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진주성 내 늙은 기생의 걱정을 아는가요?
김충영, 국방대학교 명예교수/한국시니어과학기술인 협회 회원 2026년 6월 25일
국가 존망(存亡)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세 침입으로 망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현재와 같이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무너져 국민 주권이 사라지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주장한 바와 같이 「노예의 길」 그리고 독재자/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와 같은 「치명적인 자만」에 찬 정치로 나아가 몰락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문재인과 이제명은 국민을 속이면서 후자(後者)의 길로 국가를 몰고 가는 한편, 언제일지 모르는 북한의 침입을 방관하고 있는 실정이다.
돌이켜 보면 삼국시대 고구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제거하고 보장왕을 즉위시켰다. 연개소문은 이를 반대하는 안시성 성주를 수차례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안시성 성주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을 밝히고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한편, 영류왕을 제거한 연개소문을 벌한다는 명목으로 당나라 이세민이 거대한 군사력으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여러 성을 점령했으나 안시성을 점령하지 못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안시성 성주가 성안 백성을 똘똘 뭉치게 하여 막아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고구려편)
고려 무신 정권 때 몽골군이 침입하자, 승려 김윤후(金允侯)는 처인성(處仁城)으로 피난하였다가 몽골 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이 와서 성을 공격하니 김윤후가 그를 화살을 쏘아 사살하였다. 그 후 방호별감(防護別監)이 되었다. 몽골군이 충주성을 공격했으나 이 성을 지키던, 승장(僧將) 김윤후(金允侯)는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힘을 내어 싸울 수 있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려 하니 너희는 불신함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고는 드디어 관노(官奴) 문서를 취해 불사르고 또 노획한 우마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적에게 다가가니 몽골군은 조금씩 기세가 꺾였다. 군사들은 힘을 합쳐 몽골군의 주력이 성벽 오르는 것을 틀어막았다. 결국 1253년 12월에 몽골군은 충주성을 포위한 지 70여 일 만에 그대로 물러갔으며, 그래서 이후 더는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였다. 안시성과 충주성은 성주와 성 주민이 합심하여 성공적으로 적을 막은 경우이다. 즉 손자병법에 기록된 데로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 위아래가 모두 합심하면 승리한다.)인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제1차 진주성은 진주목사 김시민이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하며 진주성 방어계획을 세웠다, 이때 병사 유승안이 싸움에 패하여 단기(單騎)로 진주성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병사가 성안으로 들어오면, 주장(主將)이 바뀌어 통솔이 어긋날 수 있다고 하여 김시민은 거절하였다. 김시민은 통솔의 일원화를 중요시하여 드디어 진주성 방어에 성공하고 왜적을 많이 사살하여 풍신수길(豐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자존심을 심히 건드렸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평양과 서울에서 철수한 왜군이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참담하게 패한 왜군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전투여서 왜군의 전투의지는 대단했다. 1593년 음력 6월 진주성을 함락시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은 지엄(至嚴)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제1차 전투와 달리 진주목사인 서예원(徐禮元)이 나약하고 장수의 자질이 부족하여 조선 측은 일괄적으로 통제되지 못하고 관군과 의병을 이끄는 여러 장수들의 개별적인 역량에 의지해 싸워야 했다. 28일 서예원이 야경(夜警)을 소홀히 하여 적이 성 밑을 파서 성벽이 무너지게 되자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은 몹시 노하여 서예원을 꾸짖기도 했다. 이날 전투에서 진주성 사람들이 크게 믿고 의지하던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이 죽고 황진과 더불어 이름이 높았던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도 죽자. 조선 측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으며, 왜군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고안한 공성 병기 귀갑차(龜甲車)가 조선 측 몰래 성 밑을 파서 성벽이 무너졌다.
어떤 늙은 기녀 하나가 홀로 심히 근심하므로, 김천일이 다가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에는 군사는 비록 적었으나 장수와 군사가 서로 사랑하고 명령이 한 군데서 나왔으므로 이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군사를 도맡아 통솔하는 사람이 없어 장수는 군사를 알지 못하고 군사는 장수를 익숙히 잘 알지 못함으로 이 때문에 근심입니다.”라고 하였다. 김천일이 요망스러운 말이라고 하여 즉시 늙은 기생을 베어 죽였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애석하게도 김천일은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이라는 전법을 알면서 실천할 줄 몰랐거나 의기만 충만했지 그 전법을 전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런 후 수일 후에 성이 함락되었다, 김천일은 그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전사했다.
1593년 6월 왜군은 10만 명이라는 대군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쳐들어오자, 조선군과 의병들은 급격히 밀리기 시작했고 치열한 전투를 치르던 중 6월 28일 이종인(李宗仁)은 탄환에 맞아 죽었다(선조실록·난중잡록)는 기록도 있고, 분전하다 마지막 순간에 왜군 두 명을 양 옆구리에 끼고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이 오늘 여기에서 죽는다"라고 외치고 남강에 투신하였다. (선조수정실록·국조보감·연려실기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등 여러 장수가 죽고 백성 6만여 명은 전투 후 왜군에게 모두 학살되었다. (이긍익 연려실기술)
김천일이 군사 일(孫子兵法)을 깊이 알았다면, 늙은 기생 말을 듣고 군사 지휘를 일원화하여 성이 뚫린 데를 집중 막았다면, 승패가 어떻게 될 줄 몰랐겠지만, 애석하게도 김천일이 의기만 있었지, 군사 계책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늙은 기생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애석하게도 임진왜란 때 명장이라던 신립과 이일은 제구실 못 했다, 병자호란 때 기마병 공격에 대한 대책을 세울 인물이 평안 병사 유림(柳琳)과 전라 병사 김준용(金準龍)이 있었지만, 지방 병사에 불과했고 도원수 김자점(金自點)과 부원수 신경원(申景瑗)은 군사 일을 전혀 몰랐다. 그러고도 조선의 국가 지도자들은 국가 안보에 대한 대책 강구가 중요함을 깨닫지 못했고 더구나 세계열강들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성행하던 시대에 외교가 중요하다(上兵伐謀, 其次伐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일본에 당하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 때 국방부 장관을 군사에 대해 일자면식(一字面識)도 없는 신성모를 임명하여 더욱 혼란에 빠뜨렸으며, 현재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 안보에 대해 일자면식(一字面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고, 또한 전쟁에 관해 일자면식도 없는 안규백(安圭伯)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여 만약 갑자기 예기치 않는 전쟁이 발발한다면, 나라가 혼란에 빠져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