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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기행
1. 여순항쟁의 개요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무장봉기가 발발. 정부와 미임시군사고문단은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 겸임)를 설치하였다. 이는 기존 경찰중심의 진압작전에서 군인주도의 초토화 작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위해 여수주둔 제14연대에 출동명령이 하달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봉기하였다. 제주도 출동명령은 군인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잘못되고 부당한 명령이었다. 군인의 봉기는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사회적으로 불만이 고조되었던 지역 주민에게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경제적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였던 민중이 호응하고 지지하면서 전남지역을 비롯한 전북․경남 일부지역까지 확산되었다. 이를 여순항쟁이라고 일컫는다.
여순항쟁은 군과 경찰의 알력이 작용하기도 했지만, 근인(近因)은 제주4․3항쟁을 진압하라는 작전명령을 거부하면서 발발한 봉기이다. 제14연대 병사들은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명의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이 성명서에는 제주도 작전은 “제주도 애국 인민의 무차별 학살”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헌법에 명시된 군인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부당한 명령이라고 밝히고 있다.
군인이 촉발한 봉기에 해방 후부터 쌓인 분단정권 수립, 친일파 등용, 토지문제 미해결, 관리 부정부패 등의 정치․사회・경제적 불만에 민중이 호응하고 지지하면서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정부는 여순항쟁이 발발하자, 모든 언론을 통제했다. 그리고 10월 21일 오전 11시 국무총리 이범석은 국군이 일으킨 반란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며, 그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라고 밝혔다. 국내외의 극우 진영 정객들과 연락을 취해 러시아 10월 혁명과 비슷한 전국적인 반란을 기도했으며 정부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조직인 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했다는 발표는 일반인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김구의 명백한 부인과 일반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자 권력에서 소외된 극우정객과 공산주의자들이 합동으로 반란사건을 일으켰다는 정부의 초기 발표는 민간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으로 그 범위가 점차 변화하게 된다. 김형원 공보처 차장은 “일반인들은 여수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민중이 여기에 호응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전남 현지에 있는 좌익분자들이 계획적 조직적으로 소련의 10월 혁명 기념일을 계기로 일대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그들이 일부 군대를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다.
‘반란’의 주체가 제14연대 군인에서 전남 현지에 있는 민간 좌익들의 조직적인 계획 하로바뀐 것이 발표의 요지. 정부조직인 국군 내부로부터 ‘반란’이 처음 일어났다는 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반란’의 초기 주체가 국군임을 부정, 그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 정부가 여순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선전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불똥은 북한 공산주의 세력으로 번져 나갔다. 극우정치세력의 세계관에서 이 같은 전개는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이에 따른 피해는 전남 동부지역의 민중에게 돌아갔다.
토벌군이 순천과 여수를 완전히 점령한 뒤인 11월 3일 국방부는 ‘전국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벽보를 각지에 살포하였다. 이 벽보에는 먼저 여순항쟁을 ‘민족적 양심을 몰각한 공산도당의 조직과 명령을 통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파괴’하는 것이라 비난하는 한편 ‘소련 제국주의의 태평양 진출 정책을 대행하려는 공산당 괴뢰정권의 음모’라고 규정. 이제 여순항쟁은 반도 남쪽의 한 지방에서 이승만의 실정에 반항하여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소련의 대외정책을 한반도에서 수행하는 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었던 것.
제14연대 군인의 봉기에 정부는 10월 21일 반군전투토벌사령부(사령관 송호성)를 광주에 설치. 10월 22일 제5여단 여단장 김백일 중령 명의 계엄령이 여수 순천지역에 선포됐다.
10월 23일 순천지역을 탈환한 토벌군은 순천지역 민간인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이후 10월 24일 여수 토벌작전을 전개를 시작으로 10월 27일 여수를 완전 탈환하였다. 여수순천 토벌작전과 뒤이은 협력자 색출은 이 지역에 큰 상흔을 남겼다. 일본군의 만주 토벌과 같은 초토화 작전과 자의적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 협력자 색출은 제14연대가 점령했을 때보다 더 큰 피해를 남겼던 것이다. 애당초 토벌군의 순천, 여수작전은 반란을 빨리 진압해야 한다는 정치적 목적에 제14연대 동향에 대한 정보부족이 겹치면서 빚어진 과잉작전이었다.
여순항쟁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이를 김구 한독당 세력을 압살하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자 일반 민간인의 반란과 북과 연결된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몰고 갔다. 이는 군 내부에서 발생한 반란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정부의 일관된 방침. 정부는 군경의 마찰이나 민중에 대한 경찰의 가혹한 행정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오히려 여순항쟁을 기회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키고 학생들을 학도호국단으로 편성하거나 경찰 증원으로 대응했다.
이 같은 정부의 대응이 불러일으킨 가장 큰 피해는 민중에게 모두 전가됐다. 여순항쟁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의 주민들은 ‘반역자’, ‘빨갱이’, ‘폭도’로 몰리면서 숱한 인명 피해와 재산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강화되는 반공체제 앞에서 다른 목소리는 허용되지 않았다. 아무 근거 없는 누명 때문에 국회의원은 빨갱이로 몰리고 검사와 학교 교장까지도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숫자는 아직도 알 수 없다. 또한 여수순천지구에 내려진 계엄령은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는 중대한 헌법위반 사항이었으나, 정부의 위협과 강경한 분위기 조성으로 정부에 비판적인 국회조차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정치적 압력에 쫓긴 현지의 무리한 토벌작전의 실패의 후과(後果)가 지역 주민의 피해로 전가됐다는 점은 여순항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측면임과 동시에 당시의 정부 태도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필요한 지점이다. 토벌군과 정부는 학생들이 반란에 열렬히 참가하고 끈질기게 저항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강경하고 탈법적인 부역자 색출을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 한 번에 목숨이 오고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지역공동체는 산산조각 났으며 일반 민중의 마음 또한 분열되었다. 여순항쟁에서 나타난 민중억압의 양상은 여순항쟁 이후 더욱 체계적으로 강화되었다 지역사회에서 출발했고 거기서 그치기는 하였지만 그 성격은 전국적인 범위에서 규정되었고 그 영향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여순항쟁은 당시의 정치 사회적 지형을 변화시키면서 전쟁 전 남한사회의 기본질서가 잡히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여순항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지났지만, 이 사건의 사실과 실체에 대한 규명은 아직도 요원하다.
