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본 닥터 로제타 홀과 매티 노블이 기록한 1890년대 조선의 빈곤
초창기 남인도지역에서 시골마을들을 순회 방문하고 다니던 중에 어느 시골마을에서 초라한 할머니를 만났다. 그 분이 처음 대하는 나를 마치 자신의 손녀를 대하듯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분이 내 손을 잡으며 한 말이 ‘전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잘 살게 되어 기쁘다’는 말이었다.
그는 50년대에 젊은 기독여성으로 ‘작은 돈 모으기’라는 세계 기독여성들의 모임에서 인도 어느 지방의 지역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그는 뉴스 레터를 통하여 한국전쟁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 되고 백만에 가까운 과부, 50만 명에 이르는 전쟁고아가 발생한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서 한국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였는데 성령님의 인도로 수십 년 동안 계속 기도하였다는 것이다. 감동으로 눈물을 훔치는 그가 마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고 벅차했던 안나 선지자처럼 보였다. 그는 거듭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한국을 축복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이야기가 너무 그럴 듯하고 신기해서 타밀나두에서 일하는 어느 목사님께 말하였더니 자기 어머니도 ‘작은 돈 모으기’ 지역장이었고 자기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한국을 위해서 기도하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하였다.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우리가 잘 나고 부지런해서 잘 살게 된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우리의 지식과 노력과 힘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축복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인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전 세계 크리스천들의 순수한 눈물의 기도가 하나님 전에 쌓였음을 깨달았다.
어느 날 인도 어떤 노회 미션컴파운드에 갔는데 어떤 남자 분이 달려와서 인사를 하였다.
자기가 일하고 있는 빈민학교를 돕는 단체가 한국전쟁 후 해외모금으로 한국 고아들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라고 하였다. 그런데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을 하자 그 단체가 한국인들의 후원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 아동들을 돕는 단체로 탈바꿈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한국 경제 성장으로 말미암아 자기 지역의 빈민 아동들이 혜택을 받게 되었다며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인들에게 감사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분단되고, 영토도 작고 자원도 빈곤하고, 강대국에 끼여서 늘 전쟁의 위기에 놓여 있는 나라가 어떻게 짧은 시일 내에 가난을 벗어났는지 놀랍기 그지없다고 하였다.
60년대 가난보다 더 지독한 50년대 한국의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인도에서 들은 후, 우리의 부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더 더욱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기 위하여 겸손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과 한국교회가 국제사회에서 하나님의 손발의 역할을 잘 하길 늘 기도하였고 한국의 축복이 오래가길 염원하며 고난과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광야를 순회하였다.
졸부가 되어 으스대는 한국인들을 경계하며 닥터 로제타 홀과 매티 노블의 글에서 1890년대 우리 조상들의 가난에 비명을 질렀다.
근대사라고 부르는 130년 사이에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 통치를 겪고 해방을 맞아 남북이 분단되는 가운데 신생한국이 출범하였다. 그리고 전쟁으로 나라가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엄청난 역사의 격랑 속에서 한국호가 침몰하지 않고 살아나서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니 우리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다 잊었다.
사치와 산해진미와 유흥을 마음껏 즐기면서 빚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 개구리들의 각성을 위해서 닥터 로제타 홀과 매티 노블이 기록한 1890년대 조선의 가난한 실상을 보고자 한다.
1891년 1월 25일 로제타의 일기
전략
고통 속에 있던 가엾은 소녀는 이제 편안해졌다. 편해진 아이는 우리가 떠나기 전에 지쳐서 잠들었다. 이 소녀가 사는 집은 조 대비의 조카딸을 위해 왕진 갔던 대감댁과 어찌나 대조되는지! 땅에 붙을 듯 낮은 지붕에 종이로 바른 작은 문짝 하나, 방바닥도 바르지 못해 짚이 깔려 있는 초가삼간에 더러운 이불을 덮고 누워 있는 딸을 둔 가난한 부모는 나에게 ‘너무 고맙소’라고 말했다.
후략
박정희 저, ⌜닥터 로제타 홀⌟158쪽
1891년 6월 29일 로제타의 일기
첫 왕진은 3주 전에 이루어졌다. 존스 목사가 성곽을 걷다가 죽어가는 그녀를 발견하고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와 남편, 아이는 시골에서 한양으로 상경해 어느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녀가 병이 나자 그 집에서 쫓겨나 몇 달 전부터는 성곽을 벽 삼아 움막을 짓고 살았다.
