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취재 산행할 때는 초가을이었는데, 잡지가 나올 때쯤엔 깊은 가을이겠지요. 항상 한 걸음 늦는 연재 참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잠시 한 몇 순을 뒤돌아보며 반추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이 달에 소개하는 산은 산림청 선정 한국 100대 명산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대암산입니다. 강원도 양구군과 인제군 경계에 솟아있는 산으로 해발 1,304m의 정상도 양구군과 인제군 두 곳으로 난 등산로로 오를 수 있고요.
- ▲ 대암산 단풍은 만산홍엽이 아니라 이렇게 은은한 가운데 루비 보석 같은 핏빛 단풍들이 점점이 박힌 것이 더 매력적인 거 있지요.
대암산은 6·25 때 남·북한군 간의 격전지였고 정상부 고원 분지의 습지 용늪이 생태적인 가치가 높아 요즘엔 아주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1989년 자연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고, 1997년에는 국내 제1호 람사르협약 습지로, 1999년에는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돼 출입도 엄격히 제한하고 있고요. 용늪은 동서 길이 약 150m, 남북 폭 약 100m에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데, 수생식물인 조름나물을 비롯해 ‘비로용담’, ‘끈끈이주걱’, ‘물이끼’, ‘북통발’ 등 희귀한 특산식물의 자생지인데다 ‘참밀드리 메뚜기’, ‘애소금쟁이’, ‘홍도리침노린재’ 등과 같은 진귀한 곤충들이 관찰되는 등 300여 종의 동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어 우리나라 희귀 생태계의 보고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2005~2010년에는 산 자체가 아예 출입 금지되기도 했는데 그 사이 진입로 길이 험해져 등산을 할 수 있게 되면서도 한동안은 서화리에서 등산로 들머리 사이 약 7km 구간 계곡 길은 주민들이 유료로 제공하는 트럭을 타고 들고나곤 했지요. 그래서 대암산 탐방은 매년 5월 16일~10월 31일 사이 하루에 100명(인제군 50명, 양구군 50명)씩 만을 허용합니다. 그것도 인제군과 양구군 군청 홈페이지에서 사전 탐방 예약을 하고 반드시 안내인과 동행해야만 가능하고요.
용늪은 여러 종류의 풀들이 무성하게 덮인 널따란 풀숲
양구군 탐방로는 군인들의 안내로 도로를 따라 올라 햇볕에 많이 노출되고 산행이 무미 한데 반해 인제군 탐방로는 지역주민 안내인의 인솔로 울창한 숲을 이룬 옛 임도를 따라 올라와 뙤약볕을 피할 수 있어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인제군 등산로를 선호합니다. 우리도 인터넷으로 신청을 하고 산행에 나섰고, 연전 트럭을 타고 왔던 길을 서울에서부터 타고 온 차로 편안히 들어와 산행을 시작합니다. 물론 동네 주민 한 분과 공식 안내인 한 분이 동행해서 안내를 해줍니다. 우리는 단체지만 개인적으로 인터넷에 등록하고 대전과 서울에서 왔다는 탐방객 두 명도 함께 산행에 나섭니다.
- ▲ 1 인제군 서화리 쪽에서 오르는 대암산 등산로 들머리 나무다리를 건너며 내려다본 계곡 풍경입니다. 작은 폭포와 물 많고 깊은 소 위로 고운 단풍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더라고요. 2 용늪 초소에 근무하는 분이 용늪 전망대 부근에서 탐방객들에게 용늪에 대한 설명과 탐방 주의사항을 들려주고 있고요. 3 대암산 정상부 암릉을 오르는 데는 이런 직벽 구간을 거쳐야 합니다.
이제까지 차로 따라 올라온 계곡을 가로지르는 목조 다리를 건너는 게 들머리입니다. 곱게 물든 단풍나무 잎들 사이로 다리 아래 작은 폭포와 깊은 소가 그림 같습니다. 안내인 한 분은 잠시잠시 일행을 멈추게 하고서는 참나무 구분법, 침엽수 열매 구분법 같은 자투리 나무 교양강좌도 열면서 옛날 임도인지 군사도로인지 모를 널따란 등산로를 따라 우리를 산속 깊숙이 이끌어 들입니다.
