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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소백산선 지연전(총개요)
제 1 절 양측의 상황
국군은 1950년 7월 초부터 미국 지원군과 더불어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번다"는 지연작전의 방침에 따라 북한군을 저지하면서 7월 14일부터 미군이 공주~대평리 일대의 금강 방어선으로, 국군이 미원~조령~풍기~영덕 일대의 소백산맥 방어선으로 물러나 큰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14일 북한군은 제2군단의 6개 사단과 제1군단의 4개 사단 전부를 전방에 투입하고, 개편중인 사단을 포함한 3개 사단의 예비대를 보유하고 주요 기동축선은 금강 지역으로부터 낙동강 상류지대로 향하였다.
북한군은 경부국도 연변을 주공 축선으로 전투력이 강한 제2,3,4,6사단 등 기존 4개 사단에 제105전차사단을 배속 시키고 서울 근교에서 제7,9,10사단을 증편하고 있었다.
아울러 조공축선인 소백산맥선 일대에는 제1,13사단을 그리고 제2군단 에비인 제8,15사단을 투입함으로써 제1,8,12,13,15사단으로 소백산맥의 회랑지대를 공격토록 하였다.
동해안 방면에서는 여전히 제5사단이 산악지대로 침투한 제766부대와 함께 포항 점령을 기도하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부는 주일미군 3개사단의 투입을 결정하고 미 본토에 제2사단의 즉각적 증원, 그리고 공정 및 해병부대와 포병, 저차, 공병 등의 증원을 요구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금강방어선에서 적을 방어하기로 결심하고 미 제24사단은 금강일대에 현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이어서 대전이 무너지면 영동지역에서 미 제1기병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였다. 미 제25사단은 상주일대로 진출하여 적의 공격을 받고 있는 미원~상주 일대의 한국군을 지원하였다.
한편 국군은 수도,1,2,6,8사단과 제23연대가 미원~이화령~조령~풍기~영덕 등 소백산맥선으로 물러나 지연작전을 수행하고 후방지역 경계를 전담코자 제3,5,7,9사단을 편성하고자 노력하였다. 동시에 7월 12일에 창설된 제2군단(군단장 김백일 장군)에 제6, 제8사단을 배속시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제 2 절 지상 작전
금강선 지연작전에서 미 제24사단은 7월 14일 제19연대와 사단포병 주력을 대평리 정면에, 제34연대를 공주정면에 배치하여 북한군 제3.4사단의 공격을 방어한 내용이었으며 여기에 경부가도 축선인 대전전투 및 영동~김천 전투를 포함하고 있다.
금강선 방어에 미 제24사단은 7월 14일 공주 지역의 미 제34연대가 적 제4사단, 그리고 7월 16일에는 대평리 지역의 제19연대가 적 제3사단의 도하공격을 받고 와해되어 대전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19일 3개 방면으로 접근하는 적을 맞이하여 대전을 방어하였으나 다음날 사단장이 실종되는 등 병력 손실을 입고 역시 영동 북쪽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때 포항으로 상륙한 미 제1기병사단이 7월 19일부터 영동부근으로 진출하여 영동~김천일대에서 적을 지연시켰다. 기병사단은 7월 22일부터 영동정면에서 북한군 정예사단인 제3사단과 격돌하고 7월 27일에는 황간 측방의 적 제2사단과 전투를 수행한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는 미 제25사단을 상주부근으로 투입하고 국군 제1사단과 연결시켜 상주 - 김천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협조된 작전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공격 기세에 미 제25사단이 상주부근에서 철수한 다음, 미 제1기병사단이 김천~왜관으로, 남부통로 주변의 제24사단은 합천~진주로 각각 철수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전선의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해 전 부대를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시키기로 하고 미 제25사단이 마산서측을, 미 제24사단은 제17연대를 배속받아 그 북쪽으로 철수하여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소백산맥선 지연작전을 수행하는 국군 5개 사단(수도,1,2,6,8사단)이 중동부 산악지대인 미원~이화령~조령~풍기 일대를 잇는 소백산맥선에서 북한군 제2군단(제1,8,12,13,15사단)의 공격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국군 수도사단과 제2사단은 청주일대에서 큰 접적없이 보은일대로 철수하고 있었으며, 국군 제1사단이 미원~상주일대에서 적을 지연시키고 북한군 제15사단을 격퇴하며 함창 정면에 이르러 북한군 제13사단과 마주치게 된다.