1) 여순항쟁 민간인 피해
조사기관
조사시점
사망
중상
경상
행불
합계
전남보건후생국
48.11.01
2,633
1,028
488
825
4,974
정부 사회부
48.11.20
570
812
236
-
1,618
전남 사회과
48.12.20
1,441
-
-
-
1,441
정부 중앙청
49.01.10
3,392
2,056
-
82
5,530
전라남도 당국
49.03.15
5,029
2,921
-
303
8,253
49.06.15
5,379
3,067
-
313
8,759
49.10.25
11,131
-
-
-
11,131
<표-1> 여순항쟁 인명 피해 조사기관별 현황
여순항쟁 희생자는 아직 정확하지 않다. 진실화해위원회(2005년 12월~2010년 2월까지 활동)의 보고서에 따르면, 전라남북과 경남 등 37개 지역에서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여순항쟁은 전남동부지역에 국한된 사건으로 인식되었으나, 피해대상 지역의 범위가 훨씬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여순항쟁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여순항쟁과 관련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누구도 답을 할 수 없다. 어림잡아 얼마 정도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들이 회자될 뿐이다. 여순항쟁 1주년을 맞이하여 전남도 당국에서는 1948년 10월 25일자로 11,131명이 희생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군법회의가 광주 2차례, 순천 3차례, 여수 4차례에 열렸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언도된 사람은 곧바로 처형되었으며, 20년형, 10년형, 5년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대전형무소, 광주형무소, 공주형무소, 김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군경에 의해 모두 학살되었다. 그 숫자가 어림잡아 3천명에서 5천명에 이른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으로 학살된 숫자도 적지 않다. 따라서 여순항쟁과 관련한 희생자는 1만5천명에서 2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여순항쟁이 진압되고 정부기구와 전라남도가 희생자를 밝혔지만 이마저도 가해자, 피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발표.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른 여순항쟁 희생자(여수・순천・구례・보성・고흥・곡성)는 1,401명이며, 전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가 조사한 광양지역 피해자는 562명으로 합하면 1,963명이다. 이들 중 남성의 피해가 92.3%로 전쟁과 혼란기에 나타난 현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연령별로는 20~30대가 63.2%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높은 활동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가해자에 따른 희생자 현황을 살펴보면,
가해자
경찰
군인
봉기군
빨치산
지방좌익
인민군
미상
합계
빈도
722
944
100
79
24
11
83
1,963
비율
36.8
48.1
5.1
4.0
1.2
0.6
4.2
100.0
합계
84.9%
10.9%
4.2
100.0
<표-2> 여순항쟁 가해자에 따른 피해 현황
2) 제14연대는 어떤 부대인가?
1946년 1월 국군준비대 등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이 선포되고, 도청 소재지 별로 9개 연대의 국방경비대가 창설된다. 당시 국방경비대는 ‘경찰 예비조직’적 성격이 강했다. 전라남도의 경우도 1946년 2월 제4연대가 광주에서 창설되면서 모병을 시작했고, 1948년 1월 부대 편성을 완료했다. 이후 미군 철수에 대비해 10연대~1제5연대가 창설했다. 제14연대는 여수 신월리에 광주에 주둔한 제4연대 기간 간부와 병사들 중 1개 대대가 내려와서 1948년 5월 4일 창설했다.
제14연대가 창설한 여수 신월리는 일제강점기 여수항공기지(해군202부대)로 사용되던 군용지였다. 이곳에 제4연대(광주) 소속 안영길 대위 이하 1개 대대 병력이 제14연대를 창설했고, 이영순 소령이 초대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이윽고 김익렬 중령, 오동기 소령을 거쳐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부대 창설과 함께 장교 및 하사관은 모병을 시작했는데, 당시 군대는 향토연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국방경비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군으로 변경되었다. 초대 국방부 장관은 이범석(국무총리 겸임)이 8월 16일 취임했고, 국방경비대는 육군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다만, 군(軍)으로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하는 ‘국군조직법’은 1948년 11월 15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정부수립 이전에 발생한 제주4・3사건은 쉽사리 진압되지 않았다. 7월 21일 부산 제5연대, 대구 제6연대가 제주도로 출동하였고,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 부사령관 송요찬 소령)를 설치하고 제14연대 1개 대대 병력 파병이 결정되었다. 제주도경비사령관에게는 제주에 주둔 중인 제9연대와 부산 주둔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 주둔 제6연대 1개 대대,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 해군 소령 최용남이 이끄는 해군 함정, 홍순봉 제주 경찰청장이 이끄는 제주 경찰대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여수 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 병력의 제주도 출병은 10월 15일경 결정되었고, 1948년 10월 19일 저녁 8시경 여순항쟁이 발발했다.
3) 여수 토벌작전
10월 20일 정부는 제14연대에서 봉기가 발발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재빠르게 언론을 통제했다. 그리고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비롯하여 미군임시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 준장, 하우스만 대위 등 국방부 군사 고문단이 모여 비상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광주에 ‘봉기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송호성 대령을 임명했다. 미군 군사고문단은 진압 무기 및 군수물자 동원과 작전지휘 등 토벌작전에 사실상 사령부 역할을 했다.
여순항쟁 발발 당시 육군은 총 15개 연대였다. 이 중 38도선 경계 부대(제1연대, 제8연대, 제10연대)와 제주도에서 토벌작전을 수행중인 부대(제9연대, 제11연대) 그리고 제14연대를 제외한 총 9개의 연대 중 7개 연대(제2연대, 제3연대, 제4연대, 제5연대, 제6연대, 제12연대, 제1제5연대)와 장갑차 부대, 항공대, 해안경비대 함정 등이 동원되어 토벌작전에 나섰다.
