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한쪽편의 심호규였다.
'실상은 어떨지 모르지만...모두 한껏 젊음을 즐기는구나'
이때 펑퍼짐한 여자가 기어와 말을 걸었다.
"호규야. 너도 노래방 갈거지?"
"아, 아니 나는 안가"
"왜? 넌 술은 못 먹지만 노래하난 짱이잖아. 너 빠지면 우리가 무슨 재미. 둔포 제일가수 심호규가 뺄 걸 빼야지.."
"다, 다른 약속이 있어서...사실은 내 목청도 간지 오래라서..."
"왐맘마? 정말? 카수가 목이 가면 우짜라고?!"
삼만원을 내주며
"미안하다. 나 안 보이면 간 줄 알어라..잘 놀아.."
거리로 나와서 밤거리를 걷는 심호규였다.
'내가 무슨 가수..이렇다 할 노래도 하나 없는 실업자가 무신 가수씩이나'
'돈 천 만원커녕 오백만원도 없는 내가 노래방 출입할 자격이나 되느냔 말야'
'부모님께 늘 걱정이나 끼치는 불효자식이 무슨 염치로 노래씩이나..'
'노가다도...고물상도 안 받아주는 멀쩡한 좀비..'
문득 딸기코에 털보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침 고물상 앞 검은 비닐하우스서 엉거주춤해있는 호규였다.
그 앞에서 이사장과 딸이 멀끔히 흥미있는 표정으로 훑어본다.
"...저기 이 동네 방값이 싸다는 소문을 들어서 그냥 둘러보다가...근방이기에...그냥...그냥.."
"근방에 왔다면 당연 들려야지. 우리 날짜랑 신방도 치렀으니께 더욱"
경악하는 심호규였고 딸이 버럭 소리질렀다.
"아배요!!!"
"놀래라..귓청 떨어지것다?"
"내가 왜 날짠교?! 이름을 갈켜주려면 지대로.."
"날자가 어뗘서? 호적이름보다 열배는 낫구만. 그럼 진짜이름 갈켜줄까?"
"동생 이리 와. 뭐라고 사기쳤는지 모르지만 아배말은 열에 한개만 새겨듣고 다 흘려보내야 돼"
"하..하지만 신방이란 것은...날자..가 말 안한 이상...."
"한방에서 같이 잔 것은 사실이잖아!"
사장은 내 알바 아니라는 듯이 뒷짐지고 고물현장으로 가고 있었다.
"...그, 그건...사실이지...근데..라면..은 언제?.."
날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얘좀 봐? 내가 라면 끓이는 기계라도 된단 말이야!"
하우스 안. 주방..셋이 둘러앉아 라면을 먹는 참인데..
한입 먹은 이사장이 찌푸리며 젓가락을 던졌다.
"맛이 왜 이러냐? 이걸 사람이 먹으라고 끓였단 말여?"
"시, 실은 제가 끓였는데..너무 뭘 몰라서..솜씨가.."
"허긴 덜된 조교탓이지 졸병이 뭘 알것냐..영창은 안 보낼게 라면 한 박스 계란 한판 사다놓고 가라"
"...파한단도 추가하지요"
"헐, 이리되면 성의가 괘씸해서 안 먹을 수가 읎네?"
젓가락을 잡아들더니 다시 먹기 시작했다.
도무지 헷갈리는 표정의 심호규였다.
"호구야.."
"...예..사장님..."
"언제라도 와서 라면이든, 이름이든, 놀든, 쉬든, 자빠져 자든, 네 마음가는대로. 모든 거슬 내려놓고 네 편한대로 히봐라"
"....고맙습니다..."
"날자야. 남양차가 열시에 온다고 했지?"
"알면서 물어보는 건 또 뭐래?"
"쫄병믿고 빈둥거리면 즉각 전역시켜버릴겅게 똑바로 하란 말이다!"
4. 바람이 전하는 말
이사장이 창고에서 수레를 끌고 나와 짐을 공터에 부리는데 헝겊등이다.
뒤에서 밀던 호규도 일하고 창고안에서 다른 수레에 더미를 적재하는 날자도 보였다.
땀을 씻으며
"헝겁이 생각보다 이리 무거울 줄은 몰랐네요?"
"종이도 상당허지. 물도 공기마저도. 세상 모든 것은 무게가 있어. 송장도. 근디 사람만은 많이 가볍기가 쉽제"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차차 알게 되것지만 가볍고무겁고도 보통 공부가 필요한 거시 아니라고"
"...그렇겠어요.."
