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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성전면(城田面) 월하리 월출산月出山 동남쪽에 위치,無爲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의 말사
無爲寺(무위사)라는 뜻은 "현상을 초월하여 상주불변(常住不變), 즉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를 이르는 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무위사의 창건은 신라시대 진평왕 39년(617년) 원효대사가 창건, 절이름은 관음사(觀音寺)라 했다고 한다.
또한 <무위사사적>을 보면 절은 삼국 통일후 875년 (헌강왕 1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갈옥사(葛屋寺)로 중건한 것이 첫번째 중창이라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905년(효공왕 9년) 이후 선종인 가지산문(迦智山門)계통의 선각국사(先覺國師) 형미(逈微, 864∼917년)가 고려 태조 왕건의 요청으로 무위갑사(無爲岬寺)에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하고 널리 교화를 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한다.
946년(정종 1) 선각국사(先覺國師)가 3차 중수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했고, 1555년(명종 10) 태감선사(太甘禪師)가 어명으로 중창하여 무위사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최근까지 목조건물은 극락전(국보 제13호)·명부전과 요사채뿐이었으나 1974년에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해탈문(解脫門)·분향각(焚香閣)·천불전·미륵전 등을 새로 지었다.
이밖에 경내에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 탑비 (보물 제507호)와 종형의 옥신을 가진 사리탑, 석탑형식을 한 부도가 있고 미륵전 안에 고려 말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입상이 있다.
그리고 1955년 보수공사 때 무위사가 1476년에 크게 중창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하며, 극락전 안에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및 29점의 불화는 조선 초기 작품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현재 삼존불상과 후불벽화만 남기고 모두 벽화 보존각에 보존, 이후 성보박물관으로 이전 보관되고있다
그런데 <무위사사적>에 의하면 고려시대인 946년(정종 1년)에 형미가 제3창을 하면서 모옥사(茅屋寺)로 절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946년은 이미 형미가 입적한 30년 뒤에 최언위가 지은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영탑비>가 세워진 해라서 믿기 어렵다. 이것은 아마 형미가 모옥(茅屋)이던 무위갑사를 왕건의 후원을 받아 크게 중창하면서 교화를 펼쳤던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무위사는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었고, 형미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나라에서는 1407년(태종 7년) 12월에 각처의 명찰로 여러고을의 자복사(資福寺)를 삼게 하였는데, 이 때 무위사는 천태종 17사 중의 하나로 소속되었다. 무위사는 천태종 백련결사가 활발했던 고려후기에 이미 천태종 소속의 사찰이 되었다가 조선 초기 사찰통폐합의 2차 정리기인 1407년에 천태종 소속의 자복사로 남게 된 듯하다. 이 무렵의 연혁을 보면 1430년(세종 12년)에 극락보전이 건립되었는데 지금 극락보전 안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삼존불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476년(성종 7년)에는 극락보전 후불벽이 만들어졌고 후불벽화가 조성되었음이 <무위사극락보전묵서명(無爲寺極樂殿墨書銘)>으로 확인된다. 이 묵서명을 보면 극락보전 건립이 조선 초기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던 고급 기술자의 손으로 만들어진 건물임과 함께 국가적인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보전의 건립, 아미타삼존도 · 아미타여래도등의 벽화 조성은 그 조성 시기 및 신앙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믿어진다.
수륙재(水陸齎)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인 것이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보전이 건립되고 아미타불의 벽화가 조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한편 <무위사사적>에 따르면 1555년(명종 10년)에 태감(太甘禪師)가 어명(御命)으로 4창하고 무위사로 개칭했다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무위사란 절 이름이 이보다 훨씬 앞선 시기인 1407(태종 7년)에 이미 나타나고 있어 <무위사사적>의 이 부분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678년(숙종 4년)에는 극락보전 앞마당에 있는 괘불석주가 제작되었다. 1739년 (영조 15)에 해초(海超) 스님의 공덕으로 전각이 보수되었는데 당시 미타전, 천불전, 시왕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절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극락보전이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었다.
해방 이후 1956년에 극락보전을 수리 보수하고 1975년 벽화보존각을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1975년에는 편광영탑비와 사리탑 등에 대한 정화 불사에 이어 봉향각 · 해탈문 · 명부전 · 천불전을 다시 짓고 1991년에 산신각을 1995년에는 이미 있던 동쪽 요사를 늘려 지었다.(출처 : 무위사)
천왕문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로 출입구의 좌우 평방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통로 좌우에 사천왕상을 봉안하였으며, 정면에는 '月出山無爲寺'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의 인도종교에서 숭앙했던 귀신들의 왕이였으나,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사천왕의 발밑에 있는 귀신의 모습으로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는 생령좌의 모습이다. 가상생물인 생령좌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악을 형상화 한 것이다.
