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 『설국』
책소개
소설 설국은 1968년 일본에게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작품으로 일본의 거장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소설이다. 이 책은 가와바타 문학이 정점에 도달한 근대 일본 서정소설의 고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37년에 단편들을 모아 [설국]으로 출간했고, 10여년이 지난 후 그 단편들을 엮어 1948년 새로운 소설이 되어 발표했는데, 지금의 중편소설 [설국]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 2024년 말에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었기에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었다. 물론 작품의 성향은 많이 다르다. 이 책은 소설의 스토리보다는 한적한 시골 자연 풍경을, 작가의 탁월한 회화적 표현력으로 아름답게 묘사한 특징 있는 작품이다. 저자의 심미적이고 탐미적인 색채와는 달리 주인공 시마무라는 눈의 차가움을 닮아 오히려 허무주의에 냉소적인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어, 의외의 느낌으로 소설을 읽게 된다. 주인공의 허무주의는 작가의 어린 시절 겪었던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으로, 아물지 못한 상실감과 오랜 외로움에서 그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줄거리
주인공 시마무라는 서양무용 연구가이지만, 직업에 있어 진지함이라곤 없는 남자로, 무위도식하며 여행을 다니는 소위 한량 같은 사람이다. 그는 도쿄에 아내가 있으나, 눈의 고장 시나타현의 온천 여관에 머물며 접대부로 들어온 고마코에게 깨끗한 이미지로 끌리게 되는데, 이후 이 지역을 두 번이나 더 방문하게 된다. 첫 번째 방문에서 아름다운 고마코와의 첫 만남을 ‘발가락 뒤 오목한 곳 까지 깨끗할 것 같은 이미지’로 표현하며, 시마무라에게 고마코는 아름답고 순수한 깨끗함의 인상으로 각인된다.
이어 다음 해 두 번째 방문. 기차 안에서 우연히 요코라는 젊은 처녀가 한 남자를 극진하게 간호하는 모습을 관찰하게 된다. 차창을 통해 투영된 모습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눈에, 건너편 자리에 앉은 요코의 눈을, ‘밤 열차의 차창에 비치는 저녁 어스름의 물결에 떠 있는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야광충’으로 묘사하며 또 하나의 끌림을 예고한다. 열차에서 만난 요코가 고마코와 잘 아는 사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고, 요코가 열차로 함께 온 환자가 암암리에 알려진 고마코의 약혼자 유키오 였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이에 미묘한 삼각관계의 여운을 남긴다. 고마코는 약혼자라는 사실을 극구 부인하나, 그 남자 유키오의 요양비를 벌기 위해 게이샤(기생)가 된 사실을 인정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야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유키오가 장결핵으로 죽어가는 현실에, 고마코의 희생을 주인공 시마무라는 ‘모든 게 헛수고’라는 허무의 눈으로 바라보며 냉소한다. 또한 병약한 유키오에 대한 요코의 지극한 보살핌 역시, 헛수고라는 허무로 시마무라는 덮어버리려 하지만, 그럴수록 두 여자의 순수함만 더욱 뚜렷해짐을 마음속 깊이 인정한다. 그러다 임종 직전의 유키오가 고마코를 간절히 찾으니, 당장 유키오를 만나러 가자는 요코의 다급한 요청을, 시마무라를 배웅해야 한다며 고마코는 매정하게 거부한다.
다음 해 늦가을 세 번째 방문.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우연히 유키오의 무덤을 찾았을 때, 애인의 무덤에서 매일 성묘하는 요코를 만나게 된다. 한편, 더욱 깊어진 고마코의 애정과 생명력을 느낀 시마무라는 본인을 향한 열렬한 그 녀의 애정을,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자신의 허무를 인정하고,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는 이 온천에 돌아올 수 없음을 예감하며,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마음의 정리를 위해, 근처 마을을 배회하다 저녁이 되어 여관으로 돌아오자, 왜 자기를 데려가지 않았냐며 서운함에 고마코가 시마무라를 추궁한다. 바로 그때, 마을에 급작스런 화재경보가 울린다. 마을 고치 창고에서 불이 난 것이다. 그곳에서는 마을 아이들이 영화상영을 관람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히 모두 무사히 대피를 했다고 안심하고 있는 사이, 아직 불길이 덜 잡힌 상황에서 뒤늦게 2층 화재현장에서 하늘과 수평을 이룬 채 별안간 사람이 추락하여 떨어진다. 요코였다. 떨어져 실신한 채 경련을 일으키는 요코를 고마코가 달려가 안고는, “이애가 미쳐요! 미쳐요!” 하며 절규하는 고마코의 모습. 그런 고마코와 요코에게 다가가려다 동네 사람들에게 떠밀려 비틀거리는 시마무라.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듯하다‘라는 문장으로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이 갈무리된다.
설국의 대표적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서 기차가 멈춰섰다.’ 이것은 이 소설의 첫 대목이다. 제목과도 잘 어울리는 소설 [설국]의 가장 대표적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국경‘이란 이국적인 느낌에 아슬아슬한 경계의 스릴감과 ’긴 터널’에서의 길고 긴 지루함, 그리고 ‘터널’이라는 폐쇄성을 지닌 암흑의 세계. ‘국경의 긴 터널’이란 세 단어의 조합은 이렇듯 짤막하지만, 포괄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어지는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라는 대목은 캄캄한 굴에서 나와 미지의 도화지 같은 새하얀 눈의 세계, 설국을 맞는 환호를 느낄 수 있는 표현으로, 되새김해 자꾸 읽게 되는 문장이다. 눈을 감으면 영화의 한 장면 속에서 마치 내가 기차를 타고 가다 환희의 설국에 도착하는 상상을 하게 되는 문장이라 설레임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감상
처음 설국이란 소설 제목을 봤을 때, 눈 위에서 피어나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상상했었다.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오겡끼데스까?“라는 외침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숨길 수 없는 나의 설레발이었다.
소설로써 기승전결의 탄탄한 구성은 없지만, 설국이란 제목에서 오는 로맨틱과는 상반된, 냉소적인 허무주의가 전개된다는 것이 반전이라면 반전이라 할 수 있겠다. 고마코의 열정과 희생, 요코의 지극한 정성을 주인공 시마무라가 냉소적인 허무주의라는 차가운 눈으로 덮어버림으로써 소설 설국이 더욱 시리게 느껴지는 건 나의 예민함일지 모른다.
그러나 소설 요소요소에 나타나는 작가의 세세하면서 아름다운 회화적 표현들은, 눈의 고장에서 알 수 있듯, 흰색과 여러 색색의 자연을 대조적으로 표현하며, 독자로 하여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그 디테일에 감탄하게 된다. 이는 독자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하는 마법을 부리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국경의 긴 터널’이란 첫 문장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국경’이란 생소하면서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섬나라 일본에 웬 국경?‘하는 의아함이 서린다. 궁금하여 찾아보니, 여기서 국경은 옛날 코즈케국과 에치고국이라 불렸던 군마현과 니카타현 지역의 경계를 말함이었다. ‘조에츠 국경’이라 불렸던 곳인데, 오늘날의 국경은 아니었다. ‘국경‘이란 단어가 나에게는 다소 낯설게 들리는 건 우리나라에서 국경이라 함은, 오직 철조망과 지뢰로 경계를 지은 휴전선이 떠오르기 때문은 아닐까. 한 편의 동양화를 본 듯한 소설을 읽었음에도 주인공의 허무주의가 전염된 탓인지 잠시 입안이 씁쓸해진다.
책 익는 마을 백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