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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추수감사주일설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누가복음 17장 11~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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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 주일로 지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고후 15:10)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301장)는 찬송가 가사가 있고,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은혜,손경민 작사/작곡)라는 찬양도 있습니다.
감사절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해서 마음으로 고백하고 예물로 영광 돌리는 날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입니다!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진심어린 감사의 고백이 흘러나오셔서,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는 추수감사절로 지켜지기를 축복합니다. 감사를 고백하는 입술에 더 큰 감사의 조건들을 허락하셔서, 구원에 감격하며, 평안의 형통함을 누리며, 영생의 나라를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 가시던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명을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함께 보시면서 성령의 감동 주심으로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깨닫는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11절을 읽어 드립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아멘.
“예루살렘으로 가실때에”라는 말씀을 보니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가 예루살렘 인 것이 분명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사마리아를 지나서 갈릴리를 지나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남쪽에 있고, 사마리아는 북쪽에 있고, 갈릴리는 그 보다 훨씬 더 북쪽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방향이 아닌 북쪽으로 역주행 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누가복음 13장에서 오늘 본문이 있기 전까지 예수님은 요단강 동쪽 지역인 베레(뢰)아 지역에서 사역하고 계셨습니다. 베레아 지역에서 요단강을 건너면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곧바로 갈 수 있었습니다.
성경 연구가들에 의하면 이 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순회전도를 하시던 중이었는데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들어 죽게 되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슬퍼하고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만나기 위해 다시 북쪽인 사마리아를 지나 나사로의 집이 있는 갈릴리 지역의 베다니 마을에 다녀 오셨습니다. 그 곳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겁니다.
왜 예수님이 북쪽으로 역주행 하셨는지 아셨을 겁니다. 제가 이런 과정이 있다는 것을 풀어서 알려 드렸지만,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실 때 지명이 나오면 지도를 찾아 보고, 인명이 나오면 그 사람의 이름 뜻과 가계도를 찾아보고, 역사적인 사실이 나오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라도 인과 관계를 살펴 보는 습관을 가지셔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시는 도중에 의문과 궁금중이 들어야 정상입니다. 모르는 것이 계속해서 나오는 성경입니다. 그러면 읽으시다가 자연스럽게 의문의 해답을 찾아보고 배우려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정 모르시겠으면 저에게 물어 보시라고 했는데 저를 너무 편하게 해 주려고 하시는지 묻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 이후로 어떤 분이 궁금해 하시는 것을 물어오실지 한 번 기다려 보겠습니다. 우선은 스스로 해결해 보시려고 노력 하시면 됩니다. 성경의 전후맥락을 잘 살피시면서 읽으시고 지명이 어디에 있는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정도는 꼭 찾아보는 습관이 길러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지나 가시던 예수님 일행은 예정에 없던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게 됩니다. 12~14절을 읽어 드립니다.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아멘.
한 마을에 들어가시려는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보는 10명이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병이 옮기지 못하도록 동네에서 먼 곳에 격리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병이 나았는지를 제사장에게 진단을 받은후에야 동네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아마도 병을 잘 고쳐 주시는 예수님이 자신들이 있는 마을 어귀를 지나갈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는지 미리 길가에 나와 있다가 멀리서 지나 가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를 크게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이들의 외침은 예수님을 멈춰서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내게 주시는 신앙적인 유익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나병환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유익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현실직시의 신앙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나병환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중병 환자들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격리 당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처참한 몰골을 직시할 줄 아는 사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치유와 회복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이전보다 너 나쁜 상황만 생기게 됩니다.
나병환자의 흉측한 몰골처럼 우리 내면과 외면에는 아직도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는 죄의 모양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보고, 느끼고,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가 죄인지 모르거나,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잃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죄를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에서 만남의 기회는 새롭게 열립니다.
둘째, 찾아오시고, 만나주심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온통 우리에게, 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보다, 예수님이 우릴 찾아오시고, 만나고 싶어하시는 마음이 훨씬 더 크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자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찾아오시고, 만나 주시는 것이 목표이신 분입니다. 그 목표의 대상이 바로 나입니다.