문화재자료 제76호 (강진군) 무위사 삼층석탑(無爲寺 三層石塔)은 무위사 극락전 오른쪽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은 각 층의 4면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아래층은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위층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특히 아래층에는 기둥조각으로 나뉜 8곳에 안상(眼象)을 세밀하게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얇고 평평해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층급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양쪽가에서 가볍게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세 개의 머리장식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가 적당히 줄어들어 있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탑으로, 비록 1층과 3층의 지붕돌이 약간 깨져 있긴 하나 대체로 원래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만든 시기는 뒤에 서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945년에 만들어짐)와 같은 때이거나 그보다 조금 떨어지는 고려시대 전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극락보전의 앞쪽에 한쌍의 괘불석주가 있는데, 오른쪽의 괘불석주에는 '康熙十七年戊午日 ? 字造成也(강희십칠년무오일 ? 자조성야)'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1678년(숙종 4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위사 극락전(無爲寺 極樂殿) 국보 제13호,
세종 12년(1430년)에 지었으며, 앞면 3칸, 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식이고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
극락전의 기단양식은 아래쪽에는 허튼기단으로 축조하였고, 위쪽으로는 잘 다듬어진 돌로 쌓은 가구식기단에 갑석을 덮었고, 정면을 피해 양옆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극락전 앞마당에 있는 연화문 배례석(拜禮石)으로 부처님을 정면에서 친견하지 못하도록 법당을 향해 좌측으로 약간 비켜서 놓여있다. 배례석(拜禮石)의 윗면에는 단판팔엽(單瓣八葉) 연화문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에는 8개의 씨방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배례석은 절을 찾은 불자들이 사정상 법당에 들어갈 수 없는 경우에 부처님께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된다.
'강진 무위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康津 無爲寺 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보물 제1312호
극락보전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다. 가운데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상이 배치되고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하고 있다.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본존불은 건장한 체구에 무릎이 넓어 안정감 있는 신체비례를 지닌 모습이다. 둥근 얼굴을 하고 가슴 부분은 약간 쳐진 듯 표현되었으며,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다. 이 아미타불은 약간 앞으로 구부린 자세이며, 연꽃대좌와 하나의 나무로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아미타불상과 거의 같은 양식의 관음보살상은 왼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 놓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가슴에는 간단한 모양의 가슴장식이 있으며, 양어깨에 곱슬한 머리칼이 흘러내린 모습이다. 두손은 앞에 모아서 보병을 받쳐들고 있다.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있는 지장보살상은 비교적 작고 갸름한 얼굴이고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다. 오른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으며 오른쪽 다리를 대좌 아래로 내려뜨리고 있다.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의 앞쪽에 흘러내린 옷주름은 아래 대좌에 표현되어 있어 불상과는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이 삼존불좌상은 고려 후기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으로 변형되고 있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불상의 연원이 되는 시원적인 작품으로서도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50㎝ 정도의 장대한 크기의 목조불임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편으로 조선 초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된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後佛壁畵)' 국보 제313호로 승격지정
극락보전 후불벽 앞면에 그려져 있는 아미타삼존불벽화이다. 앉은 모습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이,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이 서 있는 구도를 하고 있다. 화면의 맨 위부분에는 구름을 배경으로 좌우에 각각 3인씩 6인의 나한상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작은 화불 2불씩이 그려져 있다. 극락전은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만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
아미타극락회도 장면을 그린 이 벽화는 앞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상과 매우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비교적 높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양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있으며, 뒤로는 광배가 표현되었다. 왼쪽에 서있는 관음보살은 머리칼이 어깨 위에 흘러내린 모습에 얇고 투명한 겉옷을 입고 있으며,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오른손으로 석장을 짚고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채색은 주로 녹색과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조선 성종 7년(1476)에 화원 대선사 해련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벽화는 온화한 색채나 신체의 표현 등 고려시대의 특징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나 본존불과 같은 크기의 기타 인물 표현 등 조선 초기 불화의 새로운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극락보전의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 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국보 제313호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후불벽화'의 좌협시인 관음보살을 자세히 살펴보면 눈동자가 없다.
근래에 조성된 대웅전의 신중탱, 동진보살(위태천)이 화면 중앙에 자리잡고 있고, 좌우로 조금 떨어져 범천과 제석천이 함께 그려져 있고, 화면은 2단으로 전체 26위(位)의 신중을 배치한 구도이다.
극락전 내의 우측면에 모셔져 있는 칠성탱. 칠성탱에는 보통 해와 달과 별을 통솔하는 치성광여래는 금륜을 들고 있고,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일광과 월광보살, 칠성여래와 칠원성군, 태상노군과 육성군을 양협시로 하고 있는 구도이다. 신중탱과 함께 1995년에 조성된 것이다.(보충설명 : 태상노군(太上老君)은 노자(老子)를 신격화한 것이다. 장자와 함께 도가 시조이다. 이 계보가 그대로 신선설을 주장한 신선가(神仙家)를 거쳐서 도교에 도입되어 도교의 교조로 숭앙받고 있다.)
극락전 내벽 중앙에 그려진 본래의 벽화는 해체되어 보존각에 진열해 놓았다. 이 그림은 모사본으로 설법하고 있는 듯한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협시보살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삼존불 사이와 주위로는 합장한 채 본존불을 향하고 있는 입상의 두 보살상과 여섯 비구를 배치하였다.