5~6년 전 출입금지령이 막 해제됐을 때 와본 길이라 낯설지는 않지만 그새 숲이 더 우거진 같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폭포들이 층을 이루며 쏟아지는 계곡이 잘 보이지 않고 물소리도 날이 가물어선지 그리 시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무다리로 계곡을 건너며 시작된 등산로는 계곡 왼쪽으로 한동안 옛 임도 같은 길을 따르다 괜찮게 생긴 제법 큰 와폭 위를 징검다리로 한 번 더 건넙니다.
여기서부터 등산로는 여느 산처럼 오솔길로 바뀝니다. 조금 경사진 길 저 위에서 움막 터를 발견합니다. 지금도 심마니들이나 약초꾼들이 장기 산행을 할 때면 숙식한다는 곳인데 이곳도 5~6년 전에 비해 많이 황폐해 보입니다. 그땐 늦여름이라 이곳 울타리에서 만삼 꽃이 핀 것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때가 늦어 아쉽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만삼이 자라고 있다는 걸 확인하니 다행입니다. 올해는 대신 낯익지만 색깔이 흰 꽃 한 종류를 발견해 담아 왔는데, 알고 보니 향유로, 보라색 꽃이 대부분인데 흰색이었던 겁니다.
움막 터를 지나며 길은 고도를 높이기 시작합니다. 30명이 더 되는 탐방객들도 삼삼오오 그룹으로 나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제 능력대로 오르기 시작하고요. 안내인 두 분도 어느 그룹에 속해 오르는지 산굽이를 돌아서면 서로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길은 좋아 잘못 오를 염려는 없습니다.
한참을 올라왔는데도 길은 습기를 잔뜩 머금었습니다. 람사르협약에 가입될 정도의 특이한 지형을 가진 용늪 지대라 그럴까요? 전에 왔을 때는 갑자기 비를 만나서도 그랬지만 원래 길이 철벅거릴 만큼 물기가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간간이 짙푸른 용담 꽃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앞뒤좌우가 펑퍼짐한 주변 공간감으로 용늪 가까이 이른 것 같습니다. 길도 커다란 돌들로 바닥을 이룬 걸로 보아서요. 한여름 홍수로 물이 넘쳐나도 토사가 용늪 쪽으로 쓸려가지 않게 한 조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서화리마을에서 차로 10시 방향으로 7km를 올라와 지그재그 길이긴 해도 거의 8시 방향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산행을 시작해 와폭을 건너 움막 터를 지나 한동안 급격히 고도를 높여 이 지점에 이른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등산로라 하지 않고 생태탐방로라 부른답니다. 하지만 정작 용늪은 우리가 생각한 물이 고인 늪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 덮인 널따란 풀숲일 뿐입니다. 그것도 늪 언저리에서도 최소 수십 미터는 멀찍이서만 바라볼 수 있는.
탐방객들은 보통 여기서 점심을 먹습니다. 늪지대 가장자리가 그런지 나무가 자라지 않아 햇볕을 가려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 게 신기합니다. 아마도 비무장지대가 가깝다 보니 그런 분위기가 한 몫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도착하자 아마도 양구 쪽에서 올라온 것 같은 한 그룹의 등산객들이 자리를 내주며 남은 산행에 나섭니다. 맑고 찬 물이 촐촐 쏟아지는 약수터도 있어 식수 걱정은 안 해도 되고요. 주변에는 하얀 구절초들이 예쁘게 피어 있어 카메라에 담아봅니다. 하지만 이 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안내인이 제지를 하고 무엇보다 곳곳에 줄을 쳐 놓고 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미확인 지뢰지대’란 팻말을 걸어놔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용늪 초소에 근무하는 분이 별도로 만들어놓은 전망대로 오셔서 용늪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5~6년 전에 왔을 때 뵌 그분이라 반갑게 인사를 했더니 제가 그 뒤로 몇 번 전화를 한 걸 기억하고는 알아봐줍니다. 이 인연으로 용늪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는 없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가능할 리 없지요.
