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23/191016]마늘과 시금치를 심다
언제나 본격적인 ‘영농일기營農日記’를 쓸지는 모르겠으나, 어제는 ‘자연인 친구’에게 마늘과 시금치 심는 법을 배웠다. 워낙 눈썰미와 ‘손썰미’가 없기에 따라가기가 바쁘고 힘들다. 먼저 오일장이 열리는 10리길 오수농협에 가 씨와 비료, 퇴비, 농약, 구멍 숭숭 뚫린 검정비닐을 샀다. 시금치야 겨우내 먹을 수 있어도, 늦마늘인지라 내년 6, 7월쯤 수확을 할 수 있을까? 하루이틀 더 늦어지면 마늘농사가 안된다고 하는데, 어찌 게으름을 피우겠는가? 더구나 바로 옆에 ‘농사 선생님’의 친절한 가르침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농사꾼도 아닌 친구는, 어쩌면 대한민국 일등 농사꾼이었던 우리 아부지만큼 일을 잘 하는 것같았다. 비료와 거름을 뿌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몸에 착 ‘익은’ 것이었다. 나는 아무리해도 어설프기 짝이 없어 포기하고 그저 관망만 할 뿐이다. 아, 우리 친구 서산의 농부 태암의 노하우와 실력이 부러웠다.
아무튼, 육쪽 마늘을 일일이 까 실한 것들만 골라 빨간 다라이에 한 가득 담아놓은 것으로 어제의 일은 끝나고 오늘 오전에 하나하나 심을 것이다. ‘작품 버린다’며 아예 손도 못대게 하니, 올해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생각이다. 세 발짜리 쇠스랑으로 밭을 고르는데 대단하다. 일사천리一瀉千里, 금세 두 두럭이 완성됐다. 어찌 그리 일을 잘 할까? 동네 할머니들 뺨친다. 젊은 시절, 얼마나 일을 햇으면? 저 친구의 지난 역정歷程은 얼마나 신산했을까,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나는 참말로 인복人福이 많다. 어떻게 귀향하자마자 미지未知의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안쓰러워,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조화造化를 부려주신 것일까? 좌우지간, 이제 곧 있으면 튼튼하고 미끈하게 잘 빠진 무도 김장할 때 보탤 수 있고, 고들빼기김치도 담글 수 있다. 게다가 시금치라니? 속도 모르는 아내와 여동생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농부남편과 농부오라버니라니? 흐흐.
이 모든 것이 친구 잘 사귄 덕분인 것을. 엊그제는 농약통을 등에 메고 무밭 청벌레 죽이는 농약을 쳤다. 왼손으로 계속 펌프질을 하고 오른손으로 무성한 무잎을 헤치며 농약을 주노라니 어느새 뒷산 노을이 아름답다못해 황홀하다. 새벽엔 해님이 집앞 동쪽 산능성이로 솟아오르기 직전, 부옇게 물들이는 여명黎明은 또 어떻던가? 편백침대에 누워 조선창朝鮮窓을 통해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이렇게 행복 幸福되나 싶었다. 자, 이제 김치콩나물국을 맛있게 끓여 아침을 먹자, 그리고 고혈압과 당뇨약을 먹어야지, 내가 태어난 이 집에서 적어도 25년은 건강하게 살아야지. 그렇담, 나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닐까?