순천탈환 공격은 10월 22일 제5여단장 김백일 대령의 지휘 아래 제12연대 백인엽 부대가 주도했다. 이윽고 제3연대, 제4연대, 장갑차 부대, 경찰부대가 증강된 진압군은 이른바 인민군사령부가 있는 동순천역을 일시에 공격하면서 순천외곽지역을 10월 22일 점령했다. 10월 23일 아침부터 재차 공격을 감행하여 오전 11시경 순천 시내 전역을 탈환했다. 순천 토벌작전에 나섰던 김백일 제5여단장이 여수와 순천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시점이 바로 10월 22일이다. 그런데 10월 22일 전투 이후 봉기군 주력부대는 이미 순천을 벗어나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피신했다.
이윽고 여수 공격에 나서 10월 27일 여수 시내 전역을 탈환했다. 10월 24일 1차 여수 탈환작전 이후 봉기군 주력부대는 여수의 북동쪽 상암과 신덕을 거쳐 여수와 광양 사이에 위치한 묘도(猫島)에 안착했다. 이곳에서 2~3일 머물며 상황을 지켜본 봉기군은 광양 백운산으로 들어갔다. 여수에는 일부 봉기군과 지방좌익, 학생들만이 남았다. 여수 탈환작전은 대한민국 국군 사상 처음으로 육・해・공 합동작전이었다.
당시 여수와 순천 토벌작전에 나섰던 국군의 주요 지휘관은 대부분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 특히 제5여단장 김백일, 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 제1제5연대장 최남근, 육군 정부국장 백선엽 등은 만주 봉천군관학교 졸업했으며, 1939년 8월에 항일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창설한 간도특설대 소속 한인 군관 출신이었다. 특히 여순항쟁의 토벌작전을 주도했던 김백일은 비리혐의로 군복을 벗었으나, 여순항쟁 토벌을 위해 다시 기용하였다. 일제강점기 간도특설대의 활동이 그가 다시 군복을 입는데 기여한 것이다.
4) 제주도 출동과 박승훈 연대장
1948년 10월 7일 경에 부임한 박승훈 연대장은 1914년에 일본육군사관 26기로 졸업하고 1935년에 일본군 소좌를 예편하였다. 이윽고 만주로 건너가 만주군 보병 중교(중령)에 임명되어 국경감시대에 배속되었다. 박승훈이 부임한 국경감시대는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동북항일연군․팔로군 등 항일 조직을 공격하기 간도특설대의 모태 조직. 1938년 12월 국경감시대가 폐지되고 간도특설대 창설. 해방 당시 박승훈은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상교.
박승훈(1890년생)은 일본 육사 26기 그의 동기로는 미 군정청 국방사령부 고문과 정부수립이후 초대 육군총참모장을 역임한 이응준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신태영,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등이 있다. 항쟁 발발당시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은 일본 육군 49기 졸업생이며, 박정희는 50기 졸업생이다. 장교로서 군번 1번을 받은 이형근과 정보국장 백선엽은 1920년생이며, 정일권 참모장은 1917년생이다. 당시 국군의 주요 요직에 있었던 이들과 비교하여 박승훈은 군대경력, 졸업기수, 나이 등이 월등이 앞섰다. 그런데 그들보다 늦게 특별임관(1948년 9월말 경)하였으며, 계급도 중령에 불과.
박승훈의 제14연대 연대장 부임은 제5여단 여단장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이는 제주도 토벌작전과도 맥을 같이한다. 즉 박승훈은 만주군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조직의 토벌작전 전투지휘 경험이 누구보다도 출중하였다. 제주도 토벌작전에는 실전 전투 경험을 두루 갖춘 박승훈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였다. 박승훈의 여수 제14연대장으로 부임은 “제주도민 30만명을 모두 죽여도 좋다”는 초토화 작전을 의미한 준비 작업이었다.
5)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1948년 10월 11일 제주4․3항쟁을 토벌하기 위해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는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제주4․3항쟁으로 인한 희생자를 25,000명에서 30,000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이전까지 희생자(민간인, 경찰 포함) 800명 정도이다. 즉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는 여순항쟁의 발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순항쟁을 ‘반란’으로 규정한 가장 큰 요인은 국군이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해본다. 군인은 불편부당하거나 군인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명령도 모두 수행해야 하는 것일까?
1980년 5월 18일 발생한 광주민중항쟁. 군인의 출동으로 광주는 피의 학살극이 벌어졌다. 당시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이루어진 이후라 광주는 계엄 상황이었다. 당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육해공 연합작전을 펼쳤으며,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피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전두환 신군부가 내린 명령은 부당했으며, 잘못되었다는 것이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되었다.
헌법 제5조 2항에는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군인의 사명을 명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당시 1948년으로 돌아가서 보면, 제헌헌법 제6조에는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명시하였다.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방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사명으로 하는 존재이다. 국가의 안전보장이란 국민의 안전이다. 1948년 10월 11일 설치된 제주도경비사령부는 제주도에 특별한 사항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여기에 여수주둔 제14연대 1개 대대 병력이 출동명령을 받은 것이다.
2. 여순항쟁 간략 일지
04월 03일 : 제주4.3항쟁 발발
05월 04일 : 제14연대 창설. 초대 연대장 이영순(여수읍 신월리)
05월 15일 : 김익렬 중령 연대장 취임
07월 15일 : 오동기 소령 연대장 취임
09월 05일 : 국방경비대 국군, 해안경비대 해군으로 정식 발족
10월 05일 : 박승훈 중령 연대장 취임
10월 11일 : 제주경비사령부 설치(사령관 김상겸 대령)
10월 15일 : 육군 총사령부로부터 1개 대대 파병 편성 명령 하달됨.
10월 19일 아침 7시 : “LST 19일 20시 출항”하라는 명령 하달.
10월 19일 저녁 8시경 : 국군 제14연대에서 봉기
10월 20일 새벽 1시 30분경 : 여수읍내 진입 시작
10월 20일 6시경 : 여수시내 장악
10월 20일 7시 30분경 : 봉기군 순천역으로 이동(9시경 순천역 도착)
10월 20일 오전 : 광양, 구례, 곡성, 보성, 벌교, 고흥 경찰 순천으로 응원부대 파견.
10월 20일 오전 : 정부 비상회의.