이 무렵 국군 제17연대는 안동으로 이동 중에 7월 17일~23일간 상주부근 화령장에서 이동중인 북한군 제15사단을 기습하여 결정적이 타격을 입힌다.
국군 제6사단은 이화령~조령~문경선에서 북한군 제1.13사단과 접전을 하며 영강~유곡리~점촌에 이르렀으며 국군 제8사단이 풍기~영주~안동일대에서 북한군 제8.12사단을 맞이하여 적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육군본부는 7월 25일 적의 기동로를 분석하여 방어부대를 부분적을로 재조정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이 미 제25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7월 26일 점촌 정면의 국군 제6사단 좌측으로 이동하여 전선의 간격을 조정하였다.
그리고 수도사단은 1개 연대로 6사단을 증원하고 주력 2개 연대를 통합 편성하여 예천 부근의 미 제25사단 제24연대와 교대하여 적을 저지하였다.
동해안에서는 국군제3사단이 유엔 해군의 지원 하에 적5사단과 제766부대의 공격을 지연시킨다. 제3사단은 유엔 해군과 함께 7월 21일에 영덕에 이르러 수차례 공방전을 하였고 제3사단에 배속된 독립기갑연대는 진보일대에서 북한군 제766부대의 내륙침투를 저지함으로써 아군의 방어선이 양분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한편 서남부지역 지연작전에서는 호남지역과 거창~하동 일대의 방어전을 재편성중인 국군 병력과 경찰을 합하여 2,500여 명에 불과 하였다.
북한군 제6사단이 7월 16일 강경부근으로 도달하여 하동~진주로 지향하고 있었고, 대전~무주로 진출한 북한군 제4사단이 안의~거창으로 향하였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신임 미 제24사단장 처치 소장에게 거창~진주선을 방어토록 한다. 따라서 왜관에서 동해안 영덕까지의 방어는 국군 제1사~6사~8사~수도사단~3사단이 담당하고, 왜관 서남쪽의 방어는 미 제1기병사단~제24사단~제25사단이 각각 담당하는데, 8월초에 이르러 미 제2사단과 제1해병여단, 그리고 제5연대전투단과 3개의 전차대대 등이 전장에 증원 된다.
제 3 절 해. 공군 작전
이 시기 유엔해군이 한반도 해역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함으로써 부분적인 침투활동을 제외하고는 적의 해상활동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한국 함정들은 3"포를 장착하고 적의 무장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는데 주력하였다. 미 제함대는 7월 18일부터 원산.평강.함흥 일대를 포격하였다.
한편 한국 공군은 F-51기 10대를 일본에서 미군으로부터 7월 3일 인수받아 7월 4일부터 출격하였으며 미 극동공군은 제5공군과 호주 공군의 제77대대로써 남침초기부터 근접항공지원을 수행하였다.
유엔군의 지휘권 통합과 국군의 재편성
제 1 절 국내외 정세
1. 국내정세의 추이
정부는 '50. 7. 8일 전라남북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는데 이미 북한군은 금강선에 접근하고 있었다. 7월 13일에는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한반도에 주둔한 모든 미군의 작전지휘권을 인수하였고 14일 대구 경북도청에 사령부를 개소하였다. 이날 육군본부와 국방부도 도청에 합류하고, 내무장관에 조병옥 박사가 임명되었다. 7월 14일 정부도 대구로 이동하였다.
한편 경찰은 군의 지연작전에 따라 전선지역 경찰은 후방으로 철수하고, 도내의 경찰은 치안유지와 공비출몰지역에 대한 탐색과 토벌작전에 참가하여 군을 지원하였다.