루비 보석처럼 박힌 핏빛 단풍이 너무 아름다워
대암산 정상은 용늪전망대에서 4시 방향으로 40여 분 더 가야 합니다. 도중 능선 길에서 11시 방향 돌산령 쪽 도솔봉과 8시 방향 후곡약수와 광치령 쪽 솔봉에서 오는 등산로를 만나 한 길로 정상에 이르고요.
- ▲ 용늪 초소를 지나 능선 길을 좀 더 오르다가 작은 고개를 돌아서면서 이렇게 대암산 정상 암릉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길은 몇 개의 굽이를 넘어서는데 직벽을 이룬 구간도 나타나는 등 방심을 허용치 않습니다. 그래도 조금만 조심하면 그리 위험하진 않습니다. 대신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탁 터지는데 그야말로 끝내 줍니다. 산도 높지만 정상부가 커다란 암릉으로 이루어진 것도 특징입니다. 사지를 다 쓰거나 매달아 놓은 밧줄을 잡기도 하면서 한 걸음씩 올라갑니다. 그럴 때마다 확보되는 조망이나 정상부 자체의 경관이 달라져 탄성이 절로 터집니다.
바위가 온통 검은색이라 화산암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라올 땐 몰랐는데 정상부에서 수평으로 또 내려다보니 바다처럼 펼쳐지는 산자락 숲들에 점점이 빨간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습니다. 만산홍엽이 아닌 살짝 물든 은은한 가운데 루비 보석처럼 박힌 핏빛 단풍 오늘은 이게 다른 그 어떤 단풍보다 단연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정상에 오르자 가장 먼저 느끼는 게 이런 은은하면서도 눈을 찌르는 듯한 강렬한 단풍에 취하는 일입니다.
- ▲ 1 해발 1,304m 대암산 정상.
그 다음 비로소 먼 전망이 눈에 듭니다. 양구군 동면 팔랑리와 해안면 만대리와도 접하는 해발 1,304m의 대암산 정상은 올라서면 북쪽으로는 양구군 해안면 분지 일명 ‘펀치볼’이 내려다보이고, 동쪽으로는 향로봉에서 설악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병풍을 이루고 섰습니다. 또 남쪽으로 인제군 일대 산들이 흘러가고 서쪽으로 솔봉 능선 너머로 양구 사명산이 어렴풋이 조망됩니다. 날씨가 좋으면 1시 방향으로 희미하나마 북한의 금강산도 볼 수 있다는데 점점 흐려지는 오늘 낮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순간 노래가 하나 살짝 흥얼거려집니다.
- ▲ 2 정상부 암릉에서 안내인이 갖고 온 뿔 나발을 탐방객들이 불게 하고는 사진을 찍어 주는 모습입니다. 3 이번 대암산 등산을 이끈 산죽산악회 김용태 회장이 정상에서 산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주제련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그리운 금강산~”
목청을 높여 불러봅니다.
조망으로서는 양구군과 인제군의 경계도, 산과 산의 경계도, 남과 북의 경계도, 하늘과 땅의 경계도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산에 오르겠지요. 그리고 무애한 조망을 즐기겠지요. 어쩌면 생활고로 여유가 없어 레저 형 등산은 꿈도 못 꾸는 이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에서 불과 한나절로 달려와 올랐다 돌아가는 우리의 이 빠르고 멋있고 맛있고 재미난 대암산 등산을 저들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는지. 코앞에 비무장지대를 두고 있어선지 우리들의 산행이 공연히 미안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저뿐인 것 같습니다. 모두들 즐겁고 무엇보다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큰 카메라 앞에 포즈 취하는 사람들, 휴대폰으로 자기 사진을 찍는 사람들, 심지어는 안내하는 분이 갖고 온 커다란 뿔 나발을 부는 포즈를 취한 사진을 찍기 위해 대열에 줄을 선 사람들까지 모두들 추억 만들기 인증 샷에 열중입니다. 옛말에 ‘당랑박선(螳螂搏蟬 : 눈앞에 보이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자신에게 닥치는 위험을 모르고 있다가 큰 재난을 만난다는 뜻)’이라고 저는 멀리서 또 그런 모습을 제 카메라에 담아내고요.