친구와 약속했다. 모든 수확물은 ‘반띵’하기로. 반띵이 문제인가? 초보로서 배우는 입장인 걸. 양파도 심고, 대파와 쪽파도 심고, 심을 수 있는 것은 다 심어볼 작정이다. 바로 옆에 ‘족집게 선생님’이 있으니 무슨 걱정이랴. 내일모레 고향을 다니러 오시는 아버지, 당신이 평생 건사했던 본채와 사랑채의 놀라운 변신에 어쩜 기절氣絶을 하실지도 모르겠다. 환골탈태換骨奪胎,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엊그제 아버지께 모처럼 손편지를 썼다. “아부지, 외양간이 다용도실로 바뀌고요, 돼지막사가 제 서재書齋로, 사랑방이 에미와 함께 쓸 아무 멋진 방으로 변신했어요. 이제 대문도 방부목으로 예쁘게 만들어 달 거구요. 앞담도 허리춤 정도의 높이로 쌓아 앞의 전망이 여전히 타악 트이게 할 거예요. 아버지가 물려주신 이 집에서 몇 년이고 같이 살아요. 틀림없이 백수白壽하실 거예요. 그때 되면 사진 중심으로 3번째 문집을 내드릴게요.”. 아, 늙으신 아버지는 “네가 애쓰는데 줄 돈이 없구나” 한탄하신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마세요. 본채 리모델링 비용에 아부지 전 재산을 털어주셨잖아요. 본채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별장 別莊’으로 오래도록 이용할 거예요. 그러니, 온갖 근심걱정 다 붙들어매시고 ‘사람이 태어나 이렇게 늙어가는 거구나’ 하는 마음으로 노후를 마음 편히 즐기실 생각만 하세요. 자식이 일곱이나 되니 이런 자식, 저런 자식, 맘에 든 자식, 맘에 안드는 자식도 있는 법이잔하요. 그러니 제발이요”
올 겨울엔 아버지가 평생 써오신 일기책들을 모두 읽어볼 생각이다. 밑줄칠 부분(영농일지에 다름 아니다)은 따로 메모를 하여, 내년 농삿일에 참고할 생각이다. 양파는 언제 심는지, 어떤 농약을 써야 하는지, 거의 모든 게 기록돼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록記錄은 소중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영농일지를 쓸 수 있다면, 나의 노후老後생활도 헛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친구가 찰수수를 수확했다며 방아를 찧으러 가잔다. 임실군에는 수수를 찧은 방앗간이 한 곳도 없다하여 수소문 끝에 장수군 산서의 이룡정미소까지 갔다. 수고료라고 한 됫박 준 수수로 밥을 해먹었다. 쌀밥과 어울린 붉은색 수수, 이것 또한 귀물貴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친구는 도무지 모르는 게 없다. 만물박사萬物博士. 들깨는 이렇게 베라며 시범을 보이더니, 언제 털라고 게으름을 피냐고 매일 닦달을 해댄다. 하여, 지난 토요일 저녁판에 아내와 함께 들깨를 털었다. 20여분간은 재밌게 하던 아내는 곧바로 자기 체질이 아니라며 싫증을 내고 만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고를까? 친구는 역쉬 해결사. 체로 몇 번 거르더니, 선풍기를 들고 나온다. 바람에 날리면서 깨알만 고스란히 밑에 모인다. 깨끗하다. 들기름 두 병은 나오겠단다. 며칠 동안은 밤을 주으러 다녔다. 주운 밤은 무조건 삶아 햇볕에 며칠이고 말린다. 그런 후 푸대 등에 넣고 사정없이 휘둘러팬다. 껍질과 밤살이 분리되는 것도 처음 알았다. 튀어나온 밤살을 또 밥에 넣는다. 맛있다. 겨울내 먹을 수 있겠다.
어디 그뿐인가. 한 달 전에는 길이가 3m가 넘는 칡뿌리를 캐주었다. 잘게 잘라 말렸다. 겨우내 칡차를 끓여먹고 손님들에게 대접해 줄 준비 완료. 말린 새우는 믹서기에 갈아 천연조미료로 “딱”이다. 라면 끓여먹을 때 한 줌 넣어보셔라. 신라면이 새우라면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이 가을이, 난생 처음 제대로 맞는 이 가을이 가고 있다. 단풍구경 가는 것이 어찌 가을의 전부일 것인가? 가을은 낙엽落葉이 떨어진다고해서 영어로 Fall일까? 태풍이 잦은 이 가을,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면서 뜽금맞게 ‘windfall’이라는 영어 단어가 생각났다. windfall은 단어 그래도 바람에 떨어지는 것, 이른바 ‘횡재橫財’를 뜻한다. 내가 바로 횡재를 만난 게 아니고 무엇인가. 해피 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