전투지대내에서 가장 악전고투한 강원 경찰 5개 대대병력은 일부는 원주로, 일부는 북한의 유격대와 조우하면서 국지적인 전투를 벌이며 각개 철수하였다.
서울~경기~충청남북 경찰은 충남지역으로 물러나 물자수송에 전력하고 7월 14일 정부가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함에 따라 일부병력으로 지원하고 주력은 대전에서 군을 지원하였다. 경찰 주력은 미 제24사단이 물러나면서 대구로 집결하는데 이때 논산~강경선으로 진출한 충남경찰 1개 대대와 전북경찰이 이곳 도계를 연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당시 전남북 일원에는 4개 대대규모의 경찰이 산재하여 있었다.
그러다 7월 21일 대전이 함락 되면서 전남북에 게엄령이 선포되면서 경찰을 각 사단이 통제하게 되고 호남지역으로 우회하는 북한군 제6사단이 7월 17일 충남과 전북 도계를 넘어 21일 에 전주~정읍선을 공격함으로써 전북경찰 2개 대대는 제7사단 민기식 대령의 통제하에 축차 남원으로 지연하며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전남경찰 2개 대대는 제5사단장의 통제하에 국지전투와 치안유지에 임하다가 25일 구례~순천~여수~목포 일대에서 각기 육로와 해로를 따라 진주~마산~부산선으로 철수하고 일부는 연안 도서에서 유격전을 수행하였다.
한편, 북한군은 점령지에서 의용군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선전선동을 꾀하다 성과가 부진하자 강제 동원에 의한 납치로 그 수법을 전환하였다.
전시동원령을 발효하여 점령지역 주민들 중에 18~36세의 장정을 주로 강제 동원하게 되는데 남한의 청년수가 20여 만명으로 그들 중에 당원과 친공분자들을 중심으로 안동 대전, 광주여단을 편성하여 일부는 전선에 투입하고, 일부는 북으로 강제로 끌고 있다. 7월 14일부터는 남한의 해방구에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기 시작하는데 7월 25일부터 군위원, 면위원, 리위원을 선출하는데 이들은 치안대와 남로당원이었다.
북한은 점령지에 전투부대와 함께 진주한 치안대로 점령지역 행정조직을 장악하고 주민을 결박하고 현지 당원 및 적색분자를 이용하여 각종 위원회를 조직하여 선동토록 하고 리단위까지도 세포망을 확대하여 약탈과 몰수를 하고 반동분자와 비협조자를 색출하면 인민재판을 통해 고문과 학살을 자행하는데 3개월 동안에 30여만명이 투옥되고 21만여 명이 병사, 아사, 행방불명이 된다.
2. 국제 정세의 추이
결국 7월 7일 유엔안보리가 한국을 지원하기로 결의하게 되자 중립국을 표방하는 인도와 기타 국가들이 중재에 나섰지만 결국 소련과 중공은 먼저 중공의 유엔안보리 가입을 전제로 회담을 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드러냄으로서 미국과 서방 우호국가들만의 지원이 이루어지게 된다.
제 2 절 유엔군 통합과 국군의 지휘권 이양
1. 유엔군 작전지휘권 통합
국군이 미군과 함께 평택-충주-울진을 연하는 선에서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을 때에 1950. 7월 7일 유엔군은 유엔군 사령부를 창설한 후 7월 13일 제8군사령부를 대구에 개소하였다. 아울러 국군은 2개 군단 체제로 재편성하고 14일 국군의 작전권을 유엔군사령부에 인계하게 된다.
2. 국군의 작전지휘권이양
유엔군 사령부의 발족으로 극동군사령부가 유엔군사령부로서 국군을 지원하는 모든 유엔군을 토압지휘하게 되었고 아울러 미 제8군사령부도 '50. 7월 13일에 대구에서 개소하여 지상군 작전을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
7월 14일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인수한 맥아더는 7월 17일 미 제8군사령관에게 한국 지상군의 작전지휘권을 재 이양하였다.
