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외야수 박재홍의 별명은 한때 '리틀 쿠바'였다. 여기서 '이다'가 아니라 '였다'라고 쓴 데는 이유가 있다. 한때 파릇파릇한 신인이던 박재홍의 나이도 어느새 서른 여섯, 더이상 '리틀'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이와 경력으로만 따지면 그도 어엿한 베테랑이자 노장 선수다. 후배들에게 존경받고 야구인들에게 존중받는게 당연하게 여겨질 나이가 됐다. 송진우나 양준혁, 팀 동료인 박경완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는 아직도 박재홍을 보면 베테랑이나 노장 선수라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여전히 그가 물불 안 가리고 겁없이 덤비는 신참 선수인 것처럼 느낄 때가 많다. 정근우나 조동화 같은 선수 옆에 세워놓으면 누가 고참이고 누가 더 젊은 선수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왜 그럴까. 물론 여전히 20대 때의 팽팽함을 유지하고 있는 얼굴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나이를 거꾸로 먹는듯 4년 연속 17+홈런을 쳐내는 그의 여전한 기량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박재홍에게 'Fe'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쉽게 말해, 그가 아직도 철이 덜 든 선수라는 얘기다.
지난 10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히어로즈와 SK전은 그 단적인 예다. 이날 박재홍은 세 번 타석에 들어서서 모두 출루를 기록했다. 한번은 볼넷으로, 또 한번은 안타으로,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몸에 맞는 공으로. 문제는 8회초 SK 공격에서 생겼다. SK가 10-4로 앞선 가운데 1사후 타석에 들어선 박재홍은 송신영의 5구째를 받아쳐 중전안타를 뽑아냈다.
그런데 다음 타자 박정권 타석에서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졌다. 1-2 볼카운트에서 1루 주자 박재홍이 갑자기 도루를 시도한 것이다. 6점차로 크게 벌어진 점수차와 경기 상황을 고려하면 이기고 있는 쪽이 도루를 하는건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박재홍은 포수 악송구와 실책을 엮어 홈으로 들어왔고, 이후 송신영은 볼넷과 홈런 등으로 대거 5점을 실점했다. 스코어 15-4. '부관참시'라는 말이 절로 나올법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박재홍은 공교롭게도 다음 9회초에 다시 한번 선두타자로 들어섰다. 투수는 여전히 송신영. 송신영의 2구째는 세금 통지서처럼 어김없이 박재홍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명백한 보복구였다. 하지만 박재홍은 이렇다할 의사표시를 하지 못했다. 왜 몸에 맞는 공이 나왔는지를 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 후 한 기자의 왜 그 상황에서 도루를 하느냐는 질책에, 박재홍은 "스코어를 제대로 못 봤다"고 대답했다.
프로야구 선수가 스코어를 제대로 못 본다? 얼토당토 않은 얘기지만 박재홍의 상황이라면 그럴 수 있다. 사실 이날 박재홍이 기록한 도루는 개인 통산 249번째 도루였다. 이미 홈런 250개를 넘어선 그로서는 도루 두 개만 추가하면 프로 사상 최초 대기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아마 주자로 나선 박재홍에게는 그 상황이 도루 하나를 추가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상황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지난해 도루 5개에 그친 그의 주력을 감안하면 두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호기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통산 250-250 클럽 가입을 서두르고 싶은 욕심이 경기 상황과 스코어를, 그리고 상대팀에 대한 배려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전형적인 어린 아이의 특성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탕이나 장난감 앞에서는 주변의 어떤 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차도에서 차가 달려오건 누가 뭐라고 하던 오직 사탕만을 향해 달려가는 어린아이 말이다. 나이 36살 먹은 어린이, 그게 바로 박재홍이다.