나병환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찾아갈 수가 없는 몸이었습니다. 찾아오신다 한들 전염 때문에 가까이에서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 만남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그 어떤 보장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예수님이 찾아와 주실 것이라는 소망과 간절함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에게는 반드시 찾아오시며, 믿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 자에게서 반드시 멀리 떠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예수 이름, 그리고 긍휼(불쌍히)을 간절히 구하여야 합니다.
나병 환자들에게 일평생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나병이 낫고자 하는 소망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을 만날 수만 있다면, 먼 거리에서라도 말씀 한 마디만 해 주신다면 그들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막상 예수님이 그들 앞을 지나가시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큰 소리로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은 이 말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고, 목이터져라 이 말만 부르짖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이름 뜻을 가진 예수, 예수 이름, 이것 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에 덧 붙여서 “불씽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다면, 간절함의 내용은 다 전달이 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우리가 일평생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단 하나의 기도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나의 구원자 예수님, 나의 위로자 성령 하나님) 나를 불쌍히(긍휼히)여겨 주소서”하루에도 수백 수천번씩, 일평생으로는 수만, 수십 만번 기도하십시오. 진심으로 이 기도를 올려 드리십시오. 우리 주님이 자비와 긍휼하심의 은혜로 응답하시는 역사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유익은, 죄에 대한 현실 직시(인정 참회)의 태도를 가지는 것, 찾아오시고 만나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 그리고 “예수님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진심어린 기도를 드리는 것 이었습니다.
이 세가지는 정말 중요 합니다.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꼭 명심하시고, 새로운 마음으로 실천에 열심을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병 환자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레위기 14장에 나오는 나병환자의 정결규례를 보면, 제사장만이 나병환자의 환부가 전부 나았다는 진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몸이 나을 것이니 가서 나았는지 확인 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나병환자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즉시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그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으로 기쁘고 들뜬 마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을 찾아가서 몸을 보여주지도 않았는데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에 이미 병이 다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그토록 흉측한 몰골이 깨끗하게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실 때 직접 가시지 않고 말씀으로 원격 치유를 하신 적이 있는데(마 8: 5~13), 오늘 기적 사건도 원격으로 말씀만 하셔서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소리지르고 춤추고 울고 웃고 난리도 아니었을 겁니다.
나음 받은 이후의 상황입니다. 15~17절을 읽어 드립니다.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아멘.
나병환자 10명이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에 어느 정도 거리를 걸어가다가 다시 되돌아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한 사람만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하나님께 영광돌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자신의 몸이 나은 것에 도취되어서 흥분되고 기쁜 나머지 집을 향하여, 자신들이 살던 곳으로 뛰어가기 바빴습니다. 빨리 자신이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동안 억지로 떨어져 있던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무척 인간적인 행동이지만, 무척이나 은혜를 저버리는 ‘패역’(悖逆,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긋나고 순리를 거스름)한 행동입니다. 병이 낫기 전에 나병환자들이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간절하게 부르짖었던 모습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배은망덕한 행동입니다. 어찌되었든 그나마 한 사람은 돌아왔다니 참으로 불행중 다행입니다.
돌아온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돌렸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진심을 다하여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행동을 보시고 매우 흡족해 하셨을 겁니다.
병이 낫고 돌아온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라고 콕 집어서 기록을 했습니다. 평소에 멸시천대를 받고 무시하고 버림 받은 사람들로 치부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으로 감사할 줄 아는 의임이었음이 드러났고, 그에 반해서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이 얕은 믿음의 소유자들 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발 아래 엎드린 사마리아 사람을 보시면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질문을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아홉명이 각자의 길로 다 가버리고 자기만 오게된 상황이 굉장히 민망했을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옆에서 듣고 있는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교훈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에게 믿음과 은혜와 감사에 대해 깊이 새기라는 취지로 말씀 하신 겁니다.