이에 따라 정일권(소장)총참모장은 제1군단장 김홍일장군, 제2군단장 김백일 장군 등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제 3 절 국군의 재편성과 후방지역 상황
1. 국군의 재편성
국군은 '50. 7월초에 제1차 재편성에서 제1군단의 창설과 더불어 8개 사단에서 5개사단으로 축소 개편한 다음 미 제24사단과 평택-충주-울진 선을 축차 방어하는데 광정면에다 전방에 모두 투입하여 예비대 하나 없는 상태였다.
따라서 국방부는 7월 7일에 다시 해체되었던 제3사단(이준식 준장), 제5사단(이형석 대령), 제7사단(민기식 대령)의 3개 사단을 재건하고 부산에서 제9사단(이종찬 대령)을 창설키로 하였으나 기존 사단의 보충병력도 부족하고 장비/물자가 없어서 일반명령을 하달한 상황에서 후지부지 되었다.
7월 17일에는 서해안지구전투사(신태영 소장)을 신설하고 전남 및 전북 편성관구와 기타 부대를 관장하게 하고, 한편 영남 편성관구를 경남 및 경북으로 분리하여 4개의 편성관구로 개편하였으나 역시 유명무실하게 다른 부대 창설시 흡수되고 말았다.
한편 사단의 재건과 관구의 신설 노력과 어울려 중부전선의 제6.8사단이 이화령-조령-죽령으로 물러나자 이들 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가 어려워지고 적 제2군단의 주력이 지향됨에 따라 7월 12일 함창에서 제2군단을 창설하고 제6.8사단을 배속시켰다.
다시 한.미간의 합의를 거쳐 7월 20일에 병력 손실이 심한 국군 제2사단을 해체하여 새로이 2개 군단, 5개 사단으로 개편을 단행 하였다.
제1군단이 수도사단(제1연대, 8연대 해체하여 18연대에 편입, 제17연대 배속), 제8사단(제10, 제16(제2사단에서 편입), 제21연대)로 편성되었다.
제2군단은 제1사단(제11(제15연대 편입), 제12(제20연대 편입), 제13연대로, 제6사단은 제2,7,19연대로 편성하였다.
육군본부에는 제3사단(제22,23,기갑연대)와 보충대, 전주훈련소, 광주훈련소,부산훈련소 등이 편성된다.
동시에 제1군단은 작전지역을 미군에게 인계하고 사령부가 의성으로, 수도사단과 제17연대는 안동으로, 제1사단은 춘양으로 각각 이동시켰다.
이에 따라 제1군단이 동해안과 동부에서, 제2군단이 중동부에서 저지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다시 7월 24일부로 제1군단이 수도사단과 제8사단을 지휘하여 영주-안동축선을, 제2군단이 제1사단과 제6사단을 지휘하여 문경-함창-상주축선을 방어토록 하고 동해안의 제3사단은 육군의 통제하에 두었다.
2. 후방지역 상황
가. 피난민 상황과 정부의 조치
정부의 조치와 도청을 비롯한 행정관서, 군경의 검문과 안내에도 불구하고 피난민의 통제는 어려움이 많았고 형무소의 교도관들이 이탈하여 죄수마저도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적 오열이 피난민을 가장하여 후방으로 침투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였다.
피난민의 행렬은 엄청나 어떤 대책으로 막아내거나 통제가 가능한 것이 아니였다. 또한 유언비어가 유포되어 부산시민이 적의 항공기나 함포사격을 받는 다는 설에 가야산이나 지리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북한군에게 고초를 당하기도 하는 웃지못할 일도 발생하였다.
피난민 대피소등이 전국에 58개소가 마련 되었지만 120여 만명의 피난민을 통제하기란 불가능하였고 이러다 보니 방어진지 진지내에도 피난민이 방황하게 되었다.