10월 20일 15시경 : 여수인민대회 개최. 약 1~2천명 운집.
10월 20일 15시경 : 봉기군에 순천읍내 점령됨.
10월 20일 오후 : 광양경찰서 잡혀있던 민간인 27명이 주령골에서 학살됨(덕례리 학살).
10월 21일 :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광주 설치. 7개 연대 총 10개 대대 병력 투입.
10월 21일 11시 30분 : 이범석 국방장관 첫 발표.
10월 22일 : 여수.순천에 계엄령 선포
10월 22일 15시 : 순천 서면 학구에서 전투 발생.
10월 22일 저녁 : 봉기군 외곽지역으로 퇴각.(지리산 백운산으로 입산)
10월 23일 11시 : 토벌군 순천 시내 전역 탈환.
10월 23일 오후 : 순천 전역에서 협력자 색출이 시작됨.
10월 23일 : 해군 박격포와 함께 제5연대 1차 여수 상륙 시도.
10월 24일 : 토벌군 여수시내 2차 공격 실시. 잉구부에서 패퇴함.
10월 26일 : 여수시내 3차 공격 개시. 바다에서 무차별 포사격 개시.
10월 26일 : 여수시내 1차 화재 발생
10월 26일 오후: 여수시내 주요 거점 장악.
10월 27일 오전 : 여수시내 2차 화재 발생.
10월 27일 14시경 : 토벌군 여수시내 완전 진압.
10월 27일 오후 : 여수 전역에서 협력자 색출이 시작됨.
2. 여수지역 주요 답사지
대한민군 정부 수립 전후 과정에서 국가권력의 일탈로 발생한 제주4․3항쟁과 여순항쟁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안타깝게도 지역으로 국한하여 역사를 인식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기행이나 답사의 경우도 민간인 학살에 주안점을 두고, 학살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병사로 촉발한 여순항쟁은 국가 권력의 부당한 일탈에 대한 항쟁이다. 따라서 기행이나 답사도 항쟁의 관점이 정확하게 설명되어한다.
항쟁이란 반란이나 폭동의 경우처럼 특정 사회 내부의 지배 권력 관점에서 바라보는 ‘부적절함’의 의미가 강하지 않으며, 대신 ‘부당하게 억압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법적 행위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당한 행위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여순항쟁의 기행은 세 가지로 분류하여 기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봉기군의 진출 경로와 인민위원회의 활동. 둘째, 토벌군의 진입 경로와 경찰의 상황. 셋째, 민간인 학살지이다.
▣ 봉기군 / 인민위윈회 ::
제14연대 - 충무지서 - 잉구부 - 인민대회장 - 여수극장 - 여수일보 - 여수경찰서 - 여수역 ▣ 토벌군 / 경찰 ::
봉산지서 - 미평지서 - 잉구부 - 서초등학교 - 충무지서 - 진남관 - 여수경찰서 - 종산초등학교 - 여수여중학교 - 여수신항
▣ 민간인 학살 ::
구봉산(구봉어린이집) - 서초등학교 - 진남관 - 종산초등학교 - 오동도 - 만성리 학살지 - 만성리 형제묘 - 미평지서 – 손양원순교지
1) 제14연대 주둔지
신월리는 봉양, 물구미, 신근 등 3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마을로 여수에서는 동정과 서정 다음가는 큰 마을이었다. 앞에는 잔잔한 바다를 끼고 뒤에는 청산이 감싸고 있으며 주위는 바둑판 같은 옥토에 둘려 싸여 주민들은 반농반어로 꽤 풍족한 생활을 하여 옛날에는 봉산동 국동 일대 사람들이 신월리 덕으로 먹고산다는 말까지 나돌고 있었다. 1942년 8월경 앞바다가 ㄷ자형으로 천연만을 이루고 있는 신월리의 지형을 이용해 여수항공기지(해군202부대)를 만들고 미평역에서 이 비행장까지 철도(신월리선)를 놓기 위해서 신근, 물구미, 봉양마을을 철거하게 된 것이다. 이 비행장 공사는 일본토목회사들이 맡아 했는데 노동자들은 이 고장을 비롯해 전남동부 6군 그리고 광주에서까지 끌려온 근로보국대들이 2개월씩 교대로 일을 해 해방이 될 무렵에는 거의 90% 가까운 공정을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이 항복하였고 빈 막사로 남아있었다.
1948년 5월 4일 신월리는 다시 군용지로 편입돼 안영길 대위 이하 제4연대 1개 대대 병력이 제14연대를 창설 이영순 소령이 초대 연대장이 되었다. 이윽고 김익렬 중령, 오동기 소령을 거쳐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한지 채 10여일 밖에 되지 않은 1948년 10월 19일 제주4․3항쟁 진압에 대해 동족상잔을 막기 위해 제주출병을 거부하면서 여순항쟁이 발발하였다.
1946년 1월 국군준비대 등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이 선포되고, 도청 소재지 별로 9개 연대의 국방경비대가 창설된다. 전라남도의 경우도 1946년 2월 제4연대가 광주에서 창설되면서 모병이 시작되었고, 1948년 1월 부대 편성을 완료하였다.
이후 미군 철수에 대비해 10연대~1제5연대가 창설하였다. 제14연대는 여수 신월리에 광주에 주둔한 제4연대 기간 간부 및 병사들 중 1개 대대가 내려와서 1948년 5월 4일 창설하게 된다. 이후 제4연대 기간 장교 및 하사관, 병사들을 통한 모병이 시작되었다.
제주도 출병은 이미 한달전부터 이야기로 전해졌고, 출병 일주일 전에 시가지 훈련을 통해 마지막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19일 밤까지 병사들은 반란의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며, 반란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모르고 있다가 날이 밝아서야 알게 되었다는 군인들의 증언도 있다.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대부분의 병사들은 그 내용을 잘 알지 못한 상태였고, 상황을 알아차린 후 많은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가거나 자리를 피했으나 진압과정에서 사상성이나 활동에 관계없이 가담자로 지목돼 처형당했다. 자리를 피하거나 하여 즉결 처형을 면한 경우는 대부분 형무소에서 복역 중 전쟁이 발발하면서 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반면 임태황씨 같은 경우는 형무소 복역 후 재입대해 제대한 경우도 있었다. 삼산면에서는 산에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한 제14연대 군인도 자수하여 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하여 살아남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행방불명으로 여겨진다.