"노래나 해봐. 가수란 언제 어느 때나 노래를 떠나서는 안되는겨. 힘들겠지만 그래도 해야되야"
어이없는 호규가 짜내는듯이 노래를 했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그려. 니 영혼이 떠날 날도 오지"
짐을 야적한 곳에 올려쌓으며
"행복한 너는 나를 잊어도"
"만만에 콩떡 잊지는 절대 못허제"
빈수레를 끌고 창고안으로 들어가며
"어느순간 홀로인듯한 쓸쓸함이 찾아올거야"
"본래 인생은 홀로니께. 암먼"
짐이 적재된 수레를 잡아들며
"바람이 불어오면 귀 기울여봐"
"수많은 소리 소리들"
수레를 끌고 나오며
"작은 일에 행복하고 괴로워하며"
"기려기려 암먼"
둘을 지켜보는 날자의 가관이라는 표정
"고독한 순간들을 그렇게들 살다갔느니"
"고독은 작가나 가수의 천형잉게로"
울퉁불퉁한 바닥에 흔들리는 수레를 끄느라 힘들고
"착한 당신 외로워도 바람소리라 생각하지마"
"착해야지 암만. 착혀야혀"
큰 청소차에 부착된 집게가 적재함에 헝겁을 다 쌓고
빠져나가는 것을 좀은 지친 세명이 지켜본다.
# 파가 끼워진 계란 한판을 들고 라면 한박스를 끼고
언덕을 오르는 호규 모습.
# 노인들과 잡철과 프라스틱을 분류하는 호규
# 한밤중 원룸에 돌아와 털썩 눕는 심호규 녹초가 된 모습.
'..몸은 좀 피곤해도 고민도 갈등도 없었던 하루였어'
'모처럼 잠도 푹 잘 것 같은..'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 한낮 고물상에 나타난 호규가 머릴 긁적이며 이사장에게
"...여기저기가 아파서 좀 늦게 일어났어요..."
"안하다 하니께 당연 탈이 생기제. 새참이나 끓이고 주변 청소나 혀"
주방에서 큰 냄비에 라면을 넣는 심호규. 옆에선 날자가 도마에서 파를 썰고 있었다.
"파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이건 딱 이 정도가 좋아. 스프도 마찬가지. 끓이는 개수에 따라 넣는 양이 달라져. 물도 그렇고. 시간도..며칠 해보면 알거야"
"그런데 가수가 꿈이라고? 난 노래는 잘 몰라도 많이 힘들 거야. 특히 울아부지랑은"
"...왜 그런 생각을?"
"원칙이고 문법이고 없어. 무조건 마구잡이에다 주먹구구란 말야"
"...몇곡인가 작사작곡도 했다고 들었는데?"
"미발표 습작을 누가 알아줘. 나도 들어봤는데 전혀 아니야. 차라리 초등생이 만든 노래가 훨 나을걸"
호규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오죽함 집안에 키타나 하모니카 한개도 없겠냐고. 아무리 아부지지만 답이 안나온다니깐. 전축이나 테레비젼 라디오하나 안 듣는 작곡가 뻔하잖아. 동상도 잘 생각해야 후회하지 않을거야"
라면 먹은 후, 술을 비운 이사장이 편히 의자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딱히 문법도 수업도 필요 읎어. 소화되는대로 내공을 쌓으면 되는겨. 쌓이고 쌓여 넘치면 자동으로 울거나올 거니께"
"칫. 뜬구름 잡는 소리.."
날자의 잔소리에 쳐다보지도 않고
"시상 모두가 뜬구름이여. 영원한 것도 없고 머물지도 않고 기냥 덧없이 흘러가버리는겨"
"나가 노래하나 해볼랑게 들어봐라"
호규가 정신 차려 이여병에 잔득 집중했다.
"비가 오도다..눈두 오도다..오자마자 하나 되어 물이 되어 흘러버리다..내 마음은 영도다..님의 마음은 영하십도..합치면 영상으로 오르려나.."
"가사도 얼척없지만 가락이 저게 뭐야. 도대체"
"호구야, 당장 닿는 게 없을 거다만 인연이 있다면 언제가 되든 낚을 날이 올기다.."
"그, 그런데..판소리 비슷도 하고 랩..? 재즈?..그리고 단조에서 어느새 장조로 변했는지?...키도 왔다갔다.."
"그게 중요한 거시 아녀. 무엇보다 가사에 마음을 담아야는겨"
호규표정이 애매몽롱히 변했다.
"그, 그럼 가사를 다시 한번만 천천히"
"재방송은 않는 거이 본래 내 신조란다. 출연료를 후히 챙긴다면 모를까"
길을 걸어가며 통화중인 심호규였다.
[엄마? 내 전화번혼 어떻게 알았대? 알고 보니 응큼 구신이었잖아!]
"거울에 크게 써있잖아. 이태후라니 실명은 아니겠지만 그런 황당한..작명 보나마나..."
[그래서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어디 좋은 술집 알아?]
"착각마시고 이사장..아버님 이력 좀 대강.."
[우리집 가훈이 뭔지 알아? 세상에 공짜란 없다!]