내려오는 길은 정상에서 용늪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용늪을 우회하며 급강하합니다. 아마도 용늪은 정상 북쪽에 형성된 정상보다는 몸을 낮춘 분지형 고지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3시 방향으로 길이 나 있습니다. 그러다 다시 정북쪽으로 향하는데, 아까 올라올 때 용늪 초소 조금 지나서 본 들꽃 닻꽃을 못 찍고 온 게 생각납니다. 대신 이 급경사 내리막길에서는 빛바랜 금강초롱을 만납니다. 들꽃 찍는 사람으로서는 이곳에서만 자라는 희귀식물들을 다 담아보고 싶지만 식물학자라도 어려운 게 현실이라 꼭 하나 비로용담만이라도 한 번 담아봤으면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비슷해 뵈는 것도 없습니다. 이곳 말고는 백두산에서나 볼 수 있다니 그리움만 쌓입니다.
용늪에서 스며 나온 물들일까요? 계곡수가 여기저기 작은 고랑을 이룬 평지로 내려섭니다. 물에 손을 담가 보니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차갑습니다. 고랑들 사이사이 고목들이 많이 쓰러져 있습니다. 천수를 다한 것들의 원형이라 분위기가 살짝 원시적인 거 있지요. 따주는 사람이 없어선지 버섯들도 붙은 채 시든다고 해야 할지, 말라붙는다 해야 할지. 하지만 먹을 수 있는 건지 잘 모를 땐 아예 따지도 만지지도 말라는 게 등산 안전수칙 중 하나지요. 만약 여름이라면 또 어떤 분위기일까 처음 밟는 길이라 무척 궁금합니다.
- ▲ 4 대암산 등산 중 올라갈 때는 3분의 1지점, 내려올 때는 3분의 2지점이 되는 와폭입니다. 딱 쉬어가기 좋은 곳이지요. 5 쑥부쟁이 6 향유 7 구절초 8 쇠서나물과 개망초
파괴된 자연은 복원 힘쓰고 개발은 자제하기를 기원
길은 용늪을 중심으로 크게 삼각형으로 에둘러 오를 때 징검다리로 건넌 와폭에서 50m쯤 올라온 길로 이어져 다음부터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옵니다. 다들 와폭에서 잠시 휴식하며 등산화를 씻거나 물을 떠 마시곤 합니다. 올라갈 땐 자주 쉬지만 내려올 땐 쉬는 것을 깜빡 해서 몸에 무리를 얻는 경우가 많지요. 이 와폭 아래로부터 층층이 크고 작은 폭포들이 이어지는데 길이 계곡을 벗어나는 바람에 볼 수 없는 게 안타깝지요.와폭에서 쉬면서 잠시 생각에 젖습니다. 비무장지대에 가깝고 자연생태계의 보고로서 더욱 소중한 산 대암산. 우리가 이렇게 와서 보고 즐기는 거야 좋지만 이러는 가운데 알게 모르게 더 소중한 생태환경이 파괴되는 건 아닌지. 요즘 우리나라 어디든 경치 좀 괜찮다 싶은 곳에 가보면 어디나 꼭 펜션들이 들어서 있고, 놀거리 캠프장이나 바이같은 것들을 운영하며 원래의 모습이나 전체 경관을 적잖이 파괴시켜 놓은 걸 어렵잖게 보게 됩니다. 이러다 정말 우리나라 금수강산이 온 몸에 피 멍이 들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이제 우리 자연은 개발이 아니라 보전에 더 힘써야 할 때라 생각하며 파괴된 자연은 복원에 힘쓰고 개발은 자제하고 또 자제해주기를 간절히 빌고 바라봅니다.<hanseungguk@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