한 예로 당시에 부산시민이 해방 직후 28만이었으나 일본과 만주등지에서 19만여 명의 동포들이 들어와 47만 정도였다. 그런데 '50. 7월 말에는 70만명을 상회하여 임시조치법을 공포하여 공공건물은 물론 개인건물까지 피난민을 수용토록 하였다.
정부가 피난민 구호에 전력을 기울여 피난만 증명서를 발급 받은 자에 한하여 1일 2홉의 양곡을 제공하고 미군에서 담요, 옷 등의 생필품이 지원되기 시작하였다.
나. 미군의 피난민 통제작전과 한.미 협조
북한군의 첩자나 오열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침투가 빈번해지자 '50. 7월 18일 미 제25사단은 작전지역을 통과하는 피난민들의 검색을 실시토록 한다.
하지만 북한군 오열들이 주도면밀하게 침투하여 마산 북방의 한자 수용소가 전멸 당한 사건이 발생하고 창원의 탄약보급소는 항상 수색중대와 전차로만 방어하게 되었고 함안의 미 제24연대 제1대대 본부가 기습을 당해 부대대장 이하 7명이 사상되는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하자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편성하기 위해 8km이내에 거주하는 주민을 강제로 소개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대구 북방에서는 5만의 피난민이 몰려 내려오고, 경주-대구간 도로변에는 약 18만명이 내려오는 등 피난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는 먼저 수용소에 집합시켜 검문 검색후에 지정된 경로로 군의 안내하에 이동토록 했다.
그러나 왜관철교근처에서는 미 제1기병사단이 민간복장을 한 게릴라들이 피난민 대열에 침투하여 8월 4일 제8기병연대가 도강을 하려는 순간 피난민이 몰려들어 통제불능이 되고 결국 날이 저물면서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되어 많은 피해를 입고 교량이 폭파되는 아픔을 격어야만 했다.
마산 방면에서도 몰려드는 피난민 12만 명을 열차, 자동차, 선박등으로 부산이나 거제도로 소개시켰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군의 각 사단에 3명의 한국경찰 연락담당이 파견되기 시작했고 1만5,000여명의 한국경찰이 유엔군에 배속되어 적 게릴라 토벌과 소규모 전투를 군과 병해하여 치르게 되었다.
다. 지연작전시 적 게릴라 상황
미 군사고문단이 전쟁 발발 이후 7월 18일까지 적 게릴라의 전.부상자 규모가 6,000명에 이르고 있었다고 보고할 정도로 적의 게릴라 활동이 증가하였다.
실제 이 무렵 주북한 소련대사 스티코프도 "성공적인 인민군의 공격은 빨치산 게릴라 활동을 더욱 고무시켰으며 남한군 후방에서의 빨치산 활동이 더욱 활발히 전개 되고 있다"고 소련 에서 공개돈 외교문서에 기록 되어있다.
실제 미 제24사단 예하부대들이 경부축선으로 진출하여 방어선을 구축할 때에 북한군의 오열과 피난민으로 가장한 적 오열로 당시에 딘소장이후 제24 사단장을 역임한 처치소장은 "이 때 전쟁은 완전하 다른 전쟁이며, 게릴라 전쟁"이라고 하였으며 극동군 정보 참모부장 월로비 장군은 "북한 빨치산들은 잘 조직 되었으ㅁ, 현재 미군에게 가장 크고 유일한 골칫거리이다" 하였다.
또한 미 제25사단장 킨 소장도 7월 20일 '민간인 복장을 한 1개 집단이 마을에 진입하여 군복으로 갈아입고 아군 병력을 포로로 하였다"고 특별한 경계를 하달 하였다.
한편 이 무렵 미군 방어선인 영동-김천 지역에서 북한군이 종종 피난민을 앞세우고 아군의 진지로 접근하는 전술을 사용하여 바로 영동의 "쌍굴다리" 즉 노근리 민간인 피해와 같은 엄청난 비극이 발생하는 단초가 된 것이다.