여순항쟁 이후 1950년 7월 25일 군대가 완전철수하고 한때 텅텅 비어있던 이곳에 1952년 12월 31일 제15육군병원이 설치되어 전방에서 내려온 부상자들을 수용했다가 1953년 7월 27일 철수하였고 육군병원 철수로 상당기간동안 공허지 상태에 있던 이곳은 1962년 6월 26일 뜻밖에도 보사부 결핵환자 자활촌으로 지정돼 전국결핵환자의 총본산이 됐는데 이들이 시내 음식점이나 목욕탕 등으로 함부로 출입하는 바람에 말썽이 많다가 1976년 2월 20일 보사부에서 각기 생활보조금을 지급하여 자유 분산시켰던 곳이다. 1976년 7월 23일 한국화약 제2공장이 들어서 가동 중이다.
2) 서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여수 서국민학교는 토벌군이 10월 26일 점령하여 최초로 사령부를 설치한 곳이다. 토벌군은 10월 27일 여수를 완전 탈환한 10월 27일 오후부터 여수시민을 서국민학교에 집결시켰다. 그리고 이곳에서 협력자를 색출하였다. 당시 서국민학교의 상황은 미국 라이프지 기자인 칼 마이던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그림-1> 10월 27일 ~ 10월 30일 사이 여수 서초등학교 상황
서국민학교에서 협력자를 색출한 주력 부대는 대전 주둔 제2연대(함병선 연대장)이었다. 토벌군은 우익청년단원과 경찰의 협조를 얻어 협력자를 심사한다면서 길게 늘어선 인간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구라도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협력자로 분류하였다. 일명 ‘손가락총’이다. 이들은 학교 뒤의 밭에 구덩이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당시 서국민학교에서는 여수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여수시내가 함포사격과 토벌군의 방화로 시내와 집이 불타고 있음에도 발만 동동 구르며 소리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다. 협력자로 분류된 사람은 즉결 처형되었으며, 일부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제조사를 받아 학살되기도 하고 교도소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당시 서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서천호 씨는 “학교에 나와라고 해서 교실에 갔더니 교실바닥이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3) 잉구부 전투
1948년 10월 23일 토벌대 전투사령관이었던 송호성이 지방 좌익에게 저격당해 차에서 떨어지며 고막이 터지는 등, 토벌군 대열이 무너지며 후퇴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잉구부 전투는 미평에서도 4㎞가량 더 안쪽으로 들어간 종고산 기슭의 잉구부(지금의 소방서 부근)지역에서 발생했다.
24일 지금의 미평파출소 자리인 지서에 47명의 지방 좌익들이 송호성 부대의 장갑차 대열을 보고 도망치다가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결심판을 받았다. 송 사령관 장갑차 대열은 시내 중심부인 충무동 미창창고(전, 시민극장 자리) 앞까지 들어왔다가 잉구부의 협곡능선에 매복해 있던 지창수의 봉기군과 유목윤 보안서장의 지방민 무장부대에게 기습을 당하는 등 봉기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아 여수탈환작전에 실패하였다. 이 과정에서 지창수를 포함한 제14연대 봉기군들은 야음을 틈타서 묘도 방면으로 해서 광양 백운산으로 입산했으며 탄약을 운반하다가 여맹원 정기덕이 사망하였는데 25일 인민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봉기군 주력부대가 이미 여수를 빠져나갔고 단지 지방좌익과 학생들만 남은 여수지역에 토벌군은 26일 종고산, 구봉산, 장군산 등을 점령하고, 신항의 함포사격의 지원아래 무자비한 육해군 공동 토벌작전을 감행하였는데 이날 토벌작전으로 여수시내가 3일간 불바다가 되었으며, 27일 오후 3시에 드디어 여수의 진압이 완료되어 일명 손가락 총으로 죄 없는 민간인들을 일본도로 쳐죽이는 악명높은 김종원(백두산 호랑이)부대 같은 비상식적인 학살 작업을 시작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
4) 중앙동 인민대회 장소
봉기군과 좌익계열은 1948년 10월 20일 오후 3시경 중앙동 로터리 광장에서 3~5천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인민대회를 열었다. 인민대회는 이용기,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5명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보안서장에 유목윤을 임명하였다. 대회에서는 이용기의 인사말, 좌익계열의 축사에 이어 아래와 같은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일부에서는 ‘6개항 결의문’을 ‘혁명과업 6개항’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반란’이란 관점에서 왜곡한 사례이다.
“그리고 동 지는 여수점령일인 二十일 개최된 인민대회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는데 동 대회의 장관은 이용기(李容起) 외 五명이었다 한다. 대회 결의문은 인민위원회의 행정기관 접수 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 맹서 등의 여섯 가지 항목이었다”(경향신문, 1948년 11월 30일자)
ㅇ 20일 인민대회 「결의안 6개항」
1. 오늘부터 인민위원회가 모든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2. 우리는 유일하며 통일된 민족 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3. 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
4. 무상몰수・무상분배의 민주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5.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모든 비민주적인 법령을 무효로 한다.
6. 모든 친일 민족 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처단한다.
5) 중앙교 학살지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는 여수경찰서 인근에 위치하여 토벌군 군기대가 주둔하면서 협력자를 색출한 곳이다. 특히 종산초등학교 위에 있는 여수여자중학교에 부산 제5연대 1개 대대(대대장 김종원 대위)가 주둔하고 있어 여순항쟁 당시 가장 많은 학살이 일어난 곳 중에 한 곳이다.
1948년 10월말에서 12월 초순까지 여수권역 전체에서 색출된 봉기군과 협력자를 이 학교 교실에 10여 명씩 그룹을 지어 포승줄로 묶은 후 수용하였다. 또한, 인근 오동도에 수용하기도 했다. 협력자 색출과정에서 즉석에서 처형되어 학교 뒤편 밭에 묻기도 하였으며, 밤 시간에 트럭으로 싣고 가서 만성리 학살지에서 처형하였으며, 오동도에 끌고 가 처형하기도 하였다.
