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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사람됨 (창 2:4-25)
창세기 1장은 창조를 순서적으로 나타낸 데 비하여 2장은 사람의 창조를 우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조의 마무리가 인간의 창조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장 2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이, 같은 흙으로 만든 동물과 새들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며 보살피는 것을 수행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이것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사람이 창조세계를 다스림을 통하여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한 가지 기준이 바로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한가지의 법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물 됨을, 즉 사람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당합니까? 아니지요 지극히 당연하시고 마땅한 것입니다. 100가지를 금한들 안 지키면 안 되는 것이 지음 받은 자의 자세이지요?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요? 그러한 생각은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죄된 속성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상태가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뱀의 유혹을 받아 따먹게 되지요? 이때 뱀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너도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셔야 하는 선악의 기준을 이제 사람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한 의미가 아니라 타락한 죄인으로서 선악의 체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불행의 시작입니다. 아니 선악을 알아서 잘 대처를 해야 하는데 왜 선악을 아는 게 잘못 되었고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입니까?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선과 악이 결정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악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름이 사람됨인데 이제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자기중심적인 선악체계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기의 기쁨, 자기의 이익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기쁘고 이익이 되면 선이고 나에게 손해가 오면 악인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선악체계가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창세기 3장에서 바로 증명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실 때 아담이 숨어 있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먹지 말라한 것을 네가 먹었느냐? 물으실 때 아담이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 2장 23절에서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해놓고는 이 여자 때문에 따먹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내게 주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진리 관이 들어 나지요? 자신에게 손해가 오는 것을 악으로 여기고 그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는데도 똑같은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니까 부인할 수 없는 아담의 후손인 것입니다. 아담만 그렇습니까? 하와도 꼭 같이 뱀에게 전가를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 탓하는 것도 역시 선악과 따먹은 후손의 표시입니다. 그러면 자기 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하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탓이라고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대부분 “그래 알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이러는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더러워서 내 잘못이라고 해준다는 것이지요. 워낙 세상이 남의 탓만 하다가 보니 카톨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차에다가 스티카를 붙여 다니는데 어디에 붙여야 내 탓이요가 됩니까? 운전적 앞에 붙여야지요 그래야 볼 때마다 내탓이구나 할텐데 차유리 뒤에다 붙여 놓으니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됨에서 멀어진 그 값을 우리가 함께 주고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이익에 따라 선악을 결정하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여 악을 행하면 자신의 선한 행위로 악을 상쇄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양심이다, 도덕이다, 인간의 이성이다 라고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선악의 구조를 사람들이 스스로 정하여 놓고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착한 일 하면 복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나쁜 일 하면 벌받고 죽어서도 지옥에 간다고 모두가 말합니다. 전도를 해보면 거의다가 예수믿어서 천국가는게 아니라 자기 행위로 지옥도 천국도 간다고 말합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아이든 어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실감이 안되면 전도를 해 보십시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그러면 뭐라고 그래요 예수 믿는 니나 잘해라 그러지요 니가 천당가면 나는 만당간다 그러지요 예수믿는 너보다 내가 양심 더 바로 쓰고 산다 내걱정말고 너 걱정이나 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소리를 듣는 우리가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더 독하고 더 악착같고 사기꾼 거짓말쟁이가 많으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좁은 문 좁은 길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문 넓은 길로 자가용타고 쑥쑥 들어가는 그런 곳 말고 좀 수그려서 겨우 들어가는 그런 교회가 되면 사람이 좀 적게 올는지, 어떤 사람이 불고기 집과 교회의 공통점이 주차장이 넓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욕을 얻어 먹는 일은 우리가 회개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변하지 아니하는 사고방식, 내 죄는 내가 책임져야지 어떻게 남이 책임지느냐는 이 생각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어느 시골의 할머니가 짐을 이고 길을 가는데 경운기를 몰고 가든 아저씨가 할머니를 태워 주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할머니가 잘 타고 있는지 돌아보니 한 손으로는 경운기 난간을 붙들고 한 손으로는 여전히 머리의 짐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짐을 내려놓으세요. 아이고 내가 탄 것만 해도 고마운데 짐까지 어떻게 내려놓는감. 이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이 선악의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피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도 하지요. 온통 세상이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은혜란 너무나 낯선 말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은혜란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뻔뻔스럽게 지옥갈 죄도 용서받았다고 믿고 있으니 이게 세상의 원리로는 불가능 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 선악을 책임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체계로 가득 차 있으니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가 없지요. 자기행위를 믿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 다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많이 자신의 선악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배를 빼먹고 어디 가다가 교통위반으로 순경에게 걸려서 딱지를 받게 되면 뭐라고 생각합니까? 예배 빼 먹었니 이랬구나 하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어떤 손해가 오면 내가 뭘 잘못했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생각도 때로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너무 농땡이 부렸더니 하나님이 손대시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생각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매사를 인과율로 계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여서 아무른 어려움 없이 지낸다면 어느 정도를 하여야 할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갚으신다면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인과율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고 계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노림 수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선악의 기준을 따라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을 쌓아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한 예수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자신의 선악체계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부터 자신의 행위를 믿지 아니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되므로 스스로 선과 악을 조율하여 살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이것이 죽음입니다. 물론 육신의 죽음도 죽음입니다만 더욱 심각한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라고 하십니다.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로 온 세상이 심판아래 하나님께로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완성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인간의 범죄로 단절되었으나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렘 31:31-34입니다.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제는 마음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언약은 죄를 사하되 그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는 그런 용서의 언약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흘리신 언약의 피입니다. 이 피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이제 원래의 하나님의 사람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의 체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욥기서입니다.
욥과 욥의 세 친구의 논쟁을 우리가 잘 압니다. 욥의 세 친구의 반박은 무엇입니까? 네가 죄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 받는다고 공격합니다. 우리가 욥기서를 보면 욥의 세 친구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을 만큼 논리 정연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의로와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가 없다 그러니 욥의 너의 시련은 죄 때문에 왔으니 회개하라. 그런데 욥은 나 죄 지은것 때문에 이런 재앙이 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항변하지요 그러니 욥을 보고 너 교만하다 그러면서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욥이 죄 때문에 고난 온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시지 않고 다른 말로서 입을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욥이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간구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아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뿌리깊게 내려있는 선악체계가 뽑혀 나가고 주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범사에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 나의 공로가 전혀 없도다 라는 진정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됨이 더욱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