적은 피난민을 가장하고 분해된 무기와 군복을 꾸러미로 만들어 2~3명 단위로 아군 전선을 침투한다. 이들은 탄약과 물자를 우마차 또는 사람을 동원하여 수송하고 때때로 흰색의 농부로 가장한 채 산등성이를 타고 아군 전선으로 이동하며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종종 이들과 동행하였다.
제 4 절 전쟁지원체제의 정립
1. 인사 지원
국방부는 전남북과 경남북 등 4개 지역에 병력 보충을 위한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제1훈련소(대구), 제2훈련소(부산), 제3훈련소(구포), 제5훈련소(제주), 제6훈련소(삼랑진), 제7훈련소(진해) 등을 설치 하였다.
육군 인사국의 영현등록 업무는 각종 원인으로 사망한 육군 현역장병 및 군무원, 기타 종군기자의 사체 수집, 화장 및 봉송에 따른 일체의 기록을 유지 수행함을 주 업무로 하였다고 육군인사역사에 기록 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다. 실제 영현 등록 업무는 그보다 훨씬 뒤인 9월 5일이다."
전쟁기간중 전사자 유해처리는 전투현장에서 각급부대 차원에서 극히부분적으러 이루어지고 있다가 1950년 9월 5일 유군본부는 누적되는 전사자 영현처리를 위해 부산에서 '영현중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묘지등록대'를 창설한다.
따라서 부대별 여건과 지휘관의 의지에 따라 일부 수습되어 후방으로 운구되어 온 제한된 전사자 유해만 관리된다. 이때 후방지역의 학교나 사찰이 보관 장소로 이용되는데 바로 통도사나 부산 범어사 등이 그 대표적인 보관 장소였으며 전사자의 고향으로 운구된 화장된 유해는 유가족에게 전달 되기도 했지만 피난으로 유가족을 만나지 못하거나 일부는 유가족측에서 가져온 유해가 거짓(남의 유해를 불로 태워 가져왔다고의심함)일라 하여 받지않고 몽둥이로 쫒아내 결국 마을 밖 야산이나 사찰 등에 놓고 가버린 경우도 많았다.
재무감실은 7월 12일 육군 야전재무단을 창설하여 경리장교의 유기적이고 원활한 인사배치와 신속한 자금의 공급 및 청산을 도모하였고 7월 20일에는 육군본부에 육군중앙국고지출소를 창설하여 자금업무와 청산업무를 관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참전용사는 월급이란 것을 알지도 못했다 한다."
여군도 제2훈련소(부산) 내에 여자의용군교육대를 창설하고 500여명을 선발하게 되어 여군의 모체가 되었다.
이와함께 제1훈련소(대구)의 모체가 된 제25연대(교육연대)가 7월 11일 대구에서 창설 되었으나, 12일 경북편성관구사령부 제7교육대로 개칭되었다.
2. 군수 및 민사지원
피복조달은 주로 국방부가 전남방직공장의 재고품을 부산으로 이송하여 군피복용으로 충당하였고 대구와 부산에 있는 방직공장을 총동원하였다.
국군 병력의 95%를 차지하는 육군의 피복은 미 극동군사령부와 협조하여 원단을 군사원조로 들여와 가공비만 정부예산으로 충당토록 하고 해군과 공군의 피복은 특수복만을 제외하고는 국내생산으로 소요량을 확보토록 하였다.
병참보급품은 부산에 피복창을 설치하여 7월 4일 기준으로 피복업체가 71개로 늘어나고 일일 생산력도 작업복 3,000착, 작업모 1,000개, 훈련화 3,000족을 생산하였다. 7월 12일부터는 부산지구 보급창에서 통조림을 계획대로 생산하였다.
의무부대는 7월 9일에 대전에 창설한 제1야전의무단이 육본 직할의 의대를 기간으로 7월 20일부터 미군 약품이 다량으로 입하됨으로써 전선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수도병원도 대전을 경유 김천으로 제1 육군병원은 부평에서 대구로, 대전의 제2육군병원은 대구로 이동하였다. 제3육군병원은 여수를 거쳐 진주로, 육군요양원은 밀양에서 제6육군병원으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