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가지에 핀 꽃
도배 장판만 하려고 시작한 아파트 수리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싱크대와 욕실을 바꾸고 보니 사십 년 쓴 장롱과 베란다 창이 눈에 거슬려 추가하게 된 것이다. 지은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아파트에 어머니 혼자 이사 들어가면서, 도배와 장판만 새로 하고 십 년 넘게 산 집이었다. 수리가 끝났다는 연락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 도착한 아파트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말끔해졌다. 앞으로 얼마나 산다고 수선을 떠느냐며 꾸중하시던 어머니도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삿짐 상자에 포장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낡은 옷과 이불을 이참에 버리자고 하고 어머니는 필요한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며 말렸다. 옥신각신하는 동안 반 이상의 물건들이 재활용 봉투에 담겼다. 어머니에게 편리하도록 구조를 변경해 낮아진 붙박이 가구 안에 옷가지를 걸고 꼭 필요한 이불만 올려두었다. 서운하다고 눈을 흘기던 어머니도 오히려 개운하다며 웃으셨다.
베란다에 쌓아놓은 잡동사니를 정리하다가 공작선인장 화분을 보았다. 큰이모가 오랫동안 키우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에게 맡긴 화분이었다. 큰이모와 유난히 우애가 좋았던 어머니는 겨울이면 화분을 안방에 들이고, 봄이 오면 베란다로 내보내 햇볕을 듬뿍 받도록 했다. 그래서인지 해마다 어버이날 즈음이면 활짝 피어난 꽃이 쓸쓸한 어머니의 아파트를 화사하게 밝혀주었다.
어머니가 지난겨울 위중한 병환과 싸우는 동안 화분의 식물들은 빈집의 추운 베란다에서 대부분 고사했다. 공작선인장의 줄기도 짙은 갈색으로 말라서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가 보시면 언짢아하실 것 같아 집수리를 맡기면서 화분도 모두 치워달라고 했는데 사장님이 차마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선인장의 마른 줄기 위로 기적처럼 초록 잎이 돋았고, 그 잎에서 꽃망울이 세 개씩이나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죽은 줄기를 잘라내고 숨 쉬는 토기 화분에 옮겨 심었다. 뿌리가 어찌나 말랐는지 만지면 곧 부서질 것만 같아서 꽃을 들어 옮기는 내 손끝이 떨렸다. 새 화분에 자리 잡은 공작선인장의 마른 뿌리들 사이사이로 부드러운 배양토를 넣어주고 흠뻑 물을 주었다. 어머니가 거실에서 내다 보시더니 ‘너도 나처럼 죽다 살아났구나’ 하며 빙그레 웃으셨다.
구순의 어머니는 몇 해 전부터 부쩍 기력이 약해져서 봄의 문턱을 넘기가 점점 어려웠다. 지난겨울, 잘 지나가나 싶었는데 설 즈음해서 병이 나 우리 집에 모셨다. 탈 날 만한 음식을 드신 것이 없는데 약을 먹어도 체한 기운이 영 가시지 않았다.
방에 누워서만 지내시니 운동 부족으로 담 결림까지 심하게 왔다. 빈속의 어머니께 진통제를 드릴 수 없어 재활의학과에서 주사 치료를 받게 되었다. 의사는 침대에 등을 보이고 누운 어머니의 옆구리에 커다란 주삿바늘을 여러 군데 찔러넣었다. 주삿바늘이 들어갈 때마다 어머니는 움찔거리며 나와 마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가 매달리듯이 어머니 몸 전체의 무게가 손바닥에 느껴졌다. 이제 어머니에게 나는 세상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구나 하는 생각에 안쓰러우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체한 것이 가시고 속은 편하다고 하면서도 어머니는 보름이 지나도록 미음만 드시고 수액으로 버텼다. 누워 지내면서 미음만 드시니 변비로 아랫배가 아파 다시 병원에 갔다. 의사는 암인 것 같다며 내시경 검사를 하자고 했으나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고 고개를 저었다. 역류성 식도염이 심해 종합병원까지 세 차례나 내시경 검사를 받았던 이년 전의 고통이 떠오르신 것 같았다. 의사는 마지 못해 변비약을 처방하며 사흘이 지나도 변을 못 보면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면 다시는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거라며 집에 있고 싶다고 내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내 마음은 갈팡질팡했다. 어머니께서 아파 누우신 지 겨우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나는 극도로 지쳐 있었다. 어머니가 깜빡 잠이 들자 남편은 병원으로 모시자고 했다. 좀 지켜보자는 나에게 당신도 이제 노인이라며 그러다 먼저 쓰러지겠다고 화를 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머니 친구분들이 병원에 입원 후 퇴원해서는 모두 요양병원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집에 오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더구나 어머니가 저토록 집에 있고 싶다 하는데, 오직 내 손만 잡고 계시는 어머니의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냄비에 된장을 풀어 아욱을 넣고 묽은 죽을 쑤었다.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간신히 죽을 반 공기 드신 어머니는 보행기에 의지해 거실과 복도를 걸으셨다. 어머니로서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치열하게 끌어모아 한발 한발 움직이셨으리라. 삼 일째 되는 날 아침에는 마치 아이가 엄마에게 자랑하듯이 변을 봤다고 말하며 하얗게 웃으셨다. 어머니는 점점 죽의 양을 늘리고 보행기에 의지해 열심히 운동하면서 한 달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추위가 누그러들고 거동이 좀 편해지자 어머니는 집에 가고 싶다고 보채셨다. 겉으로는 친구분들이 잘 있는지 궁금하다고 하시는데 실은, 당신 병간호로 딸이 고생하는가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가 보았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목소리가 커지고 혈색도 좋아지셨다.
동생들과 단톡방을 만들어 어머니 병환을 상세히 알렸다. 그동안 맏이에게만 미루고 무심했던 동생들도 걱정이 컸던지, 집에 돌아온 내가 몸살을 앓는 동안 연이어 어머니에게 다녀갔다. 전에는 잠깐 들러 용돈이나 주고 가더니 하루 이틀 자면서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 어머니와 함께 먹으며 대청소도 해놓고 돌아갔다. 자식들 자랑하느라 톤이 높아진 어머니의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내 귓가를 간질였다. 오랫동안 내 등에 얹혀있던 돌덩이를 동생들이 치워준 것 같았다. 천근만근 무거웠던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어버이날 즈음에서야 나는 기운을 차렸다. 아이들이 다녀가고 난 후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찾았다. 어머니의 아파트는 구석구석 쓸고 닦아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돌고 생기가 넘쳤다. 딸과 사위를 위해 미리 정갈한 점심상을 차려 놓을 만큼 어머니는 일상을 되찾으셨다. 전에 분갈이한 공작선인장 화분에서는 어느새 붉은 꽃 세송이가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세 송이의 꽃은 마치, 죽을 고비를 넘기신 어머니와 나를 큰이모가 대견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죽음의 긴 터널에서 어머니가 빠져나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변을 못 보면 종합병원 응급실로 가라는 의사의 말이 어머니는 죽음보다 더 두렵다고 하셨다. 공작선인장이 마지막 한 방울의 생기를 짜내 마른 가지에 꽃망울을 부풀린 것처럼, 자식 곁에 남아있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겨울의 문턱을 넘으셨다. 이제 구십 살의 삶을 시작한 어머니가 새로 단장한 아파트에서 건강하게 백수까지 누리신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