어제 벌어진 롯데-SK전이 야구팬들 사이에서 논란이다. 여기서도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채병용도 조성환도 아닌 박재홍이라고 봐야 한다. 먼저 몇 가지 점을 분명히 하자. 채병용의 몸에 맞는 공은 결코 고의가 아니었다. 이건 경기 상황과 그 이후 채병용의 행동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조성환은 지난해 몸 맞는 공 11개로 전체 6위를 기록했던 선수다. 조성환이 당한 큰 부상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야구에서 벌어질 수 있는 불상사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롯데 팬들도 인정해야 한다. 또한 투수가 몸쪽 공을 던지는 것은 경기 상황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투수의 권리이자 의무다. 8-1 점수차가 아니라 18-0 점수차라도 필요하다면 투수는 얼마든지 몸쪽으로 공을 던질 수 있다. 이걸 할 수 없다면 그 선수는 더이상 마운드에 설 자격이 없다. 따라서 채병용이 큰 점수차에서 몸쪽 붙이는 공을 던졌다고 해서 비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진 상황이다. 8회말 2사후 박재홍이 타석에 들어섰다. 투수 김일엽은 초구를 몸쪽 바짝 붙이는 공으로 던졌다. 빠른 직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자가 위협을 느낄만한 공도 아닌, 제구가 다소 잘못된 공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 공을 피한 박재홍이 갑자기 흥분했다. 박재홍은 김일엽을 향해 걸어가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고, 양팀 벤치가 전부 마운드 쪽으로 뛰어나왔다.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다. 관중들이 쓰레기를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경기 후에도 롯데 코치와 SK 벤치 간에 심한 언쟁이 이어졌다. 각종 야구 커뮤니티는 거의 밤을 새워가며 양팀 선수들을 비난하는 게시물로 넘쳐났다.
이상한 일이다. 10일 히어로즈전에서 송신영의 명백한 빈볼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박재홍이, 전혀 고의성도 없는 김일엽의 몸쪽 공에는 과도하게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박재홍이 그렇게도 염원하던 프로 최초 250-250 클럽 대기록이 작성된 날이었다. 경기 끝난 뒤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축하 인터뷰를 하고, 사진을 찍고, 여태까지 프로에서의 생활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는 '잔치날'이 되었어야 했다. 조성환이 앰뷸런스에 실려가는 불상사가 생기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결코 박재홍이 받는 스포트라이트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박재홍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잔치상을 스스로 뒤엎었다. 축하객들을 몰아내고, 싸움판을 벌였다. 자신에게 돌아갈 모든 찬사와 축하를 그 스스로가 무위로 만들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자. 만에 하나 김일엽이 일부러 몸쪽 붙이는 공을 던졌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 흥분하고 양팀 벤치를 끌어내서 싸움으로 만들만큼 중대한 일이었을까? 이미 롯데는 8회초에 주장이자 팀내 최고 타자인 조성환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경기 역시 큰 점수차로 끌려가며 연패의 늪에 빠져든 상황. 선수단 분위기나 팬들의 기분이 매우 침울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 상황에서 굳이 약자인 상대를 자극해서 얻는 것이 무엇일까? 이미 수렁으로 빠진 상대의 분노를 끌어내고 빈정을 상하게 하고 때린 데를 계속해서 더 가격해서 이로울 게 뭐가 있을까? 차라리 담담하게 그 상황을 넘기고 경기를 조용하게 끝내는 게 지혜로운 일이 아니었을까? 그게 250-250 클럽 달성에 빛나는 36살 노장 선수의 경력에 걸맞는, 지혜로운 처신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박재홍은 끝내 그 순간을 참지 못했다. 그 순간에 박재홍의 눈에는 동료를 잃은 롯데 선수들의 슬픔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롯데 관중들 분위기도, 언론과 타 구단 팬들이 SK를 어떻게 또 한번 먹이감으로 삼을지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경기 후 받게 될 찬사와 스포트라이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이 스무살 짜리 애송이 선수라도 조금만 생각이 있다면 고려했을 그 모든 주변 상황이, 서른 여섯 노장 박재홍에게는 조금도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게 자기 기분이 조금만 나쁘면 장소가 장례식장이건 졸업식장이건 상관않고 크게 울어대는 어린 아이와 다를게 무엇인가. 게다가 철없는 행동으로 부모와 가족들을 세트로 욕먹이는 어린애와, 소속팀 이미지에 먹칠하고 애꿎은 후배(채병용)까지 욕먹게 만드는 박재홍 간에 다를게 무엇이겠는가.
프로 14년차 베테랑 선수 박재홍, 하지만 그의 생각과 행동은 여전히 스물 두살 신인 시절에 머물러 있다. 아니, 어쩌면 야구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때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프로야구의 온갖 기록을 갈아치운 서른 여섯 노장 선수가 동료와 후배, 팬들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이건 매우 슬픈 일이다. 박재홍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Fe', 철분인 것 같다. 하지만 그걸 보충하기엔, 때가 너무 늦었다.
부연 1. 롯데 조성환 선수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부연 2. 이번 건과 관련해 SK 채병용 선수는 비난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에게 돌아가는 과도한 비난과 질책이 사그라들게 되길 바랍니다.
첫댓글 형님 지금이시간에 읽기는 너무 깁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