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9]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 1860-1894)②
평양이 선교지로 결정된 윌리엄 홀은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했고 서울에서 평양은 물론 의주까지 선교를 위한 답사여행을 했으며, 여행 기간 해충과 전염병에 노출되어 고통을 당하기 일쑤였음에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가진 것에 대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선교사였습니다. 특히 평양은 외국 종교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진 지역이어서 어려움이 컸습니다. 평양감사는 외국 선교사를 직접 박해하거나 감금할 수는 없었지만 선교사와 함께 다니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까지 했습니다. 1882년 미국과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미국을 비롯한 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 홀이 선교사로 들어온 때에도 여전히 공공연하게 선교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환경이 평양 선교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아내 로제타는 홀에게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물었고, 홀은 하나님이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평양 선교의 문을 여신다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외교적으로 접근해서 감금된 조력자들의 석방을 이끌어냈고, 그 이후 점점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1893년에는 전부터 함께 평양 선교를 위해 협력해 온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 선교사가 북한 최초의 교회라 할 수 있는 “널다리교회”(1899년 장대현교회로 바뀜)를 세우는 일을 도왔고, 평양에서 집 두 채를 매입해서 진료와 전도를 위한 장소로 삼았습니다. 얼마 지니자 않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훗날 남산현교회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그는 1894년 4월 6일 광성학교(현 서울 광성고등학교)을 세워 기독교 교육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