자, 좀더 세밀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10명 중에 아홉명이 병이 낫고도 그냥 다 제 갈길로 갈 것을 미리 알지 못하셨을까요? 다 아셨습니다. 훤히 아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병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 고쳐 주셔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병이 들었을 때 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 또한 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씀만 하시면 병이 고침을 받는 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나려는 열심, 낫고자 하는 간절함, 고침 받는다는 믿음, 이 새 가지가 결합되어 예수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들은 응답되고 이루어져서 우리 삶은 매우 나아 졌습니다. 재물도 풍성하게 주시고,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가정을 이루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락 없는 고침 받은 10명의 나병 환자처럼 큰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을 뒤돌아 볼 때 과거에 그토록 어렵고 힘든 시절에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을 때의 간절한 심정과, 현재 누리고 있는 큰 은혜에 대해서 얼마나 진심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모든 것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예수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 감사하는 행동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깊이 있게, 얼마나 습관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이 감격에 젖어 즉시로 예수님 앞에 엎드리며 감사한 그 진심어린 행동을 은혜 받은 모든 자에게서 매일 같이, 습관적으로 일어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겁니다. 마치 구약에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드리는 상번제와 같이, 매일 매일 감사함을 멈추지 말라는 순종의 요구를 들려 주신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때 10명의 나병 환자 들이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저의 가난함과 궁핍함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의 막막한 앞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의 연약한 육체와 낮은 자존감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무수히 많은 소망과 소원들을 나열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를 드리셨을 겁니다.
그런 기도의 제목들이 많이 응답되지 않았나요? 그래서 지금의 내 현재 살림살이가, 믿음의 상태가, 몸의 건강이, 가정의 화목함이 많이 좋아지고 여유로로워지지 않았나요? 생각해 보면 이전보다는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토록 많은 은혜를 받은 여러분은 과연 사마리아 사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홉 명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홉 명의 비율로 보면 정말 열에 아홉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더 이상 은혜 받았음에 감격하지도 않고, 찬양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도 그런 비율 속의 한 사람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전의 나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제 갈길로 갈줄 알면서도 그 기도에 다 응답해 주셨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 이유는 단 하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 문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며 불쌍히 여겨달라는 부르짖음을 멈추는 순간, 더 이상 은혜가 역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어찌 행하지 아나 하느냐”,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 하느냐? 지난 달과 이번 달에 ”어찌”라는 단어가 들어간 설교 제목이 많았습니다. 오늘도 “어찌”를 넣어서,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어찌 찬양 하지 아니하느냐”, “어찌 엎드리지 아니하느냐”, “어찌 감사하지 아니하느냐” “어찌하여 그 아홉은 돌아오지 아니하느냐” 우리 주님의 한탄과 실망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인 18, 19절을 읽어 드립니다.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아멘.
이 이방인, 즉 사마리아 사람 만이 믿음을 인정 받고 구원 받았음이 선포 되었습니다. 10명 중에 아홉 명은 자신이 가장 원하던 몸의 건강은 되찾았지만 정작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참된 은혜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수님 앞에 엎드린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는 일생최대의 하늘의 은혜가 부어졌습니다.
여러분, 당장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해결되고 여러 가지 소원과 소망들이 이러어지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그런 것 저런 것 다 제쳐 두고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 좋습니까? 여기 있는 분들 전부는 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라고 대답 하실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열에 아홉은 당장의 문제를 해결 받기를 급하게 요구하면서, 그 문제가 해결 되는 순간 서서히 각기 제 갈길로 가기 십상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겠지만 누가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자가 될 것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제 갈길로 가는 아홉의 사람인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취할 자세는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겸손과 감사의 태도를 변함 없이 습관적으로 유지하는 겁니다. 내게 주신 은혜에 항상 감격하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영광 돌리고, 항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몸과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엎드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선포를 듣게 될 때까지 멈추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그 선포를 듣는 순간 까지 믿음의 정진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또 돌아가고, 또 찬양하고, 또 엎드리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감사의 삶을 사는 구원받은 믿음의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번 추수 감사절에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내 몸과 마음에 더덕더덕 흉칙하게 붙어 있는 죄의 모습들을 인정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 엎드리며,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하며 감사로 영광 돌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 매일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몸과 마음이 돌아오고, 진심으로 감사하여 엎드리는 겸손한 삶의 자세가 일평생 습관적으로 일어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우리 주님의 음성이 여러분 모두의 심령에 울려 퍼지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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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삶의 필요를 충만하게 채워 주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구원 받은 의인의 모습으로 겸손함으로, 감사함으로 일평생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