당시 토벌군의 책임자였던 제5연대 1대대 대대장인 김종원 대위는 이곳 종산국민학교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또한, 인근 섬에까지 진출하여 일본도로 목을 쳐서 죽였다. 여수지역에서는 아직도 70대 후반의 어르신들은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이라는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6) 만성리 학살지
여순항쟁 민간인 관련자 호남방면 고등군법회의는 광주, 순천, 여수 등에서 열렸다. 지역별,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8년 11월 20일, 21일, 22일에 여순항쟁 여수지역 민간인 관련자에 대한 고등군법회의가 여수여중학교 특설법정(강당)에서 개정되었다. 재판장은 육군 법무감 김완룡 중령, 검찰관은 이종수 중위(일제 경찰 경부출신 해방 후에는 순천감찰서장을 역임)
재판은 서면심리로 판결하였다. 1차, 2차 고등군법회의의 결과는 알 수 없으나 3차 고등군법회의에서는 검속자 805명 중 299명이 석방되고 유죄 50명이었다. 이중에 사형 280명, 징역 20년형 118명, 5년형 108명이었다. 사형이 확정된 이들은 군기대와 도경 특수대에 의해 만성리 학살지 인근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한다.
여순항쟁 당시 국동지서장 서리를 역임했으며, 토벌군이 여수를 탈환한 이후에는 경찰과 군인의 피해자 수습을 맡았던 신영길은 그의 저서(신영길의 역사의 현장, 지선당, 2004)에서 “11월 1일 고등군법회의가 진행되었고, 11월 5일 89명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재 확인된 바는 11월 20일 제1차 고등군법회의가 열렸다. 다만, 제1차 고등군법회의의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7) 형제묘
진압이 완료되면서 서정지역 주민들은 1948년 10월 26일 새벽부터 서국민학교에, 동정지역은 공설운동장과 동국민학교 등에 모여 심사를 받게 된다. 지까다비를 신고 있는 사람, 총을 멘 흔적이 있는 사람, 군용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이 되었고, 또한 우익가족이나 경찰 및 가족들의 손가락총에 의해 좌익이거나 적극적인 가담자라고 판명된 자는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고, 계속된 심사를 거쳐 가담한 자로 판명이 되면 종산국민학교(현 중앙국민학교)에서 재심사를 받게 된다.
종산국민학교에는 여수에서 1차 심사를 통해 끌려온 사람들과 각 지방에서 끌려온 좌익이나 가담자들이 갇혀 있었으며, 이곳에서도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색출된 125명에 대한 처형이 만성리 굴 너머, 현재 군부대가 위치한 근처에서 헌병들에 의해 총살 및 화장이 이루어지는데, 정기순씨의 오빠인 정기만이 여기에서 총살당한 관계로 1949년 1월 13일이라고 밝혀졌다.
사건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최명균씨의 증언이나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희생된 사람의 숫자가 125명, 또한 증언을 통해 확보된 희생자 15명의 인적사항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당시 125명을 끌고 와 경찰에게 총살을 명령했으나 최명균씨 등이 경험이 없다고 미루었고, 이후 헌병이 총살을 하고 경찰은 주위 경계를 했다고 한다. 5명씩 묶어서 총살을 한 후, 지게꾼들이 시내에서 가지고 온 장작을 이용해서 장작과 사람 5명을 겹겹이 쌓아 5층으로 다섯 묶음을 만든 후 화장을 시켰다고 한다. 이때 3일간이나 불이 탔으며, 그 냄새로 인해 사람들이 지나다니기가 곤란했다고까지 한다.
만흥동의 신용식씨 증언에는 당시에도 한명이 생존해 지게꾼들이 바지개로 가려서 살렸다는 말이 있었는데, 최명균씨를 통해 비탈쪽으로 한명이 굴려졌는데 목에 줄이 걸려 죽었음이 확인되었다.
형제묘 희생자는 호남계엄지구사령부(육군 중령 김백일) 군법 제13호의 공판장소는 여수이다. 이날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은 이들은 전주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사형을 언도 받은 이들은 1949년 1월 15일까지 형을 집행한다고 되어 있다.
3. 순천지역 주요 답사지
1) 순천역, 동천과 제방, 동순천역
순천역은 여수의 봉기군이 인근 지역으로 진출한 첫 번째 지역이었다. 통근 열차와 차량에 나누어 탄 1천여 명의 봉기군은 1948년 10월 20일 9시 경 순천역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북상하여 지리산으로 입산하고자 하였으나, 순천역의 철로가 막혀 순천역에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순천에 파견 나와 있던 홍순석 중위가 지휘하는 중대 병력의 합류로 더욱 사기가 올라 광양 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배치된 경찰을 잇달아 물리치고서 시내로 진격하였다. 따라서 순천역은 여순항쟁 봉기군의 확산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며 순천읍 공격의 중요 거점이었다. 현재의 역 건물은 1960년에 세워진 것이므로 여순항쟁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장소는 그대로이다.
순천교(별칭: 장대다리)와 동천 제방은 봉기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1948년 10월 20일 순천 경찰과 인근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 우익 청년단원 수백 명이 봉기군을 저지하기 위해 광양 삼거리와 동천 제방에 방어선을 구축하고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봉기군에 격퇴 당하였다. 더욱이 광주에서 진압하러 내려온 제4연대 지원 병력이 봉기군에 합류해 버림으로써 더욱 수세에 밀렸다. 결국 경찰의 상당수가 전투 중에 사망 또는 부상당하거나, 일부는 피신함으로써 순천읍내를 봉기군이 장악하였다. 이곳은 봉기군과 경찰 사이에 최초로 본격적인 접전장소이자 봉기군이 순천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였다.
전라선 구간의 동순천역은 ‘신역’인 순천역이 들어서기 이전까지 한동안 순천의 주요 관문이었다. 지금은 이용 승객이 줄어 역도 없어지고, 역 건물도 헐렸지만 그 흔적은 있다.