토요일 밤 9시에 첫 왕진을 갔다. 등불을 집안에 갖다 대자 짚더미 속에서 소년의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그 뒤쪽으로 짚더미 속에서 깜짝 놀란, 시뻘겋게 충혈 된 두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움막으로 기어 들어가는데 오물로 가득 찬 요강이 보였다. 냄새의 주된 근원지는 아마 그 요강이었을 것이다. 나는 요강을 들어 관식에게 건네주며 비워오라고 했다.
그 불쌍한 여인은 심한 설사를 하고 있었다. 여인을 감싼 짚더미를 들추니 누더기가 보였다. 맥박을 재보려 손목을 잡았는데 뼈와 가죽만 남아 있었다. 여인은 폐결핵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목의 분비선도 이미 엄청 비대해져 있었다. 그녀는 심한 기침과 복통을 호소했다. 약을 좀 주었고 그 다음 날에는 우유와 잎차를 조금 가져다주었더니 굶주린 짐승처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후략
박정희 저, ⌜닥터 로제타 홀⌟, 171쪽
1897년 1월 28일 매티 노블의 일지
일전에 방문했던 어느 집의 여성은 여덟 아이들 중 다섯이 죽고 세 아이만 남았는데, 그 중 한 아이도 다른 아이들이 죽어간 병과 같은 병을 앓고 있다고 내게 푸념했다. 잠시 뒤 아이가 문 밖으로 나오자 나는 아이들이 그렇게 죽어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매일 같이 영하의 기온에 바닥에는 눈이 쌓여 있는 추운 날인데도 아이는 옷 없이 벌거숭이로 지냈던 것이다.
아기들 대부분은 사시사철 조그만 저고리 하나만 달랑 걸친 채 거의 벌거벗고 지낸다. 아이 엄마가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다닐 때도 등에 면으로 된 천을 들러 매어 업는데, 그 안에서 아기를 끄집어내면 허리 밑으로 알몸이 드러난다. 요즘처럼 추운 겨울날에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매티 노블 저, ⌜노블일지⌟,88쪽
1898년 6월 8일 매티 노블의 일지
어제와 그저께 조선인 가정 열한 곳을 방문했다. 그 비참함과 더러움과 궁핍함이란 ……. 사방에서 오물이 악취를 풍기는 좁다란 길을 지나 심하게 썩은 돼지가 떠 있는 구정물 못에 다다랐다. 숨을 멈추고 서둘러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곳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질병을 막을 생각 같은 것은 엄두도 못낸다. 한번은 13세 정도의 소년을 보았는데, 온몸에 포진이 나서 똑바로 설 수도 없어 꼬부랑 허리를 하고 걷고 있었으며 생일 옷 안에는 아무 것도 걸친 것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아이의 병을 고쳐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우리 의료 선교사가 소년을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하자 다들 놀라는 것 같았다.
한편 어느 집의 여성은 남편이 한 달 전에 죽었는데 벌써 다는 남자의 첩이 되어 있다.
매티 노블 저, ⌜노블일지⌟, 103쪽
닥터 로제타는 의료 선교사로서 여성환자 왕진 차 조선인들의 가정을 자주 방문하였다.
매티 노블은 선교사로, 교사로 교인 가정 심방과 전도를 위하여 조선인 마을과 가정을 자주 방문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상놈들이 벼랑 끝에서 사는 비참 상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고통과 고난을 함께 나누었다. 그 결과로 움막집, 초가집, 땅굴집의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상놈의 삶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그들의 기록한 조선천민들의 삶은 내가 90년대 말에 인도에서 본 도시 빈민들의 삶이었고 농촌 달리트들의 일상이었다. 그들이 겪는 굶주림과 병고, 사회적인 차별과 천대를 곁에서 바라보며 아파하고 슬퍼하며 기도하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정말로 가난한 달리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응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쓰임 받고 있음을 교회가 각성하고 국민들이 깨달아 이 경제 위기를 함께 잘 극복해내길 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한반도에 충만히 임하길 빌며 다시 떠날 길을 준비한다.
2023.1.11.수요일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