잠시 듣던 호규가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 열개 이상의 가훈이 등장할 거라는 것에 내기라도 걸겠어.."
'뭔가 황당하고 얼척없지만...그 중에 얼핏 진짜가 스며있는 것도 같고..비가 오도다..눈두 오도다?'
마침 눈이 한두송이 떨어지더니 머잖아 완전히 만발해진다.
"...눈이 오는데 이런 날이야말로..."
핸드폰 주소록을 밀며..
"효실인 참고..영진인 멀고..영애누나는 바쁠 거고......우태는 이틀전에 봤고..희자는 쪽팔리기 십상...선생님?..전화할 곳이 하나도 없네.."
마침 길가에 공중전화가 보이자, 들어가서 번호를 천천히 누르는 호규였다. 잠시 후
[너 호규 심호규지? (깜짝!) 아무리 생각해도 너밖엔 없어..너지? 맞잖아 (충격에 빠져 몸을 떨며) 호규야 제발 단 한마디라도 해봐!]
전화를 끊고 밖으로 허둥지둥 나오는 심호규
'숨소리밖에 안냈는데...어떻게 나라고 추리한 거지? 어떻게..? 이런 기적이..아아 선생님...'
눈물까지 났는지 손으로 눈을 비비며
'십년도 넘었는데..그동안 거친 제자들이 한두명이 아닐 건데...엄청 많을 건데 어떻게 나를 콕 찝어낼 수가...?'
담에 기대어 눈을 바라보는 호규 눈에서 흐르는 물.
'아무리 생각해도 나밖에 없었다니...아아 선생님은 역시..제 영원한 누나이자 멘토이자 여신...이셨네요'
'선생님이 계신 강원도에도 지금 눈이 내리는가요..아아..'
그런데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한참 보다가 버튼을 눌렀다.
[호구야 이런 날 한잔 안하면 죄받는다는 것 알지?]
"그것도 가훈이야? 요즘..아니 오늘은 특히 생각할 게 많아서 혼자 마셔야겠어"
날자가 빽소리를 쳤는지 놀라 진저리치는 호규였다.
눈 내리는 골목어귀의 포장마차안에 손님이 들어찼고
김 오르는 홍합솥. 한구석에 심호규의 맥주잔에 반잔 술이 남아있고
날자가 소주를 맛있게 먹는 중인데 한 병은 벌써 비운 상태였다.
"휴우 이제야 갈증이 풀리네. 어때? 이제 생각다했어?"
"말이지..진짜 태후마마라면 주변에 남자..참..부하들이 한둘이 아닐 건데.."
"그래봐야 내시들을 어디다 써먹어 키키킥"
"....나도..친구 선후배는 많아도 막상 전화할 사람이..없더라고.."
"태후가 파리 날리는데 호구나부랑이야 말해 뭣해.."
"말이지 이심전심이랄지.. 텔레파시랄지..그런 거 믿어?"
"당연 믿지. 꼭 호구가 지금 개털신세일 거라는 촉이 딱 오더라고. 아니면 내가 아무리 술 고프기로 간택했겠어? 킥킥..술은 집에 열 박스도 넘게 쌓여있걸랑"
돌연 호규가 글라스를 들어 한번에 마셨다. 만원짜리 두장을 주인에게 주며
"이제 우리 술은 뚝입니다. 십분후에 나갈게요"
"뭘 십분씩이나? 갈증 풀었음 되었지"
하여 밖으로 나온 남녀였는데 눈은 그쳐있었다.
"하..하나도 딱부러지는 게 없어..모든 것이 어중간 어물쩡..개갈이...까닭이 안나..시절..시절"
"시절 들어봤어. 충청도 방언인지 사투리. 철없다는 거잖아"
"그, 그런가? ...근데 날자도 보통이 아닌데..학교는 어디까지?"
"유학갔다왔다면 믿을 것도 아니면서 왜 물어. 유치원도 못나왔다면?"
"그그그렇네......"
"근데 너 언제부터 누나이름 함부로 부르니? 그렇게 배웠어?"
"...아, 아니 난 못 배웠어..그래..나같은 게 무슨..."
"얘가 정말 보자보자하니..야. 심호구 너 같은 게 뭔데? 남에게 호구잡히는 게 너같은 거야? 호구야 왜 이러니 너 그런 놈 아니잖아. 스스로의 가치는 마음먹기 달린 거란 말야"
"아..알아 알지만...자꾸 자신이 없어져..."
"젊을 때는 모두 그래. 절망하고 갈등하고 힘들고. 그런 것이 밑거름이 되는 거야.."
"......저기 누나..내가 철없이 굴었다면..이해를.."
"얘좀 봐? 이젠 진짜 같이 자자고 할 눈치잖아. 꿈깨!"
하늘하늘 걸어가버리는 날자를 보며 몽롱한 호규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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