1948년 10월 20일 아침 광양삼거리에서 경찰 병력을 물리친 봉기군은 죽도봉으로 이동하여 시내로 진격하는 봉기군을 엄호 사격하고, 이어 동순천역을 점령하고 이곳에 인민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23일 새벽까지 제2연대 1개 대대, 제4연대 1개 대대, 장갑차부대, 경찰부대로 증강된 진압군은 순천 주변의 산과 동순천역을 일시에 포위하고 박격포사격과 정찰기의 지원을 받으며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개시하여 점령되었다.
2) 조곡동 둑실마을
진압군이 들어온 후 순천북초등학교에서 협력자들을 분류한 후에, 적극적 가담자를 다시 순천경찰서 유치장으로 데려갔다. 1948년 10월 25일 경에 적극적 협력자로 분류된 71명을 아침에 트럭에 싣고 조곡동 마을의 뒷골짜기인 안골[지금의 금강메트로빌]로 끌고 와서 총살한 후 불태우고 매장하였다. 그 뒤로는 계속 실려 온 협력자들을 학살했던 곳이다. 이곳은 김영랑의 시 「절망」에서 그 잔혹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3) 순천 북국민학교와 순천농림중학교
1939년 4월 20일에 매곡심상소학교로 개교, 1940년 4월 1일에 순천북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45년 8년 15일에 순천북국민학교가 됨
여순지역이 재탈환되자 진압군경은 계엄 상태에서 가장 먼저 봉기군과 이에 가담한 부역자를 철저하게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대부분 봉기군과 좌익세력은 산악지대로 도주했기 때문에 소수의 봉기군 잔류자와 지방좌익세력과 소극적인 민간인협력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1948년 10월 23일 오전에 진압군경은 순천읍민을 순천북교로 나오게 하였다. 일부 기록에는 약 5만 명의 읍민을 집결시켰다고 하나 당시 순천읍의 인구가 이에 미치지 못함으로 미루어 과장된 숫자.(일부 기록에는 23일에 2천명, 24일에는 600여명이 조사)
경찰・대동청년단・학련생 등은 먼저 40세 이하의 남자 중 군용팬티를 입은 자, 머리가 짧은 자를 봉기군 및 ‘부역자’로 지목, 그 다음 각 동네별 지방유지, 우익인사가 ‘부역자’를 지적. ‘부역자’는 제1급(인민재판 적극 참여자), 제2급(소극적 참여자), 제3급(애매한 자)로 분류되어 처벌 혹은 재심사를 받았다. 이 중 경찰은 악질적이라고 판단한 12명(21명)(박찬길 검사 포함)을 10월 25(24일?)일 순천농림중학교의 운동장 모퉁이에서 총살하였다. 일부 목격자는 북교 교정에서도 한편에서 바로 총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증언한다.
순천북교는 진압 이후에도 한동안 경찰 부대의 주둔지가 되었다. 10월 15일 오후 9시 내무부에서 여순방면 반란군 진압 작전 상황 발표를 했는데 여기에 ‘ 순천지구경찰부대는 순천북 국민학교를 본거로 하고 치안 회복과 폭도 수사에 전력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는 1948년 10월 22일 진압군경이 순천 읍내를 공격하면서 숙영지로 이용하였으며, 경찰사령부 임시본부가 설치된 곳이다. 순천이 진압된 후 가까이 있는 순천 북국민학교에 집결한 읍민 가운데 ‘부역’ 혐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취조하거나 처형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처형된 경우가 많아 무고한 피해자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강당 뒤편의 논두렁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4) 매곡동 학살지와 희생자 묘역
매곡동은 1910년대 순천에 개신교가 먼저 전파된 곳으로 아직도 선교사의 집(양관)과 선교 시설(기독진료소)이 남아있다. 해질 무렵 진압군이 들어와 당나무 아래 공터로 마을 주민을 모이게 한 다음, 이들을 이끌고 선교부 쪽으로 이동하다 담장 옆 고랑가에 서게 한 다음[성서신학원 입구에서 5미터 아래지점]에서 26명을 집단 총살하였다. 이 가운데는 우영철(우부자집 막내 아들), 김치과의 아들을 비롯하여 황종권 가족 8명도 들어있었는데 요행히 황종권과 그 조카인 황경숙, 황하연은 총을 빗맞아 살아남았으나 황하연은 피를 많이 흘려 얼마 후 죽었다.
그 이튿날 보이열 목사가 박기열, 박승규, 김00, 이재만의 도움으로 집단 학살당한 26명과 낙오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봉기군 1명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모두 27구의 시신을 들것을 만들어 운반하여 선교부 땅이었던 밭에 길다란 구덩이를 판 다음 몇 무더기로 가마니로 싸서 묻었다. 우영철[우부자집 막내 아들]과 김치과의 아들의 시신을 가족들이 찾아감으로써 25구의 시신이 현재 묻혀있다. 당시 정인대 의사가 병원에서 페니실린 병 안에 이름을 적어 넣어 시신 안에 두었다고 당시 시신을 수습하였던 박기열 옹이 회고. 묘지가 있는 곳은 삼풍 그린파크 2차 아파트 뒤편의 새로 지은 매곡동 경로당 뒤편 10여년 전에는 길다란 봉분이 마을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윗마을로 가는 작은 길이 나고, 다시 찻길이 나면서 묘지의 절반의 들어가고, 남은 부분도 많이 깎여 있다. 남은 묘지는 이웃으로 이사 와서 그 내용을 알게 된 이명식 부부가 벌초도 하고, 근래에는 꽃을 심어 억울한 영혼을 달래주고 있다. 일가족이 몰살을 당한 황종권 목사의 누나 황인엽이 인근에 살면서 이장을 시도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작고했다. 경로당을 지으면서 포크레인 작업으로 유골이 나오자 내막을 아는 주민들이 말려서 보존될 수 있었지만, 주민들은 이장을 바라고 있다.