이 벽화는 모사본의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이며, 극락전 내부의 서측면 중앙에 그려져 있던 본래의 벽화는 보존각에 진열되어 있다. 삼존불도와 같은 크기의 화면으로 8대 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아미타불이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장면이다
보물 제1314호, 무위사극락전백의관음도(無爲寺極樂殿白衣觀音圖)는 극락보전의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의 뒷벽에 있는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 성종 7년(1476)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극락전 내벽 중앙에 그려진 그림으로 지금은 해체되어 보존각에 진열해 놓았다. 설법하고 있는 듯한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로는 협시보살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삼존불 사이와 주위로는 합장한 채 본존불을 향하고 있는 입상의 두 보살상과 여섯 비구를 배치하였으며, 멀리 뒤로는 마치 월출산의 기암괴석을 표현하기라도 하듯 암산을 그려 넣었다. 비교적 활달한 필치에 적황색의 색조, 당당한 체구의 인물의 형태 등에서 고려적 색체가 어느 정도 였보이긴 하지만, 사각형의 얼굴과 연꽃대좌의 형식적인 꽃잎의 표현 등 조선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본존불의 낮은 육계와 정상계주, 고식(古式)의 눈, 코, 입 표현, 다소 위로 올라간 왼손, 회화성이 돋보이는 자연스러운 옷주름 처리 등은 이 삼존불도를 후불벽화와 거의 같은 시기의 그림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아미타래영도(阿彌陀來迎圖)이며, 극락전 내부의 서측면 중앙에 그려져 있던 것으로 지금은 보존각에 진열되어 있다. 삼존불도와 같은 크기의 화면으로 8대 보살과 8비구를 거느린 아미타불이 극락왕생자를 맞이하는 장면이다. 전체적인 구도가 매우 자연스럽고 우측을 향하고 있는 인물들의 동적인 자세, 익살스럽고 자유로운 얼굴 표정 등으로 회화성과 함께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삼존불도와 거의 동일한 색체와 필치, 인물 형태를 하여 같은 시기 작품일 것으로 추정된다.
아미타래영도 위쪽에 있는 벽화로 중앙의 항마촉지인을 한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는 부처님을 좌우 각 2분씩 배치하였다. 모두 연화좌 위에 앉은 자세로 적색 대의를 입었으며, 육계가 뽀족하고 정상계주가 빨갛게 처리되었다. 본래의 벽화 위에 덧 그린 것으로 18∼1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두광 부분이 크게 손상되긴 하였으나 전체적인 형태는 잘 남아있다. 우향한 입상으로 오른손은 하복부, 왼손은 어깨 위에 두어 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적색 대의에 양록색의 하의를 입었으며 끝단은 검은색으로 처리하였다. 다소 부자연스러운 인물의 형태, 색체, 필선으로 보아 18∼1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 아뢸奏)로 입에는 훈과 같은 악기를 물고 하늘을 날으는 주악비천상으로, 몸과 얼굴이 정면을 향하고 있어 다소 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앞뒤 공간에는 구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극락보전 뒤쪽에 있는 전각들인데 요사채로 쓰인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봉안한 법당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중생을 다 구제한 다음 부처님이 될 것을 서원한 보살로서, 아주 큰 서원을 세웠다하여 대원본존이라고도 한다. 지물은 대개 육도를 상징(혹은 육바라밀을 상징)하는 육환장(석장)을 짚고, 보주(寶珠)를 들고 있으며, 도상은 성문비구형이다. 부처님 입멸후에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육도 중생을 제도할 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부촉받은 보살이다. 좌우협시로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다.
보물 제507호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선각대사 형미(逈微)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고려 정종 원년(946년)에 건립
선각대사는 신라 말의 명승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14년만에 돌아와 무위사에 8년간 머물렀다.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54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고려 태조가 ‘선각’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이름을 ‘편광탑’이라 하였다. 이 비는 대사가 입적한 지 28년만에 세워진 것이다.
비는 비받침과 비몸돌, 머릿돌을 모두 갖춘 완전한 모습이다. 비받침은 몸은 거북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형상으로 사나워 보이며 사실성이 뚜렷하다. 중앙에 마련되어 비를 직접 받치고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둥근형태의 조각을 새겼다. 비몸에는 선각대사에 관한 기록과,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유훈율이 해서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3단의 받침이 있다. 중앙에는 비의 이름을 새겼던 네모진 공간이 있으나 마멸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고, 그 주위로 구름속 용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이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천상세계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각 부의 조각수법이 같은 시대의 다른 석비에 비해 사실적이며,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석불은 원래 무위사 아랫마을에 있던 것을 미륵전으로 이운해와 봉안.
'월출산 산신각'이라고 적힌 편액과 산신각 건물, 그리고 산신각 내에 모셔진 산신탱
나한전 근래에 건립한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으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부처님의 16제자를 봉안. 부처님 제자 중에 아라한(阿羅漢)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란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천불전에는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은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고 그 뒤쪽으로 각기 다른 모습의 천불을 봉안하였다. 부처님이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의미한다.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다불사상이 등장하게 되면서 천불, 삼천불 등이 조성되게 되었다. 그런데 천이나 삼천을 한정된 숫자로 볼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