5) 덕례리 학살사건(주령골, 순천-광양 경계지)
주령골은 흔히 덕례리 골짜기, 반송정, 반상쟁이 등으로 알려진 곳. 광양지역에서는 덕례리 학살사건이라고 부른 곳. 이곳은 10월 20일 순천에 응원대로 출동하였던 광양경찰이 중과부족으로 다시 광양으로 돌아와 광양경찰서에 체포되어 있던 좌익세력 혐의자 27명을 불법적으로 즉결처분하였다. 호남신문 기자였던 이경모의 격동기의 현장에 이곳에 참상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피해자 중에는 이경모의 친구였던 서울대생 김영배도 포함. 또한 1951년 1월 백운산 빨치산들이 야음을 틈타 광양 읍내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빌미삼아 광양경찰은 민간인 협력자로 유치장에 갇혀있던 민간인 약 100명을 이곳으로 끌고 와서 총살하였다. 주령골은 여순항쟁 발발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으며, 6·25전쟁 전후 수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죽어간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6) 구랑실재(순천시 서면 흥대리)
구랑실은 평범한 산골마을이었으나 이른바 부역자를 가려내어 처벌하는 과정에서 진압 군경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들이 참혹한 비극을 겪은 곳이다. 당시 진압군들은 봉기군으로 가장하여 마을 주민을 시험한 후 봉기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살상하고서 그 희생자들을 전과로 보고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전쟁이 일어나자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보도연맹원을 집단적으로 처형한 곳. 구랑실 골짜기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어서 시신이 쌓인 골짜기라는 의미로 ‘송장골’이라 불리기도. 구랑실 학살지는 여순항쟁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극의 현장.
4. 보성지역 주요 답사지
보성군 회천면 천포리 누운바위 민간인학살현장
1950년 7월 하순경 보성군 회천면 천포리 소재 일명 누운바위 속에서 보성경찰서 회천지서 천포출장소(누운바위속에 출장소가있었다.) 경찰들이 천포리, 서당리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주민들을 22명을 한명 한명씩 호출하여 학살한 뒤 경찰은 배를 타고 부산으로 후퇴하였다.
누운바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연합군상륙을 저지하기위해 이곳 천포바닷가에 자리잡은 누운바위안에 구멍을 뚫어 (고사포)高射砲를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한 장소.
해방이후 이승만정권은 천포리 고사포진지를 보성경찰서 회천지서 천포출장소로 사용하면서 주민들을 감시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민간인을 집단학살하고 후퇴하였다.
이봉하 (전) 보성경찰서장(재임기간:1950년 5월 15일~1950년10월 12일)전남 고흥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제 강점기시절 고등계 형사출신. 해방이후 이승만의 일제 순사출신 재임용에 따라 영암, 강진의 사찰계주임으로 재직하던 중 이승만의 특진발령으로 보성 경찰서장으로 임명. 1950년 5월 15일 부임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보도연맹원 및 사상의심자 들을 법적절차 없이 1,000 여명 이상 학살을 해 악명이 높았다. 보성주민들은 이봉하를 두고 보성의 살인마라고 하였다. 이봉하는 한국전쟁이후 장성, 화순경찰서장을 지냈으며 이후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당시 보성경찰서 회천지서장은 정00로 하루에 세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는 악질 경찰관.
여순사건이 터지고 보성군 회천면 신건리에 살고있었던 오00할머니(현83세)의 외삼촌이 여순사건에 연관되어 누나가 살고 있는 회천면 신건리에 들려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에 떠났다.
오00씨의 아버지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다른지역으로 피신하였는데 회천지서장은 남편대신 부인(오00씨의어머니)를 대신 소환. 오00씨 어머니는 당시 임신8개월의 임산부로 등에 오00씨의 남동생을 등에 없고 회천지사로 출두하였는데 정00지서장이 대뜸 남편과 당신동생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묻자 나는 모른다고 대답을 하자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으로 오00연수씨의 어머니 머리에 총격을 가하고 등에 업혀있는 동생마저 총격을 가해 사망을 하여 결국 뱃속에 있는 태아까지 합하여 세 가족이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후 정00지서장은 구례지방에 은신하며 살았다한다.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산12번지 학살현장은 보성경찰서에서 약10Km정도의 거리에있다. 보성에서 광주를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이 길을 이용해야한다. 일명 예재라 불리는 이 고개는 험하기로 소문이 나있다, 지금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있지만 예전에는 구불구불한 신작로였다. 1950년(음)6월7일 보성경찰서 경찰들은 후퇴를 하루 앞두고 보성지역의 민족주의자 20여명을 소환하여 이곳 예재에서학살을 하고 도주하였다.
대부분 20~30대의 보도연맹원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학산 윤윤기선생(당시 50세)은 보도연맹원이 아닌데도 이들과 함께 학살당하였다.
한국전쟁시 보성경찰서가 인민군에의해 1950년 7월 24일 공식 접수되어 1950년 10월 5일 퇴각한 것으로 기록(보성군지참조)으로 보아 이봉하의 재임기간은 불과 3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1.000 여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 학살방법 또한 타 지역에 비해서 악랄하고 처참.
한국전쟁전후에 발생하였던 민간인 학살 방법, 고문, 시신처리 등에 대하여 철저한 연구조사를 하여 일제강점기에 충성하였던 군인, 경찰들의 비인간적인 심리상태를 파악해야할 것으로 여겨진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보성지방의 민간인 학살진상규명이 미흡한 채 졸속 ,축소되어 조사를 마치고 종료하였다. 학살된 보도연맹원 들이 20여명이었는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고 된 사건은 겨우2건에 불과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박현정)
이봉하는 그후 화순, 담양, 장성 경찰서장을 끝으로 일선에 물러난 후 일체의 공식기록이 없이 행방이 묘연한 채 세인의 입에 희대의 살인마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2005년 6월경 전남 지방경찰과 인사과 전화조회 확인)
학산과 이봉화의 관계는 1944년 학산이 항일독립자금과 양정원 운영자금조달을 위해 강진군 칠량면 영동리 소재 고령토 광산을 운영할 때 이봉하는 강진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하고 있었다는 정황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시절부터 어느 정도 이봉하에게 학산이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 산12번지 민간인학살 위령제봉행
2003년 5월25일 학산 윤윤기선생의 학살현장 (전남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산 12번지)에서 실로 53년만에 위령제를 봉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